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85)
#85화 기업이 을일까, 은행이 을일까 (4)
“아니, 마 과장님.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정말 최고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렇게 통수를 치시다니요!”
영업부 사무실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인물은 베이스 저축 은행의 영업과장인 김주호였다.
3 대 7 가르마에 세로로 길쭉한 당근 같은 얼굴.
마석일과의 대화에서 ‘비슷한 연배’를 운운하며 친한 척을 했던 영업직이었지만, 사실상의 탈락 통보를 듣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통수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 섭섭합니다.”
“통수가 아니면 뭡니까? 저희 조건을 선택 안 하신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갑니다!”
“저한테 말씀하셔도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윗분들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인걸요. 안타깝지만, 다음 거래 때 한 번 더 도전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좋게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핏대를 세우는 김주호의 행동에도 마석일은 전혀 마주 흥분하지 않았다.
굉장히 차분한 음색.
이는 김주호와 굉장히 대조적으로 보였기에, 이번에는 숨어서가 아니라 옆에 앉아 조용히 관망하고 있는 손민관에게 굉장한 교육 자료가 되고 있었다.
“김 과장님.”
“왜요!”
쏘아붙이는 듯한 김주호의 모습에 마석일은 굉장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좋게 말씀을 안 드렸겠습니까?”
“좋게 말을 안 했으니…….”
마석일은 김주호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었다.
“정말 좋게 말씀드렸습니다. 예금 이자율이 얼마나 우수한지도요. 그런데 윗분들이 왜 베이스 저축 은행을 택하지 않았는지 도통 말씀을 해 주시질 않아요.”
눈가에 습기까지 촉촉히 찬 마석일의 모습은 그야말로 정말 억울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석일은 김주호의 말을 잘랐다.
자연스럽게.
“저는 정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김 과장님이 이렇게 저랑 대화하시는 것처럼, 더 윗분하고 연결 고리가 있는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정말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허, 참…….”
김주호가 ‘허 참’ 소리만 내고 있을 때, 마석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아래로 가서는 저번에 김주호가 선물로 가져온 홍삼을 꺼내 들었다.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받을 염치가 차마 없네요…….”
순간 김주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니, 아닙니다. 돌려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가져가세요. 저는 이걸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진짜 돌려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다음번에는 정말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음번에 김 과장님한테 좋은 소식이 될 만한 일이 생기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 꼭 기다리겠습니다.”
사무실을 나가는 김주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지만, 사무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마석일의 어깨는 쫙하고 올라갔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런 게 영업직 아니겠냐?”
어느새 눈가의 습기가 사라진 마석일의 모습에 손민관은 점차 ‘진정한 사회성’이란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정말로 왜 탈락했는지 말을 안 해 줬나요?”
“응, 안 해 줬어.”
“진짜요?”
어찌 보면 불손할 수도 있는 손민관의 말이었지만 마석일은 그런 손민관의 반응을 오히려 기뻐했다.
“짜식 많이 성장했구나. 옛날 같으면 내 눈치 과하게 보면서 못 물어봤을 텐데.”
“다 과장님 덕분이죠.”
“좋아, 솔직하게 말해 준다. 위에서 말 안 해 줬냐고?”
손민관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마석일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안 말해 주셨어.”
“에이.”
“진짜야. 뭐, 내가 물어보면 말씀은 해 주실 것 같긴 한데, 그걸 물어볼 이유가 없었거든. 그리고 왜 떨어졌는지 추측이 가기도 하고.”
“추측이 가세요?”
“당연하지, 임마. 윗분들의 의중도 모르면 회사 생활 어떻게 하냐?”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이 자식, 이거. 사람이 정말 순식간에 바뀌는데? 조만간 우리 집 이사하는데 도와줄 수 있냐?”
“당연하죠.”
“크으, 이런 사회성 참 좋아. 좋아, 말해 준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이자율 때문이야.”
“이자율이요?”
“그래, 이자율.”
마석일은 고개를 두 번 크게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2금융권의 이자율을 얼마로 알고 있냐?”
