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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화 종장(終章) (4)
“이, 이건 제가 이곳 저잣거리에서 산 물건입니다. 몇 푼 안 되는 싸구려예요! 정말입니다!”
멱살을 잡힌 상단원은 몸을 바둥대며 그리 말했다.
어찌나 구슬프고 억울하게 우는지, 하준의 손에 힘이 풀어질 뻔했다.
하지만 하준은 목걸이의 생김새를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영락없는 비휴의 눈이 맞다.
이강이 그것을 얻을 때부터 목격했던 하준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거짓말.”
그리고 약간의 폭력이 동원되었다.
“아악! 드리겠습니다. 드릴게요!”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귓구멍을 하나 더 뚫어 줘야 이해하겠나? 그 목걸이를 어디서 얻었냐고 묻는 거다.”
“그, 그게…….”
종종,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알을 굴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준은 그런 이들을 많이 겪어 봤다.
“날 봐라.”
하준이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의 두 눈이 완전히 시커멓게 물들었다.
백류산을 포함한 백씨세가 사람들이 끔직히도 싫어하는 일이지만, 하준은 자신의 힘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눈을 굴리면 그 눈을 뽑아 주지, 거짓을 말하면 혀를 뽑아 주겠다.”
“……으, 으으.”
“어디서, 어떻게 얻었냐.”
목소리만 싸늘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상단 사람들은 일생에 겪어 볼 일 없는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멱살이 잡힌 자는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원주민들에게 구했…… 습니다. 그자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가…… 귀해 보였는데. 값을 모르고 있는…… 듯해서.”
“원주민?”
“예, 해안…… 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는 부족이…… 있어서.”
부족민이 가치를 모른 채 지니고 있던 목걸이를 챙겨 왔다는 뜻이다.
하준은 무형지기를 유지하며 캐물었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정말 이강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르는지.
마침내 사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사내는 목걸이를 뺏긴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잘됐군.”
담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옆에 있던 상단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마을로 가면 단서를 찾을 수 있겠어. 잘 부탁하지.”
“하…… 하하, 그럼요.”
상단주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무림맹에서 나왔다길래, 어느 정도 선하고 어리숙한 이들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냥 위험한 놈들 아닌가.
그러나, 이미 선택권은 없었다.
“자, 잘 모셔다드려야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는 담현 일행을 저 서쪽의 담파국까지 데려가게 되었다.
담현이 싱긋 웃었다.
그 흰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였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희지 않았다.
창백하다는 소리까지 듣던 그였지만, 오랜 여정 동안 햇볕을 너무 많이 쬐었다.
건강하게 그을려서 보기 좋은 모습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담파국을 지나 일만 오천 리를 넘게 왔다.
중원 사람 중 일평생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심지어 이쪽까지 교역을 나오는 상단 역시 수년에 한 번쯤이나 떠나는 대장정이었다.
사실, 담현 일행의 동행은 상단 입장에서 큰 행운이었다.
그 대장정이 조금 험한 길이던가.
밀림을 해쳐나갈 때, 독침을 쏘는 부족을 만났다간 반드시 시체가 생긴다.
이번에는 운이 나쁘게 그놈들을 만났다.
그런데, 유약해 보이던 담현이 소매를 한 번 휘젓자 그 독침들이 우수수 떨어지지 않던가.
그 외에도 별일이 다 있었다.
한참을 우회해야 할 급류 앞에서는 팽무아가 거대한 통나무를 쓰러뜨려서 외나무 다리를 만들었다.
물이 귀한 사막을 만났을 때는, 하준이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오르더니 사구(砂丘) 너머 숨겨져 있던 물웅덩이를 찾아냈다.
그런 도움을 받으며 겨우 오십여 일 만에, 그들은 이 서남쪽 해안에 도착했다.
철썩, 철썩.
파도치는 소리.
“하얗군.”
그것이 담현의 첫 감상이었다.
신비하게도, 이곳의 백사장(白沙場)은 단어 그대로 새하얀 모래로 이루어졌다.
