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162)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162화(162/193)
| 162화. 사내 어린이집 (2)
“나는…….”
어떤 말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페널티 받기 싫어서 내 삶을 정상 궤도로 올려 준 누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수도 없고.
갈 길이 먼데 누나가 있다고 했다가 또 코피를 쏟아서 이번엔 진짜로 MRI를 찍으러 갈 수도 없었다.
애초에 누나가 있다고 말하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말이다.
비밀 유지 조항을 위한 시스템의 강제력인 듯했다.
금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있는데 두 놈이 내 안색을 살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구석을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녀석들은 곧 다른 내용으로 화제를 돌렸다. 눈치 빠른 놈들이라 다행이었다.
‘우리 누나는…… 좋은 편이었지.’
나와 누나는 드잡이질 한번 한 적 없이 자랐다. 누나와 나 둘 다 무던한 성격이었던 탓도 있고, 나이 차가 커서 누나가 나를 많이 봐줬던 기억이 있다.
똑같이 나이 차가 난다고 해도 최제호네 집 같은 곳도 있는 모양이긴 하다만.
누나는 집에도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가족한테도 누나는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려 했다.
나한테는 어른들하고 엮이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으면서, 본인은 꾸준히 가족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신경 안 쓰고 살면 안 돼? 그쪽도 우리한테 관심 없잖아.’
‘첫째들은 그게 잘 안 돼.’
자조하던 누나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런 나를 정성빈이 현실로 끌어당겼다.
“형, 치즈도 미리 까 놓을까요?”
“그건 살짝 뜯어만 놓자. 손을 많이 쓰는 게 소근육 발달에 좋대.”
“선생님들, 재료 준비 멀었나요?”
멀리서 이번에는 따봇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강기연이 물었다.
얼굴에 아주 화색이 돌고 있었다. 저렇게 생기 있는 표정은 보기 드문데. 역시 만화 친구가 좋은가 보다.
“예, 금방 가요!”
순간 나는 서빙 알바하던 시절의 톤으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적응해 버렸는데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 * *
스파크 멤버들은 객관적으로 체력이 좋은 편이다.
춤을 추는 게 일상인 최제호나 강기연은 어나더 클래스고, 박주우를 제외한 정성빈과 이청현 또한 연습 시간과 헬스의 효과로 꽤 근력이 있었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내가 계속 1등이었을 텐데.’
비록 지금은 순위권에서 잠시 멀어졌지만 곧 내 자리를 탈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누적 피로도 기능도 끄고 운동에 매진했으니 조만간 완벽한 몸 상태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매일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운동하는 청년들을 가볍게 넘어서는 신인류가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무한 동력의 소유자, 어린이였다.
“선생님, 나 이거 안 돼요~.”
“오이 왜 넣어야 해요? 나 오이 싫은데?”
“선생님, 저 바닥에 떨어트렸어요!”
“옷 젖었는데~. 다른 옷 입고 싶은데~.”
아이들의 체력엔 끝이 없었다. 모두가 샌드위치를 8단으로 쌓기 위해 기를 쓰고 임했다. 빵가루가 눈꽃처럼 흩날렸다.
개중에는 별 모양 샌드위치를 만들겠다며 아동용 칼로 식빵을 잘게 써는 친구들도 있었다.
덩달아 주방 보조(?)인 박주우도 치즈와 햄을 별 모양으로 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김이월, 거기 바나나 좀 줘 봐.”
“주긴 하겠는데 얼굴에 그 잼은 뭐야?”
“……? 언제 묻었대.”
그런 최제호의 얼굴을 어린이 한 명이 행주로 박박 문대 닦았다. 녀석의 청결도가 조금 올랐다.
어린 친구들을 한가득 달고 있는 멤버들을 위해서 나는 분주히 재료를 조달했다.
그렇게 에그마요를 세 그릇째 만들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회색 티를 입은, 좀처럼 다른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에게 말을 붙이지 않던 아이였다.
“……선생님 빵은 어디 있어요?”
“내 거?”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는 모두가 샌드위치를 하나씩은 물고 있었다.
스파크 멤버들도 애들과 함께 수제 샌드위치를 하나씩 나눠 먹는 중이었다. 최제호는 아예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먹는 중이었고.
애들을 먹이는 게 우선이다 보니 자기들 입엔 몇 입 넣지도 못하는 듯했지만, 적어도 제 몫은 하나씩 갖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기 주변의 카메라 감독님들께도 하나씩은 만들어 드린 듯했다.
나는 빈손인 사람이 없는지를 재차 확인하고 대답했다.
“선생님 건 이제 만들려고!”
그러자 ‘재윤’이라는 명찰을 단 친구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양손에 야무지게 식빵을 한 쪽씩 집어 들었다.
재윤이는 혼자서 척척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채소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반면, 햄과 치즈는 두 장씩 들어간 두툼한 샌드위치였다.
에그마요와 딸기잼을 얼마나 듬뿍 넣었는지, 재윤이의 비닐장갑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재윤이는 온정이 너무 많이 들어간 나머지 내용물이 다 터져 나오는 샌드위치를 내밀며 말했다.
“자요.”
“나 주는 거야?”
“네.”
얼떨떨하게 빵을 받아 들었다. 내가 몇 입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재윤이도 자기 몫의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 * *
스파크의 출연으로 인해 어린이집 스케줄엔 일부 변동이 생겼다.
