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날아간 1,000억 (2)
최유정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당연하죠. 저도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요.”
살짝 립서비스가 들어간 말이었지만, 그 덕분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저는 수란이 누나 덕분에 살아남았어요.”
순간 최유정의 몸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던 화제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화제를 꺼낸 것이기도 하고, 대화를 더 하기로 했으니, 최유정은 조용히 정우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대구쯤이었죠. 그때 우리는 부산으로 도망치고 있었어요. 수란이 누나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지주였는데, 공산당 녀석들이 지주들을 다 처형했거든요.”
“아…….”
“수란이 누나의 부모님이 수란이 누나에게 돈이 될 만한 작은 패물들을 전부 챙겨 주었고, 수란이 누나는 저를 찾아왔어요. 같이 도망가지 않겠냐고 말이죠.”
“함께하셨군요.”
정우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수란이 누나 집의 머슴이었거든요. 제가 어릴 때부터 수란이 누나가 저를 부쩍 귀여워했죠. 씨감자를 삶아 주기도 했고, 씨암탉을 삶아서 닭국도 해 줬죠. 물론, 수란이 누나는 그때마다 부모님께 엄청 혼났지만요.”
추억을 떠올리는 중년의 얼굴은 유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수란이 누나를 따라갔죠. 수란이 누나는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며 저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어요. 그러던 중에, 대구에서 북한군을 만나게 되었어요.”
“아아…….”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최유정을 향해 정우호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북한군이 내려오는 속도가 우리보다도 빨랐죠. 그렇기에 우리는 숨어야만 했어요. 당시 북한군은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을 다 죽였거든요.”
“그땐 그랬다고 들었어요……. 저는 아기였던 시절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한테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정우호는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살짝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부산을 향해 가고 있는데, 북한군이 우리 뒤에서 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근처 수풀로 숨었죠. 미처 숨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북한군의 총에 죽었어요.”
여기까지 말을 들은 최유정은 ‘숨었는데……?’라는 의문을 가졌다.
숨었다면 첫사랑을 잃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정우호의 설명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북한군은 길에 있던 사람들을 죽이고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그때…….”
정우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수란이 누나가 저에게 ‘절대 나오지 마’라고 속삭이고는 뛰쳐나갔어요. ‘남조선 만세’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그리고…….”
정우호는 차마 이후의 내용을 말하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안 좋은 기억을……, 죄송해요. 죄송해요…….”
눈물을 닦은 정우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야말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아니에요…….”
정우호는 힘을 내 환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때의 일로 인해서 저는 고아들을 돌보게 되었죠. 수란이 누나가 준 삶을 대충 살기가 싫었고,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을 아이들을 그냥 두기가 싫었거든요.”
“그때부터 고아들을 도우셨던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던 정우호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내가 이 말을 남에게 할 줄이야…….’
사실 지금 이야기는 정우호가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정우호는 오늘 자신도 모르게 그때의 이야기를 해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옆에 수란이 누나, 아니 수란이 누나를 쏙 빼닮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마치, ‘누나, 나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 기분.
그렇기에 정우호는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피난 중에 수란이 누나가 자주 했던 말이 있어요. ‘나중에 너한테 시집가면, 딸이랑 아들 하나씩만 낳아 줄게. 그렇게 넷이서 행복하게 살자’라고 말이죠.”
“그분은 정말……, 유쾌하신 분이셨네요.”
“네, 정말로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오죽하면, 당시에 제가 머슴이었는데도, ‘너는 우ㅎ……’, 아니 ‘너는 쟤 아니면 데려갈 사람 없겠다’라면서 수란 누나네 부모님이 저를 가리켰으니까요.”
순간 최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하다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웃으셔도 돼요. 사실 제가 생각해도 웃기니까요.”
“아, 아뇨! 괘, 괜찮아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최유정을 향해 정우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고아들을 도우며, 저는 어쩌다 보니 결혼을 하게 되었죠. 일하던 곳의 사장님이 자기 딸을 소개해 주는데 안 할 도리가 없더라고요.”
“저도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해요. 물론, 저야 제가 선택해서 정략결혼을 했던 거지만요.”
