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719
#718화
“그토록 많은 이들이 죽었음에도, 내 마음속에는 백상 한 사람에 대한 슬픔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 잠시 침묵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떠난 겁니까. 자신의 그런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남만야수궁의 궁주가 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땅과 부족민들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지.”
천년거석처럼 커다란 등이 보인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남만을 지탱해 왔을 거인의 뒷모습은, 지금 이 순간 어린아이처럼 초라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백상과 마주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아느냐?”
충분히 짐작한다. 하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에 관하여 잘 알고, 가장 고통스러워한 이가 내 앞에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살리고 싶더군.”
“…….”
“그 참혹한 광경 속에서도, 나를 비롯한 이 땅의 모두를 배신한 백상 그 녀석을 구하여 멀리 도망치게 하고 싶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혈육이나 다름없는 의형제.
야수묘왕은 어떻게든 백상을 구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을 인질로 붙잡힌 채, 암천의 사냥개 노릇을 해 왔던 그에게 면죄부를 내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 것은, 백상 본인이었다.
“아마 그 녀석도 알았겠지.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겠지.”
야수묘왕의 뇌까림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목숨보다도 아꼈던 의제(義弟)의 숨통을 제 손으로 끊을 수밖에 없던 것에 대한 비통함이었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궁주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병든 나무 한 그루로 인하여 숲이 죽었다. 한데 숲을 돌보아야 하는 숲지기는 이미 쓰러져 버린 병든 나무 앞을 서성이고 있구나. 너는 그런 자를 숲지기라 부를 수 있겠느냐?”
조용히 야수묘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긴 침묵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야율 대협, 이건 진짜 진심으로 묻는 건데…….”
나도 모르게 흐려지는 말꼬리.
솔직히 지금 이 순간조차도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다. 하지만 저 멘탈이 나가 버린 숲지기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야 한다.
아주 조금, 어쩌면 많이 선을 넘더라도.
“혹시 병신이세요?”
“……!”
야수묘왕의 뒷모습에서 감출 수 없는 동요가 느껴진다. 그러나 기왕 내친걸음,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궁주는 뭐 천지신명이라도 됩니까? 사람으로서의 감정도 없어요?”
“너…….”
“까놓고 말해 봅시다. 당장 평생을 함께한 혈육 같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세상 누가 멀쩡할 수 있습니까? 단지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고 더 슬퍼해요?”
와르르 쏟아지는 직설적인 말들에 잠시 침묵하던 야수묘왕이 입을 열었다.
“진태경, 너 역시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 같은 새끼가 뭐 대단한 놈이라고.”
“…….”
“주위에서 협객이니, 대협이니 치켜세워 줘도 결국 사람입니다. 궁주라고 해서 다르겠습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드넓은 등이 움직였다.
스윽.
서서히 돌아선 고개.
내가 이 낡은 사당에 발을 디딘 이래 처음으로 마주한 야수묘왕의 안색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역시 내가 지켜야 할 남만의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지켰잖습니까. 배반자로 낙인찍힌 뒤에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돌아왔잖습니까. 또 다른 수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입니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미 병든 나무들은 쓰러졌고, 숲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숲지기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이번 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만은 더욱 부강해질 것이다.
남만이라는 이 거대한 숲에서 병든 나무는 백상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또 다른 부족장들. 아니, 배반자들.’
백상이 자식을 위해 암천과 손을 잡았다면, 그들은 단지 일신의 안위와 권세를 위해 백상을 따랐다.
하여 그들이야말로 진작 베어 내야 했을 나무들이다. 탐욕이란 병에 걸린 나무들.
그렇게 무려 스무 명이 넘는 부족장들이 탐욕에 취해 제 몸에 달린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그로 인하여 무수한 나뭇잎이 핏물 위를 뒹굴었으나 숲은 죽지 않았다.
아니, 남만야수궁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에서 더욱더 하나 되어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남만인의 앞에서 그 깃발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그래야 저 부자(父子)도 마음 편히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소리는 야수묘왕을 향한 것이었지만, 지금 내 눈동자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차린 야수묘왕이 나직이 물었다.
“알고 있었더냐.”
“처음 들어오자마자 눈에 띄었습니다. 사당 안에 있는 거라곤 죄다 먼지투성이인데, 저것만 멀쩡하더라고요.”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아갔다.
색 바랜 벽화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십여 개의 석상 사이에, 지난번에는 볼 수 없었던 두 개의 위패(位牌)가 놓여 있었다.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두 개의 위패.
하지만 나는 저 위패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백상. 백휘.’
이 위패를 손수 만들었을 이조차 차마 새겨 넣을 수 없었을 그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그리고 엎드려 절했다.
한 번.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의 절을 마치고 돌아섰을 때, 굳어 있는 야수묘왕의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의외라서.”
