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580)
580화 이 정도면 되겠지? (4)
“조금 한가한 시간이니?”
박연지의 말에 메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애들 자요. 애들 아빠가 자기가 옆에 있겠다면서 조금 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머님이랑 차 한잔하고 싶어서 찾아왔죠. 그런데 미역국이 있네요? 먹어도 되는 거죠?”
박경자가 냄비 한가득 끓여 왔기 때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냄비 안의 미역국.
메릴은 아직 사용하지 않은 그릇 하나를 집어 들고는 국자에 미역국을 떠서 그릇에 담았다.
“어머, 어머님! 이거 진짜 맛있어요! 어머님이 끓이신 거예요? 아니면, 요리사가 레시피를 바꾼 건가?”
“어, 그게…….”
메릴도 박경자에 대해서 안다.
물론, 박경자에 대해 경험한 것은 없지만, 적어도 윤기가 누구보다도 박경자를 싫어한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여기서 박경자가 끓여온 미역국이라고 한다면?
메릴 성격상 체할 가능성이 다분했기에 박연지는 차마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아이고, 이걸 어째.’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생긴 일종의 파국.
결국, 박연지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을 이용하기로 했다.
“너는 미역국이 질리지도 않니?”
메릴은 출산 이후, 미역국을 참 많이 먹었다.
어지간한 여성들도 그 정도로 먹었으면 질릴 법도 한데, 전혀 질려 하지 않는 메릴.
“어유, 김치랑 미역국이랑 같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요. 안 되겠다. 이거, 너무 맛있어서 밥이랑 김치가 있어야 할 거 같아요.”
고용인에게 밥이랑 김치를 부탁한 메릴.
이후 메릴은 사발에 붙은 밥알 한 알까지도 싹싹 긁어먹었다.
“휴우, 정말 숨도 안 쉬고 먹었네요. 젖도 잘 나올 거 같아요. 어머님, 이 미역국 계속 먹을 수 있는 거죠?”
눈을 빛내는 메릴의 말에 박연지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어? 어어….”
박연지가 박경자에게 베풀었던 작은 친절이 어느새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었다.
* * *
사람이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계획을 세울 때,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를 대비한 플랜B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강민정의 계획은 윤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줄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계획.
그런데, 강민정은 플랜B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했으니까.
하지만, 윤기는 애초에 강민정과 유선일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다.
“흐아, 잠깐 잠이나 잘까.”
지금은 윤기가 잠시 쉬는 시간.
잠시 눈 좀 붙일까 생각했던 윤기였지만, 모처럼 어머니가 부르자 부리나케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부르셨어요?”
“응, 피곤하지는 않니?”
“괜찮아요. 내 자식들인데요.”
잡티 하나 없는 미소에 박연지 역시 마음이 푸근해졌다.
자식들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제대로라는 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이내 박연지의 마음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방금 식사하셨어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냄비를 본 윤기의 말.
윤기는 투명한 냄비뚜껑을 통해 안에 든 내용물이 미역국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으흐흐흐…, 미역국…. 전 이제 조금 지겹네요.”
윤기도 메릴처럼 미역국을 아주 많이 먹었다.
물론, 다른 메뉴를 먹을 수도 있었지만, 메릴이 힘내서 미역국을 먹는데, 혼자 다른 거 먹자니 미안해서 같이 미역국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메릴이 미역국을 좋아하는 만큼, 윤기도 미역국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소 질리는 것도 사실.
그렇기에 윤기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그거, 네 둘째 작은어머니가 만든 거야.”
“네…?”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윤기.
이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휴우, 솔직히 말해서 너한테 그냥 먹어 보라고 하려고 했거든. 동서가 만들었다는 걸 숨기고 말이야.”
하지만, 박연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고, 아들인 윤기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에 접근하는 데 속임수를 쓰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잘하신 것 같아요.”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진 윤기의 얼굴에 박연지는 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시작한 일, 계속 진행해 보기로 결정했다.
박경자가 옛날과 달리 정말 사람이 바뀌었다는 확신이 들었고, 메릴이 박경자의 미역국을 정말 맛있게 먹은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번 먹어 보지 않겠니? 나도 먹어 봤는데, 진짜 정성을 다해서 끓였더라구.”
