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32)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31화(32/193)
| 31화. 추노 (1)
나를 호출한 민주경 님은 학생 때 발표 좀 해 본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발표요?”
“응. 해 본 적 있어?”
당연히, 질리게 해 봤다.
단순한 보고성 프레젠테이션 정도는 웃으면서 4시간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가 없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표면적으로 한평산업에 입사해 PT를 진행한 경험도, 대학에서 발표를 해 본 경험도 없을 새파란 스무 살에 불과하니까.
나는 곤란한 척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특별히는 없습니다.”
“그렇긴 하겠다. 아까 이월이 네가 준 기획서, 대표님이 매니지먼트 본부 들르셨길래 바로 보여 드렸었거든.”
기안을 상신하는 속도가 KTX보다 빨랐다.
UA는 대표도 이렇게 문서를 빨리 봐 주는데 남 부장은 뭐가 그렇게 바빠서 휴가 신청조차 안 받아 준 걸까.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민주경 님은 죄가 없지. 나는 울분을 삼키며 열심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민주경 님은 말을 이어 갔다.
“그랬더니 대표님이 네가 직접 정리해서 얘기하는 거 들어 보고 싶으시다네.”
“제가 직접요?”
“응. 어때? 해 보면 의외로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몰라.”
PT를 골백번 해 봤지만 좋은 경험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게 PT란 스트레스와 구역질의 콜라보에 불과하다.
그래도 기회를 준다면 잡아야지.
지금의 내겐 고민도 사치니까.
“네,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네가 구상했던 걸 설명만 하면 되는 거니까 디테일한 요소까지 정해 올 필요는 없고, PPT는…… 있으면 좋은데 없어도 상관은 없어. 회의 일정은 다음 주쯤 잡으려고 하는데 괜찮지?”
“괜찮습니다.”
컨셉 짜면서 레퍼런스는 이미 모아 둔 상태였다.
내용 정리가 끝났으니 시각 자료 만드는 건 문제도 아니다.
파일을 미리 전달해야 할 메일 주소와 NS 프로그램 계정까지 받으니 모든 용건이 끝났다.
PT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리고 내 주특기는 철야지.
나는 어떻게 내 시간을 갈아야 최고의 자료를 만들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어 죽은 잔디의 요정무덤은 피하고 만다.’
나는 굳건히 결의를 다졌다. 어깨가 무거웠다.
* * *
나의 ‘잔디 요정 회피하기’ 프로젝트는 그날 밤부터 곧바로 시작되었다.
그런 내게 이청현이 질문했다.
“다 좋은데 잠은 자면서 해야 되지 않아요?”
작곡을 끝냈으니 며칠은 쉴 법도 한데 이청현은 끊임없이 거실을 배회하고 있었다.
“스무 살이면 철야하면서 돌도 씹어 먹을 나이야.”
“이 형이 지금 뭐라는 거야. 형은 잠을 너무 안 자잖아요!”
너 같으면 단체로 얼어 죽은 잔디 귀신이 되게 생겼는데 잠이 오겠냐?
화병으로 죽는 거면 모를까, 꽁꽁 얼어서 승천하고 싶진 않다.
“이런 거 만드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이청현이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본인은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작곡 프로그램을 뚝딱뚝딱 다루면서 말이지.
시간이 없어서 눈은 모니터에서 떼질 못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상냥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살다 보면 다 할 수 있게 돼.”
“대박.”
정확히는 조별 과제에서 버스 기사 4년만 하면 되지만…… 애들은 몰라도 된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나는 UA의 회의실에서 인생을 통틀어서는 약 사백오십 번째 정도 될 것 같은 PT를 진행하게 되었다.
여기 있는 모두 내게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을 테니 부담은 적었다.
사전에 전달받은 것과 달리 모든 부서에서 사람이 들어왔다는 함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템 공유 수준의 발표였기에, 수박 겉핥기식 PT는 20분 만에 끝이 났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 나는 습관처럼 빈정댐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가 이딴 얘기 들으려고 시간 낸 줄 알았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대표가 내게 역으로 제안을 해 왔다.
“이월아.”
“네.”
“기획안 양식 줄 테니까, 한번 제대로 써 볼래?”
예?
잠깐이었지만 이 청취자들이 발표를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일단 그렇다는 전제하에, 내용에 대한 질문이 없다는 건 딱히 문제 되는 부분이 없었다는 것.
이는 곧, 이들이 보기에도 내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충분히 사업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네, 알겠습니다.”
비속어 한 번 없는 의사결정이라니.
고성이 오가지 않는 회의실이라니!
한평산업에서 단련된 내게는 의문스러운 흐름이긴 했다.
그래도 ‘해 볼 만은 하다’는 인상을 주는 덴 성공한 것 같았다.
썩 괜찮은 결과였다.
* * *
“다들 잠깐 남아 볼까?”
김이월이 회의실을 나가자 대표가 회의에 참석했던 인원을 불러 세웠다.
대표의 목소리 톤이 상기되어 있었다. 회의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해.’
민주경은 김이월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또래에 비해 상당히 특이하다는 것을.
‘설마 PT 쪽에도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단지 김이월에게 받은 기획서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기획 회의에 참석해 보게 된 건데, 놀라운 경험을 했다.
“어떻게 들었어? 나는 괜찮은 거 같던데.”
대표가 김이월의 PT를 두고 물었다.
“저는 솔직히…… 괜찮았습니다.”
“저도요. 진부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들어 보니 생각보단 좋네요.”
기획안을 이리저리 넘겨 보던 직원들이 대답했다.
김이월이 제시한 컨셉은 가장 정석적인 ‘청춘’이었다.
