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 The Legend RAW novel - Chapter (772)
아크 더 레전드-772화(772/875)
[772] space 9. 폭주! (1)-자기야!
스크린에 불쑥 글라도스의 얼굴이 떠오르며 소리쳤다.
이에 진지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던 붉은학살자가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함교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바로 옆의 부관 케이커부터 조종석에 앉아 있는 부하들까지, 모두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 그와 눈이 마주치면 뿜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케이커 이하, 붉은학살자 부하 일동은 우주에 있을 리도 없는 먼 산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뿜’을 참고 있는 가운데.
-글라도스! 너, 좀!
-왜? 또? 뭐?
-그 자……기라는 말 좀 적당히 하면 안 되겠냐?
-에?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그때! 그래, 디피아에서 눈 폭풍 속에 갇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다가 갑자기 눈이 맞아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때! 그때 약속했잖아. 앞으로 자기라고 불러도 아무 소리 안 하겠다고!
-기억 날조하지 마!
붉은학살자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디피아에서 눈 폭풍 속에 갇힌 적도, 그녀와 체온을 의지한 적도, 갑자기 눈이 맞은 적도, 하물며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대신 눈 폭풍 속을 행군한 적은, 그 와중에 그녀가 끊임없이 옆구리를 파고든 적은, 그런 그녀를 째린 적은, 그래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기억은 있다.
그러나 붉은학살자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말싸움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그리고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자기라고 불러도 아무 소리 안 하겠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다.
글라도스가 허락하지 않으면 임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얼어 죽겠다며 눈 폭풍 속에 드러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붉은학살자도 사내, 그것도 부하들에게 냉혹, 비정, 카리스마로 통하는 사내다. 어찌 됐건 한 번 입 밖에 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누가 하지 말래? 하라고! 해! 대신 때와 장소를 좀 가리라는 말이야!
-때와 장소? 지금이 어때서?
글라도스가 수십 명의 함대장으로 꽉 채워져 있는 스크린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함대장들도 꽤 힘든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붉은학살자는 이들에게도 냉혹, 비정, 카리스마로 통하고 있었다, 뭐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붉은학살자가 한숨을 불어 내며 말했다.
-아니, 됐다. 그런데 왜?
-봤어? 영상?
-음, 봤지.
붉은학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대장들과 통신이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라마 함대에도 서너 개나 떠 있는, 얼굴이 팅팅 부은 사내가 항복이니 뭐니 떠들어 대고 있는 입체 영상!
이 입체 영상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붉은학살자는 이 일의 배후에 누구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레피드의 연락을 받고 라마 진영의 방송 준비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 붉은학살자니까.
-아크 자식, 죽었나 싶더니 갑자기 불쑥 나타나 이런 황당한 짓이나 하고 말이지.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놈이라니까.
붉은학살자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글라도스가 말했다.
-자기야, 입이 웃고 있어.
-흥! 어이가 없어서 웃는 거야. 폭발하는 노드에서 아도니스로 잠입해 적의 대장을 보쌈해서 들고 오다니? 하냐고 보통! 그런 짓을?
-나라면 할 것도 같은데?
-그러니까 정상이 아니라는 거지!
-뭐야?
글라도스가 와락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표정을 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물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크가 한 일이니 대놓고 좋아할 수는 없지만(?) 좋은 일이다. 덕분에 도저히 가망이 없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됐으니까.
함대장들과 하고 있던 말도 그것이었다.
라마가 맡은 전장 좌측 지역의 적 함대가 투항하면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느냐, 전함 숫자가 숫자다 보니 이런 것도 미리 의논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붉은학살자가 다시 회의를 재개하려 할 때였다.
퍼퍼퍼펑! 퍼퍼퍼펑!
갑자기 전장에 퍼지는 포성!
순간 붉은학살자와 함대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포성? 신의 군대 놈들이 다시 포격을 재개한 건가?
-네, 이 포격은 신의 군대입니다! 하지만 포격을 재개한 것은 중앙 지역의 1군단뿐입니다! 저희 함대와 대치하고 있는 적 함대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1군단!
적 사령관 펜릴이 지휘하는 함대다.
순간 붉은학살자는 1군단의 포격이 뭘 의미하는지 눈치챘다. 펜릴은 지금 항명하고 있는 것이다. 입체 영상에서 떠들어 대는 총독의 항복 명령에.
하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신의 군대 입장에서는 이미 절반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전투였다. 그런데 총독이라는 자가 납치된 것도 모자라 적 함대에서 항복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군대 함대 총사령관 입장에서는 눈이 뒤집힐 만도 하다.
그리고 그가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적의 포로가 된 총독을 죽이는 것!’
그렇다면 노릴 곳도 하나!
‘아크다!’
상황은 붉은학살자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포격을 재개한 적 1군단은 그대로 1,000여 척의 전함을 동원해 은하연방 함대가 모여 있는 곳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라마처럼 긴장이 풀려 있던 은하연방의 전방 함대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1군단은 그런 함대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대로 돌파!
2열에 모여 있는 함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아크 함대, 아니 아크가 있는 곳이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붉은학살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적 사령관이 지휘하는 1군단이 움직였다면 이곳도 안심할 수는 없다! 이곳에서도 언제 적 함대가 움직일지 모르니 신속히 함대를 재정비하고 포격에 대비하라! 단, 이쪽에서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 사이에 전투가 재개되면 발데라스의 지휘를 따라라! 그리고 머레이, 펌프킨. 너희들은 각각 50의 전함을 이끌고 나를 따른다! 1군단의 공격으로부터 아크 함을 지키지 못하면 전쟁을 끝낼 수 없다!