자신에게 공감해 주는 최유정의 모습에, 정우호는 더욱 속내를 드러내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더군요. 그래서 병원에 가 보니 저보고 무정자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북한군이 지나갈 때까지 수풀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 당시 굉장히 뾰족한 돌덩이가 제 하복부를 짓누르고 있었거든요. 의사도 아마 그게 원인일 거라고 하더군요.”
“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최유정의 한숨 소리가 주변에 퍼졌다.
“그래서 저는 입양을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나쁜 놈이기는 하지만, 수란이 누나가 원했던 행복을 저라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아내는 거절했습니다.”
“……아내를 원망하시나요?”
“아뇨,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이해해 주는 게 이상한 거죠. 아내에게 상당한 위자료를 지불하는 대신, 저는 이혼 직전에 두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양육권도 제가 가지게 되었죠.”
“휴우, 그나마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일까요?”
쓴웃음을 짓는 정우호의 모습에 최유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이들이 중학생 때, 우연히 아이들의 친부모를 찾게 되었어요.”
최유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정우호의 인생살이가 너무 다사다난해서, 함부로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아이들이 친부모를 만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죠.”
정우호의 한숨 소리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가짜 아빠보다는 진짜 부모가 좋다’라고 말이죠. 어린아이들이 그 말을 한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되었겠지만, 성인이 된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해서…….”
“어쩜, 그럴 수가…….”
“이후로 저는 상황을 조용히 관조했습니다. 제가 미리 넘겨줬던 재산들이 저와 상의도 없이 친부모에게로 조용히 넘겨지고 있더군요. 어느 순간 독립해서 산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친부모랑 같이 살고 있더군요. 저한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정우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저를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재산을 물려받을 게 자신들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저에게 핏줄이 단 하나만 있었어도, 그 녀석들이 최소한 가식적인 미소로 저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했을 텐데…….”
최유정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저는 고아원을 향한 지원을 끊었습니다. 평생 수란이 누나의 소원 한 번 들어주려고 했는데, 반쪽조차도 들어주지 못하게 된 셈이니까요. 결국, 아이들은 제 앞에서 연기한 것뿐이었어요. 아이들이 그렇다 보니, 원망의 화살이 고아원의 아이들한테도 뻗쳐서…….”
입을 다문 정우호의 어깨에 최유정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얹었다.
“그 심정 감히 이해한다고 말을 할 순 없지만, 저였어도 그랬을 것 같아요. 평생을 길렀는데……, 그것도 그냥 기른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몫을 혼자 감당하면서 길렀는데…….”
이 말이 결정타.
정우호는 최유정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 걸까요?”
“없어요. 정말 없어요…….”
“없는 거죠? 없는 거죠……?”
결국, 정우호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최유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호를 안아 주었다.
“누나……, 누나…….”
첫사랑의 향기와는 분명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사람도 달랐지만, 정우호는 최유정의 품속에서 연신 ‘누나’라는 말을 하며 울었다.
50대의 남자가 30대의 여자를 누나라 부르는 상황.
하지만, 최유정은 그런 정우호의 행동을 피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사람…….’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진정이 된 정우호는 최유정에게 정말 미안하고, 감사했다는 말과 함께 고아원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정우호는 공중전화를 찾아 최철규에게 받았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아, 최 사장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자 대 남자로서 꼭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 * *
경기도 외곽의 한 전원식당.
오늘 하루 통째로 대여가 되었기 때문에 식당에는 주인조차 없었다.
단지 경호원이 정우호와 최유정 사이에 차 두 잔을 놓고 갔을 뿐.
“의도적으로 속일 생각은…….”
여기까지 말하던 정우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의도적으로 속인 것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정체를 아시게 된다면 바로 자리를 떠나실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는 정우호의 모습에 최유정은 어제 윤기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해신 그룹 회장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왜?]고모한테 반했대요.>
[뭐? 아니, 무슨 미친 소리니?]기막혀하는 최유정의 대답에 윤기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예요. 고모가 정우호 회장을 만난 적이 없다면 말이죠.>
[응? 내가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네. 고아원에서 고모 품에 안겨서 운 사람이 정우호 회장이에요.>
[뭐, 뭐, 뭐, 뭐, 뭐, 뭐라고?]경악하는 최유정. 그 모습에 윤기는 잠시 여유를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하다니?]만나실지 안 만나실지 알아야 저도 행동을 정할 수 있어서요.>
[……내가 만났으면 좋겠니?]딱히요?>
윤기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에 최유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내가 만나서 그 사람을 이리저리 조종해 주길 바라지는 않는 거야?]해 주시면 감사한 일이지만, 가족한테 그런 힘든 일을 맡기고 싶진 않거든요. 그래서 고모가 하시고 싶으신 대로 결정해 주시면 돼요.>
편히 결정하라는 윤기의 배려에 최유정은 만나는 쪽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왜 자신을 만나자고 한 것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으니까.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경직된 자리였다.
