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 The Legend RAW novel - Chapter (615)
아크 더 레전드-615화(615/875)
[615] space 6. 그 남자, 나타나다! (2)‘내가 미쳤지.’
물론 그때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머리까지 차 있던 열이 식자 파도처럼 후회가 밀려들었다.
1년 넘게 키운 캐릭터다. 그리 다복했던 겜생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가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를 삭제시키는 것은 당연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박경진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는 프로게이머.
다시 말해 게임은 박경진의 취미이자 생계 수단이었다.
물론 대한민국에 돈을 벌 수 있는 게임이 갤럭시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다른 게임을 해도 된다.
그러나 현실이든 게임이든 돈을 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정된 수입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캐릭터를 일정 수준 이상 성장시켜 놔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박경진은…….
‘잔고가 없어!’
원래 부자도 아니었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박경진은 이를 갈며 현우의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프로게이머다운 경제활동은 거의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캐릭터는 밥을 먹여야 하고, 레벨에 맞춰 장비품도 바꿔 줘야 한다. 그래야 복수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박경진 역시 그러는 와중에도 먹고, 자고, 싸는 대가로 식비며, 공과금이며, 방세는 내야 했다.
덕분에 은행 잔고는 이미 오래전에 탈탈 털린 것이다.
늘어난 것은 마이너스 통장의 숫자뿐.
‘복수란 참으로 허망하구나.’
불현듯 인생의 진리 하나를 깨달아 버리는 박경진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진리 하나 깨달았다고 갑자기 술술 풀릴 리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식비며, 공과금이며, 방세는 꾸준히 쌓여 가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장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갤럭시안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말실수한 거라고 해 버릴까?’
요 며칠 박경진의 머릿속에는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개월 동안 죽이겠다고 쫓아다녔던 현우다.
그 앞에서 그런 빈티 나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빌어먹을! 현우, 이 망할 자식! 네놈을 만난 이후로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그래, 이건 모두 너 때문이다! 죽어라! 죽어!’
퍽! 퍽! 퍽! 퍽!
-현우.
‘아크’에서 ‘현우’로 바뀐 타격대에 분풀이하는 수밖에.
그리하여 박경진이 구슬땀을 흘리며 ‘현우’를 묵사발로 만들고 있을 때였다.
“경진아, 그만하고 잠시 이리 와 봐라.”
박종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퇴근했다고 생각했던 박경진은 화들짝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박종훈이 비슷한 또래의 사내와 함께 도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때문에 신입 관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녀석이야?”
박경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사내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박종훈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니 당연히 연상이겠지만 초면이 이런 태도를 보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뭐 사내가 나타나기 전에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에 박경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음, 저 녀석이 경진이다. 그런데 네가 경진이에게는 무슨 볼 일이냐?”
“좀 빌려다 써 볼까 하고.”
사내가 드라이버를 빌러온 사람처럼 대답했다.
“빌려다 쓴다고? 네가? 저 녀석을? 대체 무슨 일에?”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좀 그래. 너한테는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줄게. 그보다 먼저 확인부터 하자. 어이, 너. 갤럭시안 하고 있지? 레벨도 좀 된다며?”
“네? 그걸 어떻게…….”
“자식아, 털면 다 나와. 순순히 불어…… 아니, 그게 아니지. 뭐 나도 바쁜 몸이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다. 너, 내 밑으로 들어와라. 밥은 굶기지 않을 테니.”
“아니, 무슨 그런…….”
자다가 봉창 뜯어지는 소리란 말인가?
처음 보는 사람이 대놓고 반말. 거기에 드라이버 취급하더니 이제 밑도 끝도 없이 밑으로 들어오란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고 어느 부분에서 황당해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인간은 아무나 대고 그런 말을 하면 ‘네.’ 하고 냉큼 부하가 돼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넌 누구냐고!
박경진은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러나 일단은 삼촌의 손님.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박경진이 박종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체 이분은 누구입니까?”
뭐 사실 ‘이 미친놈은 뭡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 친구는…….”
“유저다, 갤럭시안의.”
