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696
#695화
처음에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다른 것에는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고 해야 옳았다.
최근 연이어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과 총동원령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군세(軍勢)는 외궁에 거주하는 일반 부족민들조차 숨죽이게 했고, 물경 일만에 달하는 전사와 맹수들은 내궁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궁주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 역시 있었다.
“죽겠네요. 날은 덥고,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이럴 거면 차라리 널널한 동문(東門)이나 서문(西門)에 배치됐어야 했는데.”
순찰을 마치고 온 젊은 후배의 투덜거림에, 북문(北門) 성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중년 전사가 혀를 찼다.
“쯧쯧, 잘하는 짓이다. 앞길 창창한 젊은 놈이 벌써부터 농땡이 피울 생각이나 하고.”
“순찰 다녀오는 동안 그늘에 앉아 계신 분이 할 말입니까?”
“난 늙었잖아.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어?”
“하긴, 뭐. 틀린 말도 아니네요.”
남만야수궁에는 총 세 개의 관문이 존재한다. 동, 서, 그리고 그들이 위치한 북문.
남문은 처음부터 없었다. 내궁의 후방에 펼쳐진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은 그 어떤 관문보다 단단했으니까.
“순찰은, 외궁은 어때?”
“저잣거리에도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입니다.”
“……그렇겠지. 다들 불안할 테니까.”
중년 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내궁에 결집한 전사들의 숫자만 물경 일만이다. 가히 소국(小國)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군세.
이 정도 숫자의 전사들이 모인 것은 오십여 년 전, 정마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
나이든 이들은 과거를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고, 부모는 아이를 끌어안고 문을 걸어 잠갔다.
곧 거대한 전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사방에 팽배했다.
“그런데…… 정말 중원과 전쟁을 치르는 겁니까?”
조심스러운 후배의 물음에, 중년 전사가 나직이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는 확실하지.”
“뭔데요?”
“중원에서 전쟁을 치르기 전에, 바로 이곳 남만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
“……!”
“너도 알다시피 전(前) 궁주께서는 살아 계시고, 그분에 동조하는 다섯 부족장이 외궁을 떠났다. 높으신 분들은 중원으로 향하기 전에 내부를 정리하려 하겠지.”
이건 중년 전사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생각과 연륜이 있는 이들이라면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내전(內戰). 그것도 삼백여 년 만의 내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중원으로 향하는 길을 지나기 위해서는 불과 며칠 전까지 동고동락하던 동료의 시체와 피를 밟아야 한다는 것을.
“…….”
언제나 가볍던 젊은 전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외궁을 떠난 다섯 개 부족민 중에는 그와 어릴 적부터 함께한 절친한 벗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어두워진 후배의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 전사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시게요?”
“농땡이도 피울 만큼 피웠으니, 성벽이나 한번 슥 돌아보고 오련다. 하도 안 움직였더니 몸이 쑤셔서.”
“그러지 마시고 그냥 쉬시죠. 어차피 성벽 쪽은 다른 조가 맡고 있을…….”
“그놈들이 경계라도 제대로 서겠느냐? 죄다 우리처럼 슬그머니 내려와서 그늘에나 앉아 있겠지. 윗분들한테 걸리면 결국 수문장인 나만 욕 처먹기 딱 좋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방인의 출입이 전무하던 탓에 평소에도 경계가 그리 삼엄한 편은 아니지만, 일만에 달하는 군세가 주둔한 뒤로는 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라 할지라도, 지금 남만야수궁에 쳐들어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게다가…….
‘심란하겠지, 모두들.’
생각 외로 전의(戰意)에 불타오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남만을 배반한 역도로 낙인찍힌 야율척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궁주였고, 남만야수궁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삼백여 년간 함께하며 서로에게 동화된 부족민들은 코앞까지 들이닥친 내전과 대전쟁을 꺼렸다.
하지만 어쩌겠나.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후우.”
한숨을 내쉰 중년 전사는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성벽 위는 잠잠했다.
아니, 그나마 한 놈이 남아 있긴 했다. 코까지 골며 자고 있어서 문제지만.
‘……그래. 지금이라도 쉬어 둬라.’
폭풍전야(暴風前夜)의 상황. 어쩌면 이 한심한 수하 놈들이 쉴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중년 전사는 성벽에 우뚝 선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때는 정오.
이미 중천에 오른 태양은 숨 막히는 열기를 뿜어냈고, 북문 밖으로 펼쳐진 너른 목초지와 외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은 아지랑이에 의해 일렁였…….
‘잠깐.’
뭐지? 잘못 본 건가?
중년 전사는 한 줄기 의문과 함께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소매로 거칠게 눈을 문질러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넋 나간 목소리.
그리고 중년 전사의 시선이 닿은 방향의 끝에서, 거대한 백호가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
은빛에 가까운 새하얀 터럭. 커다란 앞발이 풀을 스치며 나아간다. 동시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언덕 뒤 숲을 휩쓸었다.
솨아아아아.
