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63)
#63화 내가 명품이다 (2)
“응? 도와준다고?”
약간 의외의 말에 윤기가 반응을 보였다.
“응, 도와줄 수 있다니까. 내가 요새 뭘 하고 있는지 잊었어?”
“모델……?”
“응, 모델 일을 하고 있다고 했잖아. 명품에 관해서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아니,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초고가 명품 브랜드와 계약을 하는 일인데…….”
윤기조차도 다소 당황할 정도로 메릴의 텐션은 높았다.
“그러니까 도와줄 수 있대도?”
“계약을 도와줄 수 있다고? 모델이 그런 것까지도 가능해?”
윤기의 물음에 메릴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잡았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라고?”
“모델인 건 알겠는데, 모델이 그런 영향력이 있는지 감이 안 잡혀서 그래.”
윤기는 하회탈처럼 변하는 메릴의 표정은 볼 수 있었다.
“혹시 이 주변에 서점 있어?”
“서점이야 흔히 있지.”
“안내해!”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윤기를 집 밖으로 잡아끈 메릴은 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윤기의 소매를 슬며시 잡으며 대외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 * *
윤기가 노가다를 하던 시절에는 서점이라고 해 봤자 대형 서점들이 주요 지점에 큰 점포를 차리거나 온라인 서점을 운영할 뿐, 동네 서점들은 거의 고사하기 직전의 단계였다.
하지만, 80년대는 동네에 작은 서점들이 흔히 있었고, 그런 만큼 집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윤기와 메릴은 다소 작은 서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책 냄새가 나는 80년대의 약간 어두운 책방.
안경을 낀 마른 체형의 주인이 평소처럼 별 감흥 없이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윤기와 메릴의 외모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선을 고정했다.
윤기야 어차피 익숙한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메릴은 더욱 윤기의 옆으로 파고들었고, 덕분에 윤기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이 자식 이거, 입 찢어지는 거 봐라.>
최덕배의 말에 주머니의 대추를 문지르자, 윤기의 귓속으로 최덕배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저, 저, 저, 저놈의 대추! 아니 어떻게 이놈의 자식은 365일 대추를 몸에서 떨어뜨리질 않아?>
하지만 대추 앞에 귀신 없다고, 최덕배는 입을 다물고 주변을 배회했고, 윤기는 메릴과 함께 작은 서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잠시 뒤, 메릴이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자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찾는 게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메릴을 보며 윤기가 재차 물어보려던 찰나, 책방 주인이 살짝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학생, 뭐 찾아? 찾는 거 있으면 말해. 아저씨가 찾아줄게.”
갑작스러운 책방 주인의 등장에 메릴은 윤기의 등 뒤로 어린애가 숨듯이 숨었고, 덕분에 윤기가 메릴의 동작을 해석해서 책방 주인과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혹시 여기 패션 잡지 같은 거 있을까요?”
“패션 잡지? 저기 있잖아.”
윤기를 기준으로 복고 느낌이 가득한 한국의 패션 잡지가 진열되어 있는 장소가 있었지만, 메릴이 찾는 것은 그러한 잡지가 아니었다.
“아뇨, 한국 거 말고요. 외국 거는 없나요?”
윤기의 말에 갑자기 책방 주인의 표정이 음산하게 변했다.
“어유, 학생.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그런 걸 찾는 거야? 당연히 있지.”
책방 주인은 메릴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카운터 아래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앗……!”
윤기가 감탄사를 터뜨린 물건들은 다름 아닌 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잡지들이었다.
규제가 매우 강했던 80년대였지만, 어떤 의미로는 현대에 비해 규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미성년자에게 성인 잡지를 파는 것은 책방 주인들의 부수입 중 하나였다.
물론 성인들에게 파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어때, 찾는 게 이거 맞지?”
책방 주인이 상자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잡지 중 하나를 꺼내자 그곳에는 ‘미국다운 표지’가 떡하니 들어차 있었고, 윤기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남자로서의 정열을 떠올렸다.
“이거……, 으갹!”
