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69)
#69화 버블의 돗자리 (1)
“으흐흐흑…….”
짐짓 우는 시늉을 하던 조청우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참, 나는 일본어는 몰라. 그러니까…….”
윤기가 조청우의 말을 잘랐다.
“괜찮아요.”
“……응?”
“일본어를 모르는 것쯤이야 글로벌 시대에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걱정 마세요. 일본이 유럽이나 미국과 거래량이 많다 보니까 영어로 번역된 일본 관련 책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이거 구하는 데 류 비서가 고생 좀 했어요.”
“악!”
대놓고 비명을 지르는 조청우였지만, 윤기는 그런 조청우가 밉지 않았다.
사람이란 게 일을 잘하면 어지간한 모습은 귀엽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물론 류근태가 조청우에게 귀엽게 느껴질 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겠지만.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도 보너스 나갑니다.”
“그나마 보너스라도 있어서 다행인 거 같아……. 시간은 얼마나 줄 수 있어?”
“4주요.”
“……살려 주세요.”
“5주.”
“제발…….”
“보너스를 깎을까요?”
“아, 아니야!”
그나마 책의 양이 저번보다는 적었기 때문에 조청우는 또다시 한 권을 들고 윤기의 집을 나섰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윤기의 집에서 많은 양의 책들이 조청우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윤기야, 나 셋째 고모인데, 우리 남편 마구 굴려 줘. 고모도 남편 덕 봐서 셋째 오빠가 말하는 명품 좀 하나 장만해 보자.]저번에 셋째 고모에게서 전화가 오기에 받았더니 들은 내용.
셋째 고모까지 팍팍 밀어주는데, 윤기 입장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타이밍 적절한 지원 사격 덕분에 최윤자는 윤기에게서 에르메스 핸드백을 하나 받을 수 있었고, 한동안 같은 아파트 부녀회에서 부러움을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의외의 효과까지 보았는데, 어디 가면 살 수 있는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점이다.
[조만간 백화점이 하나 생긴다고 하던데 거기서 살 수 있대. 다들 들어 보지 않았어? 청계천의 대규모 쇼핑 단지인 와이케이 백화점 말이야.]80년대 부녀회 회원들의 입소문 속도는 그야말로 몽골 기병의 진격 속도.
와이케이 백화점의 오픈에 대한 열기는 빠르고 시끌벅적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 * *
“으으음…….”
새벽 6시, 윤기는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가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가득 차 있는 수심.
왜, 메릴 생각이 나냐? 휴지 갖다 줄까?>
말을 듣기가 무섭게 윤기는 대추를 앞에 두고 절을 두 번 반복했다.
아, 안 돼!>
벽을 붙잡으려 애쓰던 최덕배는 결국 제사의 힘에 이끌려 강제로 대추를 입에 넣었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젠장……, 내가 신이 되는 세상이 존재한다면 세상의 모든 대추를 없애 버릴 거야…….>
“또 그러면 다음부터는 아예 건 대추를 줘 버릴 줄 알아요.”
야, 건 대추는 좀…….>
“그러니까 상황을 봐서 그에 맞는 농담을 하라고요.”
에휴……, 네가 메릴을 그 정도로 생각할 줄은 몰랐지.>
차라리 윤기를 놀린다면 상관없겠지만, 윤기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건드릴 경우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민감도가 높은 것이 부모님, 그다음 할아버지, 그리고 최근에는 그다음으로 메릴이 올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류근태, 그리고 최철규에 필적하는 수준?
최덕배는 그냥 여자친구 정도로 판단했지만, 얻은 도움을 절대 잊지 않는 윤기의 성격상 유럽에서 메릴이 보여 준 호의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알아 두세요.”
쩝……, 그런데 왜 그렇게 침대를 뒹굴뒹굴하는 거냐? 침대에 몸을 비비면 ‘아, 이 녀석도 2차 성징이 되었구나.’하고 생각을 할 텐데, 좌우로 구르는 거면 무슨 군대 훈련도 아니고. 벌써 군대를 가고 싶어?>
“미쳤어요? 지금도 가끔 군대 꿈꾸는 데 무슨.”
