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179)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179화(179/193)
– 사내 주제가 (2)
“반려입니다.”
“네?”
“반려라고요.”
지성인의 손이 서류철을 살짝 흔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못 박혀 있다. 받고 꺼지란 뜻이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선구안은 서류를 받지 않았다. 대신 질문했다.
그제야 지성인의 눈길이 선구안을 향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
“멀쩡한 상품의 구성 종목을 바꿔야 한다는 이유가, 이게 답니까?”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선구안에게는 확신이 있다. ‘유병기업’에서 나올 수 있는 수익성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이 시점에선 곧 호재가 발생할 ‘베아’로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건 ‘선구안에게만’ 보이는 사실이었으니까.
“더 할 말 없으면 이거 가지고 자리로 돌아가세요.”
“…….”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데이터로 말하는 자산 운용사에서 오직 숫자로만 소통하는 지성인 팀장. 선구안은 자신의 두 눈만으로 그 벽을 넘어설 수 없다는 데 처음으로 절망했다.
‘이미 유병 쪽에 파란 불이 보이는데 어쩌라고!’
자리에 앉은 선구안이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다 지 팀장 때문이야.’
이전의 팀장은 의욕이라곤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상사인 덕에 일하긴 편했다. 선구안은 언제나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을 하는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 덕분에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 팀장이 온 뒤로는 모든 게 바뀌어 버렸다. 적당한 변명으로 지어낸 보고서는 통하지 않았다.
직감으로 알아낸 정보를 데이터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지성인과 선구안, 두 사람이 매번 부딪치는 이유였다.
‘짜증 나, 재수 없어, 유병기업 망하고 나서 후회나 하지 마라.’
속으로 중얼거리며 선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약해 둔 인쇄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복합기 앞에는 제 부사수, 도영환이 서 있었다.
“혹시 이거 뽑으셨어요?”
“어어, 응.”
도영환이 미리 나온 인쇄물을 가지런히 정리해 선구안에게 건넸다.
인쇄물은 한참을 더 나왔다.
인쇄가 끝나길 기다리던 선구안이 복합기 옆 벽에 기대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영환 씨, 아직 지 팀장한테 깨진 적 한 번도 없지?”
“어느 정도로 깨져야 깨졌다고 보시나요?”
“오늘의 나만큼?”
“그 정도는 아직 없습니다.”
“좋겠네, 영환 씨는.”
선구안이 도영환을 쳐다보다 혼잣말처럼 질문했다.
“지 팀장하고 소통하려면 역시 데이터가 필수인가?”
금융업계에 종사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바보 같은 말이 또 있을까? 선구안이 멋쩍은 듯 웃었다.
“답답하신가요?”
“조금.”
선구안이 유리 파티션 너머의 지성인을 응시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가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사람과 계속 일할 수 있을까?’
지 팀장이 원하는 대로 데이터를 가져다준다고 치자.
그런데 그 회사가 상장 폐지 직전이라면?
그리고 서류를 열심히 조작한 끝에 ‘아직’ 걸리지 않은 상태라면?
그곳에 투자하기로 결정된다면?
선구안의 눈은 그를 판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서류가 조작이라는 증거까지 보여 주진 않는다. 조사하고, 찾아내서 설득하는 건 선구안의 몫이 된다.
삑, 삑―.
발치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복합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꼭 강점만 가지고 대화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영환이 용지 칸을 열자 소음이 멎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도영환이 인쇄용지 한 세트를 꺼내 뜯고 새로 종이를 채웠다. 복합기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촉 좋은 선 대리님께서 리스트 업하고, 꼼꼼한 지 팀장님께서 결재해 주시면 두 분은 좋은 조합이 되지 않을까요.”
“…….”
“리스트에 약간의 설득력이 필요한 것뿐, 대단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합기가 멈췄다. 도영환이 가득 출력된 인쇄물을 꺼내, 잘 갈무리한 다음 선구안에게 건넸다.
“그래서 뽑으신 거 아닌가요? 이 자료.”
“우리 영환 씨는 너무 똑똑해서 가끔 무섭다니까.”
선구안이 픽 웃었다.
그러고선 제자리로 돌아가려다, 멈춰 서서 여전히 복합기 앞에 서 있는 도영환을 보고 물었다.
“그러는 영환 씨야말로 내가 사수라 걱정될 때 없었어? 일 가르쳐 주는 사람이 매번 촉 운운하잖아.”
도영환은 무던한 표정으로 뽑혀 나오는 종이만 보며 대답했다.
“걱정되기 시작하면 바로 살길 찾아 도망갈 겁니다.”
귀여운 신뢰였다. 자리로 향하는 선구안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아까의 보고서를 다시 지 팀장의 눈앞에 들이밀고 싶었다.
***
“하…….”
감독님들이 카메라를 돌려 보시는 동안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때의 애드리브도 힘들었지만 이번 애드리브는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심지어 내가 물꼬를 터서 더!
‘설마 거기서 용지가 다 떨어질 줄이야.’
이번 신은 주인공인 선구안의 감정 변화가 매우 중요한 장면이었다.
본인의 재능을 잘 발휘해 오다가 벽에 부딪힌 무력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 등이 뒤섞여 새 팀장과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구간이었으니까.
게다가 주인공인 두 사람은 옥상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오만 감정 신을 찍고, 체온을 회복한다며 중간에 휴식 시간까지 가진 상황이었다.
날씨 열악하지, 촬영이 끊겨서 감정 연결 안 되지, 체력은 점점 떨어지는데 전개상 시청자를 설득할 정도의 연기력도 보여 줘야 하지.
