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 The Legend RAW novel - Chapter (279)
아크 더 레전드-279화(279/875)
[279] SPACE 2 또 다른 시간 속에서 (2)“하아…….”
토트가 한숨을 불었다.
그리고 슬쩍 아크를 돌아보다가 다시 한숨을 불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 무슨 3류 드라마도 아니고. 이런 중요한 시기에 기억상실이라니…….”
아크가 선택한 방법이 이것이었다.
처음에는 바사크와 토트를 미친 NPC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대화를 나눠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아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내용 자체는 나름 논리 정연한 것이다. 게다가 장소도 상상하던 것처럼 버그 공간이 아니었다. 버그 공간이 이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죽는다. 막상 생각해 보면 갤럭시안에 그런 규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나나 다른 유저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하지만 만약 죽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곳이 버그 공간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하루 이틀 게임 하는 게 아니다.
척하면 착, 상황을 파악하자 대번에 답이 나왔다.
이벤트. 이유야 어쨌든 예상 못 한 이벤트가 발동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의문은 많았다.
일단 어째서 이벤트가 발동됐는지는 둘째 치고, 죽은 것도 아니고 버그 공간도 아니라면, 같이 블랙홀로 들어온 나머지 팀원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호크와 퍼거슨 일당은? 어째서 오래전에 사라진 무라티우스타에 와 있으며, 왜 바사크와 토트는 이전부터 아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뭐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이곳이 버그 공간이 아니라면 운영자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스스로 팀원과 실버스타를 찾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이곳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게 이벤트라면 목적이 있겠지. 내가 왜 이런 곳에 떨어졌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 그걸 모르고서는 팀원과 실버스타를 찾는 것은 물론 내가 있던 우주로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없어. 뿐만 아니라 토트는 엘림이라는 말을 했다. 엘림에 대해 알고 있는 NPC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스크와 토트는 날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대하고 있으니 이 이벤트와 엘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일단 어느 정도 분위기를 맞춰 줄 필요가 있어.’
이게 아크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아크가 선택한 방법이 기억상실증.
3류 드라마에서 만능 아이템으로 추앙받는 바로 그거다.
물론 이 만능 아이템을 사용하는 데는 약간의 연기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원래 연기는 아크의 부전공.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온갖 감언이설로 NPC를 털어먹는 것은 뉴월드 시절부터 아크가 종종 써먹던 스킬이 아니었던가.
“바사크…… 토트…… 암흑의 관…… 음, 조금씩 기억이 납니다. 네, 저는 여행을 하던 도중에 토트 님을 만나 이곳에 오게 됐죠. 그래, 바사크! 너도 생각난다. 고향에서부터 10년이나 나를 수행하던 나의 오랜 친구. 어째서 너를 잊고 있었을까?”
“혀, 형님, 이제 기억이 돌아오셨군요!”
“아니, 아직이야. 기억나는 것은 단편적인 것뿐이야. 내가 왜 수련관에 와야 했는지, 그리고 토트 님이 말한 엘림의 후계자라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크윽! 수련관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면 기억까지…….”
바사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소매로 눈물을 슥슥 문질러 닦으며 크리스털로 뒤덮인 가슴을 탕탕 쳤다.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이 기억하지 못해도 저 바사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고향을 떠나올 때 맹세했듯이 저는 평생 형님을 따르며 방패가 되겠습니다! 설사 형님이 영원히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저의 충성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카사인의 진심 어린 충성을 받는 자는 많지 않지.”
“카사인?”
처음 듣는 단어에 아크가 ‘?’를 떠올렸다.
그러자 토트가 혀를 차며 쪼글쪼글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쯧, 그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가? 뭐 할 수 없지. 카사인은 몇 안 되는 소수 민족으로 태어날 때부터 샤이어의 축복을 받아 수호자의 능력을 갖고 있는 종족이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완고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판단만으로 주인을 섬기지. 그 때문에 무라티우스타에 환란이 닥칠 때마다 숫자가 줄어 지금은 바사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카사인의 충성을 받는 자라면 진정한 전사로서의 소양을 갖췄다는 증거!”
