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83)
#83화 기업이 을일까, 은행이 을일까 (2)
“현재까지는 민국은행, 내환은행, 선한은행, 아이비 저축 은행에서 구체적인 이율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교섭에 들어가면 다소 바뀔 여지는 있습니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류근태의 모습에 윤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방금 말한 네 개의 은행에 대해서는 작은아버지가 담당을 해 주셨으면 하네요. 괜찮을까요?”
“나야 상관없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윤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니야, 원래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니까. 나하고 류 사장하고 쓸데없이 알력 다툼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류근태 역시 최철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래 사장 자리에는 최 실장님이 앉으셔야 하는데…….”
“에이, 순서가 중요한가요. 어차피 저도 나중에 한자리하게 될 텐데. 저는 지금 아쉽다고 미래 밥그릇 걷어차는 놈 아닙니다.”
윤기가 최철규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이유는 현재 와이케이 백화점의 서열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류근태가 1위, 최철규가 2위인 상황.
더불어서 윤기 역시 그 상황을 일부러 굳히고 있었다.
류근태가 너무 ‘다가가기 쉬운 사장’으로 인식이 굳혀져 버리면, 와이케이 백화점의 브랜드 이미지에 문제가 생겨 버리니까.
‘작은아버지가 실질적 이득을 최우선적으로 따지는 성격이라서 다행이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류 비서하고 충돌을 일으켰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
지방 검찰청에서 자신을 언제 불러 주나 하고 오매불망 기다릴 첫째 고모부를 떠올린 윤기는 속으로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류 비서, 혹시나 말하지만 작은아버지는 류 비서의 아랫사람이 아니에요.”
“예, 물론이지요. 저도 항상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윤기는 고개를 돌려 최철규를 바라보았다.
“작은아버지. 이유가 어쨌든 류 비서는 제 첫 번째 인재예요.”
“당연하지. 솔직히 조금 아쉽긴 해. 내가 형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내가 첫 번째 부하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최철규의 농담에 윤기와 류근태, 모두 웃었고, 덕분에 경직될 뻔했던 사무실 분위기가 사르르 녹았다.
“빨리 제가 성인이 되어야 두 분 고생을 덜 시킬 텐데 말이죠.”
윤기가 농담에 참전하자 류근태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까지 휘저었다.
“안 됩니다! 나이를 늦게 드셔야 우리가 쓸모 있는 건데, 나이를 드시다뇨. 생각 같아서는 평생 미성년자로 계셔 주셨으면 할 정도라니까요?”
“푸하하핫!”
처음 농담을 주도했던 최철규가 뿜어 버리면서 분위기는 사르르 녹다 못해 아주 꿀이 흐르는 상황이 되었다.
“좋아요. 둘의 사이가 이렇게 좋으니 이번 일도 잘 추진이 되겠죠. 작은아버지, 1단계가 끝났으니, 2단계를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지!”
마석일이 잡다한 영업직들을 상대하는 것이 1단계.
굵직한 영업직들을 상대하는 2단계가 최철규를 통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흐음, 이게 선한은행의 조건인가요?”
최철규의 말에 선한은행 종로지점의 영업과장인 안대호가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신지…….”
지점장을 비롯한 지점 간부들과 각고의 회의 끝에 나온 조건이었기에 안대호는 그야말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지점장까지 참여시킨 일인데, 일이 실패해 버리면 지점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확 줄어 버릴 것이 당연했으니까.
“흐음.”
최철규는 안대호가 가져온 서류를 내려놓더니 커피를 한 모금 일부러 소리 내서 후룩 들이켰다.
“안 과장님.”
“네? 넷! 말씀하세요.”
“안 과장님도 아시겠지만, 와이케이 백화점은 단순히 매출액만 입금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어유, 알죠. 당연히 알죠.”
사람들은 기업이 은행에 우대를 받는 이유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의 예금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은행 입장에서 기업의 예금은 그다지 달가운 사안이 아니니까.
당장 대출 이자와 예금 이자의 차액으로 이윤을 내는 은행 입장에서 인센티브를 줘야 하는 기업의 예금은 심할 경우 은행에 손해까지 안겨 줄 수 있다.
물론 80년대의 대한민국은 투자를 했다 하면 돈이 되기 때문에 예금이 거부당하는 일이 없었지만, 2010년대로 들어서면 은행들이 기업의 예금을 거절하는 사태도 왕왕 발생할 정도다.
그렇다면 은행은 왜 기업과 거래를 하려는 것일까?
“일단 조건만 괜찮다면, 직원들 월급 통장을 전부 선한은행으로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
애초에 이것을 위해서 접근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협상의 스킬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안대호는 최철규를 자극하지 않았다.
“어휴, 그래 주시면야 저희야 감사하죠.”
은행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행에 돈을 예금하는 일반인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기업이 직원들 월급 통장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게 될 경우, 은행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최소 수백, 수천의 고객을 확보하게 된다.
은행 여러 곳을 이용하는 일반인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일단은 긍정적으로 위에다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책상에 놓인 서류를 세워 탁탁 정리하는 최철규의 모습에 안대호가 조심스럽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최 실장님, 저기 이거…….”
“이게 뭔가요?”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함께 상자를 건네받은 최철규가 바로 상자를 열어 확인했다.
그러자 그곳에는 약과들과 함께 만 원짜리 돈다발 두 개가 담겨 있었는데, 최철규는 곧바로 상자를 닫아 안대호에게 돌려주었다.
“헛…….”
그야말로 당황하는 안대호의 모습.
‘혹시 적으십니까?’라고 말을 하자니, 그런 말은 이런 상황에서 거의 금기였기에 안대호의 표정은 그야말로 난감 그 자체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최철규는 돈다발을 거절한 게 아니었다.