붉은학살자는 바로 100척의…….
-나도! 나도 갈래!
+글라도스를 데리고 은하연방 진영으로 돌진했다.
-3킬로미터 전방, 적 함대입니다! 은하연방 함대와 교전 중입니다!
-지금은 아크 함의 보호가 최우선이다! 이런 곳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돌격진형으로 전환! 이대로 적 함대를 뚫고 들어간다!
-돌격진형으로 전환!
-진격!
퍼퍼퍼펑! 퍼퍼퍼펑!
붉은학살자는 그대로 포화를 뿜으며 은하연방 함대와 교전하는 적 함대를 뚫고 들어갔다.
그때, 맞은편에서도 불길이 번지며 붉은학살자 함대와 비슷한 숫자로 구성된 아슐라트 함대가 전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서 낯익은 전함 2척이 눈에 들어왔다.
아슐라트의 세븐 소드 에리얼과 바론의 전함이다.
그들 역시 붉은학살자와 같은 생각으로 이곳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굳이 따로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에리얼! 바론!
붉은학살자가 통신을 연결하며 소리쳤다.
-……왔나?
-뭘 해야 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 방금 전에 은하연방의 전함과 교신해 아크 함, 실버스타가 있는 장소를 알아냈다. 30킬로미터 전방! 연방 함대의 2열 중간 부근이다!
-뭐 그렇겠지.
에리얼의 말에 붉은학살자가 시선을 돌리며 끄덕였다.
가장 많은 적함이 모여 있는 전장! 그곳이 에리얼이 말한 장소였다.
-바로 진격한다! 함대, 포격!
이에 붉은학살자는 에리얼, 바론과 합류!
한층 거세진 포화를 줄기차게 뿜어내며 적 함대를 부수며 진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장을 관통한 이들 앞에 수백 척의 전함이 양쪽으로 나뉘어 무수한 포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곳이 바로 은하연방의 2열 중심!
‘아크는…….’
-자기야, 저기 봐!
그때 스크린 속에서 글라도스가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에 고개를 돌린 붉은학살자는 기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무수한 포화가 오가는 전장의 한쪽, 수 킬로미터 넓이의 빈 공간이 있었다. 마치 일부러 만들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전함들은 들어가지 않는 빈 공간.
그 공간에서 싸우고 있는 전함은 단 2척이었다.
유선형의 은빛 전함과 측면에 검은 늑대의 문장이 새겨진 전함.
‘실버스타! 그리고…… 펜릴 함이다!’
하나는 보호해야 하는 아군 전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우선 격침 목표인 적의 기함!
그러나 붉은학살자와 에리얼, 바론, 심지어 글라도스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포격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다른 전함이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았다.
-저, 저런 싸움에 무슨 수로 끼어들어?
-아니, 그보다 저게 진짜 전함으로 싸우고 있기는 한 거야?
그 빈 공간에서 격돌하는 두 전함의 전투는 다른 전함이 끼어들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 * *
……약 10분 전.
붉은학살자와 에리얼, 바론, 글라도스가 은하연방 진영을 향해 출발한 직후, 그러니까 펜릴이 1,0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을 때.
“뭐, 그렇겠지.”
아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 함대가 돌진할 때 되레 붉은학살자나 에리얼 등과 달리 아크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크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쥬벨이 신의 군대 총독이라도 전장에 불쑥 나타나 항복 선언을 한다고 모든 적 함대가 곧바로 백기를 들어 올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잡고 나서야 한 사실이지만 쥬벨은 실권도 없었다.
그래도 총독이니 쥬벨의 항복 선언은 적 함대를 흔들어 놓겠지만, 분명 저항하는 함대도 나올 것이다.
그런 놈들의 최우선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쥬벨!
다시 말해 입체 영상의 발신지인 은하연방 함대였다. 그러나 이때, 아크의 머릿속에 있던 것은 놈들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아니, 막을 생각이 없었다.
진군을 막고 포격전으로 돌입하면 전투가 장기화될 터. 그리고 전투가 장기화되면 쥬벨의 항복 선언에 갈팡질팡하는 다른 지휘관들까지 항전 쪽으로 기울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고 전쟁이 끝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저항 세력을 신속하게 제압한다!’
이게 1군단이 은하연방 함대의 1열을 쉽게 뚫고 들어온 이유다. 적을 가장 빨리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포위 공격! 적 함대의 진군로를 열어 주고 함대 내부로 끌어들인 것은 놈들을 포위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포위망이 형성될 때, 레피드도 그 부분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1군단은 적의 최정예 함대야. 전함 숫자도 우리가 많고 포위를 했다고 해도 놈들을 제압하기는 힘들다. 아니, 빨리 제압하기 위해 서두르면 되레 당할 위험도 있다. 뭣보다 1군단에는…….”
“바보냐?”
그때 아크가 피식 웃었다.
“뭐하러 저 많은 적 함대와 피 터지게 싸워?”
“뭐?”
“이건 1척만 잡으면 이기는 전투다.”
“1척? 혹시 적의 기함?”
“그렇지.”
이 포위 작전의 진짜 목적이 그것이다.
아크는 아직 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장 먼저 공격을 재개할 함대가 적의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함대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총독의 항복 선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은 전장의 총사령관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표는 하나!’
이미 총독이 항복을 선언한 상황에서 함대 최고 지휘관까지 전사한다면 적군도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릴 것은 당연지사!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기껏해야 도망치는 것이 전부이리라.
그리고 그 순간 신의 군대는 와해돼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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