요즘도 꾼다고?>
“네. 한국 남자의 천형이에요. 평생 군대와 멀어질 수 없죠.”
흠, 임오군란 때 군인 녀석들이 어떤 심정으로 들고일어났는지 알 것 같네.>
“굳이 표현하면 할아버지한테 제사를 안 지내 주다가 오랜만에 지내 주는데 대추만 올려놓은 꼴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와, 이해가 확 되네. 민비가 개새끼였어.>
“고종도 마찬가지지만요.”
고개를 끄덕이던 최덕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뭐가 문젠데 그래? 조만간 일본 가는 게 싫어? 아직 방사능도 안 터졌는데?>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일본 경제가 대단히 호황이잖아요. 와이케이 백화점이 향후 낼 매출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식 상장을 생각하면 버블 몇 년 전쯤에 한몫 단단히 챙기고 나올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죠.”
한 9년 정도 남았구먼.>
“제가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90년대에 망했다고 하니까 89년 말에 다 털고 나오면 될 거라 생각하거든요.”
그게 안전한 선택이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되는 건데 뭐가 문제야?>
“미국 유전 나올 땅에 옥수수 농사짓는 건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덕에 운영이 가능하고, 한국이야 제가 발로 뛰면 되는 일이지만, 일본은 쉽지가 않아요. 추후에 일본으로 금융 자산을 투입해서 땅을 사서 시세 차익을 챙겨야 하는데, 그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한마디로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군.>
“그렇죠. 류 비서나 작은아버지를 일본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요.”
조청우 녀석은 어때?>
“진심이세요?”
당연히 농담이지.>
윤기는 순간 대추를 만질까 하다가 그건 좀 심하다는 생각에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아무튼, 고민이에요.”
흐음, 조언 하나 해 줄까?>
“조언이요?”
그래, 조언.>
“뭔데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는 윤기의 말에 최덕배가 너무 당연한 조언을 바란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는 부모한테 의지하는 일이 너무 없어.>
* * *
네가 과거에 돌아와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은 알겠는데, 자고로 부모란 자기에게 의지하는 자식의 모습도 보고 싶어 하는 법이야. 자식이 슈퍼맨이면 부모 입장이 뭐가 되겠냐? 게다가 할아버지들한테는 잔뜩 의지하면서 부모한테는 의지 안 하지? 네 아버지 성격이 그런 쪽이라서 내색을 안 하는 것이지만, 속으로 한 번쯤은 기대 주길 바랄 거다.>
최덕배의 말을 들은 윤기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한번 세계가 넓어졌다.
그렇기에 윤기는 곧바로 삼우 중공업으로 찾아갔고, 난생처음으로 회사에 자발적으로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 최철호는 신나서 버선발로 윤기가 기다리는 사무실로 달려왔다.
“아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
4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최철호의 몸은 아직도 구릿빛 근육으로 탄탄히 덮여 있었다.
심지어 최철호의 옆에서 양복을 입고 있는 측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양복을 입고는 있는데 옷을 터뜨리고 튀어나올 것 같은 근육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런 사람만 무려 5명.
모두가 경호 인력은 아닐 테고, 분명 그들 중에 비서가 있을 것이었다.
“아빠 보고 싶어서 왔죠.”
“이 녀석, 학교도 빼먹고 말이야.”
“그 이상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그래, 괜찮지. 학교가 별거냐? 이 아빠도 남들 학교 다닐 때 자전거로 쌀 몇 가마씩 나르고 그랬어!”
아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준 최철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 네 명은 이 아빠 경호원들. 아마 본 적이 없을 거야.”
네 명의 경호원들이 마치 보디빌딩 대회에 나온 것처럼 각각의 포즈를 잡으며 윤기를 향해 인사해 왔다.
““““반갑다 윤기야!!!!””””
처음 만난 사이지만 굉장히 친근감 있게 해 오는 인사에 윤기는 신기해하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굉장히 끈끈한 관계이신가 봐요?”
“그럼! 벌써 20년도 넘게 내 주변을 경호해 오고 있는 녀석들이니까. 네 삼촌처럼 생각해도 되니까 얼굴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붕어빵 같은 거나 좀 사 달라고 해.”
