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65)
#65화 내가 명품이다 (4)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메릴.
물론, 메릴은 파비앵과 로랑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얼음처럼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
파비앵과 로랑이 메릴을 알아보는 이유는 당연히 에르메스의 모델 중 한 명이기 때문.
“엘레아노를 불러!”
메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메릴이라는 모델에 대해 들은 적은 있는 파비앵의 외침에 메릴을 여기까지 데려온 직원이 황급히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잠시 뒤, 보헤미안 웨이브의 풍성한 머릿결을 자랑하는 엘레아노가 하얗게 탈색한 머릿결을 흩날리며 사무실 문 쪽에 나타났다.
“메릴, 왔으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그랬어.”
그린색 원피스를 입은 엘레아노가 메릴을 반쯤 강제로 잡아끌었고, 메릴은 마치 석상과도 같은 느낌으로 빠르게 문 앞에서 사라졌다.
“아……, 방금 나타난 사람은 메릴이라고 우리 에르메스의 모델 중 한 명입니다. 이사회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우리의 보석이지요.”
“그렇군요.”
파비앵의 말에 윤기는 일부러 중의적인 대답을 함으로써 메릴과 자신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걸 자신이 밝히게 될 경우 효과가 미미해지니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구체적인 계약서의 작성은 조만간 하게 되겠지만, 오늘 구두로 어느 정도 합의를 해 놔야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죠.”
아까 했던 말을 대부분 반복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윤기와 파비앵은 큰 그림을 완성했다.
1. 에르메스는 와이케이 백화점에 평상시 특판 행사를 할 정도의 물량을 1차적으로 제공한다.
2. 초도 물량이 합의된 기간 안에 완판될 경우 추가 명시된 기간 동안 에르메스는 와이케이 백화점에 2차 물량을 제공한다.
3. 명시된 기간의 판매량이 합의된 매출을 달성할 경우 2번 조항의 기간은 자동적으로 5년으로 늘어난다.
4. 상기 사항은 와이케이 백화점의 소유주인 최윤기가 에르메스의 일본 판촉 모델이 된다는 계약서를 작성한 후에 발효된다.
여기까지 내용이 완성되었을 때, 파비앙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윤기는 한 가지 더 확정 지어야 할 것이 있었다.
“파비앵, 이 내용대로 조만간 계약이 완료된다면 저와 에르메스의 거래는 성사된 겁니다. 그렇죠?”
“그렇겠죠?”
윤기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파비앵이 일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백화점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에르메스를 제외한 다른 브랜드와도 계약을 해야 합니다.”
“아……, 그건 그렇겠네요.”
파비앵은 순간적으로 윤기가 다른 곳에도 모델 계약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적절한 예측이었다.
왜냐하면, 오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해당 방법이 윤기의 차선책이었으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에르메스 입장에서 같은 백화점에 절대로 입점하지 않았으면 하는 브랜드 두 가지를 결정해 주셨으면 해요.”
“절대로 같이 입점하지 않았으면 하는 브랜드요?”
“네. 한마디로 에르메스의 라이벌 브랜드를 배제하겠다는 얘기죠.”
그야말로 절묘한 제안이었다.
단 두 개.
좋게 풀이하자면 에르메스의 라이벌을 배제해 주겠다는 얘기지만, 나쁘게 풀이하자면 에르메스의 라이벌 중 두 가지만 배제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자, 파비앵.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거지?’
윤기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만약 파비앵이 두 개의 브랜드를 거론한다?
그럴 경우, 윤기는 에르메스의 기밀을 한 가지 알아낼 수 있게 된다.
비록 대외적으로 공표된 사실은 아니더라도 에르메스가 어떤 브랜드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거론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
거론하지 않을 경우, 에르메스는 와이케이 백화점에 어떤 브랜드가 들어오든 참견할 방법이 없다.
애초에 이쪽이 물어본 것에 대해 답변을 해 주지 않았으니까.
“일단…….”
파비앵은 일부러 말을 길게 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윤기는 파비앵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침묵을 하든, 말을 길게 늘이든 빠르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자체가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건에 대해서는 윗분들과 상의를 하고 계약서를 쓰는 날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 같군요. 혹시 호텔에 숙박하고 계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얼마나 체류하실 예정이신가요?”
