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655
#654화
만약 누가 내게 절정 고수 세 명을 일수(一手)에 죽일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세 명의 절정 고수를 일수에 제압해야 한다면, 그들이 살수(殺手)나 다름없는 성향을 지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럴 때는 무력보다는 회유를 통해 제압해야 하는 것이 맞다. 고문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아닌, 생존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자결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으득.
내 약속은 놈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을지도 모를 일이다.
쉬쉬쉭! 투둑!
반 박자 늦게 손가락 끝에서 쏘아진 지풍(指風)이 혈을 짚었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마혈을 제압당해 뻣뻣하게 굳어 버린 세 개의 몸뚱어리는 이미 칠공(七空)에서 피를 흩뿌리며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파팟! 덥석.
수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나는 허물어지는 세 개의 신형을 붙잡아 땅에 뉘었다.
복면 사이로 놈들의 입가에서 끈적한 핏물이 울컥거리며 솟구친다.
“그르륵, 커헉……!”
빌어먹을. 상황이 좋지 않다. 아니, 최악이다.
스스로 심맥(心脈)을 끊는다는 것은 몸 안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과 같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은 물론 전신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혈이 끊어지고 막히면 살아남을 길이 없다.
‘특히 무림인이라면 더더욱.’
소위 말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무림인은 축기(蓄氣)를 통해 범인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게 되지만 심맥이 끊어진다면 주화입마라는 1+1 빅 이벤트까지 더해진다.
바로 지금처럼.
“쿨럭. 쿠에에엑!”
촤아아악!
눈, 코, 입. 귀.
당장 보이는 구멍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물과 내장으로 보이는 희멀건한 덩어리들.
이 끔찍한 광경에 황급히 다가온 남호와 태산마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으으. 태산이. 보기 싫다. 입맛 떨어진다.”
“이, 이게 무슨.”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남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살릴 수 있겠느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전신을 펄떡거리며 경련하던 두 놈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툭.
볼 것도 없는 절명(絶命).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마지막 남은 복면인의 완맥을 붙잡고 전력을 다해 공력을 흘려보냈다.
스아아아아.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열양지기가 놈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엉망진창이 된 내부가 느껴진다.
내장기관은 상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절정 고수답게 넓고 튼튼해야 할 혈도는 낡은 폐가의 담벼락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주화입마(走火入魔)까지…….’
천하에서 으뜸가는 신의인 문경이 온다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회생불능을 직감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알아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의 이름. 오늘의 습격을 지시한 단 한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된다.
나는 아낌 없이 공력을 쏟아부었다. 돌이킬 수 없는 폭주 상태에 접어든 복면인의 내부를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닌, 마지막 불씨를 피워 올리기 위해서였다.
드드드득!
더욱 강해진 공력의 유입과 함께 거세게 몸부림치는 전신.
하지만 거센 폭풍우가 지난 뒤에 수면이 잔잔해지는 것처럼,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 있던 복면인은 짧은 평온과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나는 초점이 또렷해진 복면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누구냐. 말해.”
그리고 다음 순간. 놈의 마지막 대답을 듣기 위해 입가의 복면을 벗긴 나는, 이 최후의 시도와 질문이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쿨럭. 흐으. 허어어.”
“……!”
“크륵. 으어어.”
뭐라 말하려는 듯 상하로 움직이는 턱. 하지만 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순간 석상처럼 굳어 버린 내 머리 위로, 남호의 신음 같은 뇌까림이 들려왔다.
“지독한 놈들. 혀를…….”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복면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크륵.
유언을 대신한 단말마와 함께 텅 비어 버린 동공. 멍하니 벌어진 입에서 뭔가 말할 듯이 움직이던 짧은 혀가 축 늘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 놈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참았던 욕설을 토해 냈다.
“……이런 씨발.”
심상치 않은 놈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혀가 잘려 있을 줄이야.
놈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명을 제외하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거다.
“음,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혀의 단면이 아물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오래전에 조치를 취해 놓은 모양이야.”
은영각 요원답게 재빨리 시신들을 파악한 남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놈들…… 전부 남만인들이군.”
“한족은 없습니까?”
“없다, 단 한 사람도. 복장이 통일되어 있어서 어느 부족인지도 파악할 수가 없고.”
남만인들을 구분 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복장과 식습관이다. 하지만 죄다 새카만 흑의에 복면을 썼으니 알아차리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애당초 한족과 남만인들의 생김새도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이니, 당장 부족을 알아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한숨 섞인 욕설을 내뱉은 나를, 남호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네가 저놈들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짐작되는 흉수로 세 명의 대족장을 언급했었지. 그렇다면 혹 서신을 보낸 이가 흑웅이었느냐?”
나는 놀란 눈으로 남호를 바라보았고,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남 노인이 그걸 어떻게…….”
