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54)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53화(54/193)
| 53화. 인(간)재(앙)와 협업해요 (3)
회의 초반은 그야말로 콩트 그 자체였다.
유한수는 밤새 나를 시켜 조사했던 자료들을 본인의 업무처럼 술술 설명했다. 내용은 내가 대본체로 써 준 설명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남이 머리가 터지도록 낸 아이디어는 유한수의 몇 마디로 순식간에 유한수 본인의 기획물이 되었다. 아주 언어의 연금술사가 따로 없다.
나는 그 뻔뻔함과, 당당함을 넘어 말 그대로 자연스럽기까지 한 유한수의 연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러니 사원들이 유한수한테 아이템 다 뺏겼다는 후기가 나온 거군.’
내 직무가 아이돌이라 다행이지, 유한수와 한 팀이기라도 했다면 벌써 속이 다 뒤집어졌을 거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대표가 PT를 잠시 끊고 질문을 던진 시점부터였다.
“그래프가 저렇게 나올 수가 있나? 저기 비중 제일 높은 데가 재작년 맞아?”
대표의 질문에 유한수가 노골적으로 당황했다.
“수치가 빠져서 그렇지, 그래프 자체는 맞을 겁니다, 대표님.”
아니다. 저 그래프는 다 틀려먹었다.
유한수가 포인트 자체를 잘못 잡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말씀하신 자료를 만들려면 전수 조사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PD님. 통계 기관이 아닌 이상 국내에서 데뷔한 모든 아이돌을 조사하긴 힘들어요.’
‘대충 뻥튀기하면 되잖아. 그래프에서 단위랑 숫자는 다 빼고.’
이딴 헛소리 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시기마다 트렌드가 달라지는 아이돌 시장에서 수치 몇 건 곱한다고 의미 있는 데이터가 나오겠나. 모르면 사기나 치지 말든가.
한평산업에서였다면 내가 밤을 새워서든, 유한수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호소해서 멀쩡한 데이터를 가져다 놨을 거다.
남 부장에게 욕을 먹더라도 경영진 선에서 통과만 되면 그날 하루는 욕을 좀 덜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그럴 생각이 없다.
한 번 기회를 줬는데 듣지 않은 시점에서 저 양반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거든.
나는 회의실 끝자리에 앉아 유한수가 얼마나 곤혹스러워하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유한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유한수는 돌연 짐짓 엄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월아, 이거 수치 확인한 거야?”
오. 이렇게 책임을 돌려 보시겠다?
예상하지 못한 선택은 아니다.
남 부장이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덴 아주 선수여서 말이다.
덕분에 내가 사회의 쓴맛을 아주 톡톡히 봤다.
여기서…….
‘아, 네. 전 분명 PD님께서 넣으라고 하신 대로…….’
……라고 하면 유한수는
‘내가 언제, 하……. 죄송합니다, 대표님.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이월이는 이따 나랑 따로 얘기 좀 하자.’
……라며 시치미를 뗄 게 뻔했다.
마치 자신은 한 번도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는 듯이.
침착하자.
“아…… 죄송합니다. 잘못 넣은 것 같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고 당황한 척’하는 거야.
“변동 사항이 조금 있었는데 제가 전부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꼬투리 잡기 충분한 말을 끼워 넣으면서 말이지.
실수야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실수가 나올 수도 있는 법.
하물며 나는 외적으론 사회생활을 시작조차 하지 않은 스무 살이다. 그런 나의 실수는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보다 플러스마이너스 스무 살은 더 많으면서, 현직에 오래 종사했고, 나를 관리하는 입장이자, 본인이 아이템을 들고 와 PT를 하는 유한수라면 어떨까?
“그래, 이월이는 회의 끝나면 데이터 수정 좀 해 주고. 한수 PD.”
“네, 대표님.”
“흐름 정도 설명하는 선에선 진행 가능하지? 계속 진행해.”
“네?”
가능할 리가 없다.
유한수는 로우 데이터로 어떤 유의미한 결론도 얻지 못했을 테니까.
