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855
#854화
호북성 하급 무관 장일(張一)은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를 아는 누군가는 사내로 태어나 야심이 없다며 혀를 찼지만, 정작 장본인인 장일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암, 그렇고말고.’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양민 집안에서 태어나 정식 무관의 자리까지 오른 그다.
비록 낮은 직급 탓에 나라에서 받는 녹봉은 쥐꼬리만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호북성 서쪽에 위치한 주요 도시인 의창(宜昌)의 일곱 수문장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의창이 어떤 곳인가.
빼어난 자연 풍광을 보기 위한 시인 묵객(墨客)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호북성 전역을 가로지르는 장강 연안의 항구 도시가 바로 의창이다.
그만큼 하루에도 수많은 물자와 인파가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각 관문이 막대한 통행료를 거둬들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상부에는 절대 보고되지 않는, 뇌물이라는 이름의 떡고물도 함께.
‘오늘은 어느 잘나신 놈들이 찾아오려나.’
새벽 일찍 일어난 장일은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을 준비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비단옷에, 멋지게 장식된 패검까지.
터무니없이 비싼 탓에 사지 못한 면경(面鏡)에 이런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속이 쓰렸으나, 늙은 하인의 말이 한 줄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실로 영웅의 풍모이십니다, 주인어른.”
“큼.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예에. 관문을 통과하는 이들이 누구건, 주인어른의 위엄 앞에는 감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할 겁니다요.”
“어허, 사람이 실없기는.”
말은 그렇게 해도 입꼬리를 씰룩이는 장일의 모습에, 늙은 하인이 변죽 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휴, 제가 언제 빈말하는 것 보셨습니까? 한데 오늘따라 아끼시던 비단옷이며 검까지 차시는 걸 보면 중요한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자네는 언제나 눈치가 빠르군. 맞네. 오늘은 꽤 거물들이 올지도 몰라. 두 달 전쯤에 중경(重慶)으로 떠났던 상행이 이맘때쯤 돌아온다고 했거든.”
“허어. 한데 근래 들어 중경 쪽 분위기가 요상하게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던가?”
“아는 보부상에게 들었습니다. 중경뿐만 아니라 광서 쪽에서도 무림인들 사이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고…….”
“전부 헛소리니까 무시하게. 광서의 소식은 나도 얼추 들어서 알고 있지만, 중경은 오합지졸 같은 산적이나 수적 따위밖에 없어. 이번 상행도 분명 대박일세.”
장일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천성과 호북성 사이에 자리 잡은 중경은 성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나, 풍부한 자원과 특산품이 있어 수많은 상단들이 군침을 흘리는 곳.
이문이 많이 남는 만큼 경쟁도 치열했고, 그렇게 뽑힌 상단 역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이번 상행은 특히나 그랬지.’
세 개의 상단이 힘을 합쳤다.
그렇게 동원한 무사며 쟁자수의 숫자만 물경 오백.
백 개가 넘는 수레를 상선(商船) 열 척에 실어 떠난 것이 두 달 전쯤이었으니, 장일로서는 곧 자신에게 돌아올 떡고물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 보람이 있지.’
뿌린 만큼 거둔다는 옛 격언은 장일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의미다.
그는 의창의 수문장이 되기 위해 엄청난 뇌물을 뿌렸고, 불과 이 년도 되지 않아 그 이상의 것을 거두었으나 이쯤에서 만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처럼만 거둬들이면 충분하다. 크게 욕심부릴 필요 없어. 번듯한 장원 한 채 마련할 정도면 족해.’
탐욕은 또 다른 탐욕으로 잊히는 법.
장일은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게으른 자신이 퍽 양심적인 관리라고 자부하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근무지인 서문(西門)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팽팽하게 조여드는 공기.
여느 때처럼 팔짱을 낀 채 하품을 하고 있어야 할 병사들은 땀범벅이 된 채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고, 피 묻은 들것이나 그을린 잡동사니 따위가 곳곳에 굴러다녔다.
두 달 전 중경으로 떠나며 위풍당당하게 펄럭이던 세 개의 깃발도 함께.
“도대체 이게 무슨…….”
“나으리! 장 무관 나으리!”
문득 귓가를 파고드는 누군가의 부름에, 멍하니 중얼거리던 장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익숙한 얼굴의 수하가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그러니까…….”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서슬 퍼런 상관의 외침에 순간 움츠러들었던 수하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끄집어냈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일이 입을 딱 벌렸다.
“스, 습격?”
“예, 예. 상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사며 쟁자수의 머릿수만 물경 오백이었다! 산적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경악에 가득 찬 고함이 터져 나온 그 순간.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산적들이라고 별반 다르겠나.”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장일이 눈을 깜빡였다.
“다, 단주 어른?”
틀림없다. 피범벅이 된 몸뚱어리에 넝마가 된 옷가지를 걸치고 있어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장일이 두 달 전부터 오매불망 기다렸던 거물이자, 이번 상행에 참여한 세 명의 상단주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살아서 다시 보니 반갑군. 장 무관.”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두 분은요?”
“함께 왔다네. 대화를 나눌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지만.”