“그런데 저를 왜 속이신 거죠? 제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속였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저한테 왜 접근했는지를 묻는 거예요.”
“그건…….”
“첫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하실 생각이신가요? 제가 첫사랑이랑 닮아서?”
“예.”
어찌 보면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최유정은 조금 기운이 빠져 버렸다. 그저 자신이 첫사랑과 닮았기에 접근했다는 것이니까.
며칠 전에 이야기를 나눴을 때, 최유정은 정우호라는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느꼈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어릴 때의 순정을 잃지 않고 늙어서까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한 그 모습이 빛나 보였던 것이다.
“유정 씨,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것이 제가 추측한 게 맞다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시고…….”
정우호는 최유정의 생각을 정확히 맞췄다.
“분명 접근은 첫사랑이 생각나서 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만남을 요청한 것은 유정 씨라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어제 제가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 유정 씨는 조용히 들어주시고, 공감하시고, 위로해 주셨죠. 저는 거기서, 유정 씨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 모습조차도 첫사랑과 닮아서 그런 것 아닌가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만, 저는 진심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정우호는 진심이었다. 만약, 외모만으로 최유정을 선택했다면, 최철규와 얘기하던 날, 곧바로 최철규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겠지.
하지만, 정우호는 최유정을 곧바로 소개해 달라고 하기보다는 며칠의 말미를 얻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사라질 테니까.
와이케이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 먼발치에서 최유정을 볼 기회조차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직접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정우호는 최유정에게 반해 버리고 말았다.
수란이 누나를 잃고 오랜 기간 갈 곳을 잃었던 정우호의 마음.
그 마음이 최유정이라는 안식처를 찾았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고백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최유정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회장님, 저는 30대예요. 회장님 주변에 젊고, 늘씬하고, 예쁜 20대 여자들이 줄을 서고 있을 텐데, 왜 저를 선택하시는 거죠?”
“그거야 말했듯이…….”
최유정은 정우호의 말을 잘랐다.
“저는 지금 회장님이 신뢰가 안 가요. 그냥 저를 꼬셔서 어떻게든 이번 일에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란 생각밖에 안 든다구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지 않아요?”
“그러니까…….”
최유정은 다시 말을 끊었다.
눈물이 살짝 고인 최유정의 눈.
최유정 역시 어제의 정우호에게서 호감을 느꼈기에 상당한 배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상속과 증여 때문에 이번 재벌 전쟁이 일어난 거라고 하던데, 회장님은 상대편, 그것도 선봉장이잖아요. 그런 분의 말을 제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저도 순정이 있어요. 30대 후반의 미망인이지만, 순정이 있다고요! 그런데 회장님은 절……, 으흐흑…….”
진짜로 눈물을 흘리는 최유정의 모습에, 정우호도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뻤다.
왜냐하면, 최유정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었었다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유정 씨, 제가 이번 일의 선봉장이 되었던 것은…… 저를 버리고 떠날 입양아들이지만, 제 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고 했던 거지요. 하지만, 유정 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놓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수란이 누나가 원했던 것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단’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거지요. 전 지금, 제 입양아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자식이라 부르지 않고 대놓고 ‘입양아들’이라고 부르는 상황.
하지만, 최유정은 믿지 못했다.
“못 믿어요! 한 번 속인 사람을 어떻게 믿으라구요!”
단호하면서도 감정적인 최유정의 행동에 마침내 정우호가 사나이의 칼을 뽑았다.
“유정 씨, 앞으로 3일 이내에 유정 씨가 납득할 만한 일을 해 보이겠습니다. 3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우호는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단지, 손수건 한 장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