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55)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54화(55/193)
| 54화. 추석 연휴 (1)
직장인에게 명절 연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바다의 등대요.
텅 빈 탕비실에 들어온 한 박스의 제로 콜라와도 같은 존재였다.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 번씩 살아갈 힘을 주면서 퇴사할 수 없는 굴레를 만드는 절대 권력.
내게도 연휴가 그렇게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올해는 법정 공휴일이 얼마나 되는지를 세고, 어떻게든 명절에 휴가를 붙여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나날.
명절 전날까지 야근을 하더라도 ‘며칠씩 돈을 받으며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줬던 때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 연휴에 휴가 붙여 쓰려고 눈 빠지게 이놈들 7주년 현수막 만들고 있었는데 말이지.’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이 거지 같은 연습생 생활을 한 지 물리적으로 8개월이나 지났다니. 눈물뿐이다.
“그러고 보니…… 너희 명절에는 집에 가?”
“저희 설이랑 추석 땐 각자 본가 가요! 두 밤 자고 옵니다!”
이청현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해 보였다.
본가라. 명절답네.
……잠깐.
그럼 숙소를 비워야 하나?
예상치도 못한 위기다.
이제 와서 명절 숙소를 예약하려고 해 봤자 방이 없거나 더럽게 비쌀 터.
누나가 남겨 준 1,500만 원…… 아니다.
80만 원 쓰고 남은 1,420만 원을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쓸 순 없었다.
내 당황스러운 심경도 몰라주고 이청현은 옆에 찰싹 달라붙어 물었다.
“형은 본가가 어디예요? 전 서울인데!”
“나?”
모른다. 우리 집안 어른들이 다 야반도주를 해서.
“난…… 숙소에 남고 싶은데.”
“매니저님 허락받으면 남아도 될 거예요. 그런데 왜요? 설마 연습하게요?”
“아니, 그냥. 좀 쉬려고.”
숙소에 남을 수 있다니 다행이다. 여차하면 숙박 어플에서 빈 방이 있는지나 밤새 검색할 뻔했다.
그때 이청현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주우 형은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설에도 안 갔거든요.”
“주우?”
“네. 주우 형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주우 형한테 먼저 물어보진 말아 주세요……!”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인 이청현이 다시 주위를 살폈다. 박주우가 없는 걸 확인하는 듯했다.
“알았어. 내가 먼저 얘기 꺼내진 않을게.”
“감사해요. 하, 형들 남아 있을 거면 저도 이번엔 남을까요?”
“일 년에 휴가 두 번 있는 거라며. 그때도 연습하고 싶어?”
“잘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그러더니 이청현이 줄행랑을 쳤다.
박주우의 개인사에는 관심 없다. 가족사라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내가 이 주제로 박주우와 대화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가까운 미래에 박주우와 사이좋게 꼬치전을 부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 * *
명절이 다가오면 젊은 직원들은 휴가 때 무엇을 할 건지를 이야기하곤 했다.
좀 더 연배가 있거나 기혼인 직원들은 제사나 차례 이야기를 더 많이 했고.
‘명절날 차례상 차리는 것도 고역이야. 벌써 스트레스 받는다.’
‘팀장님 댁은 차례 지내세요?’
‘우린 차례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 지긋지긋하다, 아주.’
나는 ‘김 대리님은 명절에 뭐 할 거예요?’라는 질문에 ‘잠깐 누나 만나고, 남은 시간엔 집에서 쉬려고요.’라고 대답하는 편이었다.
누나가 죽기 전까지는.
누나가 죽고 처음 맞이한 추석 전날,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차례상 차리는 법’을 검색했다.
핸드폰을 끄고 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트가 여는 시간까지 깨어 있다가 오픈 시간에 맞춰 마트에 갔다. 그리고 검색창에서 본 재료들을 잔뜩 샀다.
제사 음식이나 차례 음식에 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 줄은 몰랐다.
요리를 많이 안 해 봤거니와, 누나의 첫 기일이 돌아오기도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나물 무치기와 꼬치전은 난이도가 높았다.
나물은 색이 다 죽지를 않나, 꼬치전은 활짝 벌어져서 계란옷을 아무리 입혀도 계란이 옆으로만 퍼지질 않나.
동그랑땡까지 부치고 있을 땐 온 집 안에 기름 냄새가 뱄다.
그렇게 온종일 한가득 쌓인 식재료와 씨름한 나는 해가 다 진 뒤에 늦은 차례상을 차릴 수 있었다.
제기가 없어 집에 있는 접시를 최대한 꺼내 상을 차리고, 1.8L짜리 청주를 뜯어 술까지 따랐다.
“누나, 우리 집에서 차례상 차리는 건 처음 봤지?”
웃음이 절로 났다. 모양이 엉망인 전을 보고 있으면 두 배로 웃겼다.
신위 없는 차례상에 마카롱과 휘낭시에까지 잔뜩 올려놓는 꼴이라니.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겠냔 말이다.
“우리 동네 디저트 가게는 명절날 쉬는 곳이 많더라. 다음부턴 마카롱은 미리 사 둬야겠어.”
그렇게 나는 한참 개별 포장된 디저트 비닐을 뜯었다.
“막상 맛있는 거 먹으러 왔는데 없으면 서운할 것 같아서 사 온 거거든? 좋아하는 맛이 없으면 이 동네 마카롱 집 라인업을 탓해. 난 파는 거 종류별로 다 사 왔으니까 무죄야.”
혼자서 중얼거리는데도 어째서 그토록 누나와 대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지.