손을 뻗으며 ‘바로 이거예요!’라고 말할 뻔했던 윤기는 있는 대로 꼬집어진 등짝에 비명을 질렀고, 고개를 돌리자 도끼눈을 뜨고 있는 메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읏흠! 이건 제가 찾는 게 아니네요. 제가 찾는 건 그냥 패션 잡지예요. 그냥 평범한 외국 패션 잡지는 없나요?”
“그런 게 이런 책방에 왜 있겠어.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이 옷 입은 여자를 뭐 하러 봐?”
너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책방 주인의 반응에 윤기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긴, 책방 주인의 말이 100퍼센트 이해가 가네.’
애초에 윤기도 지금이 아닌 예전의 80년대에는 책방 주인이 말하는 혈기왕성한 남학생이었다.
물론 지금도 혈기왕성한 남학생이지만.
“혹시 이 주변에 그런 잡지 파는 곳은 없을까요?”
“내가 아는 한 없을걸? 학교 주변 서점들이야 다 뻔하잖아. 시내로 나가서 큰 서점으로 가 봐. 그런 곳이라면 아마 있겠지.”
“감사합니다. 그곳으로 가 볼게요.”
등을 잡아끄는 메릴을 따라 윤기는 서점 문을 열었고, 그보다 더 뒤에서 책방 주인의 말이 들려왔다.
“다음에 혼자 와. 학생도 한창때잖아.”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 버린 윤기는 메릴에 의해 또다시 등살이 잔뜩 구겨져야만 했다.
* * *
단순히 서점에 가려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윤기와 메릴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시내의 대형 서점.
혼혈과 백인이라는 흔치 않은 조합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기에 윤기는 메릴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즐기고 있구먼.’
분명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메릴은 자신이 함께 걷고 있는 남자를 주변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의 60년 만에 데이트라는 것을 해 보네.’
노가다 인생을 살던 시절에는 감히 데이트라는 것을 꿈도 꿀 수 없었고, 회귀를 하고 나서는 워낙 바쁘게 달려오다 보니 이성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에 관심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당장 정신이 성인인 윤기의 입장에서 열 살 언저리 여자애들이 뭐가 예뻐 보이겠는가.
더군다나 발육 속도가 서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느린 한국의 여학생들은 윤기에게 더더욱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메릴은 달랐다.
나이보다 기본 몇 살은 더 먹어 보이는 외모 특성상 메릴은 아름다운 성인으로 보이고도 남았기에 윤기의 남심을 자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있어?”
외국 잡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는 메릴을 향해 묻자, 메릴이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바닥을 쫙 펴며 여러 개의 잡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잡지별로 한 곳씩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갖가지 옷을 입은 메릴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다.
“오…….”
절로 나오는 감탄사.
딱히 꾸미지 않은, 평상복을 입은 메릴의 모습도 예뻤지만, 대놓고 꾸민 메릴의 모습은 윤기조차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메릴이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가락으로 잡지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응?”
메릴의 가녀린 손가락이 가리킨 부분.
그곳에는 바로 메릴이 입은 옷들의 상표가 설명되어 있었다.
“아!”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메릴을 끌어안았다.
“꺅!”
메릴의 짧은 비명.
하지만 메릴의 입은 찢어지려고 하고 있었고, 윤기 역시 다른 의미로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아르마니.
돌체.
메릴은 초고가 브랜드의 모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프랑스로 향하는 여객기의 일등석에서 메릴이 쿠션에 몸을 푹 묻은 채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하아……, 역시 일등석은 너무 좋단 말이야. 진짜 오랜만에 타 보는 것 같아.”
“일등석을 오랜만에 탄다고?”
윤기의 말에 메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 집은 너희 집처럼 부자가 아니라고.”
“거스터 대장님은 부자 아니었어?”
메릴이 고개를 저었다.
“미군은 한국군하고 달리 비리를 저지르기가 힘들다고 하셨어.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존경받는 군인이지만, ‘돈을 벌려면 기업가가 되었을 거다.’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의외네……. 연줄을 잡으려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어?”
“너?”
“아니, 나 말고.”
