Archive - Chapter 62
#61화
고오오옹.
대장로는 공기의 떨림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의 가슴을 향해 쏘아지는 창날이 어떤 파괴력을 지녔는지도 깨달았다.
‘이건…… 위험하다.’
살면서 몇 번 느껴 보지 못한 생명의 위협. 전신의 털이 바짝 곤두서고, 세상이 느려진다.
쉬이익!
정면에는 진태경의 창이, 등 뒤에서는 진위경의 검이 날아든다. 두 형제의 연수합격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솨아아.
대장로의 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일 갑자의 공력이 전신 사지백해로 뻗어 나갔다. 노쇠한 근육에 활력을 불어넣고 혈맥을 깨웠다.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츠츠츠.
한 자(30cm) 가까이 솟구쳤던 검기가 절반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의 감소가 아닌, 힘의 응축이었다. 실처럼 하늘거리던 검기는 검신 전체를 휘감으며 또 다른 검의 형태를 갖췄다.
검강(劍强).
절정이라는 벽을 넘어 위대한 영역을 개척한 초인들의 상징.
아직 불완전한 반쪽짜리에 불과했으나 그것은 분명 검강이었고, 대장로가 평생을 익혀 온 무학(武學)의 결정체였다.
서걱.
태원진가 대대로 내려져 오는 가문의 보검조차 검기를 두른 채로 잘려 나갔다. 한순간에 공력이 흩어지고 내부가 진탕된 진위경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일 검이면 그의 목을 취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대장로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쐐액!
대장로는 가슴 앞까지 다가온 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주름진 손 역시 눈부신 기의 빛무리에 휩싸여 있었다.
이 역시 불완전한 수강(手强)이었으나 진태경의 창을 멈춰 세우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충분해 보였다.
콰아아아아.
창끝에서 흘러나온 와류(渦流)가 그를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 * *
죽음 같은 정적이 내리깔렸다. 이 자리에 있는 수십, 어쩌면 전장에 선 모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우리가 아니다. 오직 한 사람이다.
“이게…….”
수많은 시선 끝에서, 대장로가 천천히 입을 뗐다.
“무슨 초식이지?”
내가 대답했다.
“일섬.”
말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허기가 느껴진다. 전신의 근육이 찌릿했고 체내에는 공력 한 줌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나는 조필 때처럼 기절하지도, 꼴사납게 주저앉지도 않았다.
‘이제는 몸이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일섬의 부작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내가 성장한 만큼 일섬의 위력도 강해졌다.
지금 대장로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다.
“일섬, 일섬이라.”
작게 중얼거린 그가 어깨의 혈도를 짚었다.
흐르던 피는 멈췄지만, 그뿐. 일섬이 뿜어낸 와류에 의해 흔적도 없이 갈려 나간 팔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나이에 외팔이가 될 줄은 몰랐는데. 허허.”
허탈하게 웃은 대장로가 진위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서운 아우를 뒀구나.”
진위경이 파리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은 저 아이가 무섭소?”
“너는 어떠하냐?”
“자랑스럽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의 창백한 안색 위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강철로 자랐지. 태경이는 그런 아이요.”
대장로는 그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제법 괜찮은 인재다. 태원진가의 미래를 책임질 만한.”
“그렇소?”
“허나, 네 아우들만큼은 아니지.”
약관에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진무경이야 그렇다 치고, 나까지 높게 쳐 주니 황송하긴 한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내 생각을 읽은 듯 대장로가 말을 이었다.
“핏줄과도 나누지 않는 것. 그게 바로 권력이다. 그때가 되어도 네 아우들이 마냥 자랑스러울까?”
순식간에 장내가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 근거리에서 대장로와 대치하고 있는 이들은 전부 태원진가 소속. 조심스러운 시선들이 내 뺨에 달라붙었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가주? 그딴 거 할 생각도 없다. 이놈들아.’
그때였다. 진위경이 입을 뗀 것은.
“그랬구려.”
