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38)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37화(38/193)
| 37화. 사내 규칙 정하기
“그럼 지금부터 제1회 그룹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와!”
정성빈의 시작 멘트에 다들 열심히 박수를 쳤다.
누가 한국인들 아니랄까 봐 여섯 명 전원이 소파를 내버려 두고 바닥에만 앉아 있다. 친숙하고 좋네.
“오늘의 안건은 ‘숙소 규칙 정하기’입니다. 사실 그동안도 문제는 없었지만, 앞으로 더 잘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해요.”
진행도 깔끔하니 좋다.
알고 보니 정성빈 녀석, 콘텐츠 얘기를 전달받은 뒤 따로 대본을 만들어서 연습한 모양이었다.
그간 반장이나 학생회장을 하면서 발표 짬이 쌓인 듯했다. 이 맛에 경력직 쓰지.
‘그보다…… 내가 뭐라도 먼저 얘기를 해야 하나?’
누구 하나가 물꼬를 터 주면 그다음부턴 말하기 쉬운 법이니까.
녀석들과 살면서 불편하다고 느낀 점은 딱히 없었지만 영상 분량을 고려해서 몇 개 생각해 온 것들은 있었다.
아침에는 꼭 물을 한 컵 마시자거나 하는 소소하고 건전한 것 말이다.
나름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어떤 소재가 녀석들이 준비해 온 내용과 겹치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정성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멤버가 집안일하고 있으면 숙소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도왔으면 좋겠어요. 시험 기간 같은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게 아닌 한?”
화목해 보이고 좋은 의견이었다.
그러자 최제호가 반문했다.
“우리 다 청소는 제대로 하지 않나?”
“얼마 전에 이월이 형이 혼자 수건 개고 있더라고요. 형이 저희 아침도 챙겨 주시는데, 멤버들이 신경 안 쓰고 있는 부분까지 형이 혼자서 다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음?
이 회의가 나 때문에 열린 거였니?
그날도 막판에 정성빈이 와서 같이 수건 갰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침 챙긴다고 해 봐야 빵 굽는 것밖에 없고.
졸지에 안건의 주인공이 된 난 아무렇지 않은데 정성빈은 대단히 심각해 보였다.
심지어 다른 놈들도 이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대체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화의 흐름이 다른 멤버들을 탓하는 것 같은 논조로 가는 건 좋지 않았다.
나는 이놈들이 풋풋하게 왁자지껄 발언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거지, 얘네 데리고 인사 청문회를 열고 싶은 게 아니니까.
‘이건 분위기 못 살리면 편집해야 돼.’
나는 곧바로 자숙이라도 하겠다고 할 듯한 무거운 분위기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지금 성빈이가 얘기한 거 적을 사람? 일일 서기 구합니다.”
“……제가 할게요.”
그러더니 박주우가 보드 마카를 챙겼다. 뭐라도 하나 하려는 모습이 훌륭했다.
“그럼 이제 저 발언해도 되나요?”
기다렸다는 듯 이청현도 손을 들고 외쳤다.
“응, 해.”
“저는 멤버들끼리 대화가 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화?”
“말하면서 친해지는 부분도 있잖아요! 솔직히 우리 ‘좋은 아침.’ 아니면 ‘연습하자.’란 말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지 않나요?!”
이청현의 말이 맞긴 했다.
이 숙소에서 말이 많은 순위를 따져 보라고 한다면 이청현이 1등, 내가 2등, 정성빈이 3등, 나머지가 공동 4등일 거였다.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자는 거죠. 물론 지금도 너무너무 좋지만, 막내들은 숙소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나까지 강제로 포함시켜?”
“너 밝고 화목한 숙소가 좋아, 삭막하고 거친 숙소가 좋아? 어? 말해 봐.”
이청현이 강기연에게 덤벼들자 제법 티격태격하는 그림이 나왔다. 역시 방송을 아는 놈다웠다.
