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미래를 준비하라 (1)
“알겠습니다.”
“이유는 안 물어보시나요?”
“저에게 의견을 구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신 것이니까요.”
생각했던 대답이 나오자 윤기는 자신이 류근태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불어서 비서라는 직무에 거의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사실 역시 다시 한번 자각할 수 있었다.
‘볼수록 탐난단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윤기가 류근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역시 아니었다.
* * *
“네 엄마랑 아빠한테 할아버지랑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말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렇게 자주 찾아올 거라면 말이다.”
최기현의 말에 최윤기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왼쪽 팔을 긁었다.
“저도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싶기는 한데, 부모님이 다른 분들을 조금 불편해하셔서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열 살짜리 손자의 슬프면서도 정확한 대답에 최기현은 말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내가 성공을 너무 쌓았는지도 몰라……. 아니면 자식을 너무 많이 낳았나…….’
자신이 그냥 큰 상회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순수하게 가정의 행복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그때는 애들이 어려서 그런 것이었고, 지금은 애들이 커서 돈 욕심을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쌓은 성공을 일부러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이지. 최소한 도태되는 아이가 생기지는 않도록 내가 더더욱 성공을 쌓을 수밖에 없어.’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최기현이 윤기를 바라볼 때, 윤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무슨 부탁을 할 것이 있어서 온 게지?”
익살스러운 할아버지의 표정.
윤기는 그 미소에서 할아버지의 고독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있지만, 그 전에 드리고 싶은 말이 생각났어요.”
“무엇이냐?”
“그냥 할아버지가 저희 집에 오시면 안 돼요?”
“응?”
“저는 할아버지랑 살고 싶고, 할아버지도 저희랑 살고 싶으시잖아요. 그러면 차라리 할아버지가 평상시 생활을 저희 집에서 하시면 안 되나요?”
“호오…….”
최기현은 구미가 당긴다는 듯 수염이 까슬까슬한 턱을 쓰다듬었다.
“안 되나요?”
“나야 안 될 것 없지. 하지만 애미랑 애비가 싫어할 텐데…….”
“부모님이 할아버지를요? 말도 안 돼요.”
강한 부정에 최기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만약 부모님이 반대하셔도 제가 떼쓸게요. 한 달을 굶어서라도 같이 살고 싶다고 할 테니까 저희 집으로 오세요.”
정말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 주는 손자의 말에 최기현이 손자를 번쩍 안아 들어올렸다.
“1~2년만 지나도 내가 이제 너를 들 수 없겠구나.”
“나중에는 제가 할아버지를 들어 올릴게요.”
“크하하핫! 좋지. 아무튼,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거냐?”
손주를 내려놓은 최기현이 약간 힘이 들긴 했는지 숨을 고르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보내 주신 비서한테 청계천 근처의 땅을 제 돈으로 최대한 매입해 달라고 했는데, 비서가 한눈을 파는지 확인해 주세요.”
“청계천 땅은 왜 사려는 거냐?”
최기현은 순수한 궁금증에 물어보았다.
손주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손주가 굳이 콕 집어서 ‘청계천’ 주변 땅을 사려고 하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서 배웠는데 서울의 인구가 점점 늘어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그렇지.”
“사람은 살면서 슈퍼가 꼭 필요하고요.”
“그것도 그렇지.”
“사람이 많이 늘어나면 더 많은 슈퍼나 더 큰 슈퍼가 필요하잖아요.”
“그렇지. 백화점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래서 저는 미리 땅들을 사 놓으려고 해요. 비서한테 배워 보니까 제가 아직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부족한 게 많더라고요. 그러면 나중에 사업을 해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서울 인구는 더욱 늘 테고, 땅값도 더욱 올라갈 테니 미리 사 두는 게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어요.”
최기현은 손자의 추론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렇다면 삼우 그룹도 서울에 땅을 사 놓으면 좋겠느냐?”
윤기는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째서?”
“삼우 그룹은 투자해야 할 종목이 따로 많잖아요. 저는 지금 당장 투자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없지만, 삼우 그룹은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삼우 그룹이 굳이 저를 따라 할 것은 없다고 봐요.”
윤기의 말은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
지금 시점에서 잠실이나 강남 등의 땅을 사두면 분명 수십 년 뒤에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삼우 그룹의 규모가 커지기 위해서는 벌써 부동산 투자를 해선 안 되었다.
더군다나……
‘땅은 회사가 아니라 내가 사야 하거든.’
게다가 조만간 신군부의 시대가 오기 때문에 그룹 하나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신군부가 그룹 자체를 공중분해 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룹 하나 공중분해 시키면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이 생기는데, 신군부가 그런 일을 안 할 리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적당한 규모의 알싸라기 땅을 매점해 놓는 게 훨씬 좋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약간의 땅이라면 삼우 그룹이 뇌물을 써서 신군부의 계획을 바꿔 줄 테고, 신군부 역시 굳이 우호적인 그룹의 ‘작은 땅’을 억지로 빼앗을 생각은 없을 테니까.
‘큰 땅이면 몰라도 말이야.’
윤기는 오랜 세월 통수를 맞아 오며 겪은 자신의 감이 절대 틀릴 리 없다고 굳게 믿으며 할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네 말대로 하마. 그런데 그 비서를 감시하기 위해 다른 녀석을 보내면, 네가 청계천의 땅을 매집한다는 사실이 비서들에게 들킬 텐데 괜찮겠느냐? 녀석들이 숟가락을 얹을 수도 있는데? 아니면 숟가락 얹는 것도 봉쇄하길 바라느냐?”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숟가락을 얹어도 상관없어요.”
