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 The Legend RAW novel - Chapter (276)
아크 더 레전드-276화(276/875)
[276] SPACE 1. 버그? (1)“듣고 있어요?”
앙칼진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묵묵히 서류를 들추던 반백의 사내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서류를 덮어 놓으며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돈을 발랐다는 말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처럼 비싼 옷과 장신구로 중무장한 여자는 조미라. 그의 딸이었다.
사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말했잖아요! 민선이 고것이 날 모욕했다고요! 그것도 남자 앞에서! 아빠도 알죠? 중앙 호텔 막내아들 박은찬. 그 은찬이 앞에서 보란 듯이 말이에요!”
“민선이가 말이냐?”
“같이 있던 사내놈하고 둘이 작당해서요.”
“사내? 민선이가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말이냐?”
사내의 눈에 처음으로 관심 어린 기색이 깃들었다. 그러자 조미라는 더욱 열성적으로 핏대를 세우며 떠들어 댔다.
“네, 어디서 멍청해 보이는 사내놈을 하나 달고 왔었어요. 그런데 그 자식이 완전 깡패더라고요. 제가 실수로 민선이에게 물을 좀 쏟은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험악하게 노려보면서 다음에는 가만 두지 않겠다며 협박을 하더라고요. 그것도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 말이에요. 어쩌면 진짜 전과자일지도 몰라요. 아니, 전과자가 틀림없어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민선이 같은 계집애하고 어울리는 사내놈이라면 뻔한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당했다는 거냐?”
“그게 중요해요?”
조미라가 미간을 찡그리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빠 딸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민선이 같은 년에게 창피를 당했다고요!”
“민선이도 내 딸이다. 그리고 네 동생이기도 하지.”
“난 그런 동생 따위는 없어요!”
“네가 내 딸인 이상, 네가 뭐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물다섯이면 그 정도는 알 만한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매 사이의 다툼을 아버지의 직장까지 찾아와 일러바칠 나이도 아니고. 나 역시 그런 얘기에 귀 기울여 줄 정도로 한가한 아버지는 아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조미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입술을 씹으며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귀찮다는 말인가요?”
“아니라고는 못하겠구나.”
“네, 그러시겠죠. 알았어요. 그럼 저는 꺼져 드리죠.”
조미라가 핸드백을 집어 들고 일어나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리고 저는 스물일곱이에요!”
거친 문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두툼한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사내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다시 기계적으로 서류를 넘길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기던 사내가 인터폰에 대고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자리에 있나?”
-네,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민선이가 만나는 남자가 있다더군. 그 남자에 대해 알아보게.”
* * *
‘……뭐지?’
아크는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 아크가 있는 곳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정말 눈을 뜨고 있는지 의심이 들게 만드는, 한 자락의 빛조차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거기에 고막의 성능을 의심하게 만드는 정적까지 덤으로 붙어 있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게 얼마나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드는지.
그러나 아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어둠과 정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
‘그래, 난데없고 뜬금도 없지만 세상에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어. 도중에 한 편 빼먹은 연속극도 아니고, 침착하게 생각하면 뭔가 힌트가 될 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일단 기억을 더듬으며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아크가 머릿속의 ‘▷’를 눌러 기억을 재생시켰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장면.
-자, 시간이 없다. 기습 공격의 핵심은 속도! 놈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각 조는 곧바로 배당 받은 통로로 진입해 적을 섬멸하라! 적에게 유출될 위험이 있으니 통신은 비상시에만 사용하고 이제부터는 각자 조 단위로 판단하고 행동하라! 진격!
조사단이 잿빛 혹성에 착륙한 직후.
호크가 팀을 나눠 지하 시설로 진격을 명령하던 장면이다.
……이건 너무 멀리 갔다.
‘아니야! 필요한 장면은 여기가 아니잖아!’
아크는 ‘▷▷’을 연타해 빨리 감기 기능으로 기억을 가속시켰다. 그러자 눈앞으로 잿빛 혹성의 지하 시설에서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퍼거슨과 조를 편성해 시설로 돌입, 몰려나오는 개구리 떼를 학살하며 시설 중심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아크는 이리나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아크가 중심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설의 자폭 장치가 발동되는 중이었다는 것, 그리고 호크는 이미 한참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크를 왕따시키고 다른 단원들만 데리고 시설을 탈출하는 중이라는 얘기였다. 아니, 그냥 왕따만 시킨 게 아니었다. 아크 일행이 모여 있던 통제실의 입구를 폭발시켜 몰살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호크, 이 빌어먹을 자식!’
