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tant Manager Kim Hates Idols RAW novel - Chapter (92)
김 대리는 아이돌이 싫어-92화(92/193)
| 92화. 사내 불화 (2)
“그래서 어제 정성빈이랑 박 터지게 싸웠다고?”
최제호가 차가운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물었다. 그 우유 좀 데워 마시라니까 더럽게 말 안 듣네.
“나는 온건하게 상황을 설명했는데 성빈이가 조금 격앙되었던 것뿐이야.”
“너 원래 사람 열받게 말하는 편이잖아.”
“제호야, 지금 자기소개하는 거야?”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최제호는 코웃음이나 쳐 댔다.
어이가 없다. 지 주둥이 간수 도와주려고 내가 노력한 게 얼만데, 이런 식으로 나를 물 먹이다니.
“들어 보니까 박주우도 네 편 아닌 것 같던데.”
최제호의 말에 구석에서 조용히 빵만 먹고 있던 박주우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하긴. 처음부터 박주우가 불지만 않았으면 최제호는 정성빈이 화가 났다는 걸 눈치도 못 챘을 거다.
그래도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박주우에게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박주우가 나를 외면했다.
너까지 나를 배신해?
내가 추석에 너한테 먹인 전이 몇 장인데. 세상이 아주 배신자투성이다.
“아니, 이게 진짜 내가 잘못한 거야?”
나는 진심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정 없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네가 잘못한 거지.”
“참나.”
연습 좀 하겠다고 노력한 게 어딜 봐서 잘못이냐.
나 춤 못 춘다고 제일 많이 구박하던 놈이 말이 많다.
“형, 코는 좀 어떠세요……?”
그 와중에 박주우가 조심스럽게 내 코의 안부를 챙겼다. 병 주고 약 주는 기술이 수준급이다.
“아주 멀쩡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야.”
“퍽이나.”
“최제호, 너 자꾸 시비 걸래?”
내가 쏘아붙이자 최제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최제호는 버려 두고 나는 박주우에게 초점을 돌렸다.
“주우야, 절친인 네가 보기엔 어때? 성빈이 화 많이 난 것 같아?”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퍼센티지로 표현해 봐.”
“한…… 97%요.”
임계점에 다다랐구나. 큰일이네.
이마를 짚는 나를 보며 최제호가 물었다.
“너 정성빈한테 쫄았냐?”
“아랫사람의 행복 지수는 윗사람 기분에 따라 요동치는 법이야. 조직장이 나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시다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니?”
“그냥 둬. 혼자 생각 정리 끝나면 마음 가라앉히고 오겠지.”
“미안한데 그거 경험담이야?”
“어.”
자랑이다, 이 새X야.
내가 최제호와 동급인 수준으로 전락하다니. 정성빈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어쩔 수 없다. 성빈이에게 사과해야겠어.”
“사과? 괜히 기름만 더 붓는 건 아니고?”
“아냐. 재발 방지 대책을 같이 설명해 주면 돼.”
“기름 붓겠단 소리네.”
말끝마다 초를 치는 최제호에게 발언 금지령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우리나라는 발언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그럼 어떡해. 너희 오늘 연습 내내 성빈이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싶은 거야?”
“난 상관없어.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잖아.”
최제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지 혼나는 거 아니면 상관없다 이거지. 저 태평한 낯짝을 보니 명치에서부터 깊은 분노가 밀려왔다.
“……저는 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형이 말한 재발 방지…… 그게 성빈이의 화를 풀어 줄 것 같진 않아요.”
박주우가 조심조심 말했다. 서럽다.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다.
내가 자조하자 박주우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덧붙였다.
“그래도 형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세요……!”
됐다, 인마…….
* * *
내 예상대로 정성빈은 귀갓길까지 분노를 고스란히 이고 돌아왔다.
함께 하교한 강기연이 정성빈의 뒤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정성빈이 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진심을 가득 담은 사과를 바쳤다.