데이터를 읽었다면 저 쓰레기 같은 논증이 나왔을 리 없지.
‘파일을 줘도 못 읽어, 아이디어를 줘도 거절해, 자료를 만들어도 검토도 안 해…….’
상위 직책자로서 0점이다, 0점.
나는 진땀을 흘리는 유한수를 흥미롭게 관전했다.
“뭐 해요? 진행 안 하고.”
“죄송합니다. 지금 갑자기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섞여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한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을 거면서.
대표는 턱을 괴고 책상을 몇 번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흠…….”
회의실에 지옥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입을 꾹 다물고 자료만 뒤적거리는 유한수를 보던 대표가 나를 불렀다.
“이월아.”
“네.”
“여기 들어가야 하는 데이터 대충 기억해?”
동시에 유한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걱정 마라. 여기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유능한 천재 연습생까지 연기할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연기도 못하고.
“기억까지 하진 못하고, 자료 만들 때 사용한 파일은 전부 챙겨 왔습니다.”
“잘했네. 그거 좀 줘 봐.”
대표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곧바로 대표 쪽으로 걸어가 인쇄된 엑셀 문건을 건넸다.
대표는 파일을 앞뒤로 넘기며 읽더니 물었다.
“여기 요약 건수 앞에 ‘약’은 왜 붙은 거야?”
“근사치……여서 붙였습니다.”
나는 조금 전의 실수가 마음에 걸려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근사치? 전수 조사라고 하지 않았어?”
“그게…….”
내가 뜸을 들이자 대표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시선이 대표의 어깨 너머에서 하얗게 질려 가고 있는 유한수에게 향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리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고정시켜 둔 채 말했다.
“표본 조사 값을 임의로 키운 거라, PD님께서 확인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작업해 두었습니다.”
“임의로? 원래 통계를 그렇게 내나?”
“…….”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있다는 걸.
여기서 누굴 족칠지는 대표의 판단에 달렸다.
설령 내가 혼자서 데이터를 뻥튀기했다 치더라도 ‘유한수 PD는 본인 기획이면서 내용도 확인 안 했나?’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
‘유한수 PD한테 전적으로 권한을 주는 건 아직은 조금 이르겠다.’는 판단이 나오면 베스트다.
기왕 회사에 소문나는 김에 보컬 선생님 귀에까지 들어가면 더 좋고.
그 선생님, 내가 월말 평가 때 부족한 머리를 좀 굴린 이후로 수업 때마다 나를 예의 주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까지 상황을 내다보고 있는 건지 추측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부디 이참에 내 수치스러운 셀프 실수담을 듣고 ‘이월이 걔도 참.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영락없는 애네.’ 정도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어쨌든 간에.
나는 최대한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에 떨어질 대표의 말을 기다렸다.
“이월아.”
“……네.”
“이 자료는 두고 먼저 나가 볼래? 회의는 직원들끼리 이어서 할 테니까.”
겉으로 보기엔 축객령이었지만 이건 무죄 석방과 같다.
너는 이만 들어가고 우린 유한수를 족쳐 보겠다는 뜻이다, 이 말이다!
이보다 만족스러운 판결도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만 기쁘게 웃으며,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게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회의실을 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한껏 만끽했다.
유한수 때문에 쌓인 다크서클이 지하 연습실까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 * *
회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옥상으로 불려 갔다.
탕비실로 불려 갔던 지난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라, 나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섰다.
유한수는 나를 세워 두고 두 개비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담배 한 모금을 깊게도 빨았다.
“야.”
“네.”
“대답은 잘하네?”
‘김 대리.’
‘……네.’
‘우리 김 대리가 대답은 참 잘해. 그렇지?’
우리네 어르신들은 어쩜 이렇게 레퍼토리가 똑같을까.
한평산업 시절엔 불려 간 곳이 옥상이 아닌 탕비실이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진행되는 대화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 이 다음에는 김 대리…… 아니다. 김이월 너 나 멕이려고 작정했냐는 말이 나오겠지.
