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293)
#293화 선택지가 두 개! (2)
“왜 그리 놀래?”
정재운의 상사인 박 부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뜬금없이 소련이라뇨…….”
정재운은 처음에는 살짝 높게, 하지만 끝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반론했다.
하지만, 박 부장은 그런 정재운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박 부장도 윗선의 명령을 전달하는 쪽일 뿐이니까.
“뭐가 뜬금없어. 와이케이가 소련에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니야?”
물론, 박 부장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윗선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시킨 것을 어쩌겠는가?
당장 박 부장만 해도 윗선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소련에 보내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아, 그러면 박 부장이 가면 되겠네. 그렇지?]놀랍게도 대단히 흔한 기업 문화.
박 부장에겐 자신이 피해를 받아 가면서까지 정재운을 옹호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결론적으로 정재운이 소련을 가게 되었다.
물론, 박 부장은 정재운을 윽박지르지 않았다.
만약 윽박질러서 정재운이 확 사표라도 쓴다면, 소련에 가야 할 사람은 정재운이 아니라 자신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기에 박 부장은 방금의 말과 더불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정 과장은 최근에 애도 태어났잖아?”
바로 정재운이 반응을 보였다.
“네, 그러니까…….”
‘그래서 소련을 가기는 좀’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박 부장이 환상적인 타이밍에 말을 끊었다.
“그래, 그러니까 돈도 많이 들어갈 거 아니야. 정 과장이 소련에 가면 회사에서 그런 정 과장의 노력을 몰라 줄 거 같아? 애 엄마 미역국에 소고기를 넣고, 아기 먹을 분유를 미국산으로 쓰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어갈 텐데, 그깟 몸 좀 힘들다고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할 거야?”
정재운은 한 달 전에 태어난 자기 자식을 떠올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
아이를 위해, 회사에 충성을 다해 김무진을 나락으로 빠뜨릴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나락에 빠질 차례가 되었다.
“저…… 제가 소련에 가면 대우는…….”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지고 윗선에 이야기해서 좋게 받아 낼 테니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계속되는 정재운의 채근에 박 부장은 ‘쓰읍’ 하는 소리와 함께 미간을 찡그렸다.
“정 과장, 나 못 믿어? 정 과장을 밑에서부터 끌어올려 준 게 바로 나야. 지금 당장 조건을 어떻게 말해 주나? 아직 정해진 게 없는데.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정 과장을 책임져 준 것처럼, 확실하게 조건을 받아 내겠다고 이야기하잖아. 정 과장, 나 못 믿어?”
“아, 아닙니다. 부장님만 믿겠습니다.”
박 부장의 양괄식 화법.
정재운은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소련행을 거절하면 정재운은 그날로 해고를 당하는 게 당연한 상황.
통장에 돈이 넉넉하지 않은데,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다면 당장에 생활이 어렵다.
더군다나 퇴직금도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에, 여기에서 강하게 나가는 것은 정재운이 도저히 선택하기 어려운 선택지.
그렇기에 정재운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박 부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휴…… 다행이다.’
박 부장은 정재운이 호구로 남아 주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 과장아,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이게 다 회사생활인 거니까.’
아마, 정재운은 3년에서 5년 정도 써 먹히다가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회사에서 버려질 거다.
실무 경험도 없이 30대 중후반이 된 인물을 회사에서 쓸 리가 없으니까.
* * *
“여보, 나 왔어.”
정 과장은 다소 힘이 없는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아내 역시 목소리에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
이제 출산한 지 한 달 된 상황에서 힘이 있기는 당연히 힘든 법이다.
“응, 오늘은 일찍 퇴근하래.”
“그렇지 않아도 아가가 아빠 보고 싶다고 종일 칭얼댔는데 좋아하겠네요.”
힘든 와중에도 남편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아내의 모습에, 정재운은 속이 착잡해졌다.
“어이구, 우리 공주님. 오늘도 맘마 많이 먹었어요?”