빽빽하게 얽힌 나뭇가지가, 그 끝에 수없이 매달린 잎사귀가 흔들린다. 그리고 울창한 숲이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 또 다른 숲이 움직인다.
구궁.
땅이 울리고, 공기가 요동치고, 바람이 흩어졌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수많은 눈동자가 섬뜩한 안광(眼光)을 발한다.
“……!”
중년 전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맹수.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숫자의 맹수였다.
그저 한 사람의 평범한 전사인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숲 뒤에 얼마나 많은 맹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저 포식자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드는 맹수들의 대군(大群)을 이끄는 것이, 어쩌면 자신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쉬이이이익!
시원한 바람과 함께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크고 작은 은빛 신형.
어느덧 두 마리로 늘어난 백호는 커다란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들이 등에 태운 일남일녀(一男一女)와 함께.
‘저, 저건.’
중년 전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마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저 일남일녀의 정체를 곧장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십 년간 북문을 책임진 수문장이었고, 두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여인은 남만에서 단 넷뿐인 대족장이요. 다른 한 청년은…….
‘진태경.’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이름 석 자.
틀림없었다.
바로 그자다. 오독문의 멸문 이후, 장장 수백 년 만에 이 땅을 찾아온 이방인. 남만에 드리워진 거대한 폭풍 속의 눈.
바로 그가, 진태경이 스스로 남만야수궁을 찾았다.
그것도 수많은 맹수와 그가 납치했다고 알려진 요족의 대족장, 요희와 함께.
‘도, 도대체 이게 어찌 된…….’
하지만 중년 전사의 의문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한 사람의 입술이 열렸다.
“한 가지 충고하자면. 거기서 손 떼는 게 좋을 거야.”
“……!”
본능적으로 경종(警鐘)을 울리려던 중년 전사가 얼어붙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태경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늦지 않아서.’
저 이름 모를 전사의 얼굴을 본 순간 알았다. 아직 암천의 흉계가 시작되지 않았음을.
‘균열’이 열렸다면, 이미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도(地獄道)로 변해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 고요함. 불길함마저 느껴지는 고요함 속에서 심지가 타들어 가는 폭탄이 느껴졌다.
“안 그러냐. 흰둥아?”
엉덩이에 깔린 거대한 몸뚱어리가 움찔거린다.
신석의 수호령. 그 이름에 걸맞게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백호가 의념을 흘려보냈다.
– ……이 몸을 그따위 이름으로 부르다니.
“예전이었으면 검둥이였어. 물론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지.”
–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감도 안 잡히는군. 미친 인간 같으니.
미친놈이라. 그래. 살면서 그런 말 꽤 들었지.
내심 중얼거린 진태경은 피식 웃으며 손에 든 창날을 늘어트렸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두려움? 없을 리가.
하지만 숱한 사선을 넘어 이곳까지 왔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백상. 남천마후. 암천.
이제 그 누가 막아서더라도 상관없다. 그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울 뿐.
‘그래. 목숨을 걸고.’
이건 수만, 수십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목숨이 걸린 전투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피가 강물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룰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내야 해.’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는, 하늘에 결과를 맡기고 기다린다고.
하지만 진태경의 생각은 달랐다. 하늘의 뜻마저 바꿀 수 있어야, 비로소 의지(意志)라 부를 수 있다.
‘안 그렇습니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대답 대신 뜨겁고, 눈부신 햇빛이 돌아온다. 이런 날에는 더더욱 죽을 수 없다.
물론 어떤 날씨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는 것이 싫었고, 죽을 생각도 없었다.
설령…… 이 철문 뒤에 천주(天主)가 기다린다 해도.
쉭, 서걱!
순간, 섬광처럼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 청백색의 강기가 거대한 철문을 반으로 갈랐다.
눈부신 은빛 백호로 거듭난 수호령이 천지를 울리는 포효를 토해 낸다.
– 크와아아아앙!
세상을 집어삼킬 듯 벌어진 맹수의 아가리 속에 숨어있던 것은, 강철보다 단단한 이빨과 붉은 혓바닥뿐만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악!
휘황한 빛줄기.
순간 눈부신 광휘(光輝)가 세상을 물들인다.
수호령이 입안에 머금고 있던 신석(神石)으로부터 솟구친 빛의 기둥이 성벽을 넘어 하늘을 관통했다.
콰아아아!
백 리. 아니 어쩌면 천리 밖에서도 보일 거대한 빛의 기둥.
모두가 그 기이한 힘을, 경이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궁에 결집해 있던 일만의 전사들도. 그리고 언덕을 메운 아득한 숫자의 맹수들도.
– 캬우우우우!
– 크아아앙!
포효와 함께 보이지 않던 둑이 허물어졌다.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맹수들이 파도가 되어 드넓은 초목지를 덮친다.
구구구궁!
두두두두두!
뜨거운 햇빛 아래,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선두에 한 사람이 있었다.
“가자.”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직한 한 마디.
동시에 수호령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쐐애애액!
남만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