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23)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23화(23/193)
| 23화. 컨셉 기획 (2)
나는 강기연과 나란히 연습실 바닥에 앉았다.
맞은편의 거울에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강기연이 비쳤다.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분위기를 풀어 주는 게 나을지 고민하다가, 이 녀석에겐 배려보단 판을 깔아 주는 편이 맞을 듯해 내 쪽에서 먼저 운을 뗐다.
“얘기할 거 있으면 편하게 해도 돼.”
그럼에도 강기연은 곧바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잡담이라도 좀 해 주길 원했나? 자기표현을 어려워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다행히 얼마 더 지나기 전에 강기연은 입을 열어 주었다.
“긴장……하는 거 관해서, 조언받을 수 있는 게 있을까 하고요.”
강기연의 면담 신청 사유는 놀랍게도 ‘조언이 필요함.’이었다.
첫 평가를 말아먹지 않은 내 담력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스파크에 멘탈 강해 보이는 애가…… 최제호 말곤 없었나.’
정성빈이야 나중엔 제법 심지가 굳건해진다지만 아직은 다들 애들이었다.
그나마 자문을 구해 볼 만한 최제호는 대화 난이도가 극상이고.
그러다 보니 소거법으로 남은 게 나뿐이다, 이거지.
‘아쉬운 게 있으면 뚝딱이한테도 조언을 구하겠다는 자세는 인정한다.’
남에게 정면으로 지적을 받는다는 건 보통 용기로 되는 일은 아니니까. 이 부분은 가히 존경할 만했다.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는 내게 강기연이 물었다.
“형은 원래 긴장 같은 거 잘 안 하는 성격이에요?”
“많이 하진 않았지만 안 하는 편도 아니었어. 평범했다고 생각하는데.”
“긴장하는 건 어떻게 고쳤는데요?”
응, 경영진 앞에서 부장한테 본보기로 X나 깨지면서 고쳤어.
나는 고성이 오가던 회의실의 풍경을 애써 잊으려 두 눈을 감았다.
참자. 강기연은 사회인이 아니라 고등학생이야.
나는 강기연에게 조직의 쓴맛을 알려 주는 대신 아픈 기억을 최대한 순화해 설명했다.
“실전 같은 연습을 많이 했어. 모의 면접 보듯이.”
“실전처럼…….”
강기연이 내 말을 따라 읊조렸다.
“깨지는 상상도 하고 실수하는 상상도 하고. 그러면서 실수했을 땐 어떻게 대처할지, 어떤 상황이라고 가정했을 때 내가 제일 긴장하는지를 확인하는 거지.”
“모의 테스트는 많이 해 봤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어요. 카메라도 설치했었는데.”
“실전보다 압박감이 덜하면 연습을 많이 해도 당황스러울 수 있지.”
밤새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가도 상사가 ‘김 대리, 표정이 왜 그래?’ 한마디만 하면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인 법이니까 말이다.
“선생님들께선 따로 조언해 주신 거 없었어?”
“잘하고 있으니까 연습하던 만큼만 하면 된다거나…… 그러셨죠.”
역시 UA. 조언이 상냥했다.
아이돌들이 나중에 멘탈 갈릴 거 생각해서 일부러 자극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남들의 칭찬도 내 귀가 열려 있을 때나 들리는 법이다.
당장 자신이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하고 있단 칭찬을 들어 봤자 강기연에게 그다지 와닿진 않았을 것이다.
“압박감은 어떻게 조성하면 될까요?”
강기연이 물었다.
일단 나는 남 부장이 할 법한 꼬리 질문을 수백 번씩 돌려 가며 자문자답 대잔치를 열었었다.
혼자 살았으니 다행이지, 동거인이 있었다면 분명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줄 알았을 거다.
“긴장하는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갖춰 놓고 연습하면 적응이 될 것 같긴 한데……. 선생님들께 일일이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없긴 하겠다.”
“그러니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강기연에게 제안했다.
“내가 평가자 역할 해 줄까?”
“네?”
강기연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여태까지 목소리 한번 안 높이고 덤덤하게 얘기하더니. 이건 예상 외였나 보다.
“카메라 두는 걸로는 부족하다며.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를 더 실감 나게 만들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형은 입 열면 분위기가 풀어져서 그 느낌이 안 살지 않을까요?”
