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52)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51화(52/193)
| 51화. 인(간)재(앙)와 협업해요 (1)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 기획이 그렇게 미숙했나?’부터 ‘뮤비 촬영지 위약금이 얼마였지?’까지, 생각은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나물 반찬 하나 집기 힘들 정도로 숨 막히는 정적이 식탁을 지배했다.
오직 대표와 유한수만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지금 거 괜찮지 않아?”
“너무 약하고 흔해요. 데뷔 컨셉으로 하이틴 청춘은 이제 너무 진부하죠.”
언뜻 들었을 땐 맞는 말이었다. 청춘 컨셉으로 데뷔하는 그룹이 한둘도 아니고.
하지만 나는 분명 차별화할 수 있는 포인트를 기획서에 제시했다.
우려되는 점과 그에 대한 보완점도 포함해서.
‘기획서를 앞 장만 읽었나 보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남 부장이 일을 딱 저렇게 했거든. 거지 같은 인간.
내가 속으로 자기를 욕하거나 말거나, 유한수는 개의치 않고 열변을 토했다.
요약하자면 스파크는 어른스러운 감성을 살린 실력파 발라드 보이 그룹으로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디서 폐기된 스파크 초기 컨셉 기획안을 주워다 읽은 모양이다.
얼어 죽을 잔디의 요정들이 다 같이 급행열차를 타고 달려오는 듯했다.
솥밥에는 손도 못 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다리를 찔렀다. 이청현이었다.
이청현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하얘졌다 파래지길 반복했다.
‘형,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요!’
이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본인은 금속 팡파르가 50개인지 60개인지가 터지는 곡을 만들었는데 겨울 소년으로 노선 변경이라니, 환장하겠지.
그래도 섣불리 입을 열 순 없었다.
나이니 서열이니 하는 번잡스러운 문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와 유한수 사이에는 비전공자와 실무자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유한수가 아흔아홉 번 쓸데없는 말을 하더라도 단 한 번 맞는 말을 한다면 그건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현장에서 얻는 지식이라는 건 글로만 공부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니까.
게다가 유한수는 UA의 직원들이 처음 들고 나온 컨셉을 나름 어레인지할 생각인 듯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 의견을 안 들을 순 없다. 나는 언제나 내가 틀린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했다.
‘일단은 지켜보자.’
손 쓸 기회는 마련하면 그만이다.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정 허튼 소리를 하면 그때 족치는 걸로…….
“의상도 좀 개성 있었으면 좋겠네요. 소위 말하는 ‘시대를 앞서간 패션’ 같은 거? 모던하면서도 포인트가 있는 편이 세련됐다는 느낌을 주니까.”
X발.
그냥 지금 엎을까 보다.
* * *
유한수와의 대면 이후 스파크 놈들의 분위기는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같이 이마에 ‘나 심란해요.’라고 써 놓은 꼴을 보자 나까지 심경이 복잡해졌다.
“형들은 새 PD님 어땠어요?”
이청현이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왜 다들 아무 말이 없어요? 지금 저만 심각해요?”
장담컨대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심각할 거다.
기획이 엎어지면 기획 업무로 받았던 숙련도랑 경험치를 다 토해 내야 할 수도 있거든. 덕분에 손이 아주 달달 떨린다.
“우선은 기다려 보자. PD님께서 생각해 두신 기획안이 있다고 하니까.”
“이월이 형이 정한 컨셉 회사 사람들 다 좋다고 했는데, 왜 그걸…….”
이청현의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여기서 더 과열되지 않도록, 나는 이청현에게 적당히 주의를 주었다.
“이청현, 내가 어디 가서 남 험담 함부로 하지 말랬지?”
“지금은 저희끼리만 있잖아요!”
“우리끼리여도 마찬가지야. 웬만하면 남 얘기는 안 하는 게 최고다.”
답답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회사 안에서 회사 사람 얘기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이청현은 불만이 있어 보였으나, 내 말뜻엔 동의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대표님께서 다음에 기획 팀이랑 PD님, 나 이렇게 회의 한번 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때 분위기 좀 봐 볼게. 그때까진 다들 컨셉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있어.”
