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 The Legend RAW novel - Chapter (58)
아크 더 레전드-58화(58/875)
[58] SPACE 3. 그와 그녀의 사정 (2)뉴 월드 시절에 아크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사내 아란!
현우는 루시퍼에 얽힌 사건이 정리되어 갈 때쯤 아란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게임 속에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꽂아 넣었던 적이었지만 이건 현실이다.
현우와 아란은 결코 좋은 관계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좋아질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지만, 현우는 그 일에 어느 정도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아란은 오래 전부터 강미수를 좋아하고 있었지.’
그 이후로 강미수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이 무거웠고, 무거운 만큼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글로벌엑서스에 입사하고 나서야 그녀가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그동안 강미수 역시 아란의 일로 나름 힘들어했었다고 한다.
뒤늦게 뭔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박혜선과의 관계는 그보다는 조금 더 지속되었다.
그러나 현우에게 있어서 박혜선은 동생 이상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둘 사이에 별다른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고, 우연한 기회에-뉴 월드에서 음유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덕분이었지만- 연예 기획사에 스카우트되어 바쁜 일정을 보내는 사이에 점점 연락이 줄어들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마저 끊기게 되었다.
‘……뭐 연애란 게 그런 거지.’
현우는 그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지만, 뭐 어쨌든!
현우에게 있어 결혼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 때문에 현우는 어머니가 퇴원한 이후로 수입의 대부분을 맡겨왔다. 그리고 때마침, 한때 계부인 권화랑이 운영하던 조직 갱생단의 일원으로 ‘부동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안국에게 좋은 재테크 건수를 소개받았다.
그게 권화랑이 얘기한 택산 지구의 땅이었다.
유안국은 ‘부동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의 부동산 전문가.
과연 유안국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한 것처럼 택산 지구의 땅은 매입하자마자 쭉쭉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주요 관청이 이전한다는 발표가 떨어져 투기 열풍이 불어닥친 덕이었다. 그러나 그런 투기 열풍은 차차 진정될 것이고, 적정한 가격 대가 형성될 때까지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할 거라는 유안국의 설명이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뭐 거의 전재산을 투자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한동안 많이 올랐으니 조금 떨어져도 손해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아버지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세요. 어차피 당장 팔 것도 아니니까. 곧 다시 올라가겠죠.”
[그게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네?”
[며칠 사이에 택산 지구의 부동산 시세가 10분의 1까지 떨어졌단다.]권화랑의 말에 현우는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깨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0분의 1이라니? 농담이시죠?”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야.]“그, 그럼 왜?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떨어진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정부에서 발표한 관청 이전 문제가 취소된 건가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야. 안국이 녀석도 당황하고 있더라. 가격이 순차적으로 떨어졌다면 안국이도 뭔가 알아냈겠지만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떨어진 거야. 안국이가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연락 주겠다고 했지만 뭔가 우리가 모르는 일이 터진 게 분명해.]“그, 그럴 수가…….”
현우는 잠이 확 깨버렸다.
이미 말했듯이 어머니는 현우가 맡긴 돈을 몽땅 털어 부동산에 투자했다.
현우는 어머니만 회복되면 부족함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가 해외 난민 돕기를 시작했을 때, 기꺼이 수입의 30~40%를 어머니의 활동비(?)로 드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권화랑은 자신이 모은 돈으로 해외 난민 돕기를 하겠다고 밝히고 어머니는 현우의 수입 전부를 부동산에 투자해둔 것이다.
그 부동산이 10분의 1가격으로 떨어졌단다.
지난 4년 동안 죽어라 벌어온 돈이 10분의 1이 됐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런……!”
버럭 소리치려던 현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킨 뒤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문제든 안국이형이 있으니 잘 처리될 거예요. 제가 이래봬도 대기업 이사예요. 그깟 돈 몇 푼 따위, 없어도 그만이라고요. 아시죠? 뭣보다 어머니의 건강이 먼저라는 거. 일단 제가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릴 테니까 어머니에게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아버지만 믿습니다.”
[알고 있다. 그리고…… 미안하다.]“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아버지가 미안할 일도 아니고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깟 돈 몇 푼보다 어머니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현우라도 이런 얘기를 듣고 태연할 수는 없었다.
전화를 끊은 게 3시 30분 경, 남아있는 잠을 쫓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오니 4시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현우는 곧바로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대치동에 있는 유안국의 부동산 사무실에 도착하자 5시가 다 되어갔다.
새벽 시간임에도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혀, 현우야!”
사무실에 들어서자 담배를 뻑뻑 펴대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바로 ‘부동산’, 유안국이었다. 사무실에는 그 외에도 9명의 사내가 모여있었다.
딱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외모의 사내들. 한꺼번에 길거리로 몰려나가면 관할 경찰서에 비상이 걸릴 듯한, 수배전단지를 모아놓은 것 같은 외모의 남자들은 구(舊) 갱생단 멤버. 현우에게는 꽤나 반가운 면면들이지만 지금은 웃으며 안부를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현우처럼 이들 역시 택산 지구의 부동산을 매입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화랑 형님에게 연락을 받았구나.”
“네.”