이 시류를 타서 나도 동조의 의견을 표시했다.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덴 나도 동감이야.”
그러자 정성빈이 말을 보탰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라고는 안 정해도 될까?”
“일단은 ‘대화 많이 하기’로 해요! 효과가 별로면 그때 개선하는 걸로!”
“……알았어. 그렇게 적을게.”
박주우가 회의록에 기록까지 마침으로써 ‘다 함께 대화해요’ 안건도 훌륭히 정리됐다.
그 뒤로 강기연과 최제호가 차례로 의견을 냈다.
강기연은 ‘신발장에 신발 가지런히 놓기.’, 최제호는 ‘밤에는 꼭 거실에 있는 무드 등 켜 놓기.’였다.
강기연의 제안 사유는 밤늦게 숙소 오면 현관에서 꼭 남의 신발을 밟게 되는 게 미안해서였고.
최제호의 사유는…….
“밤에 물 마시러 나올 때 아무것도 안 보여서 자꾸 식탁에 부딪혀.”
“맞다. 너 눈 안 좋았지. 어두우면 많이 안 보여?”
“어. 그래서 일부러 등도 갖다 놨는데 누가 자꾸 끄더라.”
“그거 형이 갖다 놓은 거였어요?!”
제 발 저리는 꼴을 보아하니 범인은 아무래도 이청현인 모양이다.
아무튼 다들 거실 불은 꺼도 버섯 모양 무드 등은 켜 놓기로 했다.
성빈: 집안일은 다 같이 하기
청현: 대화 많이 하기
기연: 신발 가지런히 놓기
제호 형: 밤에 무드 등 끄지 않기
까지 적은 박주우가 나를 보며 물었다.
“형은요?”
“나?”
내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어젯밤 적당히 생각해 둔 ‘아침에 물 마시기’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왜…… 다들 대단한 걸 기대하는 것 같지?
‘김 대리, 이번 한 번만 부탁할게.’
‘팀장님…… 제가 어떻게 팀 KPI를 마음대로 정합니까. 전 고작 대리인데요.’
‘누가 정하는지가 뭐가 중요해? 구색만 맞추면 돼, 구색만.’
‘부장님께서 아시면 정말 큰일 납니다, 팀장님.’
‘괜찮아. 부장님께서도 김 대리한테 맡기라고 하셨어.’
‘네?’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응? 내가 평소에 이런 부탁 잘 안 하잖아.’
거짓말이다. 팀장의 부탁은 내가 한평산업에 다니는 동안 백만 스물한 번 정도 나왔다.
아무래도 남들에게는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들고 올 거란 확신이 있었나 보다.
지금 나를 쳐다보고 있는 다섯 명의 멤버들도 포함해서.
여기서 내가 물 마시기 따위나 언급했다간 분위기 파악 못 하냐며 싸늘한 시선을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 대체 뭘 해야 하지?
생각 없는 말 할 때마다 시말서 쓰기? 싸움 나면 분쟁 조정 위원회를 열어서 해결하기?
혼란스러웠다. 내가 해 본, 숙식을 포함한 단체 생활은 군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의 시간 동안 온갖 고민을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떠오른 걸 냅다 내뱉었다.
“연습 분위기 망치지 않기……로 하자.”
“오…… 연습 미루거나 했다간 누구 하나 인생 종 치겠네요.”
모르겠다. 다들 연습 열심히 하면 좋은 거지 뭐.
간신히 내 차례를 넘기고 나니 남은 건 박주우뿐이었다.
“주우 너는?”
“다 괜찮은데…… 설거지는 제때 했으면 좋겠어. ……가급적 생겼을 때 바로.”
상당히 세심한 의견이었다.
숙소에서 뭘 먹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간 별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그건 그래. 이제 슬슬 여름 되면 날파리 꼬일 거야.”
내 말에 다섯 명의 얼굴이 동시에 파랗게 질렸다.