“제가 뭐, 위패라도 엎을 줄 아셨나 보네요.”
“너라면 그럴 수 있다. 적어도 백상, 그 녀석이 지은 죄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젠장. 그건 그렇지.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한다면 내가 백상의 위패를 반으로 쪼갠 뒤 침을 뱉어도 정당방위다.
하지만…….
“그냥. 그냥 이러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뿐이에요.”
뭘까. 이 더러우면서도 씁쓸한 기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위패를 바라본 나는, 문득 지금 이 감정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동정이나 공감이라 불려야 할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늦었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뇌옥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언뜻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나는 이름 한 글자 적혀 있지 않은 위패를 바라보며 들리지 않을 물음을 던졌다.
‘만약 내가 당신이었다면, 나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위패가 아닌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조차. 다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세(來世)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이번과는 다른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누구도 잃지 않고,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그런 평온한 삶 속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식과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젠장. 저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안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악당은 없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이토록 기분이 더러운 이유는 간단하다.
어쩌면 나 역시 백상과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 정도가 전부였다.
“……거기선 죄짓지 마라. 이 시부럴 새끼야.”
작게 중얼거린 그때, 사당의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 온 불그스름한 빛이 두 개의 위패를 비추었다.
마치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는 듯이.
그리고 다음 순간, 굵직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구나.”
끼익.
낡은 바닥이 비명을 지른다. 마침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거한이,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지금 곧장 내궁으로 향한다면, 저녁 식사 정도는 함께 할 수 있겠지.”
“……!”
“가자. 더 늦지 않게 돌아가야겠으니.”
그런 야수묘왕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만의 숲지기가 돌아왔다.
* * *
이틀이 지났다.
말도 없이 사라졌던 궁주가 다시 돌아오자 혼란에 빠져 있던 수뇌부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고, 모두의 권유에 짧은 휴식을 취한 야수묘왕은 이튿날 나를 호출했다.
아니, 정확히는 적천강과 나를.
그리고 칠 주야 만에 급조한 회의실에 도착한 적천강은, 자리에 앉아 있던 야수묘왕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많이 컸네, 우리 묘왕이. 상석에 다 앉아 있고.”
“……헉.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그만.”
“아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버릇없는 놈을 보면 화염신장을 날리는 노부의 습관도 이해하거라.”
쉬쉭!
정마대전 때 이미 그 습관을 겪어 본 적이 있는 야수묘왕이다.
붕대를 칭칭 감은 몸을 잽싸게 움직여 상석을 비운 그가 공손히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적 노.”
“허어, 괜찮다. 몸도 불편한 놈이 뭘 이렇게까지.”
“…….”
“됐으니 그만 앉아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오라 가라 한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우선은 맘대로 지껄여 봐.”
간만에 겪는 깡패식 화법에 혼란스러워하는 야수묘왕을 위해, 내가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냥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 정도면 경청하시겠다는 뜻이에요.”
“……그럼 적 노, 이 후배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되묻는 거 되게 싫어하십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험한 꼴 당하기 싫으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알았다.”
예전 기억과는 달리 한참 젊어진 적천강의 모습을 힐끔거린 야수묘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적 노까지 모신 것은 한 가지 중대 사안에 관하여 여쭙기 위해섭니다.”
“중대 사안?”
“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뒷수습도 원만히 되어 가는 것으로 아는데. 혹 암천의 꼬리라도 밟았느냐?”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보다 머리 아픈 문제라…….”
“서두가 길다. 네놈 명줄 짧아지기 전에 본론부터 말해라.”
이 양반 여전하시네.
딱 그 눈빛으로 적천강을 바라본 야수묘왕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툭.
두꺼운 천에 싸여 있는 무언가. 하지만 나를 비롯한 이 자리의 모두는 그 너머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 속, 적천강이 침음성처럼 중얼거렸다.
“……마기(魔氣)?”
야수묘왕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것도 아주 순수하고 강력한 마기지요. 남만의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어 후배가 직접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이 마기의 근원이 어디이며, 저 천 안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더불어 짙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던 한 존재의 마지막 포효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신석(神石)이군요. 수호령이 지니고 있던.”
“네 짐작대로다. 비록 이제는 신석이 아니게 되어 버렸지만.”
스륵.
착잡한 어조로 대답한 야수묘왕이 천을 걷자, 따스하고 눈부신 광휘 대신 혼탁한 어둠을 머금은 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균열로부터 흘러나오던 마기를 모조리 흡수한 그것은 이제 마석(魔石)이라 불려야 할 무언가였고, 이를 바라보는 야수묘왕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은 내가 마기를 억누르고 있으나,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 하여 이것의 처우를 논의하고자 너와 적 노를 청했다.”
그 순간.
띠링.
눈앞의 혼탁한 어둠과는 상반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퀘스트, [타락한 신물]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