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t turns out, the third generation of tycoons RAW novel - Chapter (89)
#89화 감히 나를 이용해? (4)
“솔직히 말해서, 놀랐어.”
“저걸 쓴 게요?”
최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걸 쓴다면 좀 더 대단한 녀석에게 쓸 거라 생각했거든. 그래서 방금 상자 봤을 때 놀랐다니까.”
저 상자는 윤기가 받은 게 아니라, 최철규가 JSD에게서 받은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겼을 때 쓰시죠. 한 번 정도는 크게 도와드리겠습니다.]당연히 최철규는 내용물을 윤기에게 전달했고, 윤기는 그것들을 상자에 담아 보관했던 것이다.
“상대가 세스라면 충분하지 않겠어요?”
“엥? 세스한테 쓴다고? 그거 최종효한테 쓰는……, 아!”
최철규는 무언가 깨달은 듯 자신의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이해하셨어요?”
“어. 그런 식으로 쓰는 거라면 충분히 써 볼 만하네. 내가 너무 일차원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뭐, 최종효를 엄벌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릇의 매실을 들어 씹는 아그작 소리에 섞인 ‘으득’ 소리가 최철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화났구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최철규는 윤기가 지금 상당히 화가 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하긴, 핏줄조차도 배신만큼은 용서하지 않는 게 윤기인데, 남은 어떻겠어. 이걸 보니, 둘째 형은 아직도 용서받으려면 멀었을 것 같네.’
한동안 강한 아그작 소리를 들으며, 최철규는 다시 류근태가 서재에 나타나기를 윤기와 함께 기다렸다.
* * *
최종효는 백화점 창고에 감금당한 지 4시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시간부로 넌 해고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말하던 류근태의 모습을 떠올린 최종효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너무 일찍 들켰어.’
최종효는 류근태의 비서가 된 직후, 세스 쪽 인물들의 접근을 받았다.
[솔직히 와이케이 쪽 월급은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복지가 좋다고 해 봤자, 현찰이 좋은 법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리한테 종종 정보만 넘겨주시면, 그에 걸맞은 사례를 하겠습니다.]처음 류근태에게 발탁되었을 때는 류근태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최종효였지만, 여건이 나아지니 탐욕이 수면 위로 올라와 버렸다.
‘더 나은 인생’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세스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거기다가 세스에서 매달 현찰로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20만 원의 돈을 주었기 때문에 최종효는 더욱 류근태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고자 했다.
‘정보를 얻어 내려면 류 사장님의 신뢰를 얻어야 해.’
결과적으로 최종효는 류근태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고, 중요한 정보를 세스에 넘김에 따라 2년 치 연봉이 넘어가는 액수를 일시불로 받게 된 것이다.
와이케이 백화점은 기본적으로 고복지 저임금이 기본.
살면서 필수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부분을 회사 복지로 해결해 주기 때문에 사실상 순수 임금으로 계산해 보면 고임금이 맞았지만, 최종효는 자신이 손에 쥐는 돈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바람에 간단한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감사합니다. 또 알게 되는 게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500만 원이 입금된 날, 최종효는 자신과 접선하는 세스 직원에게 전화해서 감사를 표했고, 앞으로 더욱 류근태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물론 그 결심은 3주도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최종효는 너무도 아쉬워했다.
류근태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들어올 수입이 사라지게 된 것이 슬펐던 것이다.
‘뭐, 어차피 세스에서 들키면 고용해 준다고 했으니까.’
스파이 노릇을 하다가 들킨다면 세스에서 책임지고 고용을 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시작한 이번 일.
그렇기에 최종효는 류근태에게 해고 처분을 받았음에도 아쉬워하는 생각만이 가득한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여보, 나 왔어.”
와이케이 백화점의 복지로 무상 임대 중인 번듯한 집의 문을 연 최종효는 ‘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픽 웃음을 흘렸다.
‘맞다. 어머니 집에 다녀온다고 했지.’
현재 최종효는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는 상태.