“걱정 마. 나 꼰대 역할 잘해.”
강기연이 영 신용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 부장의 영혼이 깃든 내 열연을 보면 깜짝 놀라겠군.
살면서 내가 자의로 스파크 좋을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기연한텐 지금까지 도움받은 게 많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은혜를 갚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강기연은 별다른 수가 없었는지, 혹은 정말로 절박했는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낮에 네가 내 연습 봐주는 대신이야. 밤에 연습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일부터 하시죠.”
“너의 열정 정말 존경한다.”
나는 연습실의 이용 시간이 조금만 더 남았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자고 말했을 게 분명한 강기연의 태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점에 대해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보다, 이 정도 부탁은 뜸 안 들여도 돼.”
상담을 할까 말까 자기들끼리 고민하다가 일을 키우는 것보단 선 보고 후 뒷감당이 5만 배는 나았다.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안 보이는 데서 싸우고 감정의 골을 한껏 파는 것보단 차라리 내 눈앞에서 치고받는 게 나았다.
안 보이는 데서 싸우고 화해까지 한 다음 오는 게 최고긴 하지만.
‘그 최제호에게 단체 연습 같이 하자고 몇 번이나 조를 정도였으면 남에게 뭔가를 요청하기 어려워하는 성격은 아닐 텐데 말이야.’
심지어 강기연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의외로 불만도 갖지 않는 편이었다.
고작 이거 하나 물어보려고 괜히 따로 시간을 내 달라느니, 뜸 들일 녀석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강기연에게서 상당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형 요새 바빠 보이길래, 부탁해도 되나 좀 고민되더라고요.”
그것도 제법 대견한 이유와 함께.
‘김 대리 바빠 보이네?’라고 말하면서 스파크 생일 카페 대관을 부탁했던 남 부장과는 인성이 천지 차이였다.
미운 놈한테 떡 하나 더 줄 바엔 내가 다 먹고 죽겠다던 예전의 생각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미운 놈한테 줄 떡 뺏어서 열심히 하는 애 주는 게 인간 된 도리지.
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의 표본이었던, 성격 좋고 일도 잘하며 성실하기까지 한 송 주임님을 떠올렸다.
송 주임님, 그간 더 잘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주임님이 깔깔 웃었던 남 부장 성대모사…… 여기서도 잘 활용해 보겠습니다. 부디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무탈하시길.
마음까지 촉촉해지려던 찰나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남 걱정하기 전에 나야말로 야근을 끝낼 시간이었다. 씁쓸했다.
* * *
한밤중의 대화 이후 나와 강기연의 관계는 조금 재밌어졌다.
‘여기선 따단 탕으로 가야 하는데 형은 그냥 우당 탕이에요.’
‘미안하게 됐다.’
낮에는 강기연이 내 멱살을 붙잡고 나를 끌어 줬고…….
‘강기연 손 떨지 마. 시선 정면에 고정하고. 허리 펴.’
‘네.’
밤에는 내가 강기연을 쥐 잡듯 잡았다.
둘이서 밤마다 뭘 하냐며 남았던 이청현이 표정 관리하라는 잔소리만 20분을 듣다가 도망가 버리는 날도 있었다.
“어깨 펴고, 허리도 펴. 자세가 움츠러들어 있으면 더 긴장돼.”
“……자세를 펴도 긴장되는데요.”
“저쪽 바닥에 한 3분 누워 있다 일어나 보든가.”
긴장 풀라고 건넨 농담이었는데 강기연은 정말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만큼 간절한 거겠지. 능력은 출중한데 그걸 보여 줄 수가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나.
나는 내 춤 선생님이 반드시 빛을 보게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누워 있는 강기연에게 다가갔다.
“어때?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아?”
“……네. 편해서 그런가 봐요.”
거짓말은 아닌지 강기연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나는 강기연이 호흡을 되찾는 걸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일어나. 다시 처음부터 시뮬레이션 돌려 보자.”
강기연이 아주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한 번도 내게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기연의 인내력은 높게 샀다.
그렇다고 강기연이 내 연습 시간을 잡아먹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의도치 않게 매일같이 보다 보니까 이쪽에서도 배우는 게 있었다.
