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82)
#82화 기업이 을일까, 은행이 을일까 (1)
“어유,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는 예스 저축 은행의 전수훈이라고 합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명함을 내밀고 있는 전수훈의 모습은 그야말로 왕을 알현하는 듯한 수준의 예의였다.
“아, 예. 어서 오세요.”
하지만 그런 전수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흥미가 하나도 없다는 태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비선 실세인 윤기도 아니었고, 와이케이 백화점의 사장인 류근태도 아니었으며, 실장 역할을 맡고 있는 최철규도 아니었다.
“마 과장님이 이렇게 자리를 잡아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수훈을 쩔쩔매게 만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마석일.
현재 와이케이 백화점의 영업부 과장을 맡고 있는 마석일이 은행 영업직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15분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찡그리는 마석일의 모습에 전수훈은 꼬리에 불난 망아지처럼 급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그렇습니까.”
“네.”
그야말로 단답.
하지만 전수훈은 자신보다 열 살가량 어려 보이는 마석일을 향해 계속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 그러니까…….”
급작스러운 15분이란 제한 시간에 전수훈은 잠시 고민에 빠지다가 결국 본론에 들어가는 선택지를 골랐다.
아니, 고를 수밖에 없었다.
15분은 본론을 이야기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까.
“혹시, 생각하고 계신 이율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위에서는 혹시 별말이 없으셨는지…….”
“없었어요.”
순간 전수훈은 입 밖으로 ‘이런 쌍놈의 새끼가!’라는 말을 꺼낼 뻔했다.
하지만, 상대는 사실상 슈퍼 갑.
전수훈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일찍 찾아온 것 같군요. 조금 천천히 찾아왔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마석일은 딱히 대답하지 않고 전수훈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전수훈은 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이걸 잊고 있었네. 마 과장님. 이것 받아 주십시오.”
“이게 뭐죠?”
“별것 아닙니다만, 성의니까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유, 뭘 이런 걸 다…….”
마석일은 대놓고 종이 백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였고, 전수훈은 탐욕이 짙은 마석일의 행동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것 제 명함입니다만, 나중에 꼭 연락 주십시오. 절대 다른 곳에 뒤지지 않는 조건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때마침,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비서실 여직원이 들어왔다.
“마 과장님, 사장님 호출이에요.”
“아, 그래. 곧 간다고 말씀드려 줘.”
“예.”
이제 막 상고를 졸업했기에 앳된 데다가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 여직원의 모습에 전수훈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 본인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쿠, 이렇게 바쁘신데 저한테 시간을 내주셨던 거였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저도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지만, 상황이 이래서…….”
“요즘 와이케이 백화점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죠. 저는 퇴근 시간 이후라도 전화가 항상 열려 있으니까, 편하실 때 아무 때나 연락 주세요. 연락, 꼭 기다리겠습니다.”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시 허리를 90도, 아니 120도로 숙인 전수훈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그야말로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살살 닫힌 문.
이후로 1분간 마석일은 손목시계만을 바라보다가, 1분이 지난 것을 확인하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고 바깥을 확인했다.
탁!
닫힌 사무실 소리와 동시에 마석일은 사무실 안쪽을 향해 외쳤다.
“야, 갔어. 나와.”
그러자 사무실 책상 중 하나의 안쪽에서 손민관이 기어 나왔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고생은 네가 했지. 거기에서 웅크리고 있었어야 하니까.”
마석일은 손민관에게 영업 스킬을 교육해 주겠다며 사무실에 숨어 있을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숨을 곳으로 책상 아래가 낙점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어땠냐?”
“어…….”
“야, 내가 네 성격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너한테 일을 알려 주려면 너의 솔직한 생각을 알아야 할 거 아냐.”
말을 끝내자 마석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제가 보기에는 조금……, 과하게 대하신 것 같았어요.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요?”
“상대가 기분 나쁜 게 뭐?”
“아무래도 나중에 이율이나 그런 걸 따질 때 손해가 있지 않을까요?”
손민관의 순진한 대답에 마석일이 짐짓 소리 내어 웃었다.
“뭐? 푸핫! 민관아 진짜 너는 이쪽이 무조건 굽혀야 하는 영업은 잘하는데, 이쪽이 뻗대야 하는 영업은 너무 부족한 거 같다.”
“솔직히……, 그렇긴 하죠.”
애초에 손민관은 기자 접대용으로 윤기가 지목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지닌 바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석일의 생각은 달랐다.
와이케이 백화점의 현재 상황을 보면, 이곳은 예전에 자신이 일하던 중견 기업을 가뿐히 넘어 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 기업에서 단순히 기자 접대만으로 승진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기자 접대만으로도 대리나 과장 정도는 달 수 있겠지. 지금 내가 과장이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기자 접대 일이 끝나는 순간 팽 당하거나 평생 평사원 느낌으로 기자 접대만 해야 해. 똑같은 최후를 두 번 겪을 순 없지.’
마석일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손민관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민관아, 방금 나간 녀석이 기분 나쁘다고 해 봤자, 우리한테 해를 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까 계약 조건이…….”
마석일은 손민관의 말을 잘랐다.
“당연히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예스 저축 은행이 최소한 우리와 동등한 수준의 거래 상대여야 해. 하지만, 예스 저축 은행은 우리 입장에서 철저한 을이란 말이지? 그런데 영업 사원이 자기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계약 조건을 낮춘다? 그건 거래 안 하겠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현재 와이케이 백화점에 접촉하고 있는 것은 은행 영업직들로 은행 본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비록 와이케이 백화점이 권력의 중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상당한 매출을 올리고는 있지만, 은행 본점들의 주력 거래 상대들은 한국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업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현재 와이케이 백화점과의 거래에 목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개 직원.
