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154)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154화(154/193)
| 154화. 성과자 확인 (3)
화면 속 정성빈은 스파크 활동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보리 색과 흰색을 조합한 의상이 정성빈과 잘 어울렸다.
그 밑으로 포근한 효과와 함께 자막이 깔렸다.
『청춘을 노래하는 미소년의 대변신, 지금 시작합니다.』
“자막 왜 저래?”
최제호가 경악했다. 표현이 올드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왜? 성빈이 미소년 맞잖아.”
“그,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정성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녀석의 귀가 새빨갰다.
당사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스파크 1급 미소년 보컬의 발밑에 곡명이 나타났다.
장준후의 데뷔곡인 『첫걸음』이었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하는 기쁨을 느끼던 남자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며 이별하는 이야기.
이 노래가 흥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토리가 진부하다는 데 있었다.
흔한 이야기인 만큼 여러 사람이 이별 후엔 심심치 않게 노래방에서 『첫걸음』을 불렀다.
단순한 구조와 적당한 음역대도 갓 데뷔한 신인이었던 장준후를 인지도 있는 가수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연습생 때의 나는 꼼수를 부리기 위해 인지도 있는 가수의 유명하지 않은 곡을 선택한 전적이 있었으나, 정성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박한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이 흘렀다.
『그 봄, 너를 만나
벚꽃으로 두 볼이 물들고
여름, 어린 마음에
나무 뒤로 달려가 숨었지
가을에는 나무도
마음도 붉게만 타올라
겨울날 너의 곁에
다가가 누웠다
포근히 내리더라, 눈빛이』
이미 눈부신 실력을 가졌으니까.
당당하게, 상대 진영의 가장 꼭대기에 꽂힌 깃발을 노릴 수 있는 거지.
정성빈의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은 생전 있었던 적이 없는 첫사랑도 떠오르게 했다.
아마도 팬분들이 이럴 때 ‘몽글몽글하다’는 표현을 쓰시는 것 아닐까.
『너와 내가 내디딘
걸음은 마음에 자국이 되어
차곡히 쌓이고
서로만 보며 많은 시간을
걷고 또 걸었지』
그러나 부드러움 속에도 단단함은 있었다.
수년간 쌓아 온 기본기가 주는 안정감.
정성빈은 기초를 누구보다 잘 닦은 사람이었다. 그런 녀석의 장점은 아왕실부터 지금까지, 듣는 이에게 신뢰할 수 있는 편안함을 주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기성 가수인 장준후를 실력으로 자극했던 놈이다. 그런 정성빈이 고작 장준후 노래의 도입부를 소화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곡을 부를 때의 장준후는 20대 후반에서 서른쯤이었을 거다. 첫사랑을 노래하기엔 음색에 풋풋한 느낌이, 추억을 회상한다기엔 연륜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정성빈은 어떠한가?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어린 나이와 청초한 얼굴을 가졌으면서, 정성빈은 그 시절 장준후에게조차 없었던 연륜을 갖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정성빈은 수년에 걸쳐 나이가 들어가는 장준후의 모든 사랑과 이별 곡을 녹음했으니까.
혼나고 싶지 않아서, 더 잘하고 싶어서. 계속 노래하고 싶고 끝내는 데뷔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울분을 삭인 채 몇 년을 노래한 정성빈에게 저 정도 내공이 안 쌓였을까. 어찌 보면 장준후가 본인을 잡을 칼을 정성빈에게 쥐여 준 셈이었다.
‘잘하네.’
이렇게 잘했으면서 촬영 끝나고는 왜 아무 말도 없었담. 입꼬리 조금만 올려 줬어도 내가 알아서 헹가래 쳐 줬을 텐데.
옆자리로 슬쩍 시선을 돌려보았건만 정성빈은 손부채질이나 하기 바빴다.
후반을 망쳤나? 아니면 무대는 곧잘 했는데 결과가 안 좋아서 창피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정신 차리고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음악은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정성빈의 손이 클로즈업됐다.
손등 위로 파랗게 핏줄이 도드라졌다.
손끝이 붉었고, 카메라가 훑고 올라가는 목과 코끝, 입가가…….
『도망쳐 걸었다
파도가 닿지 않는 곳으로
먼 모래사장으로
쓸려 지워지는 너를 두고
걸음이 시리다
눈이 내린다』
붉었다.