경황이 없어도 욕 한마디 해 주지 않을 수 없다.
뭐 어쨌든, 호크의 계획은 아크의 뛰어난 판단력에 의해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통제실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찾아내 기지가 폭발하기 직전에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지의 자폭 장치가 잿빛 혹성의 코어와 연결되어 있어 혹성까지 붕괴하며 블랙홀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크는 블랙홀의 중력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아크에게는 숨겨 놓은 필살기가 있었다.
콰콱! 콰콱! 콰콱! 콰콱!
앞에서 알짱거리던 호크의 뒤통수에 박아 넣은 작살!
바로 E-2036에 불시착해 수리할 때 은근슬쩍 실버스타에 장착해 두었던 앵커 발사 장치였다.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그때 당황하던 호크의 표정은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엔도르핀이 콸콸 쏟아질 정도로 통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퍼거슨에게도 있었다.
콰콱! 콰콱! 콰콱! 콰콱!
필살기 앵커!
-아, 아크, 이 자식! 기지에서는 날 개처럼 부려 먹다가 위험해지니까 치사하게 혼자만 도망치는 거냐? 난 2등급 우주선이라 엔진 출력이 약하다고! 그러니까 나도 좀 데려가! 난 얼마 전에 우주선 하나 해 먹어서 지금 또 날리면 보험금도 안 나온다고! 살려 줘!
이번에는 퍼거슨이 아크의 뒤통수에 앵커를 박아 넣은 것이다.
퍼거슨…… 뭐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지능이 원숭이만도 못한 놈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크가 호크의 뒤통수에 앵커를 박은 것은 살기 위해서다. 호크의 우주선 데스나이트의 배기량이라면 실버스타를 매달고도 블랙홀의 중력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으리라.
그러나 퍼거슨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아무거나 붙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그냥 아크를 잡고 늘어지는 것뿐이었다. 이건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빌어먹을! 쓰레기차 피하다가 똥차에 치어 죽는다더니!’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아크 일행을 몰살시키려던 호크의 음모를 분쇄했는데, 엉뚱하게도 원숭이 수준의 지능 지수를 가진 퍼거슨에게 발목이 붙잡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실버스타를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3차원 좌표 계산기 에러! 밸런스 유지 시스템 에러! 기내 중력 발생기 에러! 자기장과 중력장이 동시 다발적으로 충돌과 폭발을 반복하며 카오스 폭풍을 발생시켜 기체의 모든 시스템에 연쇄적으로 에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어 불가능 상태입니다!
-중력장을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으악! 난 죽기 싫어!
함교에 빗발치는 토리와 헤겔의 비명!
그러나 상대는 우주 최강의 포식자 블랙홀. 24세기의 과학력으로도 구조조차 해명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 존재에게 사로잡힌 이상 아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실버스타는 마침내 거대한 어둠이 삼켜졌다.
-뒈졌습니다!
동시에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니, 당연히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어야 정상이다.
아크가 당혹스러워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어둠에 삼켜진지 한참, 한숨을 불어 내고, 심지어 이렇게 회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기다리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존재. 빛조차 한번 갇히면 빠져나갈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 혹시 영혼이 블랙홀에 갇혀 페어리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는 건…….’
불현듯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아크는 곧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 어찌 됐든 이곳은 게임. 버그가 아닌 다음에야 매달 꼬박꼬박 게임 비를 내는 유저를 이런 식으로 부활조차 못하는 곳에 가둬 놓을 리는 없어. 그럼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설마……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캐릭터 정보창.”
아크가 반신반의하며 중얼거렸을 때였다.
캐릭터 정보 창
이름 : 아크(R-02788) 레벨 : 137
종족 : 인간 직업 : 엘림의 계승자
명성 : 11,730
생명력 : 3,350
정신력 : 600마나 : 0 포스 : 1,825
모험치 : 1,590
힘 : 330(+20) 민첩 : 375(+20)
체력 : 555 지혜 : 40
지능 : 350 운 : 55
※칭호 : 청소반장(민첩 +3)
무식한 파괴자(지혜 -10, 힘 +7, 체력 +7)
벨타나의 영웅(힘, 민첩, 체력, 지혜, 지능, 운 +3)
아타마스의 영웅(힘, 민첩, 체력, 지혜, 지능, 운 +5)
중재자(지혜, 지능 +15)
※공헌도 : 은하연방 19,520, 아슐라트 500
※소속 : 다크에덴(CEO)
※신체코팅 : 서바이버
+서바이버 코팅으로 환경 적응력이 50% 상승했습니다.