마석일은 이미 이것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도 기자 접대를 하기 전에 영업직이었으니까.
“그러면 앞으로 찾아오는 모든 영업직들에게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실 생각이신가요?”
마석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향후 태도는 일부에게 한해서 달라질 거야.”
“어떻게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녀석들이지. 이율 같은 거 있잖아? 방금 온 녀석은 이율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그건 실제적인 교섭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나를 요리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거든. 건방진 새끼.”
마석일은 ‘쯧’ 소리와 함께 전수훈이 나간 사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너도 언제까지 기자 접대로만 생활할 수 있을 거 같냐. 내 옆에서 스킬을 배워. 안 그러면, 너 평생 대리로 끝날지도 몰라. 만년 대리, 아니면 만년 과장. 그렇게 살고 싶어?”
“어……, 사실 저는 나중에 작가 할 거라서…….”
굳이 회사에 오래 남아 있지 않겠다는 말이었지만, 마석일은 고개를 저었다.
“추리 소설을 쓰려고 해도 마찬가지야. 추리 소설 쓰려면 작가가 착하기만 해서는 안 돼. 악당의 생각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착한 사람만 등장하는 추리 소설이 무슨 재미야?”
“윽!”
약점을 찔린 손민관이 신음을 지르자, 마석일이 약점을 찌른 작살을 당겼다.
“그러니까 내 옆에서 배워. 착한 사람보다 착해야 할 때 착하고, 악해야 할 때 악한 사람이 세상을 더 잘 사는 법이야. 나중에 악덕 출판사 만나기 싫으면 더욱 그래야 해.”
“음……, 노력해 볼게요.”
“그래, 지금은 그 정도 대답이면 됐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마석일을 향해 손민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이 주고 간 거 뭐예요?”
“아, 이거?”
마석일이 종이 백에서 내용물을 꺼내자 안에서는 부모님이 입을 만한 붉은 내복이 나왔다.
하지만, 마석일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는데, 그러자 일류 호텔 숙박권이 들어 있었다.
“햐, 내가 이런 걸 다 받아 볼 줄이야. 언제나 주는 쪽이었는데 말이지.”
예전 회사에서 상사의 덤터기를 쓴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 마석일이었다.
* * *
“저……, 사장님. 마 과장님이 안 오는데, 다시 가 볼까요……?”
빼꼼 열린 사장실 문을 통해 드러난 여직원의 얼굴에 류근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괜찮아. 내선으로 안 와도 괜찮다고 했거든.”
“아!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은 여직원의 모습에 류근태는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여직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류근태의 외조카.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하필 취직한 곳이 블랙 기업이라 고생하고 있던 것을 윤기의 허락을 통해 비서실에 취직을 시킨 것이다.
덕분에 류근태는 친척들 사이에서 체면을 한번 세울 수 있었고, 외조카 역시 그런 류근태에게 보답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류 사장님 조카는 전혀 상상도 못 하겠죠?”
최철규의 말에 류근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조카가 몰라야 효과가 탁월한 방식이니까요.”
협상에서 을의 시간을 순식간에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바로 갑인 상사의 호출이다.
덕분에 아까 전수훈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고, 마석일도 영양가 없는 단계는 건너뛰고 알맹이만 빼먹을 수 있었다.
특히 조카의 표정 덕분에 전수훈은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방법은 전수훈뿐만이 아니라 이미 여럿을 대상으로 알차게 쓰이고 있었다.
효과는 당연히 탁월.
그렇기에 류근태와 최철규가 이러한 방법을 지시한 윤기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보니, 회장님. 마 과장이 접대 목록을 보고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뭐가 있는데요?”
손님용 테이블이 아닌, 사장 의자에 앉아 있던 윤기의 말에 류근태가 공손한 태도로 보고를 시작했다.
“다양합니다. 돈도 있고, 호텔 숙박권도 있고, 송이버섯도 있고, 인삼이나 홍삼도 있고, 한약도 있고,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네요. 한 업체당 한 번만 오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방문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올 때마다 마석일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는 경우도 분명 있었기에 현재 마석일이 받는 선물은 쌓으면 그야말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기세였다.
“돈만 돌려주게 하고, 나머지는 그냥 손 대리랑 나눠 가지라고 하세요.”
“호텔 숙박권 정도는 회장님이 가지셔도 되지 않을까요? 쉬시는 일이 거의 없으신데 한번 휴양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류근태의 말에 윤기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바에야, 벼룩의 간을 내먹죠. 저야 숙박권 없어도 호텔에 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마 과장은 고민 좀 해 봐야 할 테니, 그냥 마 과장 쓰라고 하세요. 기자들한테는 철저히 을의 생활을 하는 마 과장인데, 이럴 때 갑질 좀 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냥 돈만 확실하게 반환하라고 하세요. 다른 거야 선물이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지금 단계에서의 돈은 뇌물로 엮이면 귀찮아져요.”
“네, 확실히 반환하라고 전달하겠습니다.”
“영업직이니까 기억력은 확실하겠죠?”
류근태는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폈다.
“그럼요. 제가 괜히 마 과장을 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그건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이율을 이야기한 은행들에 대해서 말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