정규 수업이었던 영어 동화책 읽기―이걸 했어도 아마 이청현이 수업을 이어 갈 순 있었을 것이다―대신 자유 놀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합법적으로 놀 수 있게 된 아이들은 고삐가 풀린 듯 날뛰었다.
“선생님! 나도 미끄럼틀 올려 주세요!”
“충분히 올라갈 수 있잖아.”
“다리 안 닿는데!”
“선생님이 받쳐 줄 테니까 해 봐.”
최제호는 어트랙션 안전 요원으로 전직하는가 하면.
“미니팡이 더 세죠, 선생님? 마제스티 파워 쓰면 아무도 못 이기죠?”
“따봇이 15단 진화하면 미니팡은 한 방에 지거든? 15단 진화는 따봇 열다섯 개 합치는 거거든?”
“음…… 이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강기연은 미니팡이 센지, 따봇이 센지 심판을 내리는 대법관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 당연히 폭주한 씁쓸팡이 제일 세지?”
“글쎄, 선생님은 잘…….”
“선생님, 여기 봐 봐. 내가 스티커 붙여 줄게.”
그리고 박주우는 거의…… 미니팡 나라의 완전체 미니미니팡팡 같은 꼴이 되었다.
머리에 꽂힌 수많은 헤어핀과 어깨에 걸친 하늘하늘한 숄, 손에 들린 요술봉이 박주우의 권력을 실감케 했다. 그래도 얼굴에 스티커는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막았다.
다행인 것은 정성빈 특유의 온화함이 아이들을 감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정성빈은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의 음을 기가 막히게 찾아서 이청현에게 전달해 주는 통로 역할을 맡았다.
그 덕에 꽃님반에는 드디어 피아노 반주가 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만 혼자 남았다.
“저 이렇게 인류에게 배척된 건 처음이에요.”
내 중얼거림에 작가님들께서 웃음을 참으셨다.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림상으론 좋겠지만, 괜히 촬영의 퀄리티를 높인답시고 애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무리에 합류하는 대신 흩어진 장난감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리고 바닥에 쏟아진 장난감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참 바구니에 블록을 담고 있는데 반대쪽에서도 블록이 하나씩 담겨졌다.
재윤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블록을 같이 담아 주고 있었다.
“재윤아?”
놀란 내 부름에도 재윤이는 담담히 장난감을 정리했다.
착하기도 하지. 하지만 어릴 땐 놀기만 해도 좋을 텐데.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이렇게 마음이 쓰일 수가.
재윤이는 끝까지 나와 블록 정리를 함께했다. 뒷정리가 외롭지 않았다.
* * *
“이제 다들 낮잠 잘 준비할게요!”
“싫어요!”
“아니에요, 이제 낮잠 잘 거예요!”
아이들이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우리는 비겁하게 선생님 뒤에 숨어 말없이 쾌재를 불렀다. 스파크의 고운 얼굴에 다크 서클이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
“셋, 셋으로 나눠서 세 명은 바닥 치우고 세 명은 이불 깔자.”
“응…….”
박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귀에 매달려 있었던 보석 귀찌가 달랑거렸다.
“난 자기 싫은데.”
“진짜? 선생님은 키 더 크고 싶어서 잘 거야.”
“잠자면 키 커?”
“당연하지. 저 선생님들 봐.”
투정을 부리는 어린이와 대화하던 최제호가 우리 쪽을 가리켰다. 멀대 같은 5인조를 보던 어린이는 순순히 이불을 덮고 누웠다.
“얼마나 자야 선생님처럼 키 커?”
“엄마가 자라고 할 때 자야 해.”
“그럼 나도 천장만큼 클 수 있어?”
“어. 대신 몰래 게임하느라 안 자면 저기 있는 선생님처럼 눈 밑이 까매져.”
그러면서 최제호가 이번에는 날 가리켰다. 어린이가 두 손을 제 양쪽 눈에 착착 얹었다. 지금 나 판다라고 놀린 거지?
강기연은 이불을 깔기도 전부터 온갖 러브콜을 받았다. 모두가 강기연의 옆자리로 이불을 끌고 왔다. 강기연이 들려 준 미니팡과 따봇의 뜨거운 모험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정성빈과 내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을 끄자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저희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애들 자는 거 보고 있으면 돼요!”
선생님께서 조용조용 어린이집의 다음 스케줄을 알려 주셨다. 아이들은 잘 때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지켜보는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오후 간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2열 종대로 주르륵 누워 자는 애들을 보고 있으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내 바로 옆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른이도 있었다.
“주우 졸려? 가서 좀 잘래?”
“아니야, 괜찮아…….”
“미끄럼틀에라도 올라가서 자. 최제호 쟨 이미 자고 있는데, 뭐.”
최제호는 이미 줄 끄트머리에서 팔자 좋게 자는 중이었다. 쟤는 왜 저러고 자는지 모르겠다.
박주우는 미끄럼틀 위에, 정성빈과 강기연은 볼풀 안에 재워 놓고 나자 한숨 돌릴 틈이 찾아왔다.
“청현이 너는 안 자도 돼?”
“난 교본 암기해야 해.”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동요 악보집이 이청현의 손끝에서 파르르 떨렸다. 본인이 모르는 곡이 있다니, 자존심이 좀 상한 듯하다.
‘난 이제 뭐 하지…….’
발소리를 죽이고 돌아다니다 보니 이불을 걷어찬 친구들이 몇몇 보였다.
애들은 체온이 높다더니, 더워서 그런가.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땀이 나는 건 아닌지 이마를 살짝 쓸어 본 다음, 다시 반듯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