모니터링하는 느낌으로 모범 사례만 수십 번을 보고 있으니 움직임이 더 자세한 수준까지 들여다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전보다 왼발에 실리는 무게가 줄어든 것 같은데, 방금 그건 힘들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 거야?”
“힘들어서요.”
“힘들만 하지. 그래도 평가에서 선생님들이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 주진 않을 거란 거 알지?”
“……예.”
검지랑 중지 사이의 각도가 춤출 때마다 달라진다고 했을 땐 강기연의 얼굴에 질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어쩌라고. 내가 얘기 안 해도 나중엔 지가 신경 쓸 거면서.
나는 몇 번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식은땀으로 몸이 흠뻑 젖은 강기연에게 물었다.
“발목은 그 뒤로 아픈 적 없어?”
“네. 그때 일찍 병원 가서 그런가.”
“그러니까 아프면 재깍재깍 병원엘 가. 귀찮다고 미뤘다가 큰 병 만들지 말고.”
“네네.”
쏟아지는 잔소리에 익숙해졌는지 강기연이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초반보단 훨씬 움직이는 게 자연스러워졌어. 적어도 나한텐 적응한 거 같아.”
“제가 느끼기에도 그래요.”
“내가 물렁해 보여서 분위기가 잘 안 잡히는 걸 수도 있긴 해. 차라리 최제호를 앉혀 놓는 게 나았으려나?”
“네?”
내 말에 강기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형이 물렁해 보인다고 생각하세요?”
“평범하거나 살짝 흐릿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는 생각하고 있는데.”
적어도 물만두보다는 흐물흐물해 보일 것 같다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 부장이 입사 3일 만에 나만 집요하게 갈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형, 어……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말해 봐.”
“솔직하게요? 필터 없이?”
“언제는 필터 있었어? 가감 없이 얘기해.”
“형 얼굴만 보면 XX 무서워요.”
……뭐라고?
“이청현은 형 처음 봤을 때 연습생 아니라 이사님인 줄 알았대요.”
“이 독해 빠진 쿨톤 놈들이 뭐라는 거야.”
“주우 형은 형 처음 온 날 긴장해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요.”
“거짓말이지?”
“진짜예요. 압박감은 한가득 주고 계시니까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강기연의 말은 들을수록 당혹스러웠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다크서클을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 * *
강기연의 충격 고백까지 듣고 숙소로 돌아오자 이청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신규 입사자들을 차례로 온보딩하는 기분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김이월의 백오피스를 점거한 이청현이 물었다.
“형! 저 멜로디는 다 짰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건 이사님 같은 내가 아니라 다른 전문가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청현아?”
“강기연이 그거 얘기했어요?! 내가 말할 땐 듣는 척도 안 하더니!”
“둘이 자꾸 이상한 얘기할 거면 성빈이한테 말해서 연습량 더 늘려 달라고 한다.”
“에이. 저희가 건설적인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그러더니 이청현은 그 나이에 어디서 쌓았는지 모를 사회 생활력을 발휘해 내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형이 워낙 동작을 잘 보지 않느냐.’, ‘강기연도 자주 얘기한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청현의 대처는 마냥 둥글지만은 않았다.
“형은 동체 시력이 그렇게 좋으면서 왜 출력을 못 하는 거예요?”
막판에 아주 묵직한 주먹을 날리더라고.
“넌 피카소 그림 보면 똑같이 그릴 수 있어?”
“아하.”
덕분에 별 시답잖은 대화도 오갔다.
그렇게 몇 마디 떠들고 나서 나는 일 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그보다 멜로디 다 만들었다며. 들어 봐도 돼?”
“물론이죠. 대신 피드백은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부드럽게?”
“지금 약간 지붕부터 쌓은 집을 공개하는 기분이라.”
이청현이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애초에 전문가도 아닌 내가 무어라 조언할 수 있을 리도 없는데.
나는 못 보겠다는 듯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이청현의 옆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원을 재생했다.
흘러나온 것은 분명 내가 아는, 과거 이청현이 작곡한 수록곡 『시작』의 멜로디였다.
그러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전보다 좀 더…… 노래가 괜찮아지지 않았나?’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부족한 어휘력으로는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청현의 노래는 좋았다. 스파크 덕질 n년차인 내 psd 파일들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