다른 해변보다 무척 희고 고운 모래였다.
또한 바닷물은 신비로운 옥색이었다.
“모래가 희어서 물도 비취 빛이 나는 건가.”
담현의 탐구 정신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담현은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이곳까지 도착한 이상 원래 목적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입수한 목걸이가 어떻게 원주민의 손에 쥐어졌는지, 그 원주인인 이강은 어디 있을지.
혹시 ‘해변가에 쓸려내려 온 목걸이를 원주민이 주웠다.’따위 같은 막막한 상황은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상단원들이 원주민 마을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막투! 게네 비에!”
얼굴에 문신을 한 원주민 전사가 창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어어, 진정해. 우린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야. 빨리 통역해 봐 이 자식아!”
상단주는 기겁을 하며 제 상단원을 돌아보았다.
담현 일행이 이들의 호위 보표는 아니었으므로 여기선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상단원 중에 이쪽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상단주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전사는 침을 탁 뱉고 말했다.
“파크! 막투!”
“뭐라는 거냐?”
질문한 것은 다름 아닌 담현이었다.
통역을 맡은 자가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씨벌, 꺼져랍니다.”
전사는 차갑게 등을 돌려 제 마을로 돌아갔다.
담현이 슬금슬금 몸을 빼던 상단주의 멱살을 잡았다.
“어이, 교역을 한다며. 돈을 주고 거래하던 사이인데 왜 저렇게 삐딱하게 나와!”
“그게, 그으…….”
“똑바로 답해!”
“가끔씩 대화가 안 되면, 조금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있습죠!”
상단주가 사실을 고백했다.
그들은 평범한 상단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의 원주민들을 얕잡아보는 마음가짐도 있었다.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값비싼 것으로 교환하는 거야 교역의 기본이라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게다가 종종은 윽박을 지르거나 폭력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저번 상행에서는 이 부족에서 큰 싸움을 벌여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것이다.
하준이 상단원 한 명의 목덜미를 잡고 다가왔다.
이강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던 자였다.
“거짓말을 하면 혀를 뽑아 버린다고 했을 텐데.”
“흐억! 거짓말이 아닙니다. 분명 이곳에서 원주민에게 구한 물건이에요!”
“구했다고. 어떻게?”
그는 정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분명 원주민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를 받았다.
“도자기 사발 두 개를 준다고 했는데도 안 주길래……. 좀 겁을 줘서 빼앗……. 억! 으어억!”
사내의 목을 부러뜨릴 뻔했던 하준이 가까스로 그를 놓아주었다.
이래서는 대화가 될 리 없었다.
“저희가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팽무아가 그리 제안했다.
상단의 평판은 이곳에서 최악이었다. 차라리 담현 일행이 직접 소통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거기, 통역.”
담현이 이 지역의 말을 할 수 있는 상단원 한 명을 불렀다.
“그리고 너도 따라와. 나머지는 기다리고.”
목걸이를 강압적으로 빼앗았다는 상단원이었다.
그는 쭈뼛거리면서 따라왔다.
담현은 성큼성큼 부족의 마을로 걸어갔다.
창을 들고 있는 원주민 전사들이 마을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았다.
“막투!”
“게네브 잇 마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강 썩 꺼지라는 듯했다.
그 기세가 위협적이었지만 겁을 먹은 것은 상단원뿐이었다.
담현과 그 일행은 표정도 바뀌지 않았고 걸음이 느려지지도 않았다.
원주민 전사들이 망설였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이를 악물고 창을 내질렀다.
“마하!”
힘은 좋았지만.
설마 그들의 창이 닿을 수나 있을까.
뒤에 있던 하준이 손을 튕겼을 뿐이다.
그의 손에서 지력이 발출되었다.
따당!
대나무를 잘라 만든 창 두 개가 동시에 부러져 나갔다.
원주민들로서는 귀신의 조화처럼 보였으리라.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물러나는 전사들의 모습을 보면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뭐라고 막 소리를 치는가 싶더니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하지만 담현 일행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사들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그 전진이 멈춘 것은 마을의 중앙이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이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저자가 부족장입니다.”