“아직은 이걸 받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상자를 돌려받은 안대호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다시 종이 백에 넣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최철규의 말에 안대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사무실을 나갔고, 최철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20분 뒤에 올 내환은행의 영업 사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은행이 가장 좋은 이율에 가장 많은 선물을 가져올까?’
분명 윤기는 류근태를 통해 마석일에게 돈은 반환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최철규는 마석일의 사례를 보았음에도 돈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의 특수성 때문이다.
인삼이나 숙박권 같은 것은 아무리 비싼 것을 선물해도 가격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돈 선물’은 한계가 없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선물은 받아 놓고 입을 슥 닦아도 되지만, 돈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돈을 받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거래가 확정이 되었을 때.
미니 백화점 때처럼, 거래가 확정 난 은행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실장 역할도 그리 나쁘지 않다니까.’
류근태의 신비주의는 이미지에는 좋지만, 떡고물을 얻기는 쉽지 않아진다는 단점이 있다.
애초에 류근태가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갑일 수밖에 없기에 뭔가를 받긴 힘드니까.
반면 최철규는 실장 역할을 하면서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최철규 입장에서는 불만 하나도 없는 인선.
‘커피가 달구먼.’
류근태의 외조카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최철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나머지 만남을 이행했다.
* * *
“조건으로 따져봤을 때, 선한은행이랑 민국은행이 가장 좋았어.”
서재에서 이루어진 최철규의 보고에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조건이 동등한가요?”
“입금액에 따라 구간 비율은 조금 다르긴 한데, 최종적으로는 같아.”
“작은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조건이 같다면 은행 규모가 큰 곳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민국은행을 추천하신다는 얘긴가요?”
“굳이 따지자면? 그런데 어느 쪽을 택해도 똑같기 때문에 마 과장의 선택으로 남겨놔도 좋지 않을까 싶긴 해.”
여기까지 말하던 최철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금 생각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3단계가 있는 거야?”
최철규의 말에 윤기는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 * *
부지런한 노동자에게는 그래도 하루의 휴일이 있다면, 부지런한 경영자에게는 휴일이 없다.
하지만, 일요일인 오늘.
윤기는 정말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휴식도 좋은 법이죠.”
조수석에 앉은 차필규의 말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서울 풍경도 꽤 볼 만하네요.”
“오늘은 류 사장님이나 최 실장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나요?”
“네, 오늘은요.”
운전사와 차필규만이 동행하는 드라이브.
이러한 일은 처음이었기에 조수석의 차필규는 꽤 신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나 싶었지만, 드라이브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별말이 없는 윤기의 모습에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아쉬운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차필규는 평상시 바쁜 윤기와 하지 못했던 대화를 시도했다.
그동안 경호원으로서 옆에 자주 붙어 있었지만, 윤기가 워낙 바빴기에 말을 섞은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보니 이렇게 쉬시는 일이 드무시던데,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고 싶지 않으신가요?”
“음? 지금 전도하시는 건가요?”
윤기의 농담에 차필규가 ‘으헉’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와 손을 마구 저었다.
“아뇨, 아뇨. 저는 무교입니다.”
“농담이에요.”
가슴을 쓸어내린 차필규는 살짝 헛웃음을 지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옆에서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이 자주 들어서요. 매일 그렇게 열정적으로 생활하시는 모습이 대단하다고나 할까요?”
윤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니까요.”
“네?”
윤기는 흙수저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재능이 있게 태어났는데도 재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그라드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열심히 살아야 해요. 재능을 꽃피울 권리를 잡은 사람이 권리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이니까요.”
차필규는 윤기의 말에 살짝 감명받은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지금 윤기의 말은 과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정말 우연으로 잡게 된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나에게 다음은 없을 거야.’
윤기가 이렇게 지금 인생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차필규가 백분지 일이나 알까.
사실 지금 드라이브도 단순한 여흥이나 휴가가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었지만, 차필규는 윤기의 생각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처럼의 휴일이시니 잘 보필해 드려야지.’
약간 핀트가 어긋난 생각이었지만, 차필규의 보좌 덕에 윤기는 서울, 수원, 안양 등을 둘러보고 최철규에게 3단계 지령을 내릴 수 있었다.
* * *
‘됐다. 됐어!’
안대호는 최철규가 자신을 부르자, 선한은행, 그리고 종로지점이 와이케이 백화점의 파트너가 되었다고 확신하고는 한달음에 최철규에게 달려갔다.
“아, 어서 오세요.”
저번과는 확연히 온도가 다른 최철규의 모습.
그렇기에 안대호 역시 환히 웃으며 최철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최 실장님. 오늘 연락만을 기다렸습니다.”
거래가 확정된 이상 골치 아픈 머리싸움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안대호는 곧바로 최철규를 향해 떡을 내밀었다.
“최 실장님. 오늘 퇴근하시고 시간 괜찮으십니까? 오늘, 제가 아주 풀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저번에 가져왔던 상자를 다시 내민 안대호였지만, 최철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거절하는 최철규의 모습에 짐짓 거절하는 것이라 판단한 안대호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저번보다 좀 더 챙겨 넣었습니다. 섭섭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아뇨, 아뇨, 아닙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부른 거거든요.”
“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탐지한 안대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일단 앉으세요.”
엉겁결에 앉은 안대호의 모습.
하지만, 최철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결국, 답답한 마음에 안대호가 최철규에게 먼저 말을 거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최 실장님, 뭔가 큰일이라도 난 건가요?”
“어떤 의미로는 정말 큰일입니다.”
윤기가 지시한 3단계.
최철규의 입에서 그 3단계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