정재운은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갓 한 달이 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와도 같은 딸의 모습.
그런데 이 모습을 얼마 안 있으면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여보,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순간 정재운은 화들짝 놀랐다.
“응? 아, 아니야. 무슨 일이 있긴 뭐가 있어.”
둘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끊은 것은 정재운의 어머니였다.
“아니, 벌써 퇴근했니?”
“네? 아, 어머니. 언제 오셨어요?”
“며느리가 출산해서 힘들 텐데 당연히 내가 자주 와야지. 점심 먹었니?”
“네? 아, 아뇨. 아직…….”
“그럼 앉아라. 며늘아기랑 같이 먹어라.”
어느새 밥상에는 밥공기가 하나 늘어 세 개가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고기미역국.
큼지막한 전복을 통으로 삶은 전복 숙회.
보기만 해도 달달하게 느껴지는 호박죽.
거기에 마즙까지.
그야말로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들이 가득 놓인 식탁은 간이 슴슴했지만, 시어머니의 정성이 느껴지는 밥상이었다.
“어머님, 힘드실 텐데…….”
“힘들기는 뭐가 힘들겠니? 내가 젊었을 때는 시어머니가 이런 것을 전혀 안 해 줘서, 나중에 며느리 들어오면 이런 거 꼭 해 주기로 마음먹었어. 오히려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준 거지.”
“어머니…….”
정재운의 아내는 눈물을 글썽였다.
“뭔, 눈물을……. 자, 얼른 먹어라. 먹어.”
함박웃음과 함께 며느리에게 숟가락을 건네준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밥 위에 전복 숙회를 한 점 올려 주었다.
“이 녀석아, 서운해하지 말어. 애를 낳았으면 여왕이야, 여왕.”
어머니의 말에 정재운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들을 못 낳아서 죄송해요…….”
“아니, 얘는 도대체 그 말을 몇 번 하는 거냐? 우리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아서 소박맞은 사람이고, 내가 그걸 옆에서 보고 자란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며느리한테 아들 못 낳았다고 뭐라 하겠니? 어차피 인명재천이라고, 하늘에서 다 정해 준 거니까 죄책감 가지지 말거라. 딸이면 어떠냐? 저렇게 귀여운데.”
80년대를 기준으로는 정말 톱 클래스의 시어머니가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좋은 분위기 덕분에 정재운은 더더욱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기가 말을 꺼내는 순간, 이 화목이 깨질 것 같았으니까.
‘회사에 사표를 낼 수도 없고…….’
당연한 말이지만, 정재운은 사표를 냈을 때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는 직장에 취직할 자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정재운은 회사에서 더러운 일을 전담하는 역할.
그런 만큼,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서는 좀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다.
동종 업계에 간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리스크는 똑같이 질 테고, 동종 업계에 가지 않는다면 월급은 당연히 곤두박질칠 것이다.
지금의 화목이 돈에서 온다고 철석같이 믿는 정재운에게 있어서 이직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니?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야?”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애 아빠가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내와 어머니.
여자 두 명이 다그치기 시작하자, 정재운은 점차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아니, 별일 아니에요.”
“별일이 아닌데 수척해 보일 정도로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하구나.”
“여보, 말해 봐요. 가족 좋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
“아니, 별일 없다니까…….”
결국, 아내는 약간 화를 내기까지 했다.
“여보, 그렇게 계속 숨길 거예요? 결혼하면서 서로 간의 비밀은 없도록 하자고 약속했잖아요.”
아내가 예전의 약속까지 끌고 나오자, 결국 정재운은 조금의 입씨름을 더한 끝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아아…… 나중에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정재운은 밥상 위를 검지로 톡톡톡 하고 한참을 두드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동안…… 소련에 가야 할 거 같아.”
“네? 소련이요? 네? 어? 소련? 잠깐, 지금 소련이라고 했어요?”
얼마나 당황을 했으면 아내의 말은 거의 횡설수설한 수준이었다.