상단원이 담현에게 귓속말했다.
담현이 그에게 통역을 명했다.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또한, 나는 이 상단의 사람도 아니다!”
그러자 족장 노인이 무어라 대답했다.
상단원이 바로 통역해 주었다.
“우리 부족은 얼굴 흰 외지인을 거부한다. 나가라!”
태도가 강경했다.
담현도 강경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상단 놈들이 너희 부족민을 때리고 이 목걸이를 갈취했다 들었다. 맞나?”
담현이 목걸이를 치켜들었다.
원주민들이 서로 웅성거렸다.
“우리는 이 목걸이의 원래 주인을 찾으러 왔다. 그는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차무투 나미!”
마을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다리가 불편한 듯 뒤뚱거리는 사람이었다.
통역이 그 말을 해석해 주었다.
“자기 꺼라는 말입니다.”
“저 원주민이 맞나? 네가 다리를 부러뜨린 거야?”
목걸이를 빼앗았던 상단원이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려주지, 나와서 가져가라!”
그러자 하준이 깜짝 놀랐다.
하준의 시선을 느낀 담현이 전음으로 설명했다. 어차피 목걸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강을 찾는 것 아니던가.
하준도 납득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리가 불편한 원주민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걸어 나왔다.
담현은 그에게 목걸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다리가 불편한가 보군.”
‘저놈이 부러뜨렸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담현은 씨익 웃고 답했다.
“고쳐 주지.”
그러더니 원주민 사내를 살짝 밀쳐서 쓰러뜨렸다.
“어, 어어!”
상단원마저 당황했다.
마을 원주민들이 그 사태에 폭발했다.
그들은 전부 창을 들고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담현은 아무 망설임 없이 원주민의 전신을 두들겼다.
그것이 마치 두들겨 패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담현은 게다가 굽어 있는 사내의 다리를 움켜잡기까지 했다.
“인대가 뒤틀린 채 뼈가 붙었군.”
그러고는 힘을 주었다.
끔찍한 비명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창을 던지기 시작했다.
상단원들은 놀라 몸을 웅크렸지만, 하준과 팽무아가 나섰다.
화살도 쳐내는 이들이 죽창 몇 개를 무서워할 리 없었다.
후두두둑!
손발을 흔들고 도를 휘두르자 죽창들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사이, 담현의 돌발행동이 끝났다.
“일어나라.”
금침의괴에게 의술을 배운 담현이었다.
겁을 먹어서 덜덜 떨던 원주민은 어리둥절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깔끔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아챘다.
“아, 아아!”
그는 신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제 부족에게 자신의 몸이 나았음을 알렸다.
흥분했던 원주민들이 놀라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담현의 협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목걸이를 어떻게 구했는지 알려 줘라. 대신 이놈들을 주겠다.”
목숨을 건진 상단원이 열심히 통역을 하다가 말을 멈췄다.
“뭐, 뭘 줘요?”
“이놈들을 주겠다. 그렇게 통역해.”
그는 담현의 살벌한 기세에 머뭇거리면서도 그리 전했다.
“마음껏 두들겨 패라.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통역해. 아니면 내가 직접 죽여 주지.”
상단원은 결국 더듬으며 통역을 했다.
원주민은 싱글벙글 웃으며 뭐라고 말했다.
“저어, 저 바다 건너서 섬들이 여럿 있는데, 물고기를 잡으며 사는 섬 한곳에 어느 날 머리가 흰 사람이 나타났답니다. 그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줬는데 그 대가로 목걸이를 줬다는군요.”
“머리 흰 사람?”
이강의 머리가 희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목걸이를 줬다니 한번 찾아가 봐야 할 것이다.
다리를 고친 원주민은 신나서 자기가 직접 배를 태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 그러면 복수 잘하라고.”
담현은 웃으며 상단원들을 밀쳤다.