“백상과 요희라면 충분히 흉수로 거론될 만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흑웅은 다르지. 생각해 보면 네가 이런 상황에서 그를 떠올릴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침착하면서도 냉철한 어조로 말을 끝마친 남호가 입을 열었다.
“그였느냐?”
“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말을 이었다.
“서신에 적혀 있던 장소에서 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위 뒤보다 숲에 숨는 걸 택했군. 하지만 아무리 인파가 많더라도 흑웅 정도의 체구라면 눈에 띄었을 텐데. 그가 직접 나왔단 말이냐?”
“축골공(縮骨功)을 익혔더군요. 처음에는 저도 흑웅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허, 축골공이라. 보이는 것보다 비밀이 많은 작자였군. 모두가 감쪽같이 속았어. 하긴,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의 인물이었다면 네게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남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계속해 보거라.”
흑웅에 대한 이야기는 짧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흘려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남호는 안 그래도 주름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거지발싸개 같은 상황이로고.”
동감이다. 일이 벌어졌지만 좀처럼 용의자를 좁힐 수 없었다.
백상, 요희, 흑웅. 그 누구도 용의 선상에서 제외시키기 힘든 상황. 게다가 오늘의 습격의 진정한 배후에는 암천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독단이 아니라 심맥을 끊은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
남만의 특성상 자결할 수 있는 극독을 구하는 건 너무나도 쉽다. 당장 외궁 밖의 풀숲으로 피크닉만 가도 온갖 독물들이 우글거리는 동네니까.
하지만 복면인들은 스스로 심맥을 끊는 것을 택했다.
심맥을 끊는 것은, 빠르고 쉬운 독단에 비해 몇 배나 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는 길이다.
나로서는 놈들이 이미 그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만독지환. 암천은 내가 만독지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암천은 혈주를 보내 소림혈사를 일으켰고, 사천에서 서천마군으로 하여금 아미파와 사천당가의 신물을 탈취하고자 했었다.
십왕(十王)과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을, 아니 어쩌면 삼성(三星)에 버금가는 초절정 고수들과 정예 병력을 신물을 위해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사천혈사가 끝난 직후에도, 사천당가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
사천당가는 서천마군과의 전투로 사천의 어느 문파보다 극심한 피해를 입고 휘청였지만, 모두가 우려했던 암천의 후속타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결정적인 이유가 만독지환의 유무라고 짐작했다.
‘그러니 독단 대신 심맥을 끊어서 일말의 가능성조차 차단하게 만든 거고.’
문득 식은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적들은 내 움직임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남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남만야수궁의 내궁(內宮)에서 오늘과 같은 습격이 벌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었다.
“언제부터 습격이 벌어진 겁니까?”
내 물음에 남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도중에 잠에서 깬 터라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떠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일이 벌어진 것 같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밖에서 난리가 나 있더군. 사마표 저놈은 피칠갑을 해 가며 싸우고 있었고.”
쓰러져 있는 사마표를 가리킨 남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한데 저놈은 괜찮은 게냐? 놈들과 싸우면서 피를 많이 흘린 것 같던데.”
“지혈도 해 뒀으니 괜찮을 겁니다. 살펴보니 당장 눈에 띄는 위험한 상처도 없고, 대부분이 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것 같더군요.”
시신들을 끌어다가 한곳에 모아 놓고 돌아온 태산이 커다란 눈동자를 껌뻑였다.
“각주, 사실인가? 태산이 주군 괜찮나?”
“그래.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쓰러진 것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들은 모양인지, 태산의 눈동자에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흐끅. 태산이. 걱정했다. 만약 주군 죽었으면. 태산이 삼 년 동안 고기 안 먹었을 거다. 흐끅.”
“…….”
“…….”
삼년상은 들어 봤어도 삼 년 동안 고기 끊는 애도 방식은 처음 들어 본다. 그 정도면 무림에서 가장 힘센 비건이 되지 않을까.
나는 차오르는 말을 꿀꺽 삼키며 녀석의 우랄산맥 같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너도 고생했다.”
“흐끅. 태산이. 힘 많이 썼더니 배고프다.”
“……어, 그래.”
한 대 쥐어박을까 그냥.
하지만 내가 심도 깊은 고민을 하던 그때. 저 멀리서 횃불과 함께 숱한 인기척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맹수의 익숙한 포효도 함께.
– 크아앙!
쉬쉬쉭! 팟!
어둠 속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은빛 신형이 가장 먼저 공터에 도달했다.
백호의 등에 올라탄 야율목의 얼굴은 목각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늦었군.”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 늦었지. 내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전각과 곳곳에 고인 피 웅덩이. 그리고 쌓여 있는 시신들.
입술을 질끈 깨문 야율목이 입을 열었다.
“순찰을 돌던 전사들이 죽어 있었다. 반 각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 그리고…….”
다음 순간, 이어진 야율목의 말을 들은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흑웅과 요희. 두 대족장이 사라졌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