그날 나는 마카롱으로 우리 집 좌식 식탁에 탑을 쌓았다. 알록달록한 게 꽤나 볼만했다.
그리고, 청주 한 병을 다 비운 다음 차례상 옆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1년에 세 번씩 제사상과 차례상을 차리다 보니 제수 음식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명절날과 누나의 기일 날 아침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리스트 없이도 장을 보고, 레시피를 보지 않고도 요리를 했던 것이다.
‘그래. 익숙해진 건 좋아.’
나는 손에 들린 봉투의 무게감을 한껏 느끼며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 짓을 지금도 하고 있냐고……!’
그렇다.
9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나는, 추석을 맞아 아침 일찍 눈 뜨고 추석인 걸 확인하자마자 습관적으로 근처 마트에 가 재료를 쓸어 담았던 것이다.
지금 시점엔 살아 있을 누나의 차례상을 차리겠다고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패륜이란 말인가.
잠이 좀 깼을 땐 이미 모든 물건의 계산이 끝난 뒤였다.
환불을 할지 고민했지만 식재료에 냉장 식품도 있을뿐더러, 이청현의 말마따나 박주우도 숙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명절 음식으로 기분이나 낼 겸 고스란히 짐을 들고 돌아왔다.
누나, 미안해.
차례상이 아니라 민족성을 잊지 않기 위한 전통 학습이라고 생각해 줘.
“……이게 다 뭐예요?”
“……명절 기념 요리 콘텐츠 준비물?”
“요리 콘텐츠요……?”
내 말에 박주우가 비닐봉지 하나를 슬쩍 열었다. 동그랑땡과 동태, 밀가루가 든 봉투였다.
박주우는 봉투 안과 나를 미묘한 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저번처럼 돈 없어서 대학 못 갔다는 말실수를 할 생각은 없다.
태연하게 가자.
“아무리 그래도 명절인데 기분이나 낼까 하고. 요리는 내가 할 테니까 주우 넌 쉬어.”
“아니에요. 같이 해요.”
“그럼 나야 좋지. 아, 혹시 기름 냄새 나는 거 싫으면 전은 안 부칠게.”
“환기 잘 시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박주우의 배려 덕분에 동태전도 부칠 수 있게 됐다. 시작이 순조로웠다.
나는 박주우가 계란 한 판을 계란물로 만드는 동안 재료를 지지고 볶았다.
이 정도 실력이면 아이돌 그만두고 반찬가게에 보조로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려던 찰나, 박주우가 밀가루까지 곱게 준비해 놓고 나를 불렀다.
“전은 내가 부칠 테니까 전에 밀가루랑 계란물 좀 입혀 줄래? 장갑 끼고, 마스크도 꼭 쓰고. KF94로.”
“장갑이랑 마스크는 왜요……?”
“노래하는 애가 연기 맡는 거 아니야.”
“……형도 보컬이잖아요.”
저는 임시 보컬이고 당신은 메인 보컬이시잖아요.
나는 혹시 몰라서 사 온 마스크를 박주우에게 들려 주었다.
박주우가 내게도 굳이 마스크를 뜯어 주는 바람에, 우리 둘은 실내에서 야무지게 마스크를 끼고 전을 부치게 되었다.
요령이 생기니 꼬치전도 얼마나 예쁘게 부쳐지는지. 팔아도 될 정도다.
내가 동그랑땡에 홍고추와 청고추를 하나씩 올리는 걸 보던 박주우가 말했다.
“형, 요리…… 되게 잘하시네요.”
“그렇지도 않아. 먹고 싶으면 하나 먹어도 돼. 저염식이거든.”
“완성 전인데 먹어도 돼요?”
“먹으려고 만든 건데 뭐 어때. 고추도 색만 빨갛지, 안 매운 거야.”
나는 밍밍한 음식을 좋아하는 박주우에게 내 동그랑땡의 무해함을 설명했다.
비록 아침에 정신 못 차리고 전 부칠 재료를 한가득 사 왔지만 아이돌의 본분을 잊지 않고 건강식으로 고른 나, 칭찬한다.
앞접시를 꺼내 동그랑땡 하나를 올려 주자, 박주우는 동그랑땡에서 김이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더니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박주우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먹을 만해?”
“형, 이거 맛있어요……!”
“두 개 먹어. 두부로 만든 거니까 고기로 만든 것보단 살 덜 찌지 않을까.”
내 말에 박주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락 밴드 얘기할 때만 나오는 표정인 줄 알았는데.
한번 동그랑땡을 맛본 박주우는 꼬치전과 동태전도 시식에 들어갔다.
소금 간을 하지 않아 담백한 동태전과 재료가 잘게 들어간 미니 사이즈의 꼬치전도 합격점을 받았다.
“형은 원래 요리를 좋아하세요?”
내가 시금치 삶는 걸 보던 박주우가 물었다.
“전혀. 제수 음식 말고 다른 건 잘 못해. 라면……은 잘 끓인다.”
전자가 집중해서 익힌 요리라면 후자는 하도 자주 먹어서 습관이 배어 버린 요리였다.
“어쩌다 이런 것만…….”
박주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궁금하긴 한데 하필 소재가 제사상에 올라오는 음식이다 보니 말을 아끼는 듯했다.
“그냥, 내가 좋아해. 오늘은 너도 숙소에 있을 거라길래 좀 해 본 거고.”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아냐. 나도 먹을 건데, 뭘.”
숨이 죽은 시금치를 꺼내 찬물에 헹구려는데 박주우가 나를 불렀다.
“형.”
“왜?”
“형은…… 왜 본가 안 가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