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공수표 (2)
“아……, 그런가요?”
잠깐의 침묵을 통해 류근태는 박기수가 이 주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동시에 만족했다.
애초에 박기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으니까.
“네. 제가 와이케이 백화점을 세우고 운영하면서 느낀 거지만, 세스의 정통성을 이길 수는 없겠더군요. 세스가 와이케이보다 몇 년 먼저 백화점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세스는 그룹이라 다른 계열사들과의 시너지까지 생각하면, 어후……. 저는 그냥 1호점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하하핫!”
짐짓 너스레를 떠는 류근태의 모습에 박기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데에는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입니다. 세스의 방침이나 규모를 생각해 보면 우리 와이케이 백화점이 세스의 자회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자회사가 되지 않더라도 종속적 관계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크죠. 그런데 제가 아직 미숙하다 보니 일단 찾아오는 것밖에는 뭔가 할 도리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환대를 해 주시니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몰라요.’ 전략을 내세운 류근태의 칭찬에 박기수는 속이 끓으면서도 차마 류근태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박기수는 세스의 소속이었으니까.
단지, 박기수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류근태에게 볼멘소리를 간접적으로 알렸다.
“그런데 왜 굳이 저를 찾아오신 건지…….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라면 아직 기업의 주인이신 제 아버지를 만나 보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만약 여기서 류근태가 ‘회장님은 만나 뵙기 힘드니까요.’ 같은 멍청한 대답을 했다면 만남은 여기에서 중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근태는 아주 멋들어진 대답으로 박기수의 환심을 샀다.
“에이, 원래 사업이란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만간 세스는 박기수 사장님의 것이 될 것인데, 당연히 사장님을 만나 뵈어야죠.”
세스는 박기수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박기수의 표정이 한결 펴졌다.
그리고 이 말이 현실을 대변하는 말이었다면 박기수는 류근태의 말을 들으며 의심을 했을 것이다.
‘뭐지? 왜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아첨을 하는 거지? 뭔가 노리는 게 있나?’ 하는 의심 말이다.
하지만 이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박기수였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기분 좋게 해 주는 류근태에게 마음의 가드를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라도 좋네요.”
“기분이라도 좋다니요. 당연한 말 아닙니까?”
박기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말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아마 세스를 이어받지 못할 겁니다.”
“예? 그런 말도 안 되는……, 박 사장님이 장남인데 박 사장님이 아니면 누가 뒤를 이어받는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 어렵다는 일본 진출을 해낸 것도 전부 박 사장님의 공 아닙니까?”
박기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일이 쉽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시간만 좀 더 있다면 제가 자리를 확실히 잡겠지만, 현재 세스 홀딩스는 일본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 동생은 아버지 옆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서 착실하게 포인트를 쌓았지요.”
담담하게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 가지 어휘를 통해 박기수는 자신이 가진 불만을 류근태에게 드러내 보였다.
“시간이라…….”
“그렇습니다. 시간만 좀 더 있었어도……. 제가 성인이 되자마자 일본에 진출했다면 능히 나중에 세스를 물려받았을 텐데, 너무 늦은 나이에 일본 진출을 해 버렸습니다. 제 동생이 세스를 물려받아 버리면, 제 아들이 세스를 물려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고요.”
“저런…….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박 사장님의 저력이라면 충분히 자리를 잡았을 것 같은데, 혹시 동생분의 방해가 있었습니까?”
순간 박기수는 오랫동안 표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품속에 품고 있던 의심의 씨앗을 개화시켰다.
‘그리고 보니……. 내 일본 사업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은 혹시 동생 녀석이 나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잘 생각해 보니 그동안 거래가 거의 성사되기 직전에 파투 난 경우가 몇 건 있었던 데다가, 거래하던 업체가 거래를 중단하던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으레 있는 일이었지만, 한 번 피어오른 박기수의 의심은 이내 거의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럴지도 모르죠. 재벌가의 상속 싸움은 그야말로 살벌하니까요. 후우……, 이렇게 직접 저를 찾아와 주셨는데, 사실상 저는 쭉정이 같은 놈이니 헛걸음을 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아뇨, 아뇨. 저는 오늘 박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깊고 넓은 식견에 감탄했습니다. 박 사장님과 교류를 계속한다면 저 역시 큰 도움이 되겠죠. 저는 박 사장님이 세스를 물려받든, 물려받지 않든 꾸준히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류근태의 말에 박기수는 다소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오늘 대화는 정말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 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형님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인데, 혹시 형님으로 모셔도 될까요?”
류근태가 보여 준 자신에 대한 태도, 그리고 와이케이 백화점의 사장이라는 직함과 신군부와의 인맥은 박기수가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제가 영광 아니겠습니까. 군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영향력이라니요. 그저 운 좋게 시류에 탑승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형님이라 부르는 거, 허락하신 거로 알겠습니다?”
“어……, 그,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형님. 이제 말 편하게 놓으시죠.”
“그……럴까?”
“당연하지요. 이제부터는 저를 동생이라고 생각하시고 힘드신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탁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동생이 도와줄 일이 무엇이 있겠어. 가끔 이렇게 찾아와서 말동무나 해 주면 그걸로 최고지. 진짜 요새 들어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날은 처음이야.”
박기수의 말에 류근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친밀감은 이만하면 다 쌓은 것 같네.’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람이 10억을 벌었을 때와 그 10억 중 5억을 잃었을 때의 심리는 100퍼센트 다르다.