“딱히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본래 예정은 일주일이었지만, 윤기는 일부러 일정을 오픈하지 않았다.
만약 7일이라고 한다면, 에르메스는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7일째 되는 날 연락을 해 오겠지.
지금 구두로 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계약서를 쓸 당시에 어떤 추가 조항을 요구해 올지 모르는 일이다.
‘공사판에서 하청 업체들이 기한 때문에 죽어 나가는 꼴을 내가 한두 번 본 줄 알아?’
윤기가 뻔히 드러나는 파비앵의 수법을 속으로 비웃고 있을 때, 다시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여기에 메릴의 남자친구분이 계신다고…….”
엘레아노의 말에 파비앵과 로랑이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윤기의 뒤에 있는 조청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선을 받게 된 조청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조청우를 바라보는 두 사람 역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이 메릴의 남자친구라고? 말도 안 돼!]]공통된 둘의 심정을 듣기라도 한 듯, 엘레아노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최윤기라고……, 윤이라고 한다던데, 혹시…….”
엘레아노의 눈은 윤기를 향했고, 윤기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윤이에요.”
윤기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비앵과 로랑은 ‘뜨악!’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조청우인가 생각을 했는데, 설마 윤기였던 것이다.
물론, ‘설마 윤이 남자친구인가?’라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각하지 못한 연상일 뿐, 설마 윤기가 정말로 남자친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메릴의 남자친구셨어요……?”
다소 얼이 빠진 것 같은 로랑의 말에 윤기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왜 아까는 아는 척을 안 하신 건지…….”
“하지 않았나요? 메릴을 만나 보신 적이 있으면 아실 텐데.”
[[전혀 모르겠는데!!]]파비앵과 로랑은 메릴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인사했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당연하다.
인사를 안 했으니까.
하지만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윤기의 말에 파비앵과 로랑은 그저 혼란에 빠진 상태로 어물쩍 납득할 뿐이었다.
“그런데 아까 우리가 메릴이 에르메스의 모델이라고 했을 때, 분명 ‘그렇군요.’라고 대답하신 거 같은데…….”
파비앵의 말에 윤기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저는 이사회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말에 그러냐고 대답한 건데요……?”
대답을 들은 순간 파비앵은 ‘세상에’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눈앞의 소년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계산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젠장, 나름대로 닳고 닳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소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계약을 파투 낼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계약 내용에 있어서 손해는 없었으니까.
“엘레아노, 그런데 그 말 하려고 여기에 온 거예요?”
엘레아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메릴이 자기 남자친구 잘해 달라고 저한테 신신당부하더라고요.”
“잘해 달라고요?”
파비앵의 반문에 엘레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니까 초도 납품 물량도 넉넉히 잡고, 마진율도 좀 낮게 잡고…….”
“아니,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이사회에서 구두 승인이 떨어졌어요.”
“예? 이사회에서 구두 승인이요?”
“메릴이 에르메스의 전속 모델이 되기로 약속했거든요.”
“아…….”
이사회가 막연히 메릴이 예뻐서 허락해 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파비앵이 다소 알딸딸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음……, 이사회의 지시라면 그렇게 해야겠죠.”
“그리고 윤 씨는 저를 따라오실 수 있나요? 메릴이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든지요.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파비앵의 고개가 끄덕여진 것을 확인한 윤기가 조청우를 바라보았다.
“조 비서, 우리 호텔의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요.”
말을 끝으로 윤기는 사무실을 나섰다.
* * *
“엘레아노, 나 진짜 엘레아노라도 없으면 나 여기 들어와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인다니까?”
깔깔거리며 웃는 메릴을 바라보던 엘레아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에 연락을 미리 좀 하지. 나, 네가 복도에 서 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까지 데리고 온 거 보고 무슨 일인가 싶었다니까? 그런데 그게 남자친구 때문에 온 거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엘레아노를 향해 메릴이 짐짓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너도 남동생 때문에 나한테 부탁했었잖아.”
“나는 가족이고 너는 남자친구잖아.”
“가족이 될 건데?”