+서바이버 코팅으로 만복도의 감소 속도가 30% 낮아졌습니다.
+서바이버 코팅으로 낙하 데미지를 50%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서바이버 코팅으로 ‘투시’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어? 지, 진짜야?’
아크의 눈이 이따만 해졌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캐릭터 정보창이 떠오른 것이다.
게다가 레벨 137. 블랙홀로 빨려 들어오기 직전과 같은 레벨이었다. 마지막으로 페어리에 등록했던 133레벨로 되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여기가 저승(?)이 아니라는 뜻!
그러나 아크는 곧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분명 레벨과 스텟은 블랙홀로 빨려 들어오기 전과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캐릭터 정보창에는 레벨과 스텟만 표시되는 게 아니다. 장비품에 붙어 있는 추가 스텟이 (+α)형태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없어졌다.
붙어 있는 추가 스텟은 힘과 민첩에 달랑 +20뿐, 나머지 장비품의 추가 효과는 몽땅 사라진 것이다.
‘서, 설마? 헉! 이, 이게 뭐야?’
-장비품 정보창-
무기 : <계승자의 검>
방어구 : <엘림의 헬멧>
보조 장비 : –
‘자, 장비품이 사라졌잖아?’
황급히 장비품 정보창을 열어 본 아크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아머와 부츠, 심지어 얼마 전에 얻은 유니크 아이템 벨페골의 바지와 오신기의 하나인 바이우스 실드까지 몽땅 없어진 게 아닌가? 남아 있는 것은 계승자의 검과 엘림의 헬멧뿐! 손으로 더듬어 보니 처음 갤럭시안을 시작했을 때처럼 쫄쫄이에 헬멧과 검만 차고 있는, 변태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외모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장비품이 어떤 장비품인가?
지난 몇 달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하나하나 모아 왔던 장비품이다. 적게 잡아도 1,000골드 아니, 엘림의 계승자의 상위 직업으로 전직하는 데 필요한 바이우스 실드를 생각하면 돈으로 환산하기조차 힘든 가치가 있었다.
그 장비품 세트의 가치에 비하면 목숨 따위는 헐값, 차라리 깔끔하게 죽어 버리고 부활하는 편이 100배 나았다. 그런데 싸구려(?) 목숨은 붙어 있고 목숨보다 귀한 장비품이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없어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백팩에 수납해 두었던 각종 잡템은 물론, 기본 장비품인 님프마저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 죽은 것도 아닌데 입고 있던 장비품과 백팩의 아이템과 님프까지 사라지다니? 이런 얘기는 들은 적도 없다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버그다! 그래, 이건 버그가 분명해! 젠장, 때가 어느 땐데 이딴 말도 안 되는 버그가 있는 거야? 당장 제작사에 항의해야겠어! 아이템을 복구해 주지 않으면 고소해 버릴 테다!’
하고 생각했지만…….
‘가만? 어쩌면 이건 의외로 기회일지도 몰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아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사실 아크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올 때 절망한 이유는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유저에게 죽음은 페널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레벨이 떨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템을 떨어뜨리기도 하니 피해가 막심하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건 유저처럼 부활할 수 있는 개척자 NPC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개척자가 아닌 NPC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 부하로 삼아 힘들게 키워 놔도, 비싼 장비품을 입혀 놔도, 일단 죽어 버리면 몽땅 잃는 것이다.
실버스타에는 그런 1회용 직원이 둘이나 타고 있었다.
토리와 엘라인.
‘만약 블랙홀로 빨려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몽땅 죽어 버렸다면 토리와 엘라인은 그걸로 끝이야. 뿐만 아니라 힘들게 손에 넣은 우주선 실버스타까지 잃어버린다.’
물론 실버스타도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험으로 받을 수 있는 보상금은 우주선 가격의 최대 80%. 10,000골드짜리 우주선을 잃어도 8,000골드밖에 보상받지 못한다. 나머지 2,000골드는 우주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유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선과 함께 잃어버린 화물, 업그레이드, 추가 장비품에 대해서는 1쿠퍼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때문에 일단 우주선을 잃으면 보험이 있어도 수천 골드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그로 인한 것이라면?’
이번 사태를 몽땅 제작사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물론 블랙홀에 빨려 들어온 것은 아크의 잘못이지만 버그로 인해 곤란에 빠진 것은 사실. 어쩌면 실버스타는 물론 팀원들까지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