처음 10억을 땄을 때는 냉정한 시선으로 주식을 분석해서 이익을 봤다면, 10억 중 5억을 잃었을 때는 총이익 5억이 아니라, 5억 손실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과투자가 이루어지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박기수가 정확히 이러한 상황이었고, 덕분에 류근태는 자신의 직함을 이용해서 박기수와 호형호제를 하는 데에 성공했다.
“가끔이라니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다음에는 술도 한잔해야죠. 안 그래요?”
“술이라……, 좋지. 일본의 술 문화가 아주 대단하거든.”
머릿속으로 유흥을 떠올린 박기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뇌가 흐물흐물해지는 타이밍.
그걸 노리고 류근태가 쐐기를 박았다.
“그런데 형님.”
“응?”
“술을 마시려면 그래도 기분 좋게 마시는 게 최고 아닐까요? 기분 나쁠 때 술 마시면 독이에요. 독.”
“휴……, 그렇기야 하지.”
“그런 의미에서 제가 형님을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날 도와줘? 어떻게? 군부도 일본에서는 별 영향력을 못 쓰는데…….”
“에이! 형님, 제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겠습니까?”
“그럼?”
40대를 바라보는 동생과 50대 극 초반의 형.
하지만 50대의 형은 마치 10대 사춘기의 형처럼 40대 동생의 말에 빠져들었다.
“혹시 도호쿠 지방의 우미구치구미라고 아십니까?”
“우미구치구미? 당연히 알지. 현재 일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야쿠자 집단이잖아. 그런데 왜?”
류근태는 일부러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거기에 영향력을 좀 행사할 수 있습니다. 형님이 원하신다면 형님 사업에 아스팔트를 쫘악! 갈아드릴 수 있죠.”
양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며 마치 ‘이랏샤이마세!’ 하는 시늉을 하는 류근태의 모습에 박기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게 가능해……?”
“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우미구치구미의 막내딸이 신랑감을 구하고 있다고 하는데, 형님이 원하신다면 형님의 아드님을 제가 후보로 추천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류근태는 핫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저 형님을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형님의 의중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말을 꺼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박기수는 류근태를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좀 더,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봐. 우미구치구미가 막내딸의 신랑감을 구하고 있다고?”
류근태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히로코라고 하는 여자아이인데, 현재 20대 후반입니다. 아마 형님의 아드님도 비슷한 연배이니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내 아들이 지금 23살이기는 한데…….”
“히로코가 연상이군요. 하지만 초혼임은 확실합니다. 프랑스에서 의사 학위를 공부하다가 학년 진급 시험에서 3번 떨어지고, 이후 생물학을 공부하다가 마찬가지의 상황을 겪어서 결혼이 늦어졌다고 합니다.”
“프랑스라……, 거기 학업 난이도가 살벌하다고는 들었지.”
프랑스는 대학교에서 학년 진급 시험을 보는데, 대학 생활 중 세 번 진급에 떨어지면 해당 과목을 다시는 공부할 수 없다.
히로코는 이러한 과정을 두 번 거쳤기 때문에 뒤늦게 결혼 상대를 찾게 된 것이다.
물론 신랑 후보감을 찾고 있다는 것은 반쯤 거짓.
와타나베 마사오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히로코의 정략 결혼을 제안했고,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윤기에게 이 제안을 알렸다.
윤기는 이 정보를 류근태에게 주었고, 류근태는 이걸 적절히 가공해서 박기수에게 흘린 것이다.
“어떠십니까? 세스 홀딩스가 현재 어느 정도 장악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미구치구미의 힘을 등에 업는다면 최소한 도호쿠 지방에서만큼은 굴지의 기업이 될 겁니다. 잘만 하면 일본에서 30대 기업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죠. 한국의 세스보다 빨리요.”
순간 박기수의 숨소리가 멎었다.
‘30대 기업! 한국보다 빨리!’
박기수의 몸 안의 혈액이 빨리 돌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세스 홀딩스가 일본 30대 기업 안에 들어간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하는 수준을 지나 아버지를 능가하는 자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동생!”
“예, 형님.”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하루만 시간을 줄 수 있을까?”
“당연하죠. 심사숙고해야 하는 일인걸요. 저한테 편하실 때,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류근태가 돌아가자, 박기수는 곧바로 자신의 측근인 정동윤을 불렀다.
* * *
“우미구치구미 말입니까? 그곳의 막내딸과 사장님 아들의 결혼을요?”
“그래.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세스 홀딩스라는 호랑이의 등에 날개가 달리게 되겠지.”
“그리고 보니 저도 들은 게 있습니다. 우미구치구미의 조장인 와타나베 야스다가 자신의 아들인 와타나베 마사오를 불신한다는 이야기를요. 만약 사장님의 아들이 막내딸인 히로코와 결합을 한다면, 어쩌면 우미구치구미의 힘 그 자체를 사장님이 흡수하실 수 있을지도…….”
정동윤이 말을 흐렸지만, 이미 박기수의 머릿속에는 우미구치구미의 실권자가 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박기수는 와타나베 마사오가 와타나베 야스다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 녀석도 나와 똑같은 건가?’
아버지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추레한 아들의 모습.
하지만 박기수는 동병상련을 느끼기보다는 마사오의 상태를 이용할 계략을 떠올렸다.
“정 전무.”
“네, 사장님.”
“그냥 한번 해 보는 말인데.”
절대 그냥 한번 해 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정동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말씀하시죠.”
“내 아들이 아니라 내가 히로코와 결혼을 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