쓴웃음을 짓는 윤기의 모습에 메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연줄을 통해서 자식들을 이곳저곳에 취직시켜 주시긴 했지. 하지만, 그뿐이야. 경찰이나 CIA라면 몰라도 미군이 돈 받고 전쟁을 안 할 수는 없잖아?”
간단하지만 맥락을 확실히 짚은 메릴의 말에 윤기는 자신과 손을 잡은 거스터의 행동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거스터의 입장에서는 아들 하나를 이사로 보내는 대가로 한국의 재벌가와 사돈을 맺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어차피 내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거스터는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자식을 또 다른 곳에 자리 잡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재벌만 한 돈은 없지만, 영향력은 재벌 이상이다.
이게 바로 거스터라는 존재의 의의라고 윤기는 결론지었다.
“그래도 미군에서 대장으로 퇴역을 했으면 대우는 좋지 않아? 엄청 좋을 거 같은데.”
메릴은 고개를 저었다.
“근무 당시에는 무진장 좋았는데 퇴역하고 나서는 딱히? 할아버지가 종종 과거를 그리워하실 정도야.”
“현역 당시에 대우가 어느 정도였기에?”
“굉장히 좋은 편이야. 침대가 있는 전용기랑 개인 제트기 무상 임대에 호화로운 저택도 주거든. 거기에 운전사는 기본에 요리사에 가정부, 개인 비서까지. 그야말로 왕 부럽지 않은 수준이지.”
“대단한데……?”
윤기는 한국군의 대장보다 좀 더 나은 정도를 생각했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우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그렇다 보니 연봉은 오히려 애매하게 느껴질 정도야. 퇴역하시고 연봉이랑 같은 액수를 연금으로 받고 계시거든.”
“얼만데?”
“얼마냐면…….”
메릴의 말을 들은 윤기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2019년을 기준으로 얼추 3억이 안 되는 금액.
‘그 돈으로는 절대로 개인 제트기와 호화 저택, 개인 비서 같은 것을 꾸릴 수 없지.’
윤기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거스터 님은 군수 회사에서 일 안 하셔?”
메릴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에 군인이 많아서 그러기가 힘들대. 대신에 군대에 아직도 큰 영향을 미치시기는 하지만.”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거구나.”
“그런 거지. 아무튼, 올 때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왔는데, 이렇게 일등석을 타니까 너무 편해. 하아, 다리를 이렇게 쫙 펼 수 있다니.”
메릴의 매끈한 다리를 바라보던 윤기가 웃으며 속삭였다.
“평생 일등석만 타게 해 줄까?”
얼굴이 확 붉어지며 어깨를 투닥이는 메릴의 모습.
즐거운 비행의 시간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몸은 좀 괜찮아요?”
윤기의 말에 조청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 비즈니스석이면 완전 감사하지.”
조청우는 자신만 비즈니스석에 탄 것에 대하여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원래 3등석을 타도 불만을 가지지 않아야 하지만, 세상에는 공평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윤기는 언제나 측근들의 안색을 잘 살폈다.
능력 이상의 불만을 가지는 자들은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하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조청우는 분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가 볼까요?”
물론 조청우만 함께하는 일정이 아니었다.
이번 일에 꼭 필요한 세 명의 인원.
원래는 한국에서 구해 보려고 했지만, 메릴 덕분에 프랑스에서 합류한 이 세 명의 사람들은 이번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약속 시각까지 넉넉하지 않으니 곧바로 출발하죠.”
윤기 일행은 어렵사리 잡은 에르메스 본사와의 만남을 위해 호텔에 체크인하기가 무섭게 바로 일정을 시작했고, 약속 3시간 전에 본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3시간이라는 긴 시간.
하지만 윤기는 준비 과정 때문에 10분 전이라는 아슬아슬한 시간에 에르메스 본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접객실에 들어가니 이미 에르메스 본사의 해외 사업부 매니저인 로랑은 기다리고 있는 상황.
로랑은 윤기를 보기도 전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계약이 어렵다고 말씀을 드렸지 않……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