상단주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장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적에 쌓인 수십여 구의 시체. 그중에서도 따로 분류하여 떨어트려 놓은 시신 두 구의 정체는 불 보듯 뻔했다.
“……설마.”
“자네가 예상하는 그대로일세.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지만 어쩔 수 없었지. 우리로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어.”
“중과부적이라니. 산적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았단 말입니까?”
“엄연히 따지면 산적과 수적들이었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바로 알아보겠더군. 작살을 든 놈들이 사방에 득실거렸으니까.”
“수, 수적이 어찌!”
“산에 있으나 장강에 있으나, 도적놈들은 도적질을 본분으로 삼는 법 아니겠나?”
힘없이 중얼거린 상단주는 반파된 수레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두 달 전, 의창을 떠날 때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네. 하지만 중경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나 다를까. 옥화산(玉化山)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놈들이 나타나더군.”
옥화산은 아름다운 풍광과는 별개로 험하기로 이름난 중경의 험산(險山)이다.
사방이 좁고 가로막힌 풀숲에서 적들과 처음으로 조우했던 순간을 떠올린 상단주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는 거칠 것이 없었네. 각 상단에서 정예들만 뽑아 데려왔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이름난 낭인 수십 명도 고용했으니까. 하지만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 모든 것이 전부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네.”
“대관절 놈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기에…….”
“일천.”
“예?”
“일천이라고 했네. 눈대중으로 살폈음에도 그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을 테지.”
“……!”
장일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천이 넘는 도적 떼라니. 북방에서는 초원을 근거지로 한 유목민이나 마적단이 힘을 합쳐 대병력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있었지만, 중경은 아니었다.
실로 유례가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어. 한데 근래 들어 중경 쪽 분위기가 요상하게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던가?’
‘아는 보부상에게 들었습니다. 중경뿐만 아니라 광서 쪽에서도 무림인들 사이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고…….’
집을 나서기 전, 늙은 하인과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린 장일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가 아끼던 비단옷은 언제 흘렸는지 모를 식은땀으로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중경은 호북과 지척이다. 그가 수문장으로 있는 의창에서도 뱃길을 타면 사흘이요, 육로로 이동한다면 닷새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이게,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손발이 덜덜 떨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볼 것도 없이 당장 일어나 군사들을 지휘하고, 경종을 울려야 함에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장일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단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통행료를 내겠다고 했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놈들이 쏘아 보낸 화살이었네.”
누군가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상단에서 키워 낸 무사들과 고용된 낭인들, 심지어는 수레를 끌던 쟁자수까지 나서서 싸웠으나, 일평생을 약탈자로 살아온 수적과 산적들은 거침없이 그들을 베어 넘겼다.
“그건 전투라기보다는 도륙에 가까웠네. 아군의 숫자도 많았지만 그중 절반은 쟁자수였고, 남은 이들로는 한계가 있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놈들도 결국 화전민이나 어부 출신이 대다수 아닙니까?”
“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놈들은 뭔가 달랐네. 마치 신들린 것처럼 계속해서 달려들었어.”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말하고 있던 상단주의 목소리가 문득 파르르 떨렸다.
“다리가 베이고, 팔이 날아가도 달려들었지. 하나를 쓰러트리면 셋이, 셋을 쓰러트리면 다섯이. 솟구치는 두려움을 참으며 그마저도 쓰러트리면 열 명의 적이 기다리고 있었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상단주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지옥도(地獄道)에서 뛰쳐나온 악귀들처럼 달려들던 그들의 모습을.
“전투는 불과 반 시진 만에 일방적으로 끝났고, 사기가 꺾인 아군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네. 사방이 비명과 죽음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나 역시 수하들을 이끌고 몸을 피했지. 비록 상행은 실패했지만,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했어.”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그는 다른 두 상단주와 함께 남아 있는 병력들을 이끌고 퇴각했고, 옥화산을 빠져나왔을 때는 오백에 달하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산자락을 타고 계속해서 도망쳤네. 자그마치 사흘 동안.”
“사, 사흘?”
“산 밑으로 내려가 관군이나 다른 무림 문파에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놈들이 있는 한 불가능에 가까웠지. 그 방법만이 최선이었어.”
적들은 각 길목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호북성으로 돌아갈 최단 거리를 통해 도주를 감행하여 마침내 중경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옥화산을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나루터에 정박시켜 두었던 열 척의 상선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확신했네. 더는 도망칠 엄두조차 들지 않을 만큼.”
장장 사흘간 이어진 추격전은 끔찍하고 치열했다.
오백에서 절반으로. 그 절반에서 불과 백여 명도 되지 않는 숫자로 줄어든 그들은 죽음을 떠올렸다.
검붉은 불길과 함께 가라앉아가는 상선을,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것을 지켜보며.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적들의 고함을 들으며.
그리고 생애 마지막의 전투가 시작되려던 그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인물들이 등장했다.
“웬 중년인이었네. 열 명 남짓한 일행과 함께하고 있던.”
“중년인…… 말입니까?”
“그래. 마치 산보 하듯이 다가오더니, 타오르는 상선을 가리키며 대뜸 이렇게 묻더군.”
호흡을 가다듬은 상단주가 말을 이었다.
“어떤 호로 새끼가 불을 질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