“…….”
“신경 안 쓸 수가 없는 문제라는 건 나도 알아.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으면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게.”
내가 말하자 녀석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개중 박주우가 물었다.
“……어떻게요?”
“방법이야 많지. 무릎 꿇고 읍소를 한다거나, 문 앞에 드러누워서 그 기획을 택하시려거든 나를 밟고 가서 하시라고 하거나.”
그러자 최제호가 끼어들었다.
“그거 효과 있는 거야?”
“한번 밟히고서 고용노동부로 가면 없던 효력도 생겨.”
한평산업에서 몸소 굴러가며 익힌 팁을 알려 주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유한수의 실무 경험만 취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이건 전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며칠 뒤 유한수가 피로한 프레젠테이션이 내 생각을 깡그리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내게 컨셉 기획에 사용한 자료를 요청했던 유한수는 정확히 이틀 뒤 기획 팀과 나를 불러 모았다.
PPT 제목도 거창했다. 제목이 무려 ‘신인 그룹 스파크 기획 재고안’이었다.
저 진취적인 면 하나는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UA라는 소속사에 대한 이미지를 고려했을 때, 우리는 좀 더 발라드 아이돌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요.”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보컬 역량에 집중하는 게 필연적입니다. 지금은 댄스 연습의 비중이 너무 높아요.”
40분 내내 유한수가 하는 말은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언제 발라드 아이돌이랬냐.
UA에 지장 찍은 이래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그런 걸 하고 싶은 거면 당장 나부터 보컬 연습실에 가둬 놔야 한다.
그리고 무슨, 보컬 실력만 실력이고 댄스 실력은 실력도 아니야? 음악 방송에 의자 여섯 개 갖다 놓고 맨날 앉아서 노래 부를 거냐고.
듣는 내내 혈압이 올랐다.
그러나 기획 팀은 꽤 진지하게 유한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유한수 쪽의 의견이 스파크를 ‘UA표 아이돌’로 보이게 하는 덴 효과적이니까.
하지만 그럼 정통 아이돌로 만들겠다는 기존 기획과 상충하잖아요.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잖아요…….
가슴 속에서 눈물이 철철 흘렀다. 벌써부터 경험치 빼앗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유한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기획 팀장은 인쇄물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물었다.
“그럼 PD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신가요?”
그러자 유한수가 여길 먼저 봐 달라며 PPT를 넘겼다.
흰색 슬라이드에는 장준후의 이번 앨범 커버와 큰 폭의 상승세를 보이는 그래프가 들어가 있었다.
“기획 팀에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이번에 장준후 씨 뮤비 기획에 참여했잖습니까?”
저 X끼 앨범이 왜 여기서 나오나 했더니.
예상치도 못한 인연에 뒷골이 당겼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회 수 상승 추이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굉장히 가파르게 올라갑니다. 일반적으로 바이럴을 타지 않는 이상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상승폭이 줄어드는 것을 고려했을 때, 효과적인 컨셉 기획이 해당 콘텐츠의 수명에 기여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게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되지?
아무래도 유한수는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는 듯했다. 말 같지도 않은 지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바이럴을 타지 않는 이상, 조회 수 상승폭이 급속도로 커지거나 시간이 지난 콘텐츠가 상승세를 보이기 힘들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건 전제 조건부터가 틀렸다. 장준후의 뮤비는 최제호 바이럴을 탔기 때문이다.
당장 커뮤니티만 해도 최제호의 이름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 장준후 뮤비 남주 누군지 알아냄
유에이 연생이고 이름은 최제호
올해 스무 살이고 댄스 멤
연생 중에 젤 연장자라 함
└ 헐 배우 지망생인 줄
참고로 모니터링 과정에서 이번 신곡이 유난히 좋다든가 뮤비 연출이 좋았다는 등의 이야기는 하나도 못 봤다.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남자 한 명이 실연의 슬픔에 처연한 일상을 보내는 게 다니까.