착잡함과 후련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대장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무엇을 말이냐?”
“당신이 배반한 이유.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난 이유.”
“……!”
대장로의 떨리는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거였나.’
후계자 싸움.
커다란 퍼즐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작은 조각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하나둘씩 맞춰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진위경이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네 조부에 대해 아느냐?”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일언반구 없으셨지요.”
“냉혹한 사람이었다. 자식에게도, 하나뿐인 아우에게도. 그리고…….”
대장로는 피식 웃었다.
“소인배였지. 여러 이유로 한때 의좋은 형제였던 우리는 점차 멀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그 일이 터진 거지.”
“정마대전.”
“십만마도(十萬魔度)라는 말을 아느냐? 그들은 끝없이 밀려왔다. 무림맹이 결성되었지만 구파일방의 연합에 불과했고, 제 근거지를 지키기에 바빴지.”
대장로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는 태원진가의 깃발 아래 산서성 무인들을 결집시켰고, 마침내 마교의 군세를 몰아냈다.
“바로 이곳, 팔천협에서 마지막 전투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먼 과거 어딘가를 더듬는 듯했다.
“긴 전쟁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모두가 지쳐 있었지. 그러나 희망도 있었다. 이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삼백 명의 결사대가 같은 마음이었다.”
“결국 대승을 거두셨지요.”
삼백 대 삼천의 싸움. 결과는 마교의 전멸.
위대한 승리였고, 대장로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기도 했다. 모두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방금까지는.
“매복이 있었다.”
뭐?
“협곡 깊숙한 곳까지 물러서며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대장로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잔잔했다.
“어떻게 놈들이 미리 매복할 수 있었을까? 팔천협으로 오는 길은 형님이 막고 있을 터인데.”
“……!”
사람들 사이로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 나갔다. 가뜩이나 창백하던 진위경의 얼굴에선 아예 핏기가 사라졌다.
“전투는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오지 않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싸웠지만 허사였지. 삼백의 결사대 중 생존자는 고작 여덟. 마침내 가문에 귀환했을 때, 나를 보던 형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게…… 사실입니까?”
“강산이 몇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다. 단순한 의심으로 여기까지 왔을 거라 생각했느냐?”
수십 년의 세월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대장로가 허탈하게 웃었다.
“형님은 전쟁을 기회로 만들었다. 나는 전장에서 영웅이 되었지만 그는 가주가 되었지. 나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전장에서 죽거나 실종된 후였다.”
“그렇다면 곧장 장로원에 들어간 것도?”
“그래야 안심할 테니까. 그래야 나와 내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내 사람들?
앞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장로를 따라 최후에 살아남은 여덟 명의 생존자. 그들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장로들과 산서오문의 문주들.’
살아남은 자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자신들을 배신한 가주와 가문에 대한 복수였다. 대장로는 좌중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실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사람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불신, 충격, 부끄러움. 감정은 제각각이었지만 아무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아, 물론 나는 제외지.
“개소리를 길게도 하네.”
“……!”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무슨 얘기까지 나오나 쭉 들어 봤는데, 이건 뭐.
“결국 목적은 하나잖아.”
나는 대장로를 향해 엄지를 까딱였다.
“복수고 자시고, 당신이 이거 되려는 거, 아냐?”
“뭐라?”
“맞잖아. 태원진가와 항산검문. 방해되는 거 싹 다 치워 버리고 산서성 꿀꺽하려는 거.”
“이놈-!”
노인네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아, 여기엔 기차가 없구나.
“복수? 좋지. 다 좋은데…….”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복수를 왜 지금에 와서 해?”
자그마치 40년 전의 일이다. 대장로의 나이를 생각해도 반평생을 기다린 거다.
“당신 뒤통수쳤던 인간들이 지금 몇 명이나 살아 있는데? 뒷북도 정도껏 쳐야지. 아, 이건 제발 부탁인데,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어쩌고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마시고.”
