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27)
#27화 목표는 4년 후 (4)
저벅저벅.
스위트룸에 메릴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 발걸음 소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저벅저벅.
연주를 하고 있는 윤기 역시 연주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어느 순간 코끝을 달콤한 향기가 찌르고, 입술에서 묘하게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나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응……?”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며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메릴.
풍성한 속눈썹이 맺혀있는 눈이 크게 커진 상태로 자신 스스로도 당혹감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저…….”
연주를 멈춘 윤기가 부르려고 할 때, 메릴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구둣발을 콩콩거리며 할아버지가 있을 별실로 뛰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꺅……!”
낮은 비명 소리.
별실 입구 쪽에서 거스터와 콜슨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
결국, 메릴은 방향을 틀어 스위트룸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메릴!”
깜짝 놀란 거스터가 황급히 손녀의 뒤를 따라 나갔고, 이어서 콜슨이 윤기를 향해 외쳤다.
“윤기야!”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만지던 윤기도 정신을 차리고는 가방들을 챙기고는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엘리베이터의 차이 때문에 콜슨과 윤기가 1층에 도착했을 때는 거스터가 손녀를 달래는 것을 완료한 듯, 메릴은 거스터의 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물론 고개 자체는 돌리고 있었지만.
“어린 애들끼리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런가? 핫핫핫!”
거스터의 말에 콜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손자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괜찮다니까? 소련에서는 더 심한 일이 있었지 않은가.”
독소 전쟁 이후, 결혼 적령기의 남성들이 극단적으로 줄어, 10살짜리 아이가 20대, 30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흔했던 일을 언급하는 거스터의 말에 콜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한국 여행을 하실 거라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부탁 좀 할까? 오늘은 좀 쉬고 싶군.”
“그럼, 내일 오전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리하자구.”
호탕하게 웃으며 콜슨의 등을 몇 번 두드린 거스터가 다시 스위트룸으로 올라갔고, 콜슨 준장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어진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손주에게 물었다.
“일은 잘된 거냐? 나는 아직도 정신이 없단다. 저분은 미국에서 정말 연줄이 대단하신 분이거든.”
대답 대신 윤기는 할아버지를 안았다.
“할아버지가 정말 최고예요.”
손자 사랑은 팔불출.
콜슨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윤기를 향해 물었다.
“최 씨 녀석보다도 더?”
그러자 윤기는 콜슨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비밀이에요.”
비록 오늘 하루, 엄청난 피곤함을 느꼈던 콜슨이었지만, 손자의 단 한 마디로 모든 피곤함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 * *
손녀를 따라 스위트룸으로 들어온 거스터는 둘만 남기가 무섭게 폭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그 녀석이 그렇게 마음에 든 거냐?”
“놀리지 마요!”
“한국 기준으로는 10살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8살이나 9살 정도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그렇게 좋았냐?”
“몰라요!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는데 저보고 어쩌라고요.”
“콜슨 녀석은 알겠지만, 그 손자 녀석이 네 본 모습을 못 봤다는 게 아쉬울 정도야. 지금의 네 모습이 진짜 모습인데 말이지.”
메릴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청초하고 단아한 인상을 주지만, 조금만 친해져도 금방 본 모습을 드러낸다.
원피스를 입고 그네에 앉아 책을 보는 소녀가 아니라, 원피스를 입고 진흙밭을 뛰어다니며 전쟁놀이를 하는 소녀랄까?
지금까지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메릴이었지만, 오늘 윤기를 만나고 처음으로 고민이 생겼다.
‘그 애가 내 본모습에 대해 알면 어쩌지?’
상념에 빠진 메릴은 입을 다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얼굴에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거스터는 한마디 더 꺼낼까 하다가 손녀가 마치 건드리면 작동하는 시한폭탄으로 보여 이내 포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10살짜리 아이의 사업 계획서라…….’
거스터는 윤기가 두고 간 사업 계획서를 다시 한번 정독하기 시작했다.
* * *
윤기의 말에 피로가 씻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피로함을 느꼈던 콜슨은 빨리 자기 위해 자리에 일찍 누웠다.
하지만,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자신도 모르게 거수경례를 했다.