신혼부부를 배려한 시어머니가 고마웠기에, 최종효의 아내는 꽤 자주 시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오늘도 아내가 그런 이유로 집을 비웠다는 사실을 떠올렸기에 최종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했다.
나름 넓은 거실.
만약 복지로 무상 임대를 받지 않았다면, 세스의 연봉 기준으로 최소 3년은 꼬박 싹 다 모았어야 살 수 있는 집이었지만, 최종효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만간 이 집을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에휴, 이따가 세스에 전화해야겠네.’
어쩐지 피로감이 든 최종효는 바로 전화를 하기보다는 소파에 몸을 먼저 뉘었다. 어쨌든 4시간의 감금 동안 심적인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었으니까.
“응?”
소파에 누운 최종효의 눈에 응접 테이블에 올려진 못 보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책이지?’
대충 책을 들어 눈앞에 가져온 최종효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켜 양손으로 책을 집었다.
“마, 마, 마, 마르크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단어.
집에 있는 책에 바로 그 단어가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게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야?’
애초에 최종효의 집에는 책도 별로 없었기에 최종효는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누, 누가 산 거지? 아, 아, 아, 아냐! 일단 버, 버려야 해!’
최종효는 황급히 책을 상의 안에 품고는 마당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당에서 태우면 되겠지. 맞아, 태우면 돼!’
하지만, 이런 최종효의 생각은 실행되지 못했다.
쾅!
현관문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매우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문 열어!”
“헉!”
최종효는 순간 패닉에 빠져 버려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패닉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행동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관문이 그대로 박살 나며 현관 안으로 들어와 버렸으니까.
“이 새끼! 여기 있었구먼! 이런 빨갱이 새끼!”
현관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서인표 경정을 비롯한 기세등등한 사복 경찰들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세 마리의 지렁이.
하지만, 표정만큼은 류근태 앞에 섰을 때와 달리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새끼! 감히 공산주의를 찬양해?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빨갱이로 몰렸다는 사실만큼은 파악한 최종효가 바로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빨갱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서인표가 최종효의 멱살을 잡고는 앞뒤로 흔들자, 최종효의 상의에 숨겨져 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뭐야, 뭔데 품에서 떨어져?”
“아, 안 돼!”
멱살을 푼 서인표가 몸을 숙여 책을 집자, 최종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마르크스? 이 새끼, 이거 아주 진성 빨갱이구먼!”
“이, 이건 제 것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얼마나 소중히 여기면 품속에까지 품고 있어?”
서인표는 그대로 최종효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최종효의 입 안의 실핏줄이 터지며,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종효는 고통을 느낄 정신조차도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정말 제 것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보니 거실에 올려져 있…….”
최종효의 변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과장님! 여기 찾았습니다!”
“과장님! 여기도 찾았습니다!”
서인표가 데려온 다른 경찰들이 찾은 물건.
그것은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와 더불어 김일성의 사진, 그리고 다른 책자들이 있었다.
“헉!”
비명을 지른 최종효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
그것은 바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서인표의 주먹이었다.
* * *
너 과일 되게 좋아한다?>
요즘 들어서 매실을 즐기는 윤기를 바라보며 최덕배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먹어 보니까 괜찮네요? 옛날의 저한테 매실은 매실 음료밖에 없었는데 말이죠.”
하긴, 그 당시 네 수입으로 과일 사 먹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사 먹는 거야 가능하긴 했죠. 뭐, 애초에 살 생각은 없었지만요. 먹어 본 과일들이 죄다 상태가 영……. 으휴.”
윤기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과일을 먹어 볼 기회라고는 공사장 함바집에서 가끔 나오는 수박이나 사과, 귤 정도.
그런데 그나마도 물이 간 저급품들뿐이라 거의 손을 대지 않았었다.