최철호의 말에 코 옆의 점이 인상적인 사내가 우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우리 박봉인데 벼룩의 간을 내먹네.”
“얀마! 우리 아들 붕어빵 사 주면, 나는 진짜 붕어를 사 주면 될 거 아냐!”
“붕어는 됐고, 붕어탕이라면 환영이지.”
“호오, 그럴까?”
“윤기야, 이 삼촌이 붕어빵 사 줄까?”
그야말로 유쾌 그 자체인 모습에 윤기는 웃음을 터뜨렸고, 윤기를 따라 모두가 웃었다.
“아, 그리고 이 녀석은 내 비서실장.”
경호원 네 명보다 훨씬 더 대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40대 후반의 남자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건치를 드러내며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어왔다.
“반갑다. 나는 네 아빠 친구이자 비서실장이자 경호실장인 차범진이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쾌활한 윤기의 인사에 차범진은 악수를 한 손에 조금 힘을 주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 네 아들 악력이 대단한데? 내 밑에서 수련시켜 보는 게 어때?”
“미쳤어? 얘는 경영인이지 경호인이 아니라고.”
“으, 아깝다. 아까워.”
“굉장히 친하신 사이인가 봐요?”
아들의 물음에 최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은 싹 다 내가 아버지 밑에서 구를 때 함께 구른 애들이거든. 오죽하면 예전에 우리들이 ‘종로의 자전차왕들’로 불렸겠냐?”
최철호의 말에 모두가 자신들의 튼실한 허벅지를 자랑하듯 드러내며 웃었다.
‘진짜 즐거운 경영 생활을 하고 계시구나.’
아버지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고, 최철호 역시 아들을 따라 웃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냥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나한테 무슨 부탁이라도 있어서 온 거지?”
최철호의 눈은 실망감보다는 오히려 기대감이 잔뜩 박혀 있는 눈이었다.
“헤헤헤…….”
뒤통수를 긁는 아들의 모습에 최철호는 키가 결코 작지 않은 윤기를 마네킹 옮기듯이 들어 올리더니 사장실 손님용 소파에 앉혔다.
“아들! 말해 봐! 아빠가 뭘 도와줄까?”
“어……, 그냥 말해도 되나요?”
아버지와 굉장히 친한 관계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윤기는 그래도 혹시 몰라 마지막 체크를 했다.
“당연히 해도 되지. 얘들 입 무겁다. 애초에 나 배신하고 갈 녀석들이었으면 진작 갔어. 월급 많이 준다는 스카우트가 수도 없이 왔는데도 안 간 녀석들이니까.”
아버지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삼촌들이 동시에 ‘그럼!’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윤기는 큭큭 거리며 웃다가 본론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조만간 일본 쪽에도 사업을 해 볼까 하거든요.”
“일본? 그리고 보니 거기 요새 호황이지?”
“맞아요. 물론 호황이라 하더라도 신규 진입한 기업이 아니라 기존 기업들의 호황이긴 하지만요.”
“무슨 의미인진 알겠냐?”
최철호의 말에 차범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러려고 네가 나 공부시켰잖아.”
“좋아. 아들, 계속 말해 봐.”
아버지의 말에 윤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은 제가 진입하기가 힘들지만, 이번에 에르메스 모델 관련해서 일본으로 가게 되거든요. 그때 일본에 대해서 조금 파악하고, 사업체 하나는 일단 해외 법인 겸 해서 만들어 두고 싶은데 옆에서 일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아버지라면 추천해 주실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
최철호는 신이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 아빠한테 부탁하는 거지? 네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아닌 바로 나한테?”
윤기는 다시 멋쩍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철호는 곧바로 차범진을 바라보았다.
“야! 네가 힘을 쓸 때가 왔다!”
“미친놈아. 내가 가면 여기는 어쩌게?”
“아차!”
윤기는 할아버지가 왜 아버지를 후계자로 생각하기 힘들었는지 납득을 하면서도, 이렇게 쾌활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확인했다.
“내가 가기에는 그렇고, 저 녀석을 보내자고.”
차범진은 경호원들 중 가장 늙어 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