“애석하게도 적금을 들 정도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어서요.”
“아, 너 사회생활 경험이 짧았지. 2금융권의 예금 이자율은 20퍼센트 이상 40퍼센트 미만이야. 예금 종류에 따라 달라지지만 말이야.”
“워……, 높네요.”
“그런데 이자율이라는 게 예금 이자만 있는 게 아니거든? 대출 이자도 있단 말씀이야?”
“아, 그건 알아요.”
“그럼, 2금융권의 대출 이자는 어떻겠냐?”
“아……!”
“그래, 이해됐지? 우리 와이케이 백화점은 대출을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예금 이자 많이 받자고 대출도 2금융권에서 받아 버리면 손해가 너무 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애초에 2금융권은 성공할 수가 없던 일이었어.”
“1금융권은 이자율이 훨씬 낮은가요?”
“그래. 예금 이자가 10퍼센트 조금 넘어. 올해는 심하게 떨어져서 8퍼센트인 곳도 있더라. 근데 이러면 대출도 10퍼센트를 좀 넘는 선이겠지.”
“윗분들이 진짜 똑똑하신 것 같네요.”
“똑똑해야지. 그래야 우리가 오래 일하지. 내가 전 직장에서 돌대가리 상사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우…….”
“아, 그러면 저축 은행 사람들은 다 돌대가리만 있는 거예요?”
손민관의 말에 마석일이 푸핫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캬, 응용력이 좋아졌는데? 뭐, 돌대가리들도 있겠지만, 진짜로 멍청해서 접근을 한 게 아니야.”
“그럼요?”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 영업을 온 거지. 떨어질 걸 알면서도 말이야. 물론 일부는 진짜로 영업하러 온 거지만.”
“우리랑 연줄을 만들어서 이득이 있어요?”
“당연히 있지. 내가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여기에 온 것처럼, 연줄을 만들어 두면 추후에 분명 도움이 되니까. 이런 우량 기업에서 일하던 사람과 연줄을 만드는 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너도 빨리 깨달아야 해. 막말로 내가 1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기는 힘든 지인에게 여기에서 안면을 익힌 2금융권 사람을 소개해 줄 수도 있잖아?”
“세상이라는 게 생각보다 되게 복잡하네요.”
“그렇지. 그런데, 방금 온 김주호라는 녀석을 돌대가리가 맞아. 왜냐하면, 진심으로 화를 냈거든. 그건 영업을 진심으로 했다는 거고, 또 내 앞에서 그렇게 화를 낸 것 자체가 인맥 형성에 있어서 최악의 행동이야. 일단, 베이스 저축 은행의 사장도 돌대가리인 게 확실할 테니, 베이스 저축 은행은 조만간 망할 거야.”
“어쩐지 예언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 같네요.”
“사실이니까. 그리고 너도 어렴풋이 깨달았겠지만, 나보다 을이 저렇게 화를 낸다고 해도 화를 내야 할 때가 있고 안 내야 할 때가 있어.”
“방금은 안 내야 할 때였나요?”
“그래, 안 냈으니까 이렇게 홍삼을 보존했지. 크크크.”
음산한 웃음을 흘리는 마석일을 바라보며 손민관은 그야말로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실질적인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표면적인 손해는 가뿐히 감수하는 마석일의 행동이 그야말로 정석으로 느껴진 것이다.
“마 과장님.”
“응?”
“많이 배우겠습니다.”
마석일은 손민관을 바라보며 영업과의 미래가 매우 밝아질 것임을 느꼈다.
* * *
“선한은행이 꽤 애가 닳았나 보네요.”
윤기의 말에 최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조금 놀랐어. 민국은행이 조금 억울하겠더라고.”
민국은행은 불과 대출 이율 0.1퍼센트 차이로 선한은행에 패배했다.
소수점, 그것도 불과 0.1퍼센트의 차이였지만, 1천억을 빌린다면 1년 이자 1억이 절약될 수 있었기에 윤기는 선한은행을 선택한 것이다.
“덕분에 나도 짭짤했고.”