사과는 푸석하기만 할 뿐 달지 않았고, 귤은 무른 데다가 시큼털털했으며, 수박은 스티로폼을 씹는 느낌이었으니 손을 댈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원래의 삶을 되찾은 이후에도 윤기는 과일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볼 때마다 옛날 맛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과일을 여러 번 먹은 이후로, 윤기는 상질의 과일을 즐기게 되었다.
올해 봄에 꽂힌 과일은 다름 아닌 매실.
“진짜, 지금의 삶을 살면 살수록, 예전 금수저들이 했던 ‘나도 가난을 안다.’라는 말들이 전부 개소리라는 걸 느끼게 돼요. 당장 사과만 생각해 봐도 걔들이 경험했던 사과와 제가 경험했던 사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니까요.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전혀 다른 체험을 했는데, 어떻게 감히 가난을 안다고 할 수 있었을까요?”
윤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최덕배 역시 큭큭 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어. 특정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 지방의 특산물이 수라에서 빠지는데, 그거 가지고 그 지방의 고난을 왕이 느끼게 하는 거였지. 그런데 개소리야. 어쨌든 굶지는 않잖아?>
“이거, 이거. 신하 된 자가 그런 표현을 해도 되는 거예요?”
조선 망했는데 뭐. 그나저나 그 배신자는 어떻게 처리할 거냐? 뭐, 일단 종로경찰서 지하실로 잡혀가 있는 것은 맞지만 말이야.>
류근태는 서 경정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윤기에게 보고했고, 윤기는 보고를 받은 후 최덕배에게 부탁하여 종로경찰서의 지하를 확인했다.
그 후로 최덕배는 윤기에게 계속 은근히 말을 걸었는데, 드디어 참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아마 상당히 고초를 겪게 되겠죠. 가짜 종북이라고는 해도, 건수를 만들어 놨으니 쉽게 나오지는 못할걸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이 될 거예요.”
아냐, 아무래도 부족해.>
모처럼 화끈하게 참견하고 싶어 하는 최덕배의 태도에 윤기는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요?”
어. 나도 배신자는 정말 싫어하거든. 친일 매국노들 봐라. 왕이랑 왕비가 아무리 쓰레기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건 그놈들 탓이잖아?>
“조선이 망했지만, 조선의 신하였던 것은 기억에 남으셨나 보네요.”
최덕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혼자 생활할 때는 생각이 많이 옅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너하고 같이 지내다 보니 나도 과거가 조금 중요해지지 뭐야.>
“그 심정 알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무언가 해 드렸으면 하는 게 있으신 건가요?”
최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해 줬으면 하는 것보다는 허락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뭔데요?”
최덕배는 은근한 표정으로 윤기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 * *
서 경정은 최종효가 ‘작업된 종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선풍기로 치면 ‘미’ 정도의 코스로 최종효를 대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하는 최종효 입장에서는 이게 미인지 약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노릇.
그렇기에 최종효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잠은 하루에 세 시간도 안 재우지, 물도 달라고 할 때마다 한 모금 겨우 주지, 밥도 안에 김치 넣은 보리밥이나 한 덩이 주지.
거기다가 발바닥을 두툼한 자로 때리거나 회초리로 가슴이나 종아리, 등을 때리는 데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불어. 너한테 종북하라고 시킨 놈이 누구야?”
점심시간, 우거짓국을 퍼먹던 경찰의 말에 최종효가 외치듯이 답했다.
“그러니까 저 종북 아니라고요! 진짜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미 코스를 받은 만큼 최종효는 3일 차가 된 오늘에도 아직 기력이 남아 있었다.
“이 새끼 봐라? 아직도 힘이 넘치네? 건방진 새끼!”
경찰 하나가 숟가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최종효의 이마를 딱하고 내리쳤다.
‘하, 생각 같아서는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은데. 진짜 종북이 아니라는 지령이 내려왔으니, 이거 원.’
이런 경찰의 생각은 전혀 모르는 채, 오히려 자존심이 팍 상한 최종효의 눈빛이 살기등등하게 변했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나 아니라니까……. 그래! 공산주의 만세다! 이 개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