“네! 형님은 진정한 전사입니다!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바사크가 큰 목소리로 말하자 토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를 엘림의 후계자로 선택한 데는 바사크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지. 그리고 너는 엘림의 자질을 시험하는 수련관을 통과해 내 기대에 보답해 주었다. 어이없게도 기억을 잃었지만…… 뭐,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 전사는 무용과 사명감 그리고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 지식 따위는 말 몇 마디로도 전할 수 있는 것이니.”
토트가 제법 현자스러운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하긴 처음 봤을 때 바사크는 토트를 스승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아크를 엘림의 후계자로 선택해 수련관으로 데려온 사람이라니 그런 느낌의 포지션인 모양이다.
“일단 가면서 설명하지. 따라와라.”
토트가 지팡이를 짚고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기억을 잃은 것은 아마도 일시적인 것일 게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자연히 되살아나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 기억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차기 호루스가 되실 쿠휀 황자께서 성지로 가는 일정을 더는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차기 호루스? 성지?”
“수련관으로 올 때 말해 준 내용이지만…….”
토트가 잠시 멈춰 서서 3개의 태양이 떠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곳, 무라티우스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호루스는 무라트의 왕, 위대한 3개의 태양 라와 슈, 테프누트로부터 지배자의 권능을 하사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무라트는 지난 수천 년간 호루스의 영광 아래 똘똘 뭉쳐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은하계 어느 종족보다 뛰어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지. 그런데 며칠 전 황도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다.”
“전무후무한 사건?”
“황도 수비대장이었던 세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세트는 반란과 동시에 황도의 병력을 장악, 호루스와 수호기사인 엘림을 시해하고 스스로 호루스를 사칭하고 있다.”
“엘림이…… 죽었단 말입니까?”
“엘림은 은하계 최강의 전사다. 완전히 각성한 엘림의 힘은 혹성마저 파괴할 수 있다고 전해지지. 그러나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가 엘림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은 고작 수년 전, 아직 엘림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황도 수비대장이었던 세트. 놈은 간악하게도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호루스를 인질로 잡아 협박했다. 그로서는 결과가 어찌 될지 알면서도 세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지.”
“인질을 잡다니! 전사로서 취할 행동이 아닙니다!”
바사크가 울분을 토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토트는 거친 동작으로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세트는 전사가 아니다! 그놈은 그저 비열한 반역자일 뿐이야!”
“그런데 세트라는 자가 어떻게 황도의 병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겁니까?”
아크의 질문에 토트가 움찔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불어 냈다.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라고 해야겠지.”
“정치적인 견해?”
“무라티우스타는 위대한 3 태양의 가호를 받는 별이다. 3개의 태양이 발산하는 뜨거운 열기는 무라티우스타 지표의 70%를 열사의 사막으로 만들었지만, 그 막대한 에너지는 무라트의 문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지.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그건 신 그 자체인 태양조차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의 섭리다. 그리고 그 섭리에 따라 수천억에 달하는 시간 동안 무라티우스타를 밝혀 주던 태양에도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종말이라면……?”
“요 몇 년간 제2태양 슈에서 전례가 없는 연쇄적인 흑점 활동이 감지되었다. 이에 천문학자들의 조사 결과, 혹성으로서 슈의 수명이 다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슈는 끝없이 증폭하던 에너지로 인해 생성되던 내부의 중력장이 한계점에 도달해 자기붕괴를 일으키게 된다. 그리되면 제1, 제3, 라와 테프누트 역시 그 영향으로 붕괴. 거대한 블랙홀이 생성될 것이고, 이 태양계는 무궤無軌의 시공간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겠지.”
태양계의 사멸, 문자 그대로 종말이다.
그러나 무라트는 이미 은하계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문명을 이룩한 종족이었다.
성경의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종말을 피했지만, 무라트는 거대 우주 모함을 만들어 다른 별로 이주할 수 있는 과학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생긴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무라트는 은하계 전역에 진출해 있었다. 물론 그런 외계 혹성 중에는 이미 다른 종족의 문명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은 무라트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문명이었지만 무라트는 이들을 동등한 은하계의 주민으로 존중했다. 그리고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신의 문명을 전수해 주며 지원했다. 이게 아직까지 은하계 곳곳에서 무라트가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였다.