“일단 앉아라.”
유안국이 초췌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까지 얘기 들었냐?”
“부동산 가격이 10분의 1로 떨어졌다는 말까지요. 대체 어떻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올라가던 땅 값이 하루아침에 그렇게까지 내려갈 수 있죠?”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안국이 담배를 뻑뻑 빨아대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몇 가지 알아봤는데, 우리가 매입한 부동산 근처의 땅 수만 평이 거의 같은 시간에 몽땅 매물로 나왔어. 그것도 시가의 70%밖에 되지 않는 가격의 급매로. 직전까지 가격이 오르던 곳이라 구매자가 많아 하루 이틀 사이에 대부분 팔렸지. 그런데 그때 매입한 사람이 뒤늦게 같은 시기에 주변의 모든 부동산이 급매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누가 봐도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때문에 불안해진 매입자들이 산 땅을 다시 급매로 내놓으면서 가격이 바닥까지 내려가 버린 거야.”
“그래서 10분의 1 가격까지 떨어졌다는 말입니까?”
“시세는 10분의 1이지만…….”
“그 가격에도 거래가 되지 않고 있어.”
전직 사기꾼으로 짝퉁이라는 별명을 가진 강유진이 끼어 들었다.
“그쪽 바닥은 소문이 LTE급이야. 부동산이 한 바퀴 회전할 정도면 이미 모두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런 전문가들이 며칠만에 10분의 1로 가격이 떨어진 땅을 살 리가 없잖아. 10분의 1가격은 매물을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이고, 팔리지 않으니 실제로는 그 이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거래가 되지 않는 죽은 땅이 될 수도 있어.”
“그럼…….”
“그냥 묶이는 거지. 네 돈이나 내 돈이나.”
“우리 돈도.”
전직 해결사로 덩치라는 별명이 붙은 마철웅이 유안국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자 강유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안국이도 잘해보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안국이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땅 값이 올라갈 때는 헤벌쭉하다가 일이 꼬였다고 안국이 탓을 하는 거냐?”
“탓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마철웅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유안국은 그저 한숨을 푹푹 불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현우는 잠시 그런 유안국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그런 상황이라면 당장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주변의 부동산이 한꺼번에 매물로 나와서라는 말인데…… 대체 그 이유가 뭐죠? 첫 매도인이 가격이 오르는 땅을 70%의 가격에 내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알 수가 없으니까 미치겠다는 거야.”
유안국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긁적이며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도 연락을 받고 그것부터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하지만 택산 지구 부동산 소유자는 모두 가라야. 가라 알지? 명의만 가지고 있고 실제 소유주는 따로 있다는 말이야.”
“그게 누구인데요?”
“택산 지구의 땅 값이 오른 것은 정부에서 관청 이전 발표가 나온 뒤라는 거. 그 발표가 나오기 전에 인근 부동산을 매입했다면 뻔한 거 아니겠어?”
“정치하는 놈들이지.”
강유진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유안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내가 택산 지구 땅 값이 올라갈 걸 알게 된 것도 그쪽에 끈이 있어서였어. 그래서 이번 문제가 터졌을 때도 그쪽부터 알아봤는데, 도무지 정보가 나오지 않아. 관청 이전 문제가 취소돼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도 이상해. 설사 취소됐다해도 아직까지 정부는 아무런 발표가 없잖아. 며칠 사이에 방송으로 나올 예정이라면 모를까,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정치하는 놈들이 한꺼번에 70%의 가격으로 내놓을 리가 없잖아.”
“당장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뭐 전쟁이 일어난다면 택산 지구 땅 값은 확실히 떨어지겠지.”
마철웅이 구시렁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현우와 갱생단원들의 눈이 모두 향하자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잖아. 일전에 택산 지구에 땅 보러 갔을 때, 고속도로 타고 가다가 교외에 원자력 발전소 보지 않았어? 북한 놈들, 전쟁 나면 가장 먼저 그런 곳에 미사일을 쏟아 부을 거 아니야? 예전에 후쿠시마 원전사고 보니까 발전소 하나 박살나니 장난 아니더구만. 택산 지구가 방사능에 쩔어 버리면 부동산 따위는 그냥 엿 되는 거지.”
“씨발 놈, 농담이 나오냐?”
갱생단원들이 눈을 부라리며 마철웅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현우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자력 발전소…… 택산 지구 교외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었다고? 그럼 설마…….’
동시에 현우의 머릿속에 붉은 이름이 떠올랐다.
……루시퍼!
뉴 월드의 메인 디자이너 박우성이 만들어낸 최강의 인공지능!
새삼스럽지만 현우가 앉아만 있어도 신 대접을 받는 뉴 월드를 떠나 갤럭시안에서 개고생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루시퍼 때문이었다. 루시퍼가 그 잘난 능력을 적극 활용해 모 원자력 발전소를 장악, 대한민국 정부를 볼모로 잡고 현우를 갤럭시안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때 현우를 찾아온 비상대책위 실무과장 문지훈은 루시퍼가 장악한 원전이 근래 들어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위조부품 비리 사건의 원전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현우가 갤럭시안을 시작하는 것만으로 그 원전의 제어권을 다시 정부에게 넘겨준다고 했었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다름 아닌 정부가 하는 일이다.