순간 엘레아노는 마시려던 커피를 도로 잔에 뿜었고, 덕분에 하얀 머리칼에 검은 커피가 몇 방울 달라붙어 마치 백색 도화지 위의 잉크 방울 같은 느낌을 냈다.
“야, 약혼자였어?”
메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윤이 나한테 평생 일등석만 타게 해 준댔어.”
“……어쩐지 부러운 약속이네.”
엘레아노는 에르메스의 중견 디자이너이기도 했지만, 30대 중반의 노처녀였기에 메릴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윤기를 힐끔힐끔 보며 메릴을 부러워했다.
“그나저나 남동생은 잘 복무하고 있어?”
“응. 네 할아버지 덕분에 위험 지역으로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됐어. 덕분에 부모님도 안심하고 계시고.”
엘레아노는 메릴의 할아버지가 미군 전 대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남동생의 위험 지역 자원을 사전 차단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돈을 더 벌어 보겠다고 총탄이 날아다니는 곳에 직접 가겠다는데 그걸 눈 뜨고 지켜볼 가족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지금 메릴은 엘레아노에게 마음 편히 부탁할 수 있었다.
“세상에 다른 명품이랑 다리 놔주는 디자이너는 나밖에 없을 거야.”
엘레아노는 포스트잇에 몇 가지 브랜드명과 사람의 이름, 그리고 전화번호를 적기 시작했고, 잠시 뒤 포스트잇을 메릴에게 넘겼다.
“여기 디자이너들에게 전화해서 내 이름을 대면, 이 브랜드들과는 상대적으로 쉽게 계약이 될 거야. 물론 100퍼센트는 아니니까 너무 과신하지는 말고.”
“고마워!”
“징그러워! 하지 마!”
자신을 향해 안겨드는 메릴을 떼어내던 엘레아노가 결국에는 체념하며 메릴을 달고 있는 채로 윤기를 향해 물었다.
“저기…….”
“네?”
“호, 혹시 가족 중에 결혼 안 한 남자 있나요……?”
메릴에게서 윤기가 어떤 인물인지 들은 엘레아노가 어쩐지 처량한 욕망을 드러냈지만,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제가 첫째라서요.”
“아…….”
엘레아노의 구슬픈 탄식이 사무실에 흐르듯이 퍼졌다.
* * *
엘레아노가 알려 준 연락처들을 토대로 계약을 하자 윤기는 원래 생각했던 브랜드들과 대부분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일부 브랜드는 인맥을 활용했음에도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치트 키가 있었으니까.
‘에르메스같이 괜찮은 브랜드를 더 확보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 말을 던지기가 무섭게 에르메스가 입점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브랜드들은 방향을 바꿔 계약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덕분에 윤기의 유럽행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메릴은 공항에서 윤기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아직 학업을 계속해야 하는 메릴의 여건상 윤기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와. 난 언제나 메릴을 기다릴 테니까.”
말을 들은 메릴이 감동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도끼눈을 떴다.
“혹시 바람피우거나 하면 죽어…….”
“걱정 마, 메릴보다 못생긴 사람하고는 바람 안 피울 테니까.”
사실상 피우지 않겠다는 말에 메릴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보니 왜 진짜 초고가 브랜드들하고는 계약을 안 한 거야?”
“재벌 중의 재벌들만 사용하는 브랜드 말이지?”
“응. 따라다니면서 그곳들은 언제 가나 하고 생각했었거든.”
메릴의 타당한 궁금증에 윤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은 상품성이 없거든. 나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지 고가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아……, 그래서 그렇구나.”
메릴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메릴이 타야 할 비행기의 승객들은 곧 탑승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럼……, 갈게.”
“잘 가.”
빙긋 웃는 윤기의 입술 위로 따뜻한 감촉과 함께 순식간에 메릴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졌다.
사람이 수없이 지나다니는 공항에서도 어쨌든 자기 갈 길을 잘 가는 메릴의 모습.
‘거스터의 생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네.’
거스터가 왜 사진 모델을 시켰는지, 혼자서의 한국행을 허락했는지, 윤기는 알 것 같았다.
‘좋아, 이제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 볼까.’
윤기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조청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다.
“우리의 전쟁터로 돌아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