사내가 박종훈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도 갤럭시안의 얘기다. 그렇지 않아도 잔심부름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가 너를 추천하더군.”
“추천? 누가 저를 추천했다는 말입니까?”
“현우다.”
“혀, 현우? 그 자식이!”
박경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자 사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훗, 예상했던 반응이군. 너와 현우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대강 들었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소개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 하지만 뭐, 어차피 내 밑에 들어오면 나와 현우의 관계는 알게 될 거고, 뭣보다 난 비밀 같은 건 갖지 말자는 주의거든. 어쨌든 그런 얘기다. 됐지? 그러니까 군말 말고 내 밑에 들어와.”
“되긴 뭐가 돼요!”
박경진이 울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체 뭐가 ‘그러니까 군말 말고 내 밑으로 들어와.’입니까?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문법이에요? 아니, 그 전에 제가 왜 현우 자식이 추천했다고 아저씨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요? 게임을 해도 저 혼자 합니다! 아니, 설사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가도 현우 자식이 소개해 준 사람 밑으로는 안 들어갑니다!”
“왜?”
“에? 왜, 왜라니…… 그야…….”
사내의 질문에 박경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떠듬거렸다.
물론 이유야 엄청나게 많다. 아니,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면전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니 명확하게 딱 짚어 얘기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박경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니, 제가 왜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데요? 난 아직 아저씨가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싫은데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싫으면 싫은 거지!”
“뭐 그야 그렇지.”
사내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용무는 끝. 박경진은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타격대로 몸을 돌리는데 사내의 뒤이은 말이 귀에 박혔다.
“약해 빠진 놈이라도 선택의 자유는 있는 거니까.”
“뭐라고요?”
박경진이 튕기듯 돌아서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 제가 약하다고 합니까? 현우 자식입니까?”
“어라? 뭐야? 그럼 설마 너,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나 참, 요즘 애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주제를 몰라요. 그걸 누구에게 들어야 아냐? 그냥 딱 보면 알지. 사실 나도 그래서 좀 고민하고 있었다. 현우 자식이 꽤 실력이 있다고 떠들어 대서 좀 기대했는데 죽도를 휘둘러 대는 폼을 보니 이건 뭐……. 어이, 저 녀석 네 조카라며?”
“거기서 내 조카라는 말이 왜 나와?”
박종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사내를 째렸다.
그러자 사내는 되레 펄쩍 뛰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런 인정머리 없는 놈을 봤나? 그래도 명색이 검도장 관장이나 되는 놈이 조카가 저렇게까지 약해 빠졌는데 삼촌으로서 뭔가 책임감 같은 것도 못 느껴? 그리고 너도 조카가 어디서 맞고 다니면 솔직히 쪽팔릴 거 아니야?”
사내의 말에 박경진이 울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맞고 다니긴 누가 맞고 다녀요?”
“너야말로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아까 말했잖아. 현우에게 대강 얘기는 들었다고. 너, 현우에게 몇 번이나 발렸다며?”
“그, 그건…….”
박경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이를 갈아붙이며 소리쳤다.
“그건 게임 속에서의 일입니다! 현실과 게임은 다르다고요! 현실이라면!”
“현실에서도 이기지 못했지.”
“음, 그건 나도 인정하지. 둘 다 졌다. 현우의 스승으로서도, 경진이의 삼촌으로서도 쪽팔린 일이었지. 그러고 보니 네 말대로 내가 좀 무책임했다는 생각도 드는군.”
박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때는 나도 열이 뻗쳐서 실력 발휘를 못 한 겁니다! 다시 붙으면…….”
“약한 놈들이 꼭 그런 식으로 말하지.”
“뭐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참지 않을 겁니다!”
“하아? 참지 않겠다? 참지 않으면?”
“정말…….”
죽도를 움켜진 박경진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옆에 박종훈만 없었다면 이미 그 죽도로 저 실실대는 사내의 면상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박경진은 불쑥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박종훈은 예의를 몹시 따지는 사람이다.
특히 이 도장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다른 때였으면 박경진이 이렇게까지 화가 나기 전에 뭐든 했으리라. 그런데 이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내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인가?’