무라트는 온건하고 균형을 중시하는 종족이라 이런 진출 방식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태양계의 종말로 인해 혹성 규모의 이주 계획이 시작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처음 호루스의 이주 계획에 이의를 제기한 자가 황도 수비대장 세트였다. 당시 호루스는 장기간에 걸쳐 새로운 혹성을 찾아내 테라포밍을 한 뒤에 무라티우스타의 주민을 순차적으로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세트는 반대했지. 이미 무라트가 진출해 있는 혹성은 수십 개. 그 혹성으로 무라트를 이주시켜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아크가 보기에도 세트의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었다. 무라트가 무슨 우주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미개 혹성을 찾아다니며 퍼 주기만 하고 정작 자신이 어려울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너무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그러나 호루스는 호루스대로 사정이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이때, 은하계에서 초과학 문명을 이룩한 종족은 무라트만이 아니었다.
훗날 무라트와 함께 4대 천족으로 불리게 되는 인더스, 포타미아, 어리티우스가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당시 무라트처럼 은하계로 진출하되 타 종족을 지배하지 않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라트가 다른 종족을 힘으로 지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면 나머지 세 천족과 유지해 오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그리되면 4대 천족에 의해 무분별한 식민지 건설이 시작될 것이고, 그 작업이 끝나면 팽배해진 4대 천족이 대립, 최악의 경우 천족 간의 세력 싸움으로 번지게 되리라.
“무라트도 그렇지만 인더스, 포타미아, 어리티우스는 각기 방향은 다르지만 마음만 먹으면 혹성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과학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네 종족이 대립하면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공멸. 네 종족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크고 작은 분쟁의 중재자로서 엘림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네 종족에 속해 있지만 네 종족이 아닌,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중재할 수 있는 제3의 종족으로. 이건 네 종족이 합의한 절대적인 규칙이다. 차기 엘림의 후계자로 휴먼인 널 선택한 이유가 그것이다.”
‘이들 눈에도 내가 지구인으로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군.’
이어 아크는 자신의 과거(?)도 전해 들었다.
아크는―적어도 바사크나 토트가 알고 있기로는― 오래전 지구에 침입했던 우주 해적에게 납치된 지구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무라트의 엘림이 우주 해적을 추적, 놈들을 처단하고 구출했지만 이미 아크는 미개한 지구인으로서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이에 선대 엘림은 아크를 자신이 맡아 키우게 되었다.
토트의 설명으로 아크는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알게 되었다.
‘무라트의 얘기가 나올 때부터 짐작했지만 역시 여기는 내가 있던 은하계가 아니야. 아니, 같은 은하계지만 시간대가 다르다. 지금 이곳은 4대 천족이 번영하던 시기. 내가 있던 시대로부터 수백, 혹은 수천 년 전이다. 그러고 보니 어떤 물리학자가 블랙홀을 이용하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이 세계는 그런 이론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곳인가? 그렇다면 일종의 이계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지금 아크가 겪고 있는 일이 정상적인 이벤트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지는 정보였다.
그렇다면 사라진 아이템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특수 이벤트의 경우 상황에 맞춰 있던 아이템이 없어졌다가 이벤트를 끝내면 다시 생기는 일은 게임 속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보다 어떻게 해야 이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야 팀원과 실버스타를 찾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토트.
“얘기가 잠시 샜군.”
그때 토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트가 황도의 병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때문이다. 호루스는 무엇보다 평화를 중시했지만 세트는 그런 호루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무라티우스타의 태양계가 종말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인더스, 포타미아, 어리티우스 따위의 눈치를 보는 호루스는 호루스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지. 황도의 지휘관들은 그런 세트의 주장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호루스와 엘림을 시해하고 황도를 점령하는 반란에 가담하고 말았지. 그러나 위대한 라와 슈, 테프누트께서는 무라트를 저버리시지 않았다.”
황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호루스의 유일한 후계자인 쿠휀 황자가 성지 순례를 위해 황도를 나온 것이다. 그리고 엘림의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불리는 토트가 수행하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황도에서 일이 터졌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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