“…드셨다고요? 뭘 넣었을지도 모르는데…?”
박연지는 박경자를 믿었다.
하지만, 윤기가 박경자를 믿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애초에 박경자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니까.
“설마 이상한 걸 넣었겠니. 한번 된통 당했고, 지금 그래도 먹고살 만해졌는데, 예전보다 더 심한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이런 이유로 박경자를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박연지는 윤기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했다.
“그렇기야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도 이미 드셨다고 하니, 휴…, 어쩔 수 없네요.”
“멀쩡하다니까?”
짐짓 알통 만드는 모습을 보여 주는 박연지.
윤기는 병원 검사를 받아 보시라고 말할까 하다가, 어쩐지 그건 선을 좀 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한 번만 먹어 봐. 이 엄마가 평소에 너한테 부탁하는 일이 자주 있는 편은 아니잖니?”
윤기는 잠시 오른 검지로 볼을 살짝 긁다가 결국 국자를 들었다.
아주 살짝 다시 끓인 미역국.
그렇기에 따뜻한 미역국이 그릇에 담겼고, 윤기는 숟가락으로 미역국을 한술 떴다.
1초, 2초, 3초.
살짝 크게 떠지는 윤기의 눈.
“뭐죠…? 이건…?”
의문의 의미가 아니었다.
비하의 의미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나오는 것은 감탄사.
“맛있지? 나도 깜짝 놀랐어. 20년 넘게 음식을 만들더니 아주 장인이 된 것 같더라구.”
윤기는 한 숟가락 더 먹으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자존심의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숟가락으로 한술 더 뜨고 말았다.
입가에 가져갈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윤기의 모습.
“그냥 먹어. 한 숟가락이나 두 숟가락이나 먹은 것 똑같지 않니?”
박연지의 말.
윤기는 정말 얼굴에 대놓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 주다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너도 정말 뚝심 하나는 알아 줘야 해.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이 엄마도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오늘따라 ‘엄마’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박연지.
윤기는 이미 박연지의 의중을 알아챈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이신지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완곡한 어조로 단호히 거절하는 윤기.
그러자 박연지는 마지막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며늘아기가 그 미역국을 매일 먹고 싶다더라구.”
“예에?”
순간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쭉 펴는 윤기.
“메릴은 그 미역국을 동서가 만든 지 모르고 먹었어. 내가 말할 타이밍을 놓쳤거든. 여기 오자마자 미역국 보고는 바로 먹는 바람에….”
박연지는 아까 메릴이 찾아왔을 때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가 없더라구. 그런데 그 앞에서 내가 어떻게 누가 만든 건지 말하겠니. 며늘아기 성격상 말을 듣는 순간 얹힐 텐데. 화장실 가서 토하려고 할지도 모르고….”
윤기는 어머니의 앞이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물론, 폭급하게 화를 내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오른손으로 얼굴부터 뒤통수까지 쓸어올리더니 이마에 오른손을, 오른 팔꿈치를 오른 허벅지에 댄 채 생각에 잠겼을 뿐이다.
잠시 후.
“후우, 어머니. 저 일단은 일어날게요.”
“그래…, 그러렴….”
박연지는 최선을 다했다.
* * *
저녁 식사 시간.
미역국을 한술 뜨던 메릴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박연지를 바라보았다.
“어머님, 아까 그 미역국 혹시 다 먹었나요?”
“어? 아니, 그게…….”
윤기의 반응을 보았기에 차마 그 미역국을 내놓을 수 없었던 박연지.
하지만, 메릴이 환히 웃으며 아까의 미역국을 부탁하자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응? 다른 미역국이 있었어?”
최기현의 말에 메릴이 답했다.
“네, 아까 어머님이 진짜 맛있는 미역국을 주셨거든요. 그거 또 먹고 싶어요!”
“호오, 그래? 애미야, 그런 게 있으면 다 같이 먹어야지. 얼른 가져오려무나.”
최기현까지 나선 상황.
윤기는 어머니가 더 난감해지지 않게 짐짓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저도 먹고 싶네요.”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오자 박연지는 호다닥 고용인에게 아까의 그 미역국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미역국이 도착하자 윤기는 차마 숟가락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으응~ 역시 이 맛이야. 할아버님 진짜 맛있죠?”