대충 건강 관리를 제대로 못 한 나의 불찰을 인정하며, 동료를 놀라게 해 미안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형이 장담하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조상신께 건강 검진 계측용 수호 유령 하나만 붙여 달라고 할게.’
이젠 이용만 당하고 계신 조상신께도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불손한 후손을 용서하지 마세요.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건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건강 검진 계측용 수호 유령은 없어도 퍼센티지 단위로 측정이 가능한 피로도 지수가 있으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정성빈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나는 정성빈이 흔들린 틈을 타 아픈 멤버를 향한 녀석의 걱정과 동정심 그리고 연장자에게 화를 냈다는 이유로 밤새 커졌을 녀석의 죄책감을 쥐고 흔들었다.
그냥 계속 무릎 꿇은 채로 빌었다는 뜻이다.
녀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내 사과를 받아 주었다. 내 정성에 감복한 게지.
정성빈이 공기가 80%쯤 섞인 목소리로 ‘형은 정말…….’이라며 탄식하는 게 백미였는데.
어쨌든 정성빈이 너른 아량으로 나의 사과를 받아 준 덕분에 우리의 오후 연습은 몹시 수월하게 진행됐다.
유한수한테 전화가 오기 전까진 말이다.
매니저님에게 받아 온 핸드폰에 부재중이 찍혀 있어 콜백했더니, 놈이 받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 XX XX야, 네가 내 전화를 씹어?
이 천박한 비속어. 경우 없는 통화 예절.
그리고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달되는 분노까지. 정말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인간이다.
“죄송합니다, PD님.”
나는 공손히 전화를 받았다. 여기저기 퍼져 있던 스파크 놈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녀석들에게 앉으라는 손짓과 조용히 하란 손짓을 차례로 해 보였다.
그러자 한쪽에서 이청현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스피커폰 해요!’
그건 좀.
아무리 내 양심이 닳고 닳았어도 애들한테 이런 나쁜 어른의 대화를 들려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 와중에도 유한수의 욕설 메들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제가 고의로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희 모두 핸드폰은 반납하는 게 원칙이어서요.”
― 그래서 XX 어쩌라고? 내가 네 상황 봐 가면서 전화해야 되는 입장이냐? 어?
“절대 아니죠. 죄송합니다, PD님.”
― 죄송? 죄송하다는 XX가 나한테 이렇게 엿을 먹여?
그리고 유한수는 이미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적어도 이전 인생에선 남 부장을 만나기 전까진 이 정도의 꼰대를 만났던 적이 없는데. 이번 삶은 진도가 너무 빠르다.
가엾은 내 처지에 인공 눈물이라도 한 방울 넣어 주려던 찰나, 내 시선이 정성빈과 마주쳤다.
정성빈의 눈은 마치, 예전에 한 약속을 잊지는 않았냐며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알았어, 알겠다고.’
나는 무릎을 짚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유한수에겐 성의 없이 추임새만 넣어 죄송하다고 말한 다음, 녀석들에게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녹음하고 올게.’
내 말을 알아들은 녀석들은 나를 순순히 보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비상구에서 녹음 버튼을 누른 채로 한참 동안 유한수가 뭐라고 떠드는지를 감상했다.
유한수가 제대로 듣고 있냐며 소리를 지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껏 기죽은 목소리로 몹시 죄송하고 잘 듣고 있다는 대답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비상구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이런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유한수의 본론은 20분 뒤에나 나왔다.
― 너 이 XX, 네가 안유리 쪽에도 손댔지.
안유리는 뉴리 씨의 본명이다. 예상은 했지만 그걸로 어지간히 열받은 모양이다.
“PD님, 저는…….”
― 왜? 변명하게? XXX야, 사고 다 쳐 놓고 이제 와서 할 말이 있어? 어?
“…….”
― 네가 뭔데 선을 넘어, 넘길. 회사에서 칭찬 몇 번 들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살면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 안 들어 봤어?
억울하다. 애초에 그쪽에서 먼저 아주 조심스럽게 의견만 구한 건데. 그리고 내 말 안 들을 거면 뭐 하러 전화했냐?
