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37)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36화(37/193)
| 36화. 인턴 실습 (2)
나는 최제호에게 들고 있던 가방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촬영장 구경도 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겸사겸사. 촬영은 끝?”
“어. 잠깐 대기하다가 해 질 때쯤 노을 컷 찍는다던데.”
뮤비 한 번 찍으려면 이틀 밤을 새운다더니. 정말 하루가 통으로 쓰이는군.
“그래. 그럼 난 가방 옮기러 간다.”
“그거 누가 너보고 옮기라고 한 거야?”
“자발적 지원이야. 남이 일하고 있을 때 일하지 않으면 심장에 가시가 돋아서.”
연기하느라 고생했을 최제호는 매니저님께 보내고 마저 짐을 옮기려는데 최제호가 따라붙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최제호가 물었다. 질문 한번 누가 들을까 겁난다.
“듣는 사람에 따라선 오해를 살 수 있으니 그 표현은 주의해야겠다. 그리고 공짜로 배운 게 있으니까 돕는 거야. 큰 도움까진 아니더라도.”
“배워?”
“현장 분위기 같은 거. 너도 잘 봐 놔. 그래야 우리 뮤비 찍게 되면 기연이 데리고 시뮬레이션 돌리지.”
“…….”
“경력자분들이 일하시는 걸 바로 옆에서 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경험은 돈 주고도 못 배운다.”
남의 작업장에서 팁 좀 얻어 보겠다고 설치고 있는 꼴인데 짐 나르기가 대수겠나.
내 직장에서도 인수인계 하나 제대로 받기 힘든 각박한 세상에서 이런 특별 대우는 호사였다.
나는 지금이라도 누가 시키기만 한다면 편의점까지 뛰어가서 인원수대로 음료수까지 사 올 자신이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최제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이내 뒤로 돌더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스태프분들께 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는 짐 하나를 받아 왔다.
“뭐 하냐?”
“더 옮길 거 있냐니까 이거 주시던데.”
“오. 금쪽같은 쉬는 시간 할애해 주는 거야?”
“멤버는 일하는데 혼자 쉬다가 인성 논란 터지고 싶진 않아서.”
이 녀석, 도와주겠단 말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하는 재주가 있다. 그래도 생각이라는 걸 하다니 대견해서 봐주기로 했다.
새파랗게 어린애들 둘이 뭐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꼴이 기특해 보이기라도 한 건지, 막바지에는 절대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허락을 받고 나서 매니저님의 핸드폰으로 현장 사진까지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예상보다 더한 소득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싹 다 레퍼런스로 정리해서 강기연 모의 훈련 시켜야지.
“이월이 네가 기획 쪽에 관심 있단 얘기는 들었는데, 연출에도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매니저님이 돌아가는 차에서 열심히 사진을 돌려 보고 있는 내게 말했다.
“혹시 애들한테 얘기해 줄 일이 있을까 싶어서요.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눈도장 찍어 두면 좋지 뭘. 그리고 애들한텐 오늘 숙소 도착하면 바로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네?”
“걔네 오후 내내 톡 보내더라. 너희 촬영 온 게 어지간히 궁금했나 봐.”
그러면서 매니저님은 애들끼리 사이도 좋다는 말과 함께 웃었다.
‘궁금이라기보단 걱정이 아닐까 싶긴 한데.’
오후에 계속 매니저님에게 연락을 했다는 건 녀석들이 PC톡이 깔린 노트북을 들고 연습실에 갔다는 뜻이었다.
장준후는 안 왔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할 걸 그랬나. 연습만 해도 모자랄 녀석들이 괜히 마음 쓰게 만든 것 같아 내심 미안해졌다.
예상치 못한 훈훈한 소식에, 나는 연습실로 돌아가면 동료의 첫 촬영기를 생생하게 전달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때까지의 나는 알지 못했다.
뮤직비디오 찍는 과정도 수업 듣는 것처럼 강제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내가, 자체 콘텐츠를 기획하게 될 줄은 말이다.
* * *
모든 것은 한 줄의 업무에서 시작되었다.
+
[SYSTEM] ‘새 업무’가 할당되었습니다.▷ 내용: 숙소 규칙 정하기
▷ 보상: 경험치(5) 지급
+
거참 귀찮게 구네. 규칙 없어도 몇 달 지내보니까 별문제 없더만.
스파크가 껄끄러워 죽겠는 나조차 스파크와의 숙소 생활 자체에선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한창 사춘기일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숙소에서 큰소리 내는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가끔 빨래를 제때 안 개는 놈들이 있는 정도?
그것조차 내 빨래 갤 때 개서 특별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
지금만 해도 건조대에 3일간 머물러 있던 공용 수건을 열세 개째 개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주겠다는 경험치를 무시할 순 없는데.’
남이 주는 건 일 빼고는 다 받는다.
이런 신조로 평생을 살아서 그런지, 선명한 시스템을 못 본 척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말을 어떻게 꺼낼지만 고민하고 있던 찰나…….
“형, 혹시 숙소 생활 관련해서 다 같이 얘기 좀 해 보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운명처럼 정성빈이 운을 떼어 줬다. 녀석, 역시 최고의 리더감이다.
이렇게 굴러들어 온 경험치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냅다 수락할…… 뻔했으나.
≫ UA 감 없는 놈들 저런 얼굴 동영상으로 안 찍어놓고 뭐 했냐
남들은 연생 홍보한다고 데뷔 전에 서바이벌하고 자컨 뿌리는데 우리만 X나 서프라이즈 데뷔임 너무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서 아무도 모름
└ 묵혔다 꺼내 놓으면 다 산삼 되는 줄 알았나 보지
커뮤니티 반응이 자동으로 기억났다.
