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302)
#302화 자본주의식 목줄 (2)
40대 중반인 미국의 중견 변호사 루카스.
루카스의 밤색 곱슬머리 안쪽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가볍게 흘러나왔지만, 볼에 흐르기 전에 머리카락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미국 변호사라도 계약서가 영어가 아닌 경우는 보지 못했을 테니까.
“어…… 미스터 조. 이 계약서는 혹시 당신 국가의 언어로 적혀 있는 겁니까?”
정중하면서도 당황스러움이 섞인 루카스의 물음에, 조청우가 세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연스럽게 루카스의 얼굴에 뜨악한 표정이 지어졌다.
“아, 아니, 잠깐만요. 계약서는 영어로 써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왜요?”
미소와 함께 돌아오는 반문에 루카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계약서를 영어로 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계약서를 영어로 쓰는 것은 사실상 불문율이나 다름없는 것.
그런데 루카스는 한글 계약서를 받게 된 것이다.
“어…… 미스터 조. 미국에서 계약할 때는 보편적으로 영어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특수한 상황도 있다는 거군요! 지금이 바로 그 특수한 상황이에요.”
만약 지금 조청우의 손에 귤이 들려 있었다면, 조청우는 분명 흰색 실 같은 것들을 떼면서 웃고 있었겠지.
하지만 귤이 없었기에, 조청우는 볼펜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루카스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잘 돌리는데……?’
순간, 루카스는 조청우의 펜 돌리기에 집중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루카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터 조. 우리는 보편적인 계약을 원합니다. 그러니 영어로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으면 합니다.”
“안 돼요.”
그야말로 즉답.
하지만, 너무나도 환한 미소가 루카스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아니, 왜요?”
“회장님의 지시 사항이거든요.”
“회장님의 지시 사항이요……? 최기현 회장님……?”
“아뇨, 최윤기 회장님이요.”
루카스는 와이케이 그룹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바지사장을 떠올렸다.
물론, 바지사장이라는 것 자체가 전략적인 거짓말이었지만, 루카스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루카스는 어린아이의 고집 정도로 치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스터 조. 계약은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 누가 장난을 치고 있죠?”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조청우의 모습.
기본적으로 협상을 하거나 계약을 맺어야 할 때, 기업은 능수능란한 사람을 내보낸다.
왜냐하면,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가져오니까.
하지만, 윤기는 이번 계약에 대표로 조청우를 내보냈다.
오직 조청우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상대가 얼마나 능수능란하든지 간에 자신의 마이페이스를 절대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지금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았다.
상대가 분명 말은 잘하는데, 통하질 않고 있었으니까.
“미스터 조. 우리는 영어 계약을 원합니다.”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빵싯 웃는 조청우의 모습에 루카스의 관자놀이가 불룩 솟아올랐다.
“그러니까, 최 회장님을 설득해서 영어 계약서를 쓰는 것이 당신의 의무 아닙니까?”
“회장님이 이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니까요?”
“아니, 진짜!”
결국, 루카스가 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 그냥 가시게요?”
루카스는 그만 뒷목을 잡고 말았다.
물론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환장해 버렸다는 이야기.
결국, 계약서는 작성되지 못했다.
* * *
“응? 뭐라고?”
집무실에서 루카스의 보고를 받던 레이건은 대단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마십시오. 세상에 그렇게 단순할 정도로 순수……? 멍청……? 아무튼, 이상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니, 말이 다른 의미로 안 통해요!”
“아니, 그거 말고.”
“네?”
루카스는 레이건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됐냐고.”
“네? 아, 영어 계약서를 가져오라는 말을 한 뒤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계약을 맺지 못했다고?”
“그렇습니다. 영어로 되어 있지 않은 계약서는…….”
“미쳤냐?”
순간, 루카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미쳤냐고. 계약서가 한글로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향후 일정을 조율하지도 않고, 통보만 하고 밖으로 나와?”
“아니, 각하. 영어로 된 계약서를 쓰는 것은 사회 통념상으로 당연한 일이고…….”
“아니, 이 미친 새끼야. 에이즈 치료제를 공동 개발하자는 것도 아니고, 독점으로 유통할 수 있는 계약을 맺는 건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어?”
레이건은 뒷목을 잡았다.
상식적으로 쌍방 대등한 계약을 맺는 것이라면 루카스의 행동이 맞을지도 몰랐겠지.
하지만, 이번 계약은 레이건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계약이었다.
애초에 레이건에게 뇌물이라고 쓰고, 기부라고 읽는 행위를 해 주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20퍼센트.
이번 계약과 관련되어 있는 공화당의 인물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유통 업체의 사장은 레이건의 친척이 당첨되었고, 간부진에는 공화당 인물들의 친척이 배정되었다.
더군다나, 비상장 회사지만 레이건의 아내가 제1 주주로 등록되었기에 배당금을 쓸어갈 수 있었고, 다른 공화당의 중진들 역시 레이건의 허락하에 이런저런 방법으로 빨대를 꽂은 상황.
그런데 계약을 맺기로 한 날, 계약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
“각하, 계약서에 사용하는 언어는 대단히 중요해서…….”
“닥쳐, 이 멍청한 새끼야!”
레이건의 얼굴은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오늘 계약을 맺지 못해서 일이 틀어진다면?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와이케이 제약 쪽이 기분이 나빠서 계약을 좀 미루겠다며 시간을 질질 끌거나 계약의 대상을 공화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바꾸거나 하면, 레이건만 미시시피강 오리 알 신세가 되는 거였다.
자고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계약은 최대한 빨리 맺어야 하는 법.
그렇기에 레이건은 끌어 올라오는 혈압을 억지로 누르며 루카스를 향해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지금 당장 가서 계약을 맺고 와.”
“각하, 하지만, 언어가…….”
