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70
#69화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진위경은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크허업!”
맹렬한 기세로 양팔을 허우적거리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일렁이는 등잔불과 탁자를 가득 채운 서류. 익숙한 집무실의 풍경이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위경이 목덜미를 주물렀다. 악몽을 꾼 탓인지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죽는 줄 알았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꿈이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피해 턱에 숨이 차도록 도망치다가 넘어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처리해야 할 일은 넘쳐나는데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피 말리는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보니 피로는 쌓여만 갔다.
“끙. 빨리 사람을 뽑든가 해야지.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어.”
천하는 넓고 인재는 많다. 그런데도 아직 변변한 책사 하나 없는 것은 태원진가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중원의 거대 문파나 이름난 세가(世家)를 놔두고 뭣 하러 산서의 태원진가에 몸을 담겠는가?
그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이제는 모든 게 바뀔 것이다. 다가오는 원단에 산서 무림을 일통하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장한다면…… 머지않아 태원진가의 깃발 아래로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날이 올 것이다.
‘……그전에 과로로 죽겠지만.’
진위경이 살벌한 양의 서류 더미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쿠르릉.
아주 미세한 소리. 절정 고수인 진위경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소음이 울렸다.
‘뭐지?’
그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공력을 귀에 집중시키자 소리가 또렷해졌다.
쿠르릉. 캉.
작지만 분명히 들었다.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 야심한 시각에.
진위경의 얼굴이 굳은 이유는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방향은…….’
진무경의 처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어제부로 한 사람이 더 들어가게 된 곳.
‘설마 무경이가 막내를……. 에이, 아니겠지.’
사이좋게 지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벌써 치고받고 싸우겠는가. 그는 사랑하는 아우들을 굳게 믿었다.
캉. 캉!
“…….”
진위경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작정하고 경신법을 펼치자 진무경의 처소까지는 금방이었다.
문제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에 있었다.
‘……연무장에서 혼자 수련하는 거겠지?’
전각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진위경은 담벼락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말했지. 두 번째 규칙. 어?”
쾅! 콰광!
쉬지 않고 검집을 휘두르는 진무경. 그리고 그런 그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는 한 사람.
“로, 로그아웃!”
진태경의 필사적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검집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검집이 연무장의 청석(靑石)을 박살 냈다.
콰앙!
“내가, 이 새끼야, 주화입마, 임독양맥!”
“로그아우우웃!”
“…….”
노구아욱은 뭐고 주화입마에 임독양맥은 왜 튀어나오는가.
당최 알 수 없는 대화의 흐름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러다가 일 나겠군.’
이대로라면 정말 의원이든 장의사든 둘 중 하나는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다.
‘막내는 내가 지킨다!’
진위경이 결의에 찬 얼굴로 난입하려던 그때.
“옆구리는 왜 또 비어? 맞고 싶어서 안달 났냐?”
뻑!
“커흑!”
옆구리에 일격을 얻어맞은 진태경이 비틀거렸다. 진무경이 때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으며 검집을 휘둘렀다.
퍼버벅!
“악, 악, 악!”
“맞았다고 움츠러들지 마라. 특히 하체!”
퍽!
“이익!”
“어쭈.”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아우의 모습에 진무경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넌 기본도 안 된 놈이야. 본능대로 손 뻗고 발 나가는 습관부터 고쳐. 무공은 사람이 익히는 거지 짐승이 익히는 게 아니니까.”
“닥쳐!”
“기억력도 안 좋은 놈이군. 푹 자라. 일어나면 규칙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마.”
쉭! 털썩.
정통으로 턱을 얻어맞은 진태경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대자로 뻗은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진무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오십시오.”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명백하다. 머쓱한 얼굴의 진위경이 담벼락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었느냐?”
“모르는 게 이상하죠. 이 녀석 맞을 때마다 형님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던데요.”
진위경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쓰러진 진태경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구나. 다행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무경아!”
“걱정 마십시오. 근골 하나는 기가 막히게 튼튼한 녀석이니까요.”
“그래?”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두 시진이나 버티더군요. 이 정도 체력과 독기면 금방…… 왜 웃으십니까?”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진위경이 흔쾌히 대답했다.
“신기해서. 네가 막내 칭찬하는 건 처음 아니냐?”
그 말에 진무경이 멈칫했다.
‘칭찬? 내가 저 녀석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동생 아닌가. 가문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술독에 빠져 계집질이나 일삼던 놈을 자신이 칭찬했다니.
진무경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렇구나.”
“정말입니다.”
“알았다. 누가 뭐라던?”
“아니, 지금도 웃고 계시잖습니까!”
“그런 적 없다.”
“형님!”
진위경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가 다친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언제까지 품 안에 둘 수는 없어.’
산서잠룡. 태원진가가 배출한 또 한 명의 천재.
그는 훌쩍 커 버린 아우를 보며 기쁨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니, 그건 어쩌면 두려움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진무경이라는 천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눈에도 진태경의 성장 속도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안 돼.’
어린 시절, 진위경은 촉망받는 기재였지만 결코 천재는 아니었다. 자신 같은 범인(凡人)이 어찌 천재를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이 깊어 가던 찰나에 진무경이 돌아온 것이다.
진위경은 이때구나, 하고 두 사람을 붙여 놨다.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아 걱정이 많았었는데…….’
오늘 와 보니 괜한 걱정을 했다. 방법이 거칠긴 하지만 그건 분명 일방적인 구타가 아니라 단련이었다. 성장은 빠르지만 아직 미숙한 진태경을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들어 줄 단련.