아무래도 대리 덕질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스파크와 관련된 정보가 골수에 새겨진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그런데 2주만 시간을 줄 수 있을까?”
“2주요? 급한 건 아니니까 괜찮기야 한데요…….”
멤버별 이미지 각인을 위한 자컨은 확실히 필요했다.
더불어 떡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데뷔 초일 경우 팬들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극히 적은 만큼, 준비는 많이 해 둘수록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촬영부터 편집까지 다 할 수는 없다.
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나 혼자 했다간 지속성이 엄청나게 떨어지겠지.
결국은 회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앨범 준비에 기획 인력을 다 쓰고 있는 상황에서 불현듯 누군가가 ‘아! 우리 애들 자컨도 좀 찍읍시다!’라고 외치는 걸 기대하긴 힘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읍소뿐이지. 내가 또 간절하게 비는 데에는 재주가 있다.
나는 바로 시스템이 넘겨준 기획안 3종 세트를 떠올렸다.
‘구성만 어느 정도 바꾸면 콘텐츠 기획안으로 쓸 수 있을 거야.’
나는 밤을 불태울 작정으로 공용 노트북을 켰다.
영감이 샘솟는 것이, 꼭 잦은 야근으로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한평산업의 대리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 * *
“이게 자컨 기획서라고?”
“네. 꼭 진행되지 않더라도 부족한 점에 대해 의견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얼마 전 프레젠테이션에서 소개받은 기획 팀 담당자에게 밤새워 쓴 기획안을 넘기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일일이 종이로 보고서를 주고받는 대신 전자 결재 제도 같은 것 좀 도입해 주면 좋을 텐데.
한평산업이나 UA가 아날로그에 죽고 못 사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열의 있단 얘기는 들었는데 고생이 많네.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어. 지금 회사에 인력이 없어서…….”
“가능성이 있는지라도 검토해 주시면 해결 방안을 따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애썼다.”
해결 방안은 이미 정해져 있다.
회사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해 준다고 할 경우, 나는 지옥의 셀프 캠 촬영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초라하게 삼각대라도 사서 놓고 찍지 뭐. 고정된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녀석은 그날 화면에 안 나오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당장 업로드를 하지 않더라도 촬영물이나마 남겨 두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큐를 만들든, 데뷔 초 영상 자료를 만들든 일을 하기 위해선 소재가 있어야 하니까.
기록이 필요하다면 최대한 많이, 가급적 영상으로 해 두는 게 좋았다.
그래서 기획서에도 이 부분을 대문짝만 하게 강조해 두었다.
거의 조선왕조실록의 중요성을 논하는 수준으로 적었는데 어떻게 보일진 모르겠다.
‘회사 입장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 늘어나는 거니까 쉽지 않겠지.’
없던 일이 생기면 온순한 직장인이라도 화가 나는 법이다. 나는 부디 UA가 기획 팀에 성과급을 넉넉하게 주기만을 기도했다.
내 바람이 하늘에 닿기를 염원하는 사이 이청현이 말했다.
“형 진짜 인간 좀비 같아요.”
“차라리 좀비인 게 낫겠어.”
“왜요? 형 아포칼립스 세계관 좋아해요?”
“아니. 좀비면 잠 안 자도 되잖아.”
“와. 진심이에요?”
진심이다. 아니면 몸이 두 개로 쪼개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형 다크서클이 엄청 심각하긴 해요. 이러다 색소 침착되겠는데요?”
“아이돌이 색소 침착이면 좀 곤란한데.”
“그러니까요.”
“……둘이 뭐 하냐?”
이청현과 심각하게 피부 미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최제호가 멀리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되겠다. 숙소 규칙 정하기 콘텐츠 다음으로는 피부 미용 콘텐츠나 찍어야겠다.
* * *
일주일 뒤.
기획 팀에 머리를 조아리며 촬영에 도움 좀 주십사 간청한 결과 영상 팀의 지원이 떨어졌다.
역시 UA. 앞서가진 못해도 지원은 확실했다.
UA는 무려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봐 주기까지 했다.
‘기획 팀에서 소품이나 큐 카드 필요한 것 없냐던데?’
‘작은 화이트보드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멘트 치는 데 익숙한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찍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오후 연습 시간을 이용해 보드 판 하나만 들고 숙소 거실에 모였다.
살면서 조기 퇴근하는 게 찝찝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영상 팀 직원분들은 정시 퇴근을 시켜드려야 하니까.
‘저런 본격적인 카메라에 찍히는 건 처음이네.’
숙소 구석에 설치되는 카메라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평산업에도 회사 홈페이지 리뉴얼을 위한 촬영 팀이 온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뒤에서 소통만 했지, 카메라 앞에 나가 본 적은 없었다.
리더라 졸지에 진행을 맡게 된 정성빈도 약간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너무 긴장하진 마. 생방송도 아니고.”
“네……!”
“대신 촬영 중에 열 마디 이상 안 하는 놈은 끝나고 나랑 대화의 시간 가져야 할 거다.”
“헐? 그거 미션이에요?”
“그럼 아이돌이 카메라 앞에서 한마디도 안 할 거야? 앉아서 박수만 치고 있는 꼴은 내 눈에 진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
박수 봇 시절의 스파크를 또 보는 건 진지하게 사양이다.
‘조각난 일화까지 주워다 홍보 글을 작성하는 팬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열심히 해라.’
내 진심이 전해진 건지, 녀석들은 제법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