일개 게이머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했다고 믿는다면 너무 순진한 것이리라.
‘루시퍼도 바보는 아니야. 장악하고 있던 원전의 제어권을 몽땅 넘겨주면 실제적으로 정부를 위협할 무기가 없어진다. 게다가 루시퍼 역시 박우성의 존재를 알고 있어. 만약 그 사이에 정부가 박우성을 이용해 국내 원전의 방화벽을 재정비하면 루시퍼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해지겠지. 그러니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제어권을 넘겨줬을 리가 없어. 아니, 문지훈의 말과 달리 처음부터 루시퍼가 장악한 원전은 하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갤럭시안을 하는 조건으로 제어권을 넘겨준 원전은 그 중 하나에 불과했거나, 혹은 장악하고 있던 원전의 제어권을 넘겨준 직후에 다른 원전을 장악해버린 거라면…….’
그리고 그게 택산 지구 교외의 원전이라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택산 지구의 부동산을 사들였던 사람들은 관청 이전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정치인들.
그런 정치인들이라면 루시퍼와 원전에 대한 정보도 어찌어찌 손에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지훈은 그게 특급비밀이라고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특급비밀이란 서민들이 알 수 없는 정보라는 의미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정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 것이다.
그게 돈이 되거나, 혹은 손해가 될지도 모르는 정보라면 더욱 더.
그리고 ‘알만한 놈’들끼리 굳게 손을 잡고 일거에 매입해뒀던 부동산을 팔아치운 것이다.
일급비밀을 알 수 없는 ‘서민’들에게.
‘빌어먹을 자식들이!’
거기까지 생각하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정치인의 실체란 말인가!
정말이지 갖은 욕을 퍼부어 대고 싶지만 뭐 몰랐던 일도 아니니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다.
그리고 지금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70%의 가격에 매각했어도 그 전에 가격이 상당히 올라있던 부동산이라 실제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우와 갱생단은 다르다. 정치인들이 기습적으로 부동산을 매각하고 빠져버린 탓에 가격이 10분의 1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가격으로 팔고 싶어도 살 사람이 없는 것이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아붙이던 현우가 유안국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지금은 10분의 1가격으로도 팔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당장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럼 지켜보는 수밖에 없죠. 뭔가 다른 정보가 생기면 연락주세요.”
현우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빨아대던 유안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가게?”
“별 수 없잖아요. 앉아 있는 다고 당장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오늘은 일이 좀 있어요. 형님들,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요. 며칠 뒤에 한 번 봬요.”
“자식, 도깨비 같은 건 변함 없군. 그래, 지금은 정신이 없으니 적당할 때 연락 주마.”
강유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온 현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까지는 원전이니 뭐니 해도 실감나지 않았는데…….”
물론 그렇다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서민에 불과한 현우로서는 국가비상사태니 뭐니 하는 말이 와 닿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레벨을 확 낮춰 부동산 가격에 초점이 맞춰지자 그제야 현실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뭣보다 이제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만의 하나, 정말 원전이 폭발하면 현우와 갱생단의 땅은 방사능에 쩔어 문자 그대로 불모지가 되어버린다. 동시에 4년 동안 죽어라 굴러다니며 모은 돈이 몽땅 날아가게 되리라.
돈도 돈이지만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시퍼를 막는 수밖에 없어.’
국가의 일이 아니다. 나와 가족, 형들의 일이다.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야해! 언제까지나 벨타나에서 미적거릴 때가 아니라고!’
마음이 급해진 현우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퍼뜩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루시퍼가 거기까지 파악하고 택산 원전을 점거한 건 아니겠지?’
*****
“무슨 일이냐?”
넓고 호화로운 사무실.
반백의 사내가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물었다.
“저와 어머니 앞으로 되어있던 부동산이 저도 모르게 매각되어 있더라고요.”
이어지는 목소리에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한숨을 불어내며 서류를 한쪽으로 미뤄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앞에는 20대 여자가 서있었다.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각종 고급 가구로 치장된 사무실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지만 그런 자잘한 문제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마치 석상 같은 무표정함이 모처럼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가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
“저와 어머니 명의의 부동산이에요. 알고 있는 게 이상한 가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렇겠죠. 알아보니 거의 같은 시기에 인근의 땅이 모두 팔렸더군요. 그리고 곧바로 가격이 10분의 1로 떨어져 그 땅을 산 사람들이 피눈물을 쏟고 있다던데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세요. 덕분에 저와 어머니는 나쁜 년이 돼버렸네요.”
“그런 말하려고 온 거라면 그만 돌아가라.”
“그럴 생각이에요.”
여자가 삭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하필 당신이 제 아버지인가요?”
거친 동작으로 문고리를 움켜쥐던 여자가 잠시 멈춰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기던 사내의 미간을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사내가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며 대답했다.
“나도 원했던 일은 아니다.”
“그러시겠죠.”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러나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폭발하듯이 수많은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원망과 분노, 회한, 그리고 무력함…… 그녀는 당황했다. 어느 누구에도 그런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이리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