이 절체절명의 순간 눈치 없이 복합기가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순간 눈앞이 A4 용지처럼 새하얘졌지 뭔가.
그래서 컷 소리가 나기 전에 그냥 애드리브를 쳐 버렸다. 소리가 더 안 나게 열심히 종이도 채웠다. 복사 용지 채우면서 나도 후회했다.
다행인 점은 촬영이 중간에 끊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서명 씨도 잘 이어 주셨고.
불행인 점은…….
“이월 씨, 방금 도영환 원샷이랑 상반신 한 번씩만 더 갈게요!”
굳이 내 파트에 추가 촬영이 들어왔단 거다.
젠장할, 빨리 정성빈 OST나 나왔으면 좋겠다.
***
시간을 빼앗긴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드라마 촬영으로 얻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카메라에 어떻게 해야 잘 보일지를 다양한 방향에서 생각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아이돌은 시선을 카메라에 주는 게 가장 중요한 반면, 배우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시선으로 몰입감을 줄 수 없으니 움직임 하나까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갖은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표정 연기를 넘어서 동세까지도 연습하게 됐다. 정해진 동작을 누가 봐도 일상적인 것처럼 보여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불어 아이돌로 무대에 설 때는 디테일이 부족한 춤 선이 카메라에 덜 비치는 걸 목표로 했었다.
반면 배우는 특정한 의도가 아니면 최소 바스트 샷이 기본이다. 연출적 요인을 위해 손이나 신발만 찍는 게 아니라면 계속해서 얼굴이 나온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머리의 그림자가 안광을 가리느냐 마느냐도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게 보였다.
‘이런 게 통일이 안 되면 영 신경 쓰인단 말이지.’
그래서 숙소에서도 하루 종일 앞머리를 내리고 돌아다녔다.
몇몇 놈들이 기분 안 좋냐며 안부를 물어봐 오긴 했지만 덕분에 조명이 어디에 달려 있든 죽은 눈을 연기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앞머리와 무관하게 그냥 안광이 뒤진 놈도 있었다.
부엌에서 헤드셋을 쓰고 노트북을 두들기는 이청현이었다. 이어폰 너무 많이 쓰면 귀 상할까 봐 얼마 전에 하나 사 준 헤드셋이었다.
식탁을 살짝 두드리자 놈이 퀭하지만 심연의 한가운데같이 깊은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드러냈다.
“형 왔어? 왜?”
“OST, 네가 작업해?”
이청현의 노트북에는 ‘인마이오피스_2차ED_Ver.5’라는 제목의 작곡 프로그램이 열려 있었다.
“어엉, 그렇게 됐어.”
“요즘 다들 나 빼고 회의한다?”
“그럼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는 형 데리고 화상 회의할까? 동생들이 자립심 있게 크고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줘.”
“이젠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네.”
“당연하지. 내년에 해 바뀌면 형이라고도 안 부르려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도 이청현의 손은 멈추질 않았다. 악기를 몇 개나 섞으려고 했는지 트랙이 빽빽했다.
“들어 볼래?”
“그래도 되면.”
이청현이 헤드셋을 넘겼다. 녀석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발라드는 처음이라 그런 걸까. 이놈이 장르 탈 놈은 아닌데.
재생 버튼이 눌리자 슬픈 곡조가 흘러나왔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이었다. 연인이 위기를 겪거나 헤어지는 상황에 나오기 딱 적절한 감성이었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악기들도 클래식했다.
하지만…….
“너 이거 마음에 안 들지?”
“어떻게 알았어?”
이청현이 눈을 다람쥐처럼 뜨고 물었다.
“네 스타일이 아니야.”
“내 스타일이 뭔데?”
“그렇게 ‘나다운 게 뭔데?’ 같은 질문은 자제해 주지 않을래?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되니까.”
내 요청에도 이청현은 내 양 팔뚝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화음이나 멜로디가 부자연스러운 곳은 없거든?”
“응, 응.”
“그래도 중독성이든 고점이든 뭐 하나는 남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얜 아무것도 없어. 맹탕이라고. 소파에 누워 있는 제호형을 노래로 만든다면 이럴 거라니까?”
“왜 갑자기 시비냐?”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최제호가 멀리서 목소리를 냈다. 우리도 들을 의사가 없었을뿐더러, 최제호 본인도 누가 대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명한 OST들을 레퍼런스로 삼은 건 알겠어. 발라드에 기초한 것도 알겠고. 보컬로 성빈이 목소리를 생각한 것도 좋아. 가녹음해서 얹으면 훨씬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 문제는 이미지가 없다는 거야.”
“드라마 자체가 연상이 안 된다는 거야?”
“‘어느 드라마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OST라는 거지.”
내 말에 이청현이 미간을 찌푸리려다 말았다.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미간을 열심히 폈다.
“그래도 대단하네. 어떻게 OST 작업까지 맡을 생각을 했어?”
창작에도 어느 정도 휴식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OST 건은 굳이 이청현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던 건데.
본인이 자처해서 일감을 가져올 줄은 몰랐다.
“나중에 스파크가 발라드로 컴백할지도 모르잖아.”
“그런 기특한 생각을?”
“난 늘 기특했어. 나 같은 동생은 흔치 않으니까 잘해 주도록 해.”
그러더니 이청현은 내 코멘트를 메모장에 타이핑했다.
‘드라마를 연상시킬 수 있는’, ‘인 마이 오피스’에 특화된…… 등등을 적던 이청현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 형.”
“왜?”
“직장인의 삶은 보통 어떤 거야?”
아, 넌 거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구나.
어쩔 수 없지. 너를 UA 기획 회의(특: 마감 3일 전)에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