“거스터 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아, 다른 게 아니고 오늘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말이야.]콜슨은 순간 굉장한 당혹감에 눈동자까지 흔들렸다.
혹시나 자신이나 자신의 손자가 큰 실수나 결례를 저질렀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자네가 자리를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아마 자네라는 인연이 없었어도 호기심 때문에 한 번은 내가 도와주었을 것 같아. 자네, 정말 대단한 손자를 뒀어.]불안감이 일시에 녹는 것을 느끼며 콜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사람, 한숨을 쉴 정도로 그렇게 긴장했었나?]“대장님한테는 그 어떠한 누도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아, 우리 인연이 40년이 넘어. 그 정도 민폐 좀 끼치면 어떤가? 아무튼, 자네가 부러워. 비록 자네가 혈혈단신에 딸 하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핏줄을 두고 있는 나보다 더 대단한 다이아몬드를 얻었어.]“그 정도로 느껴지셨습니까?”
콜슨 역시 자신의 손자가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이 이 정도로까지 고평가를 해 주니 솔직히 굉장히 신기했다.
[자네는 할아버지라서 모를 거야. 원래 자기 자식은 저평가를 하게 되는 법이거든. 자네 손자……, 잘하면 대단한 인물이 되겠어. 집안이 능력에 비해서 부족할 정도야.]“다 제가 부족한 탓이죠. 저도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이름만 빌려주는 것을 떠나, 내가 아주 조금만 더 힘을 실어 주도록 하지.]“그게 정말이십니까?”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하는 만큼, 콜슨 준장의 목소리에 기쁨이 실렸다.
[물론이지. 혹시 내 힘이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자네를 통해서 전달하라 하게. 예를 들어 수입을 하고 싶은데, 힘들다거나 하는 것 말이야. 어차피 한국에 있는 우리 미군을 위한 품목이니 내가 힘을 실어 줘도 되겠지.]“감사합니다. 윤기 녀석도 아주 좋아할 겁니다.”
[그나저나 메릴 녀석, 아직도 멍한 표정이야. 자네 손자 어디서 그렇게 바이올린을 배운 건가? 비록 나이가 어려서 아직 부족한 점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마음이 느껴지는 연주였어.]“집에서 짬짬이 연습하는 것을 보긴 했습니다만, 제가 음악적 지식이 영 없어서 저는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정말 다재다능한 녀석이로군. 하지만, 음악 쪽으로 가지 않은 게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일지도…….]“제가 최선을 다해 감독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즐거웠어. 내일 보자구.]“예, 편히 쉬십시오!”
끊긴 수화기를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콜슨은 그야말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찬가지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거스터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직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손녀 메릴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이야 금방 변할 수 있고, 메릴 역시 그 녀석에게 쉽게 싫증이 날 수도 있지만…….’
거스터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지금은 내 손녀에게 부족한 녀석이지만, 내가 조금 도움을 준다면 훨씬 더 뛰어난 녀석이 될지도 모르지. 꽤 재미있는 녀석을 만났어.’
거스터는 방금까지 들고 있던 수화기를 전화기에 내려놓았다.
* * *
이야, 이 녀석, 이거. 아주 여자를 꾀는 데 소질이 아주 타고났어?>
“그만 해요.”
히야, 나는 왜 바이올린을 들고 가나 했더니, 내가 손녀 있다고 말해 준 것 때문이었어?>
“그만하라니까요.”
나는 왜 나를 공항으로 미리 보냈나 했네. 여자 꾀려고 보낸 거였어?>
계속 입을 다물지 않는 최덕배를 향해 윤기가 조용히 주머니에서 대추를 꺼내 들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래서 한 상 차려 줬는데, 계속 그렇게 놀려야겠어요?”
짜증 가득한 윤기의 말에 최덕배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뒤통수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덕배의 앞에는 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성스러운 집밥이 차려져 있었으니까.
“솔직히 바이올린은 재롱잔치라도 해 볼까 하고 가져간 거였어요. 제 무기는 최선을 다해 써야 하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거스터 대장이랑 말이 잘 통하는 바람에 손녀한테 쓰게 됐지만요.”