정성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끝끝내 눈물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마저 첫사랑을 막 떠나보낸 청춘 같았다.
가사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마이크를 두 손으로 꽉 쥔 채, 한 음 한 음을 꾹꾹 눌러 담는 모습이 마음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저런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완벽하게 노래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지금 궁금해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화면 속의 정성빈이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주변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여 앉은 모두가 정성빈의 호흡 하나, 노래 한마디에 상상 이상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걸.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감정 표현이었다.
‘내가 얠 과소평가했구나.’
다른 걸론 다 까여도 얼굴과 실력으론 안 까인다는 스파크에서 메인 보컬을 맡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중학생 때부터 가이드를 녹음하고, 가장 오래 연습생을 해 왔으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컬 숙련도가 두 자릿수였다는 사실을 평범한 데이터 입력하듯 받아들인 내 실책이다.
‘그냥…… 장준후 콧대 좀 납작하게 만들고 설움을 씻으라는 게 목적이었는데.’
장준후 곡에서 정성빈이 놈을 지울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성빈은 오히려 내 기대치를 우습게 넘어 버렸다.
이 무대를 본 누구도 원곡을 누가 불렀는지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까.
충격적이었다. 좋은 의미로.
* * *
“형은 천재야.”
눈시울이 벌겋게 물든 이청현이 정성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형은 천재야!”
“일단 울음부터 참아 보자, 청현아!”
이청현은 정말로 감동한 것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조용히 좀 해 봐. 형 멘트 안 들리잖아.”
강기연이 이청현을 타박하며 볼륨을 키웠다. 무대를 훌륭하게 마친 정성빈이 MC분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장준후 씨와 같은 소속사 선후배라면서요?』
MC분의 질문이 나오자마자 어디서 익숙한 욕설이 들렸다.
“에이 씨…….”
최제호 저놈은 욕을 조건 반사로 하는 게 틀림없다. 상대가 장준후니까 이번만 봐준다.
『네. 사실은, 제가 장준후 선배님과 인연이 깊어요.』
“헉.”
이청현이 숨을 삼켰다. 정성빈이 저렇게 대놓고 언급을 할 거라곤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정말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선배님 곡 가이드를 맡아서 했거든요. 그래서 선배님 노래에 대해선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건 정말 인연이네요. 준후 씨도 후배가 이렇게 데뷔해서 좋은 무대를 보여 주니 뿌듯할 것 같아요.』
“뿌듯하긴. 지금쯤 열폭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이청현이 비웃었다. 이놈, 성깔이 좀 는 것 같다.
“이월이 형은 이렇게 무대 잘 나올 거 알고 성빈이 형한테 일임한 거예요?”
강기연이 물었다. 나는 정성빈을 힐긋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야. 나도 놀랐거든.”
민망한 듯 정성빈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개미만 한 목소리로 눈물이 맺힌 건 의도한 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의도한 게 아니어서 더 좋았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방송은 17년차 기성 발라더가 ‘오늘의 가수’로 선정되며 끝이 났다.
치열한 인선에서도 정성빈은 3등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흡족하게 슬로건에 붙여 둔 정성빈 사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당사자가 말을 건넸다.
“감사해요, 형.”
“뭐가?”
슬로건 만들기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대뜸 감사 인사를 받아 버렸다.
무슨 의미냐는 뜻을 담아 쳐다보자 정성빈이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 형, 월말 평가에서 『창가에 앉아』 불렀던 거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스킬이 부족해서 없는 감성을 끌어다 사기 쳤던 첫 평가 아닌가. 돌이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실력이었다.
“이번 무대 준비하면서 그때 형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랬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형을 참고한 덕분이에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완벽하게 몰입하는 건 힘들었을 거예요.”
정성빈이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은 그때의 내게서 배울 점을 찾았나 보다. 나는 그때의 날 떠올리며 자기 비하나 하고 있었는데.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피했다.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 준비한 거잖아. 내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네 노력에 일부러 남 숟가락까지 올리지 마. 네가 그러지 않아도 현대 사회는 칭찬에 각박하니까.”
창피해서 그런지 말이 딱딱하게 나갔다. 어쩐지 민망해져서, 나는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좋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내 말에 정성빈이 활짝 웃었다. 낯간지러운 밤이었다.