“소련? 에구머니나! 소련? 너 지금 빨갱이들의 나라에 간다는 거냐?”
어머니의 말은 아내보다 훨씬 직설적.
그렇기에 정재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에이, 빨갱이라뇨. 요즘 누가 소련을 빨갱이라고 해요. 당장 와이케이가 소련에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데요. 진짜 빨갱이 나라면 그렇게 투자 못 하죠.”
“아무리 그래도, 6·25 때 북한 도와준 게 소련 아니냐. 그 빨갱이 놈들의 나라에 네가 왜 가? 거기 갔다가 고문이라도 당하는 거 아니냐?”
어머니의 말은 정재운의 정곡을 찔렀다.
만약, 와이케이의 뒤를 캐다가 소련 정부에 의해 잡힌다면?
정말로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미 정재운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가족 앞에서 인정할 수는 없는 법.
“에이, 사업차 출장인데 무슨 그런 일을 당해요. 그런 거 없어요. 100퍼센트 안전한 일이에요.”
정재운이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한 덕분인지, 어머니는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다. 하지만, 아내가 남아 있었다.
“그러면, 얼마나 다녀오시는 거예요? 2주? 한 달?”
사실상 희망 사항을 담은 물음.
하지만, 정재운은 아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글쎄…… 2년에서 3년은 걸릴 것 같은데…….”
“아니, 뭐라고요?!”
“얘야,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핏덩이를 두고 3년이나 집을 비운다니?”
아내와 어머니, 둘 다 난리가 났다.
“잠깐만요. 3년 동안 내내 소련에 있는 건 아니죠? 중간중간 한국에 자주 돌아오는 거죠?”
아내의 마지막 소망이었지만, 이 역시도 들어줄 수 없는 소망이었다.
애초에 산업스파이와 소통을 해야 하는 직책인데, 자리를 비울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아니, 여보…… 무슨 회사가 그래요. 어떻게 사람을 3년이나 소련에 보내요. 차라리 사표를 내요. 네? 제가 아껴서 살 테니까, 그냥 한국에서 같이 살아요.”
“얘야, 그래라. 어떻게 3년 동안 아내랑 아기를 두고 외국에 나간다는 거냐. 막노동을 해도 좋으니까, 그냥 한국에서 살려무나. 응?”
하지만, 정재운은 도저히 어머니와 아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애원과 거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정재운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일어났다.
“아, 진짜! 막노동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가정을 이루면서 사냐고요! 저도 머리가 아프니까 그만 좀 하세요!”
“응애애애애애애애!”
정재운의 고함에 아기가 잠에서 깼고, 집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정재운은 소련행 비행기에 올랐다.
* * *
정재운은 소련의 수산물 수입을 명목으로 소련에 자리를 잡았다.
공항에 나와서까지 가지 말라고 울먹이던 아내를 뒤로한 채 도착한 소련.
그게 벌써 한 달이나 된 상황.
김무진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의미가 있는 정보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끽해야 한글로 연구를 하고 있다는 특이점 정도일까?
‘하아, 지루하군.’
정말이지, 너무나 지루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젖먹이가 눈앞에 아른거렸고, 언제나 자신을 케어해 주던 아내가 그리웠고, 어머니의 푸근함이 그리웠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조금만 삐끗해도 향수병이 걸릴 것 같은 상황.
그렇게 정재운이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재운아!]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수산물과 관련한 사업을 하러 왔기 때문에 가족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준 상황.
물론, 국제전화 비용이 너무 비싸서 통화를 건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다은이가 아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를 어째!]* * *
어머니와의 통화를 끊은 후, 정재운은 이성이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이성을 붙잡고는 전화기를 들어 바로 박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부장님!”
[어, 정 과장.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정해진 시간을 제외하면 통화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나?]박 부장의 목소리에는 친근함이 일절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재운은 그걸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당장 중요한 용건이 있었으니까.
“부장님! 제 애가 많이 아픕니다.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정 과장,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