통역은 없었지만 그 마음은 전달되었나 보다.
부족민은 환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팔다리를 부러뜨려도 내가 고쳐 놓으면 되니까. 걱정 말아라.”
그 위로는 상단원들에게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 덕에 원주민들의 원한도 풀렸으니, 상단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약 한 식경 동안 이어진 매타작이 끝나고.
원주민은 직접 담현 일행에게 배를 태워 주었다.
그들은 노를 저으며 옥색 바다를 한참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보이는 섬을 발견했다.
빛의 기둥이 솟았다는 지역을 막 지나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섬이 있었다고 원주민이 설명했다.
그들 부족의 말로, ‘거인의 눈’이라는 이름의 섬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얕은 파도만이 찰랑일 뿐이었다.
맑은 수면 아래에 마치 운석의 충돌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어서 빛기둥이 솟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원주민은 그곳을 지나쳐 조금 더 나아갔다.
사람이 거주하는 유인도.
그곳이 바로 목적지였다.
“……노을이 지는군.”
옥색 바다가 어느덧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맑은 하늘은 보랏빛과 푸른빛이 어슴푸레하게 섞여 있다.
그 아래에 있는 섬은 몹시 아름다운 곳이었다.
언제까지고 휴양을 즐기고 싶을 정도로.
담현은 문득 알 것 같았다.
만약 이강이 살아 있었다면.
그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팽무아가 나지막이 탄성을 터뜨렸다.
담현도 그곳을 돌아보았다.
하얗게 반짝이는 백사장.
그곳에 원주민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웃옷을 벗고 있는 청년이 한 명 끼어 있다.
등을 돌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독 눈에 띄었다.
상대적으로 흰 피부, 그리고 희게 탈색된 머리카락.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린 것은 하준이었다.
그는 경공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달렸다.
“야! 같이 가!”
팽무아도, 담현도 우선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거의 물 위를 달리듯 했다.
놀란 원주민 아이들이 꺅꺅대며 청년의 뒤로 숨었다.
그 청년이 몸을 돌렸다.
하준이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강이다.
그의 형이 맞았다.
머리카락은 어째선지 희었고, 이 남국의 태양에 의해 피부가 조금 그을렸지만.
하준이 제 형을 몰라볼 리 없었다.
뒤따라 도착한 팽무아도 곧바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이강의 가슴팍을 보았다.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 그곳에 명백한 칼자국이 보였다.
관통상이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흉터였다.
“야 이 자식아! 살았으면 돌아왔어야지 왜 이런 곳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어?”
담현의 말은 일행 모두가 공감하던 것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강은 멀쩡한 상태였다.
모두가 이강이 뭐라고 답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도무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저……. 누구신지.”
이강은 명백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그 말에, 팽무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그제야 모든 실마리가 풀린 듯했다.
이강이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저건 분명.
‘기, 기억상실!’
말로만 듣던 그 증상임이 분명했다.
당황한 이강 앞에서 모두가 얼음같이 굳었다.
누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용기를 가장 먼저 낸 것은 하준이었다.
“나야 하준이. 형 동생이야…….”
하준은 목이 메이는 듯 그리 말했다.
“동생이라니. 나한테 동생이 있었다니…….”
그다음은 담현이었다.
“너는 청림의 문도이다. 그리고 나는 네 사형이지.”
“사형……요?”
“그래, 네가 늘 존경하며 모시던 그 사형이다.”
“제가 존경을…….”
“하늘같이 여겼지. 기억이 안 나나 보는구나.”
팽무아는 담현의 뻔뻔함에 무심코 소리를 칠 뻔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녀는 더 큰 거짓말을 했다.
“나는 무아야. 팽무아. 그…… 너랑 진지하게 만나던 사이잖아.”
그러자 담현과 하준이 동시에 팽무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이미 던진 이상 회수할 수 없었다.
“아니,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 그런 거였지.”
이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거짓말이 들켰나 싶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갑자기 이강이 미소를 지었다.
“큭, 하하.”