비록 몸은 고달프겠지만 말이다.
‘다 널 위해서다.’
쓰러진 막내를 하염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진위경이 입을 열었다.
“이만 가마.”
하지만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진무경이 아니었다.
“혼자 가긴 어딜 갑니까? 저 녀석도 데려가십시오. 같이 못 살겠습니다.”
“열흘이다. 고작 그 정도도 못 참겠느냐?”
“오늘은 형님을 봐서 이 정도로 끝낸 겁니다. 정 그러면 내일은 장의사 부르시든가요.”
“진심이냐?”
“예. 그러니 당장 데려가는 게 저 녀석한테도 좋을 겁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인 진위경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거라.”
“예, 예?”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한마디를 툭 던진 진위경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진무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니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네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게다.’
이 불편한 동거는 비단 막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천재는 언제나 외로운 법. 두 천재가 서로에게 큰 자극이 될 것임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어나, 이 새끼야!”
빡!
“…….”
진위경은 돌아가는 길 내내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 * *
“일어났냐?”
“…….”
“일어난 거 다 안다. 대답해라.”
“…….”
“마지막 기회 준다. 셋 셀 동안 안 일어나면 연무장이 네 무덤이 될 줄 알아라.”
“…….”
“하나, 둘.”
개새끼. 숫자 한번 더럽게 빨리 센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우, 잘 잤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고리눈을 뜬 진무경이 보였다.
저 얼굴을 보니까 어제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쳐 죽일 놈.
나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 형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진무경을 보니 존댓말을 쓴 게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나 트집 잡히기라도 하면 복날 개 잡듯이 두들겨 팰 놈이니까.
‘시바…… 약한 게 죄다. 죄.’
나도 오기가 있는 놈이다. 하지만 맨주먹으로 하는 싸움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진무경을 당할 수 없었다.
저놈이 체계적인 권법, 각법을 익힐 때 나는 UFC 경기를 봤다. 애초에 오기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로그아웃이었다.
물론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전투 시에는 로그아웃이 불가능하다니. 그딴 게 어디 있어.’
미리 말이나 해 주든가. 그것도 모르고 덤볐다가 인생에서 로그아웃 당할 뻔했다. 나는 힐끔 진무경을 곁눈질했다.
“야.”
“예?”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제가요?”
싸늘한 목소리에 최대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이제는 눈도 착하게 떠야 한 대라도 덜 맞는다.
“너…… 후. 조심해라.”
“네, 형님.”
갑자기 공손해진 내 태도에 진무경은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예의 바르다고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어제 일 말인데…….”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제 잘못입니다. 수련 중이신데 큰 소리를 내다니. 맞아도 싸죠.”
“아니, 야.”
“어떡해, 어제 저 때리시느라 손 아프셨겠다. 제가 호 불어 드릴까요?”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진무경은 나를 때릴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포기하고 주먹을 내려놨다.
“됐다. 따라 나와.”
“……어디로요?”
“연무장.”
앞에 했던 말 정정. 연무장에서 때릴 모양이다. 그래, 또 내 방을 초토화시킬 순 없을 테니까.
바짝 굳은 내 표정을 본 진무경이 혀를 찼다.
“그런 거 아니니까 따라와. 오늘부터 수련이다.”
“수련이요?”
“그래. 네 녀석의 끔찍한 무공을 처음부터 뜯어고쳐 주마.”
볼 때마다 두들겨 패던 인간이 갑자기 수련을 도와준다고? 그것도 자기 시간까지 쪼개 가면서?
‘차라리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회개했다는 말을 믿지.’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스스로도 느꼈는지 진무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형님께서 다녀가셨다.”
“아.”
성격은 지랄맞아도 위아래가 확실한 놈이다. 진위경이 직접 부탁했다면 지금 상황이 이해된다.
“비어 있는 건물이 몇 채인데 너를 왜 내게 보냈겠느냐? 젠장. 아예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했는데.”
……어지간히 가르쳐 주기 싫은 모양이군.
하지만 나로서는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하다못해 괜찮은 권각술 하나라도 전수받는다면 분명히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니까.
“부탁드립니다.”
진무경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고 말해. 내 기준에 맞추려면 벅찰 테니까. 힘들다고 포기할 바에야 지금 깨끗하게 접어라.”
힘들 때마다 포기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은 걸까?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연무장으로 나와라.”
띠링.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시련? 수련?]정해진 기간 동안 진무경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하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강해지건, 진무경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퀘스트는 실패합니다!
등급 : 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진무경의 인정 (미완료)
보상 : ???
실패 : ???
남은 시간 : 9일 23시간 51분 10초
‘진무경의 인정이라.’
추상적인 임무지만 충분히 자신 있다. 시스템의 사기성과 내 노력이 합쳐진다면 진무경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할 수 있어.’
내가 결의를 다지던 그 순간이었다.
“참. 너 창 쓰지?”
“아, 네.”
“그것도 챙겨서 나와.”
진무경은 검사다. 그러니 당연히 권법 위주로 가르쳐 줄 거라 생각했는데. 어리둥절한 일이라 일단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갑자기 창은 왜……?”
“수련도 실전처럼. 그런 말 못 들어 봤어?”
진무경이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형님한테도 허락 맡아 뒀다. 장의사 불러도 상관없대.”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로그아웃.”
삑.
– 해당 퀘스트 중에는 로그아웃이 제한됩니다.
이런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