“이월이 너, 나 완전 물 먹일 뻔한 거 알아?”
거봐.
시스템은 뭐 하나. 숨겨진 업무로 ‘상사의 심리 맞히기!’ 같은 거 안 내주고.
솔직히 반쯤 기대했는데 시스템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그런 것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도 안 죄송하지만, 뭐.
그래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준 꼴이 되었으니 곱게 사과했다.
그러자 유한수가 내 신발 코앞에 담뱃재를 털었다. 얼굴에 연기는 뱉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누가 너한테 뭔갈 부탁하면 그건 진짜 꼼꼼히 확인하고 줘야 하는 거야. 알겠어?”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본인께서는 제 건의 사항을 듣는 척이나 하셨는지?
짧은 한평산업 재직 기간 동안 검토로는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던 내가 고의 실수를 저지르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지, 본인은 알고는 있냐 이 말이다.
바보 같은 작업을 거부하려는 본능을 이기고 해 달라는 대로 해 줬건만 말이 많아.
“대답 안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것 봐. 또 대답은 잘하지.”
대답을 해도 난리, 안 해도 난리.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수습 못 했으면 너 진짜 X될 뻔한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
그 와중에 수습은 했다는 말에 박수가 나올 뻔했다. 하여튼 난놈이다. 어떻게 그 난국을 헤치고 나왔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쉽게 넘어간 감이 있는데.’
정치질만 하며 커리어를 유지해 온 양반이니 어련히 빠져나왔겠거니 싶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내가 생각에 빠지거나 말거나, 유한수는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말했다.
“대표님이 너 예뻐하시니까 내가 이번은 봐주는데, 다음에도 실수하면 짤 없다. 끈 떨어지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네.”
대표가 날 예뻐한다는 부분엔 반박하고 싶다.
예뻐한다기보단 아주 미세하게 신뢰를 얻은 거지. 작년에 올랐던 내 연봉만큼.
고개 숙인 내 모습이 퍽 보기 좋았는지 유한수가 덧붙였다.
“둘 다 못 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손 떼든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새X, 아마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을 거다.
나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것처럼 홱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르르 떨리고 있는 유한수의 입꼬리가 보였다.
“네, PD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새겨듣고, 이제 들어가서 연습해.”
유한수는 격려하듯 내 어깨를 두어 번 치더니 세게 움켜쥐었다.
이 정도 악력은 우습다.
나는 최제호가 맨손으로 호두 깨는 라이브도 실시간으로 봤던 사람이니까.
이 견제가 먹히길 바라는 유한수를 측은하게 쳐다봐 주고 나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옥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기획 팀에게 전달받은 따끈따끈한 속보를 들고 연습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우리 컨셉 현상 유지로 간다!”
“정말요?!”
답지 않게 큰소리를 낸 정성빈의 뒤에서 이청현이 날뛰었다.
이청현을 말릴 생각은 딱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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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업무’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경험치(20)
▷ 누적 경험치: 20
▷ 누적 포인트: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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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치만 잘 들어왔으면 됐지.
한껏 흡족한 기분을 즐기고 있는데 이청현이 다가왔다.
“진짜 십년감수했다. 그렇죠?”
“십년감수까지야.”
너희 10년은커녕 7년 만에 해체했잖아. 누구 놀리냐?
“십년감수 맞아요. 데뷔조까지 확정됐으니 이번에 집에 가면 엄마가 데뷔 준비는 잘되어 가냐고 물어볼 텐데……. 어후, 저는 그 컨셉으로 도저히 당당하게 잘되고 있단 말 못 합니다.”
이청현이 질색했다.
“어차피 대외비라 제대로 얘기도 못 드릴 거 아냐.”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더니 이청현이 실실 웃었다. 어지간히 신난 모양이다.
“그보다 너 집에 가? 언제?”
“언제라뇨. 다다음 주에 추석이잖아요.”
추석이라니.
시간이…… 언제 그렇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