그러더니 시원하게도 웃었다.
팽무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동공도 크게 확장되었다.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기억상실증은 처음부터 농담이었다.
그녀는 냅다 몸을 돌려서 바다로 달렸다.
그것을 하준이 붙잡았다.
“진정해.”
“놔! 죽을 거야! 아니 쟤부터 죽여야 되나?”
팽무아를 말리는 데에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이강이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으려 하고 나서야 간신히 멈췄다.
“농담이 제법이구나.”
담현은 뻔뻔하게도 그리 말했다.
“한번 해 보고 싶었습니다.”
“깜빡 속아 넘어갔네.”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머리를 썼지. 목걸이를 찾아내기도 했고.”
담현은 이곳까지 찾아온 여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강은 감탄하며 들었다.
“대단하시네요.”
“그렇지 뭐……. 그런데 너.”
담현은 이강이 묘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좀 바뀐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이전의 무덤덤하고 차가운 모습이 사라졌다.
더 많이 웃고, 더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왜 안 돌아온 건데.”
이강은 예상치 못한 답을 했다.
“좀, 쉬고 싶어서요.”
원래 이강을 만난다면 잔소리를 하고 곧바로 중원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전부 구했다.
모두가 그의 빚을 지고 있다.
이강은 그의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 모두의 감사를 받으며.
분명 그리 생각했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게 끝나면, 좀 쉬고 싶다고.”
이강은 끝까지 발버둥 치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자에게는 마땅히 휴식이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좀 쉬었는데. 이제는 슬슬 돌아가야겠지요?”
이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리 물었다.
돌아가야 하겠지.
담현 일행이 함께 온 지금 돌아가는 것이 이강에게도 수월할 것이다.
중원에서 이강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고.
하지만 하준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더 쉬자.”
“응?”
“더 쉬어도 될 것 같아.”
“하하. 그럴까.”
이강은 가죽으로 만든 공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그러면, 한 사흘 정도만 이곳에서 지내다 같이 돌아가죠.”
“그거 좋지.”
담현 일행도 웃었다.
“제가 섬 구경 좀 시켜드리죠.”
이강은 일행을 이끌고 해변을 걸었다.
“여기 바다가 참 예쁩니다. 산호도 많고 가끔 돌고래도 보여요.”
“그래?”
“과일도 많이 열리고. 따듯한 지역이라 그런지 무척 달아요.”
“그거 좋군.”
한가로운 대화였다.
해변을 걷는 그들의 뒤로 발자국들이 남았다.
노을빛으로 물든 파도가 희게 부서지며 그 발자국들을 지웠다.
투쟁의 상처도 그처럼 깨끗이 지워질 듯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누가 세상 전부가 지옥이라고 말했는데, 꼭 그렇진 않더라고요.”
“그건 무슨 얼빠진 놈이 한 말이야? 웃기는 놈이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이 지옥 같다고 해도 어찌 한줄기 볕 들 곳이 없겠는가.
멈추지 않고 걸어온 모든 이들에게는 마땅히 쉴 자격이 있으니.
“밥은 먹었어요?”
“아직.”
“아까 물고기를 잡아 둔 게 있는데 같이 구워 먹죠.”
그들의 웃음소리가 파도와 함께 흩어졌다.
저 붉게 빛나는 노을이 그들을 축복하는 듯했다.
백씨세가 시한부 공자
대미(大尾).
작가의 말
이로써 백씨세가 시한부 공자의 본편이 끝났습니다.
안녕하세요. 비도입니다.
준비 기간을 포함해 2년 이상을 매진한 글이기에 끝마침의 감회가 깊습니다.
독자님들의 사랑 덕택에 무사히 완결을 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있는 글이지만, 이강의 대장정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작중에서 미처 전부 보여 드리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혹여 독자님들께서 궁금하신 부분이나 추후 외전으로라도 보고 싶으신 이야기들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 주십시오. 가능하다면 답변을 드리고, 또한 깊이 참고하겠습니다.
독자제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늘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비도 배상(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