“한국어 능통자를 데리고 가든지 해서 맺고 오라고!”
마침내 레이건이 두툼한 손바닥 크기의 십자가를 루카스에게 던졌다.
그야말로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루카스는 뒤로 벌렁 넘어갔고, 그제야 루카스는 상황을 파악했다.
미국 그 자체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컸던 루카스.
하지만, 그 자부심도 자본주의에는 이길 수 없는 법이다.
* * *
레이건의 분노를 제대로 맛본 루카스는 다급하게 조청우를 향해 다시 연락을 걸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받아라…….’
다행히도 사무실에 전화를 건 결과, 조청우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 미스터 조?! 저 루카스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다름이 아니라, 계약서를 작성하고 싶습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 지금 시간이요?]“네!”
어쩐지 될 것 같은 태도에 루카스가 반색했다.
하지만.
해맑기 그지없는 목소리.
루카스는 레이건처럼 뒷목을 잡았다.
레이건이 루카스를 대할 때가 이런 기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의외로 역지사지를 모르는 법.
그래도 루카스는 레이건이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배웠기 때문에, 참을성이 많이 늘어난 상황이었다.
“아, 언어 때문에 그러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글로 된 계약서도 상관없습니다.”
[아뇨, 언어 때문이 아닌데요.]“네?”
[곧 퇴근할 시간이라서요. 오늘은 정시에 퇴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루카스의 앞에 거울이 있었다면 메두사가 재림했다고 생각할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루카스는 얼굴을 마구 찌푸리면서도, 가까스로 목소리를 친절하게 붙들 수 있었다.
“아,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계약인데…….”
[야근 수당 없다니까요?]“……야근 수당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거 받으면 저 회사에서 잘려요. 아, 퇴근 시간 다 됐어요. 다음에 연락드리겠…….]순간, 루카스는 이대로 통화가 끊어질 것을 직감했다.
“미스터 조!”
[……니다!]전화가 끊겼다.
“…….”
루카스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수화기를 든 상태로 몇 분이나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아아아아악!”
루카스는 사무실에 있는 모든 물건을 여기저기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순수의 화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 뒤집기.
루카스의 머릿속에 절로 야구방망이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랴.
절대적인 갑은 조청우인 것을.
그렇기에 루카스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레이건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아, 여보세요. 윤기 군?”
레이건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네. 각하!]그야말로 공손하기 그지없는 윤기의 태도.
그렇기에 레이건은 더욱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계약서에 한글을 사용한다고 들었네.”
[아, 맞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영어를 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와이케이는 기본적으로 계약서를 한글로 작성하고 있습니다.]‘아…….’
할아버지에 대한 효도 때문이라는 데 어떻게 트집을 잡겠는가.
더군다나 고민도 없이 대답이 나왔기에 의심할 여지가 더더욱 없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레이건이 그걸 알 수는 없는 노릇.
윤기는 ‘주도권’을 가지고 싶었다.
레이건에게 숙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하지만, 숙이는 것을 오로지 레이건에 한정해야지, 레이건의 주변에서 일하는 모두에게 숙이게 되면 향후 행보에 결코 좋을 게 없었다.
‘레이건’, 혹은 ‘미국 대통령’만이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
자신은 이렇다고 레이건의 주변 인물들에게 인식시켜야 추후 행보에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을 여지가 있었으니까.
물론, 이 기회에 와이케이가 한글 계약서를 사용하면서 한글 계약서도 표준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부차적인 이익도 꾀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 그런데, 오늘 계약을 맺어야 했는데, 계약을 맺지 못했어.”
[네? 어째서입니까?]“……그냥 사정이 그렇게 됐네. 그래서 다시 계약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쪽 담당자가 퇴근을 해서 말이야…….”
[아…… 저는 당연히 계약이 되었을 줄 알았는데, 중간에 계약이 불발이 났었나 보군요.]전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윤기의 태도에 레이건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 직원은 야근을 좀 시킬 수 없겠나? 오늘 계약을 끝내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제가 따로 연락해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라고 하겠습니다.]“그래…… 부탁 좀 함세…….”
통화가 끝나고, 레이건은 루카스를 향해 전화기를 통째로 던졌다.
그리고 1시간 후.
루카스는 한쪽 눈이 까맣게 된 상태로 다시 조청우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출근하셨네요?”
살짝 으르렁거림이 섞여 있는 루카스의 가시 돋친 말. 그 말에 조청우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대답했다.
“네, 회장님이 시켜서요.”
덕분에 루카스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표정까지 대단히 어두운 조청우.
아마, 조청우의 근무 실태를 알게 된다면, 루카스는 진심으로 조청우를 동정하게 될 것이다.
* * *
윤기와 레이건의 치료제 계약은 완벽하게 끝이 났다.
더불어서 미국 내부에서 에이즈 치료제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 국민 대다수가 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에이즈에 걸렸던 톱스타, 그리고 고위층들은 성능이 확실히 더 뛰어난 치료제를 쓰기 위해 레이건 측에 접촉했고, 레이건이 운영하는 유통 회사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순익의 20퍼센트를 자신들이 먹는 것이다 보니, 그야말로 당연한 일.
와이케이 제약의 직원 일부가 유통 업체에 파견 나와 있기 때문에 장부를 속이거나 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현재 장부에 적히고 있는 와이케이 제약의 이득은 그야말로 하늘을 뚫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아주아주 평온한 1987년의 12월.
평온한 와중에도 아주 바빴지만, 윤기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어린이들의 축제에 시간을 내서 집을 방문했다.
왜냐하면, 정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줘야 했으니까.
“정아야, 정아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할아버지한테 어떤 걸 받고 싶어?”
윤기의 물음에 정아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놀이공원!”
정아는 ‘오빠랑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지만, 윤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