박경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좀 뭐하지만 아무래도 어른으로서 현실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겠군. 뭐 원래 어린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니까. 어이, 박 관장, 괜찮겠지?”
“뭐 나야 상관없다만.”
“좋아. 자, 한번 붙어 보자.”
사내가 몸을 쭉쭉 풀며 대련장으로 걸어갔다.
이건 대체 또 무슨 상황인가?
새삼스럽지만 박경진은 아직 이 사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컷 열 받게 만들더니 이제 한 판 붙자?
뭐 이런 경우 없는 인간―사실 그러는 박경진도 며칠 전에 현우에게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다―이 다 있단 말인가? 완전 마이 페이스! 아니, 그냥 또라이다.
박경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사내가 누구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상관없다. 이미 박경진도 이대로 집에 가면 발 뻗고 숙면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 열 받아 버린 것이다.
“좋습니다. 붙어 드리죠.”
박경진이 살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응? 뭐 하냐? 붙어 주겠다며?”
멀뚱멀뚱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묻고 싶은 건 박경진이었다.
“호구를 입고 와야 대련이든 싸움이든 할 거 아닙니까?”
“에? 호구?”
박경진의 말에 사내가 호구라는 말을 난생처음 듣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혹시 그 호구라는 거,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그러니까 약한 놈들끼리 싸울 때 아프지 말라고 입는 그런 거 말하는 거야? 와! 이 자식, 약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눈까지 나쁘네. 설마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 작대기가 내 몸에 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뭐, 뭐라고요?”
“아니, 됐다. 뭐 그래도 사내자식인데 야망은 크게 가져야지. 어쨌든 그런 배려는 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와라. 자, 컴온! 컴온!”
‘대체 뭐야? 이 인간은?’
박경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박종훈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박종훈은 이런 사내의 태도에도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뭐든 상관없다!’
박경진이 죽도를 꽉 움켜쥐었다.
꽤 오래 죽도를 내려놓기는 했지만 박경진은 어려서부터 무학관에서 검도를 배웠던 몸이다. 그리고 지금도 10년 이상 된 관원과 붙어도 밀리지 않는 수준!
죽도라도 제대로 맞으면 뼈 정도는 우습게 부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박경진이 원해서 호구를 벗은 것이 아니다. 사내가 입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박종훈도 묵인하는 분위기니 설사 불상사(?)가 벌어져도 책임을 묻지는 못하리라.
‘본때를 보여 주마!’
박경진이 힘차게 발을 구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죽도를 내리치는 순간!
퍼펑-!
튕겨 날아가는 사람은 박경진이었다.
그와 함께 두꺼운 호구를 관통하며 들어오는 숨이 턱 막히는 충격! 박경진은 한참을 물러난 뒤에야 사내의 옆차기에 얻어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우와 같은 발 차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준은 전혀 달랐다.
이런 무지막지한 ‘관통 대미지’가 붙어 있는 발차기라니?
그때 사내가 숨 돌릴 틈 없이 다가오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능적인 위기감에 박경진은 황급히 자세를 잡고 죽도를 들었다. 순간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박경진은 옆으로 튕겨 날아갔다.
그냥 발 차기다. 그리고 죽도로 막았다.
그럼에도 사내보다 20킬로그램은 더 무거워 보이는 박경진이 허공에 붕 떠서 수 미터나 날아갔다. 직접 경험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상황!
‘설마 이 사람은…….’
순간 박경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새벽 수련을 할 때 종종 얼굴이 마주치는 현우에게 이와 비슷한 사람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헉헉헉, 젠장, 이건 경찰청에서 훈련할 때보다 빡 세네. 뭐 그때보다 시간은 짧지만. 엉? 무슨 경찰청이냐고? 아, 실은 내가 현직 형사에게 태권도를 배울 때가 있었거든. 말도 마라, 관장님도 만만치 않지만 그 형도 장난 아니야. 일단 사람이 무슨 쇳덩어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아니, 그 형은 정말 쇳덩어리로 만들어졌을지도 몰라. 너도 맞아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걸. 무슨 철봉에 맞는 기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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