“어째서?”
“비서들과 제가 동원하는 액수에서 이미 격차가 벌어져 있고, 비서들이 숟가락을 얹어서 성공한다면, 비서들은 나중에 저한테 충성할 수밖에 없잖아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 지금보다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 비서들이 네 계획을 다른 곳에 유출할 거라는 생각은?”
“사람은 진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확신이 생기면 그것을 절대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데요. 특히 자신보다 못한 사람한테는요. 책에서 봤는데 저는 이 말이 정말 인상 깊어요.”
순간 최기현은 겉으로 ‘오…….’라며 감탄을 할 뻔했지만, 이 말을 속으로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면 이만 나가 보거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윤기는 할아버지를 한 번 꼭 껴안은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저녁 7시가 되었을 때, 류근태가 최기현의 서재로 들어왔다.
* * *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공손한 류근태의 인사에 최기현이 굉장히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 앞에서 보여 줄 때와는 180도 다른, 냉정함이 풀풀 풍기는 서릿발의 화신이었다.
“최근에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고해 봐.”
“네. 최근까지 저녁에 두 시간씩 과외를 하다가, 얼마 전부터 도련님의 명령에 따라 청계천의 땅을 매입하고 있습니다.”
“청계천의 땅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최기현은 짐짓 모르는체하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류근태 역시 가타부타 첨언을 하지 않고 오로지 사실만을 이야기했기에 대화는 잠시 끊기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최기현이 어체를 한 단계 높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윤기는 어떤가?”
처음으로 류근태의 어조에 ‘흥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금이지만 담겼다.
“굉장히 유능합니다.”
“굉장히 유능하다?”
“예. 국민학교 3학년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의 양을 아득히 능가하고 있습니다. 공부할 때의 집중력을 보면 가히 ‘한이 맺혔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니까요.”
“그 정도인가?”
“네. 도련님은 그 정도로 공부에 목말라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도련님의 과외를 가기 전에 8시간 정도 자료를 준비해서 갑니다.”
“8시간이나?”
류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면 도련님을 2시간 동안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해오고 있기 때문에 항상 제가 생각한 공부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다반사고, 이해속도가 워낙 빨라 일반 학생의 속도로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보고를 들은 최기현은 속으로 미소를 짓고 싶었으나 초인적인 인내로 참으며 다시 한 가지를 물었다.
“그렇다면 윤기에게 좀 더 전문적인 강사를 붙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경영이야 자네가 좀 더 가르치면 되겠지만, 다른 것들 말이야.”
류근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차라리 도련님한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윤기를 믿어 보자?”
“그렇습니다. 도련님은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게 있으면 직접 말씀하시니까요. 이쪽에서 억지로 공부의 방향을 정해 준다면 오히려 위험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라…….”
“예. 더군다나 도련님이 관심을 가진 분야가 경영이기 때문에 방향과 완급, 모두 도련님에게 맡기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요청이 들어왔을 때 최고의 지원을 해 주는 쪽이 더 좋은 효과를 내리라는 판단입니다.”
“옆에서 본 자네의 말이라면 맞을 수도 있겠지.”
최기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류근태가 침을 꿀꺽하고 삼키는 게 느껴졌다.
윤기 앞에서야 마이페이스를 확실하게 유지하는 류근태조차도 최기현의 분위기에는 완전하게 맞설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입니까?”
“비서실장이 자네를 추천하더란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굉장히 유능한 것처럼 보여. 어째서 다른 곳이 아니라 삼우 그룹에 지원을 했나? 삼우 그룹의 전망이 더 뛰어날 거라 생각했다는 그런 상투적인 설명은 집어치우고 말이야.”
류근태가 잠시, 정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호남 지방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아, 전라도?”
최기현의 어조에 류근태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희망이 감돌았다.
어조 그 어디에도 호남 지방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거라면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우리 회사가 첫 회사가 아닌 건가?”
류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출신 지역 때문에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했다가, 지역을 속이고 합격했더니 그것도 결국에는 걸려서 두 번이나 회사를 나와야 했습니다.”
“우리 회사 인사 담당자는 지역 차별을 안 하던가?”
“그게…….”
“비서실장하고 무언가 관계가 있겠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류근태는 하마터면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 그렇……습니다.”
“어떤 관계지?”
“제……가 비서실장님의 아들의 군 선임이었습니다. 내무실에서 술 취한 선임들이 총 쏘면서 난동부릴 때 목숨을 구해 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70년대 군번까지만 해도 술 취한 고참들이 총을 들고 서로 싸우는 일이 분명 존재했다.
특히 지역 단위로 갈라져서 말이다.
물론 술에 취했어도 인명사고가 나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부분 벽을 향해 쐈지만.
“어쨌거나 자네가 능력이 있으니까 ‘그 녀석’이 자네를 추천했겠지. 안 그런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서실장을 ‘그 녀석’이라 부르는 최기현의 모습에 류근태는 무릎을 꿇으며 몸을 넙죽 엎드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지금까지 보인 모습으로는 그 녀석의 선택은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겠어. 네 녀석이 내 손주 녀석을 잘 보필한다면 너도 그 녀석도 이득을 볼 거고, 네 녀석이 내 손주를 이용해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마까지 바닥에 쿵 찍는 류근태를 바라보는 최기현의 속마음은 어디까지나 사랑스러운 손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