다행히 벌레 키우는 게 취미인 놈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숙소의 첫 6계명이 정해졌다.
약소한 경험치와 함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자컨이라기보단 브이로그에 가까울 정도로 날것의 영상을 찍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기획 팀의 호출을 받았다.
“제작 본부요?”
“응. 대표님이 이제 이월이 너 여기 올 일 많을 거라면서 잘 가르쳐 주라던데?”
제작 본부를 소개해 주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기획 팀 직원분이 말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 두고 모종의 뒷얘기가 있었나 보다.
뭐, 조직 구성은 알아둬서 나쁠 게 없었다. 프로듀싱을 하면서 여러 팀과 협업해야 한다면 더더욱.
‘회사 홈페이지에 조직도가 없어서 곤란했는데 마침 잘됐어.’
때마침 찾아온 기회에 기뻐하며 나는 제작 본부에 속해 있는 팀들을 상대로 대면식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간중간 재밌진 않아도 소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네가 혹시 걔니? 장준후 씨 뮤비 찍는 곳에서 박스 날랐다는?’
‘저 맞는 것 같습니다.’
‘PD님께서 그게 되게 인상적이었나 봐. 날도 더운데 빨빨거리며 고생했다고 엄청 얘기하시더라. 경력이 오래되신 분이라 그런가, 태도 이런 거 엄청 보시긴 하거든.’
‘제호도 같이 도왔어요. 그리고 저희 정말 별거 안 했습니다……!’
이런 것들 말이다.
이 외에도 ‘네가 이번에 자컨 찍고 싶다고 했다며?’나 ‘기획안 올린 거 안 그래도 곧 볼 예정이었는데!’란 말들을 들었다.
이런 말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딱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너구나?
나한테 일 더 준 놈이.
가슴 아픈 일이다. 남 부장이 일 떠넘기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남에게 일을 만들어 주고 있는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최대한 순진해 보이도록 웃는 동시에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제작 본부 순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직원분이 말했다.
“부모님께서 이월이 널 되게 잘 가르치셨나 보다.”
“그런가요?”
“응. 난 네 나이대 애들이 이렇게까지 깍듯한 거 처음 봐.”
이 말을 가정 교육 잘 받은 것 같단 말로 이해해도 되는 걸까?
물론 그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는 가정에서 교육다운 교육이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을 하다 걸렸으면 나를 훈육하느니 집 밖에 내쫓았을 사람들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나에게 등짝을 후려 맞으며 큰 덕분에 일탈 행위 한 번 하지 않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유년기에 배우지 못한 예의범절을 학교에서 눈치껏 배우느라 고생한 기억은 생생했다.
인사 팀에서 일하면서 화법을 다시 익힌 것도 도움이 됐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내 인격을 형성한 데 부모의 덕은 조금도 없는 셈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래도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기댈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알고 있으니까.
* * *
제작 본부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연습실 가운데에 멤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흔치 않은 모습에 이 부분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습 안 하고 뭐 해?”
설마 연습 분위기 망치지 않기로 한 규칙을 벌써 어긴 셈인 건가.
진지하게 한 명씩 보컬 연습실로 끌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려던 찰나 이청현이 고개를 들더니 손을 흔들었다.
“형! 타이밍 최고네. 파르테 선배님들 티저 같이 봐요!”
“티저?”
“네네. 방금 떴어요!”
이청현이 나를 끌고 가자 박주우와 강기연이 옆으로 조금씩 비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정성빈이 들고 있는 공기계에는 1시간 전에 올라왔다는 파르테의 티저가 일시 정지 상태로 떠 있었다.
“방금 떴다며. 1시간 전에 올라왔다는데?”
“연습하다가 쉬는 시간에 확인한 거라…….”
다행이다. 보컬 연습실에서의 일대일 면담은 안 해도 되겠구나.
“그럼 틀게요.”
정성빈이 영상을 재생하자, 웅장하고 음산한 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