최철규가 지폐를 세는 시늉을 하자, 윤기는 픽 웃었고, 류근태는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러워요?”
표정을 읽은 윤기의 말에 류근태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인간이란 게, 아무래도 인스턴트한 이득을 좋아하다 보니…….”
“원하신다면 바꿔드릴 수도 있죠. 최 사장, 류 실장, 이렇게 말이에요.”
“아, 아뇨. 저는 사장 직함이 좋습니다.”
당황하는 류근태의 모습에 짐짓 음산한 웃음을 지어 준 윤기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우리 입장에서 예금 이자는 별로 중요치 않죠. 상당한 액수가 재투자 되거나 물품의 재구매를 위해 쓰일 테니까요. 그런 면에 있어서 선한은행이 머리를 정말 잘 쓴 거예요.”
사실 예금 이율까지 감안한다면 민국은행의 승리였다.
하지만, 윤기는 순수 대출 이자만을 생각했고, 덕분에 와이케이 백화점은 정말 압도적으로 유리한 이율로 천억 이상을 대출받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선한 은행의 승리요인 중 하나는 심사마저도 선심사로 끝냈다는 점이었다.
와이케이 백화점에서 매출과 관련한, 심사를 위한 자료를 일절 넘겨주지 않았는데도 본사 차원에서 계약서를 들고 왔기 때문에 이 점도 이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물론, 백화점을 담보로 설정해야 하긴 했지만, 윤기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었다.
‘애초에 내가 없으면 브랜드의 상당수를 입수할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신군부와의 연줄도 끊어질 테니까. 어떤 의미로는 쭉정이 같은 느낌이지.’
물론 실질적인 가치는 충분했기에 선한은행으로서도 딱히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요. 우리의 의도를 잘 읽은 거니까요. 그런데, 회장님. 지금 천억 원대의 대출을 받으신 것은 2호점을 위해서 대출받으신 건데, 생각해 두신 위치가 있으신가요?”
류근태와 최철규는 천억의 대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2호점을 직감했다.
그만큼 윤기의 옆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것이 두 사람이었으니까.
“저는 서울에 총 다섯 개의 지점을 낼 생각이에요. 동서남북에 하나, 그리고 중앙에 하나로 말이죠.”
“수요가 공급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결국 도시로 몰리게 마련이에요. 나라가 발전할수록 말이죠. 미국만 봐도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어마어마하잖아요? 그렇다는 것은 수요도 그만큼 늘어날 테니 문제가 없겠죠.”
류근태와 최철규는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호점은 생각해 둔 위치가 있어? 방금 류 사장이 물어보긴 했지만 말이야.”
“그건 류 비서가 아마 잘 예측하고 있지 않을까요?”
류근태는 때아닌 퀴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장 가능성이 큰 지역을 답했다.
“용산 아니면 잠실인데, 제 생각에는 잠실 같습니다.”
“어째서죠?”
“북쪽에 하나를 세웠는데, 중앙에 세우는 것은 아닌 것 같고, 현재 회장님이 소유한 토지에서 잠실 쪽에 사는 사람들의 재력이 괜찮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사람이 들으면 강남을 생각했겠지만,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강남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강남이 초고속으로 개발된 것은 전부 국민의 세금이 쏟아져 들어갔기 때문.
그렇기에 류근태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정확해요. 2호점은 잠실이에요.”
“그곳에도 미니 백화점들을 만드실 생각이신가요?”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니 백화점은 오로지 종로 쪽에서만 운영할 거예요. 더 지을 이유가 없는 곳이거든요. 이미 유력인사들의 연줄은 다잡아뒀으니, 다른 곳에 세우면 그들이 오히려 싫어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9시에 잠실 지도와 제가 보유하고 있는 토지 관련 문서 등을 가지고 여기로 다시 오도록 하세요. 혹시 일정이 있나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나도 오는 거지?”
“당연하죠. 함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새로이 2호점을 열 곳으로 지정된 잠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윤기의 의도와 관계없이 잠실에 투기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