* * *
정성빈의 ‘내.가.장’ 출연 이후 백해원의 플레이 리스트엔 새 곡이 추가됐다. 방송용 곡이라 음원은 기대도 안 했는데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곡이 풀린 덕이었다.
‘참…… 좋은 방송이었지…….’
전통이 있는 프로라 그런지 음향도 빵빵하고 조명 효과도 좋았다. 그곳에서 기깔난 무대를 보여 준 울 애기가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장’은 청초하게 글썽이는 정성빈의 얼굴을 기가 막히게 잡아 줬다!
정성빈의 미모가 빛나는 순간을 캡쳐한 백해원의 글은 스파클러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인용되었다. 끝내주는 고음 구간을 딴 동영상도 심심찮은 조회 수를 보여 주고 있었다.
≫ 내가장에 아이돌 나오냐고 싫어하던 우리 엄마 3분 만에 태세 전환하심
근데 자꾸 쟤 진짜 아이돌 맞냐고 물어봐
그러니까 성빈아 정통 발라드 하나만 내 주라
└ 원곡 넘어서기가 쉽지 않은데 솔직히 성빈이가 너무 잘해서……ㅋㅋㅋ 원곡 들으러 갔다가 조용히 백스텝함ㅋㅋㅋㅋ
└ 누가 봐도 성빈이가 원곡 삼켰다고요ㅠㅠ 울 애기 대견해서 주금
≫ 처연한 냉미남이 우는 건 반칙이지
거기다 노래까지 잘하고 말이야
이러다간 남돌 메보 1티어밖에 못 돼
└ 22이러다간 정성빈 너 남돌 1등 보컬밖에 못 돼ㅠㅠㅠㅠㅠ
≫ 정성빈 눈에 맺힌 게 눈물이 아니라 진주처럼 보이는데
이거 괜찮은 거냐……
가슴이 막…… 막 벌벌 떨리는데?
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갬성으로 흠뻑 젖었는데? 쥐어짜면 줄줄 흐르는데?
└ 진정하고 가서 스밍부터 해
≫ 눈매랑 코끝 목까지 불그스름한데 눈은 촉촉하고…… 표정은 처연하고……
저런 얼굴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데 안 사랑하고 배겨??
└ 안 사랑하고 배겨???
└ 안 사랑하고 배겨???????
└ 안 사랑하고 배겨?????????????
≫ 내가 정치를 안 해서 참 다행이다
만약 나였으면 궁궐 기둥 다 뽑아다가 첩지 내리고 성빈이 눈물 한 방울 흘릴 때마다 국고 터는 바람에 참수 엔딩 맞았을 거야
└ 쓰니야 제발 네 목 저기 날아간다고ㅠ
└ 내가 지금 뭘 본겨
이 틈을 타 옆 동네에까지 스파크를 영업하고 온 백해원은 하얗게 불탔다.
기력 회복을 위해 백해원은 음원이 풍화될 때까지 정성빈 ver. 『첫걸음』을 반복 재생시켜 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휴대폰 알람을 보며 침대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사랑스러운 스파크의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오늘 뭐 올라올 날이 아닌데?’
자신이 SNS 공지를 놓쳤을 리도 없는데. 백해원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급히 스파크의 미튜브 채널에 들어갔다.
≫ [스파크] 2X09XX 리더 몰래 응원 도구 만들기
‘설마 성빈이 플래카드 만든 거야?’
스파크가 너무 귀여워서 죽고 싶어졌다. 카메라맨이 애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뭘 하는 모습을 찍으려던 것 같은데, 다들 어깨가 태평양이라 썸네일에 등짝만 대문짝만하게 나온 것도 개같이 좋았다.
이번 영상의 배경은 웬일로 숙소였다. 깔끔한 PPT도 없었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아이돌의 리얼한 자컨은 이게 보통이었다. 그동안 너무 프로다운 모습만 봐서 착각할 뻔했다.
『각자 하나씩 만들고 나중에 모아 보는 거지?』
『그러자. 개성껏 만들자고.』
김이월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청현이 재료를 집어 들었다.
이윽고 정상인 없는 스파크 다섯 명의 거침없는 응원 도구 제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