고로, 저 상승세는 전부 최제호가 끌어냈다는 뜻이다.
‘어디서 남의 공을 가로채려고 들어.’
게다가 컨셉이 콘텐츠의 수명에 기여하는지에 대한 근거로 삼기엔 장준후의 뮤비가 나온 게 상당히 최근 시점이었다.
이 외에도 할 말은 많았지만 내 입만 아플 것 같았다.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경청의 신호라고 느낀 건지, 유한수가 말을 이었다.
“성공 사례를 최대한 참고해서 올바르게 취하는 것이 신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감탄했다. 저렇게 뻔뻔해야 먹고사는구나.
어떻게 그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별의 후유증 스토리를 저렇게 당당히 성공 사례라고 말할 수가 있지?
청자인 나는 괴로운데 정작 당사자인 유한수는 프로처럼 여유로웠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서 발라드 아이돌을 계속 미는 거고요. 다음 화면을 봐 주세요.”
그러면서 유한수는 화면을 넘겼다.
새로 나타난 화면에는 너른 잔디 들판과 이름 모를 남성들의 단체 사진이 조잡하게 합성되어 있었다.
사진 밑에는 조그맣게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감성 소년들, 겨울에 머물다.’……라고.
그 뒤로도 유한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귀담아듣진 않았다.
* * *
회의를 마치고 연습실로 돌아가자 스파크 놈들이 내게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청현이었다.
“형! 회의 어땠어요?”
이청현은 두 손까지 모으고 나를 쳐다봤다.
그런 이청현과 나를 번갈아 본 박주우가 중얼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았나 봐.”
나는 박주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녀석들을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해 최대한 간결하고 명료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감성 겨울 소년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
내 말이 끝나자 연습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 차라리 UA가 처음에 내놨던 그냥 겨울 소년이 낫다고 생각 중이겠지.
이번에도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건 이청현이었다.
“그게 말이 돼요? 마땅한 이유라도 있으면 몰라. 겨울에 데뷔하는 보이 그룹이라는 게 기획 사유의 전부예요?”
“오늘 들은 바로는 그래.”
“기획이 너무 빈약하잖아요. 그럼 우리는 앞으로 봄 소년, 여름 소년, 가을 소년밖에 못 해요?”
“너희들까지 다 성인 되면 ‘소년, 남자가 되다.’ 같은 거 내겠네.”
“그럼 그땐 분기마다 남자가 될지도…….”
어쩐 일로 최제호가 내 생각과 같은 말을 했다. 격분하던 이청현의 표정이 내 말까지 듣고는 절망적으로 변했다.
심란해 보이는 이청현은 잠시 뒤로하고, 나는 다른 멤버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 생각은 어때?”
“저희요?”
“어.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얘기해. 그래야 앞으로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으니까.”
내 질문에 최제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난 별로야.”
“왜?”
“발라드 아이돌로 갈 거면 나랑 강기연이 이 팀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아? 내가 노래 부르느니 박주우나 정성빈이 한 줄 더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뭐야, 왜 저까지 끌고 나가려고 해요.”
우리 사포둥이들 사이에 다시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하루라도 안 싸우면 가시가 돋지, 아주.
“저는 컨셉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형이 쓴 컨셉보다 PD님 컨셉이 좋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저도 형이 기획한 게 더 좋아요.”
정성빈과 박주우의 의견도 최제호와 같았다.
내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내 의견이 좋다고 하는 건 아닐 터였다. 녀석들이 이 구역 최고 뚝딱이인 내 눈치를 볼 이유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강기연까지 내 손을 들어 주면서 스파크의 의견은 만장일치했다.
내가 유한수의 PT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과 별개로, 녀석들이 감성적인 겨울 소년을 희망했다면 긍정적으로 고려라도 해 보려고 했건만.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겨울 소년은 동면시킨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런 내 의지에 반응하듯, 시야가 환하게 빛나며 시스템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