그가 구상한 뮤비 속 스파크는 날티 나는 분위기와 외관 덕에 양아치로 오해받기 충분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회사에서 준비하던 청순한 겨울 소년에 비하면 파격적인 컨셉이었다.
게다가 교복과 청춘이라니.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 요소는 자칫 ‘진부하게’ 느껴질 수가 있었다.
바로 지난주에 신화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대형 신인 그룹이 공개되어서 더더욱.
최근 시장의 흐름을 생각하면 컨셉의 강렬함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이월의 선택은 가장 ‘스파크다웠’다.
동시에 독창적인 면도 있었다. 마지막에 들어간, 아주 작은 반전 덕분에.
회사에서 팀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선택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단순히 비주얼만이 아니라 성향, 대중적 이미지 등을 모두 고려한 아이템이라는 점에는 모두 이견이 없었다.
“기획서만 봐도 괜찮은데 발표가 수준급이네. 걔 진짜 스무 살 맞지?”
“그럼 올해 고등학교 졸업한 거예요? 장난 아니다.”
“저 나이에 저렇게까지 깡 있고 머리 돌아가는 애는 정말 드물어. 그래서 말인데.”
대표가 이리저리 살펴보던 김이월의 기획안을 덮으며 말했다.
“얘 프로듀싱 쪽으로 키워 보는 건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부턴 별수 없이 아티스트 관리 팀도 낄 수밖에 없었다.
상황 파악이 끝난 민주경은 팀장에게 다급히 메시지를 보내며, 들뜬 얼굴로 다이어리를 펼쳤다.
* * *
기획안 발표가 끝난 후, 회의실에서 돌아와 한참 연습을 하고 있는데 시스템이 떴다.
+
[SYSTEM] ‘숨겨진 업무’가 완료되었습니다.▷ 내용: 프로듀싱 멤버로 인정받기
▷ 보상: 경험치(5)
▷ 누적 경험치: 70
▷ 누적 포인트: 0
+
직원들은 다 남으라더니.
나 빼고 아주 즐거운 회의를 하셨나 보다.
이로써 스파크는 자체 제작돌로 등극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전부 만족했다.
내가 프로듀싱 멤버로 들어가고, 이청현이 작곡, 최제호와 강기연이 안무를 짜는 완벽한 구조가 형성됐으니까.
이렇게까지 구성이 갖춰지면 회사 입장에서 자체 제작돌을 노리지 않을 수가 없지.
‘매니저로 이직하긴 더더욱 틀렸군.’
이쯤 되니 데뷔 후 탈퇴를 했을 때의 노후 대비를 생각해 놔야 할 것 같았다.
가뜩이나 물이 되어 버린 경력이 이제는 안개처럼 흐려지고 있으니까.
아니면 자격증을 뭐 딸지 생각해 두는 것도 좋아 보인다.
이왕이면 생산적인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 예를 들어 코딩이라든가, 코딩이나, 코딩 같은 것.
‘그럼 타이틀은 이청현 곡이 가져가려나?’
애초에 컨셉도 겨울 소년이라는 이미지만 있었을 뿐, 별다른 아이템은 딱히 없는 상태였다.
UA에서는 스파크를 위해 곡을 받아야겠다고 논의조차 나오지 않았었고.
그러니 대표나 기획 팀의 누군가가 번뜩이는 영감을 받지 않는 이상, 내가 컨셉까지 붙인 이청현의 곡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곡이 누가 들어도 괜찮게 나왔어.’
이렇게 되면 자체 제작 능력치를 마케팅하기 위해서라도 이청현의 곡이 타이틀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매니저님이…….
‘너희 청현이 곡으로 데뷔할 수도 있겠다던데?’
……라는 말을 전해 왔다.
확정형이 아니긴 했으나, 네 명의 스파크 놈들은 그 말만으로도 나름 의욕이 생긴 것 같았다.
잠깐.
네 명?
머릿수가 하나 비는데.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작은 머리통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이청현 아직 안 왔어?”
“네.”
“왜? 항상 칼같이 오던 애가.”
“글쎄요. 오늘 늦게 끝난단 얘기는 없었는데.”
강기연이 대답했다. 이청현 역시 핸드폰이 없는 터라 연락할 방법은 마땅히 없었다.
쎄하다.
한평산업에서 눈칫밥 먹고 자란 쎄믈리에로서 장담하건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걔가 연습 빠질 애는 아냐. 곧 오겠지.”
“나도 그렇다고는 생각하는데…….”
최제호가 평소와 같이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최근에 너희들 내면의 깊은 어둠을 좀 많이 본 것 같아서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연습생 때는 대체로 이청현이 분위기 메이커를 맡았다고 하니 과거 썰을 믿을 생각이었다.
어쩌다 보니 교실에 가방을 놓고 오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렸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
+
[SYSTEM] ‘새 업무’가 할당되었습니다.▷ 내용: 데뷔곡 확보하기
▷ 보상: 경험치(10)
+
저건 또 뭐야?
데뷔곡 확보라니. 이대로만 가면 데뷔곡은 자동으로 결정이 될 건데.
‘설마 이청현한테 미리 판권이라도 사란 뜻인가? 속물 같으니.’
곡의 권리와 관련된 문제는 아직 전부 파악하지 못하긴 했다만…….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어쩐지 등에 고난 플래그가 두 개 정도 꼽힌 기분이었다.
“저…… 형.”
미안한데 주우야. 나 부르지 말아 줄래?
지금 사방에 불길한 예감뿐이어서 그래.
“요새 청현이가 가끔씩 생각이 많아 보였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
빌어먹을.
이놈 새X 어디로 튀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