“호오, 진짜 맛있구…, 어?!”
최기현은 미역국을 먹자, 퍼뜩 상황 판단이 되었다.
다른 집안사람들과 달리 최기현은 박경자의 음식이 나름 익숙했다.
최기현에게 있어서 최철민은 어쨌든 아들.
그렇기에 만세복지관 사건 이후로 최기현은 종종 최철민을 만났고, 그때마다 음식을 대접받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이 미역국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고, 당연히 윤기의 반응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님, 왜, 그러세요?”
하지만, 아직 상황을 전혀 모르는 메릴.
“어? 아, 아니, 맛있구나.”
“그렇죠? 그렇죠? 진짜 맛있다니까요.”
메릴은 미역국에 밥을 말더니 김치를 척 얹어서 거의 마시듯이 먹기 시작했다.
정말 행복이 눈에 보이는 모습.
“자기야, 뭐 해? 자기도 먹어. 진짜 맛있다니까.”
메릴의 재촉에 윤기도 숟가락을 들 수밖에 없었다.
“맛있지? 맛있지?”
“으응…, 맛있네.”
“그렇다니까. 진짜 이런 미역국이라면 1년 365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야말로 극찬 중의 극찬.
“우와, 진짜 맛있네!”
눈치 없는 최철호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최기현과 박연지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윤기.
“나 먼저 애기들한테 가 볼게.”
윤기는 조용히 아기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 *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윤기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과 같은 증오심이 있는 것은 아니야.’
이건 사실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거나 하는 그 정도 수준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껄끄러운 것은 확실했다.
분명 이유도 있었지만, 예전의 그 이유가 아니라 이제 와서 굳이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축적되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메릴이 너무나 기쁘게 미역국을 먹는 모습을 보니 저울의 상황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 상황이라면, 지금은 그 무게추가 서서히 반대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할아버지도 이미 교류하고 계신 데다가 어머니도 이쯤이면 화해하는 것이 어떻냐는 뜻을 비치시는 중이기도 하고….’
만약, 지금의 박경자가 ‘미수범’이 아니라, 노가다 시절처럼 ‘실행범’이었으면 절대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박경자는 확실히 ‘미수범’이었다.
법정에서도 실행범과 미수범의 형량에는 차이가 있는 법.
개인 간의 원한에서도 약간이라도 차이가 나는 것이 실행범과 미수범이다.
더군다나 윤기 역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박경자가 얼마나 사람이 변했는지를 말이다.
“서준아~, 하윤아~, 이 아빠가 어떻게 해야 좋겠니? 용서할까?”
[[꺄하하하하하]]순간 윤기의 귀에 들려온 아기들의 목소리.
“응?”
깜짝 놀란 윤기가 아기들이 누워있는 요람을 확인했다.
아주 찰나, 순간적으로 웃은 듯한 착각.
물론, 현실적으로 지금 서준이와 하윤이가 웃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빨라도 생후 6주부터 아기들은 웃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윤기는 정말로 방금 서준이와 하윤이의 웃는 표정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용서하라는 거니?”
[[꺄하하하하하]]다시 한번 들리는 웃음소리.
“푸흐.”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고뇌가 무색할 정도로 쉽게 결정했다.
“그래, 너희들이 용서하라면 해야지, 어쩌겠니. 이 아빠가 용서할게.”
어쩌면 윤기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평범한 계기가 아닌, 윤기에게 있어 정말 소중한 계기가 말이다.
* * *
박연지가 쓰는 거실이 아니라, 윤기가 쓰는 본 거실.
그곳에서 박경자는 정말 완전히 움츠러든 자세로 몸을 웅크리듯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윤기.
“미역국을 끓여서 가져오셨다는 말을 듣게 됐어요.”
윤기의 말에 박경자는 거의 울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진짜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말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박경자.
그런 박경자를 보면서 윤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는 소리가 가득 퍼지는 거실.
박경자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내 박경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맛은 있더라구요.”
“에…?”
눈물로 흐려진 시야였기에 박경자는 윤기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윤기의 말 덕분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가끔 미역국이나 가져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