결혼할 거냐?>
막 우유를 한 모금 마시려던 윤기는 우유를 그대로 컵에 뿜었다.
아니, 그냥 묻는 거야.>
미간을 찡그리던 윤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좋아한다고 해도 일이 쉽게 풀릴 리도 없고요.”
왜?>
“백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일수록 기본적으로 인종 차별에 대한 심리가 많아요. 할아버지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거스터 대장의 입장에서는 전 그저 동양인일 뿐이란 말이죠. 자신의 연줄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대단한 곳에 손녀를 결혼시킬 수 있을 텐데 뽀뽀 한 번 했다고 저를 손녀랑?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러려나? 조선 시대 때도 피부 허연 것들이랑 결혼하는 애들 은근히 있었는데. 꺼먼 것들이랑 결혼하는 애들도 있었고.>
“당장 할아버지도 허연 것, 꺼먼 것이라고 표현하네요.”
아!>
최덕배는 확실히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다음은 어떤 일을 할 거냐?>
“한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공부 쪽에 집중해야죠. 근태 아저씨가 일을 끝내야 제가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한동안은 한가하겠구먼.>
“저는 바쁘겠지만요.”
말을 끝낸 윤기는 우유를 비우자마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 윤기를 바라보며 최덕배는 배시시 웃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노력만 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야. 아까 거스터란 녀석이 그랬거든.>
* * *
찬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하는 77년의 11월.
류근태는 그야말로 골이 빠개질 지경이었다.
‘도련님 앞에서는 어떻게든 해내겠다고 말은 해 놨는데, 이거 진짜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인 거 같아.’
건설업을 시작할 수 있는 인재 모으기.
아직까지 20개월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아직도 진척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동문의 건축학도들은 삼우 물산 쪽의 건설 계열도 가려고 하지 않을 텐데, 하물며 삼우도 아닌 이제 막 시작하는 회사에 들어오려고 할 리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회장의 맏손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만약 삼우 그룹이 재계 10위쯤 된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100위인 지금은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삼우 그룹보다 위에 있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밑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영입해야 할 경력 있는 자들 역시 불안한 회사에 이직하려고 하지 않았다.
‘젠장, 젠장. 오늘 이것마저 잘 안 되면 답이 안 나오는데…….’
오늘 류근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을 썼다.
그것은 바로 고향에서 건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삼촌을 찾아가는 것.
미친 척하고 삼촌에게 회사의 운명을 도련님에게 걸어 보라고 요청해 볼 생각이었다.
회사를 일단 해체하고, 도련님의 밑으로 다시 재취직을 하든가, 아니면 회사의 주식 자체를 싸그리 넘겨서 경영권을 포기한 자회사 취급을 받게 하든가 말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류근태에게는 답이 없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회장 직속 비서실에서 일했다고는 하지만, 겨우 30대의 직장인.
윤기조차도 어려운 일인 것을 알고 맡긴 만큼, 류근태의 입장에서 정말로 버거웠다.
꾸욱!
사장실에서 삼촌을 기다리던 류근태가 자신의 바지 무릎을 움켜쥐었고, 다시 놓았을 때, 그 부분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끼익!
“오, 근태야. 무슨 일이냐? 네가 이 시간에 여길 다 찾아오고?”
삼촌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삼촌은 류근태를 보자마자 환대하며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삼촌 보고 싶어서 왔죠.”
40대 후반의 김정선.
배가 살짝 나오고, 쌍꺼풀이 인상적인 외모는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이 녀석, 나이 다 먹고 삼촌한테 용돈을 받으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뭐, 직장에서 잘리기라도 했냐? 삼촌한테 취직하려고?”
류근태는 속으로 ‘으…….’하고 고민을 하다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생각으로 저돌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삼촌, 부탁이 있어요.”
“그럴 줄 알았지. 무슨 부탁인데?”
환히 웃으며 물어보는 삼촌을 향해 류근태가 직구를 넘어서 핵 직구를 던졌다.
“삼촌 회사를 싸게 파실 수 있나요?!”
장고 끝에 악수 둔다.
지나친 생각으로 류근태는 너무 앞과 뒤를 자른 말을 꺼냈고, 이는 당연한 대답을 끌어냈다.
“미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