10년 참았다고 군자면, 40년 참은 대장로는 예수냐?
그저 정신 나간 노인네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함부로 했다. 어쩔래?”
“네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꼭 알아야 하나?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뻔한 물음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전장을 가리켰다. 시산혈해, 아비규환. 말 그대로의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그건…….”
서늘하던 대장로의 눈빛이 흔들린다. 하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그렇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조하듯 중얼거린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대장로.”
진위경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오너라.”
사양할 내가 아니었다.
“쳐!”
이제 상처 입은 맹수를 사냥할 시간이다.
* * *
대장로를 처음 본 날이 생각난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당당한 풍채와 위엄. 백발의 수염은 신선을 연상시켰다.
푸화악!
물론 가차 없이 사람을 반쪽 내는 신선은 없겠지만.
‘썩어도 준치라더니.’
피를 뒤집어쓴 채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른다. 그런 그를 향해 경외와 두려움 섞인 시선이 쏟아졌다.
“괴물…….”
한쪽 팔을 잃었지만 대장로는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분명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해볼 만해.’
아무리 대장로가 절정 고수라지만 이 자리의 무인들 역시 태원진가의 정예다. 진위경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앞선 대장로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만큼의 실력자들.
따다당!
사방에서 짓쳐 드는 검날을 튕겨 낸 대장로의 안색은 어두웠다. 예전 같았다면 검기로 가로막는 모든 걸 베었을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 같던 공력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증거다.
거기에 늙어 버린 육체가 한계에 도달하기까지 했다.
촤아악.
대장로의 몸에 점차 검상이 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부분이 그의 피였다.
‘지금!’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다. 힘껏 내지른 창이 그의 옆구리 살을 한 움큼 뜯어냈다.
“흡!”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무인 하나를 베어 낸 대장로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대로 작심한 듯, 휘둘러지는 검에는 미약한 검기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서걱.
솟구치는 피보라와 함께 검기가 흩어졌다. 비틀거리는 그의 등 뒤로 진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널 잊고 있었구나.”
대장로가 일그러진 얼굴로 돌아섰다.
“등에 칼을 꽂는 것은 형님에게 배웠느냐?”
“식솔들이 죽어 나가는데 암습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더냐?”
“무인이기 전에 소가주입니다.”
“소가주라, 허허.”
진위경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장로를 바라봤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항복 권유라도 할 셈인가?”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춰 주십시오.”
전장의 흐름은 이미 이쪽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그러나 흑의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아직도 비명과 시체는 줄어들지 않았다.
“네 말이 옳다. 의미 없는 싸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비틀거리던 대장로가 허리를 곧게 폈다. 어느새 눈에는 정광이 번뜩였고 칼날 같은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마지막 발악?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나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조필. 놈이 죽어 가기 직전 보여 준 마지막 모습이 지금의 대장로와 겹쳐졌다.
‘선천지기. 선천지기를 끌어올린 거야.’
공력이 운기조식과 영약을 통해 축적한, 후천적인 기운이라면 선천지기는 그 반대다. 생명력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한 인체의 근원.
대장로는 지금 생명을 담보로 선천지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쿨럭.”
핏물을 토해 낸 대장로가 검을 치켜들었다. 빠르게 꺼져 가는 생명과는 반대로 그의 검은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검강…….”
그건 본능이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펄떡거린다. 검기를 아득히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래, 네가 있었지.”
실핏줄이 툭툭 터져 나간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진위경이 황급히 대장로를 막으려 달려들었다.
“안 돼!”
그러나 대장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한 걸음 만에 다섯 장의 거리를 압축시킨 그가 내게로 검을 내리그었다.
후우웅.
‘이렇게 죽는구나.’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격. 난 죽었다.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전신의 근육을 쥐어짰다. 한 줌 남짓한 공력이 창날을 향해 질주했다. 그건 마지막 발악이었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던 내 인생에 대한 예의였다.
“일섬.”
쐐애애액!
마지막 힘을 담은 일격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