정말 발전 없는 인간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본인 살 궁리나 더 열심히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 넌 무서운 게 없지? 그런데 어떡하냐? 너 이미 업계에서 평판 XX 안 좋아. 하나만 잘못 걸리면 바로 나락 간다고.
“죄송합니다, PD님.”
물론 하나도 안 죄송하다.
내부 고발한 아이돌도 골치 아프겠지만 횡령하려던 직원 평판이 더 구리지 않을까? 이제 좀 본인의 대단함을 깨달으셨으면 좋겠다.
― 너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내가 친하게 지내는 현역 하나 없을 것 같냐? 처신 똑바로 해, 장준후도 네 욕 XX 하고 다녀.
장준후라.
유한수가 장준후 뮤비만 찍어 준 줄 알았더니 둘이 꽤나 죽이 잘 맞았나 보다. 사석에서 내 뒷담하며 친해질 정도면.
아니면 유한수 혼자 나한테 블러핑하는 걸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유한수든 장준후든 위협적인 요소는 못 되니까.
“장준후…… 선배님이요?”
― 어. 너 싸가지 없는 걸로 유명하더라? 장준후가 아주 벼르고 있더만.
그래도 기왕이면 둘이 친한 사이인 게 좋겠다. 여차하면 둘 다 엮어서 보내 버리게. ‘PD와 선배 가수가 손잡고 그룹 하나를 상대로 갑질’, 타이틀 훌륭하네.
나는 한 손으론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선배님께는 인사 몇 번 드린 게 전부인데요.”
― 네가 장준후 협박했다며. 하극상은 인마, 중죄야. 알아?
아무리 하극상이 중죄인들 갑질만 하겠냐. 그 논리는 군대에서나 통하는 거지.
유한수는 장준후의 이름이 언급된 후로 내가 정말 당황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 들어 보니까 별것도 아닌 걸로 네가 설친 거 맞더만. 너, 장준후가 물병 좀 던진 걸로 핸드폰 뺏어서 검사하는 선배니 어쩌니 했다며?
“PD님, 그건.”
― 그 정도가 갑질이면 뭐, 나는 너한테 말도 안 되는 갑질을 하고 있는 거겠네? 장준후가 물병을 사람 몸에 던지길 했어, 네 핸드폰을 부수길 했어? 아, 나는 네 MP3 부쉈으니 갑질했다고 신고도 하겠다?
해 주고말고. 이거 증거 자료로 갖다주면 되겠다, 야. 횡령 의혹으론 부족해서 스스로 죄를 추가하는 모습이 기가 막힌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X같은 세상에 일이 이렇게 수월하게 풀리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로또를 샀어야 하나 보다.
그러고는 으레 그랬듯 욕설이 이어졌다.
녹음은 할 만큼 했겠다, 이제 슬슬 대가리 박으며 죄송하다 주워섬기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계단 아래서 덜컹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누군가에게 들키는 건 곤란했다.
회사 사람이 끼면 당장 유한수를 입 다물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잘만 하면 장준후와 유한수를 갑질 듀오로도 보낼 수 있는 마당에 그런 온건한 형벌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큰 목소리로, 누군지 확인조차 안 된 인영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유한수의 욕설이 멈췄다. 곧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와 함께 소속사의 직원 한 분이 올라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아, 저 잠시 전화 좀 받느라…….”
그와 동시에 전화가 끊기며 핸드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화면이 직원분의 시야에 들어가도록 슬쩍 핸드폰을 젖히자, 공손하게 ‘유한수 PD님’으로 저장해 뒀던 이름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유 PD님 아직도 너한테 전화하니?”
직원분이 경악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도 정말 오랜만에 통화했어요!”
오랜만인 건 맞으니까.
그보다 지금 난 빨리 연습실로 돌아가 녹음이 잘되었는지 확인이나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직원분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유 PD님이 또 뭐라고 한 건 아니고?”
“아뇨, 정말……!”
그때 타이밍 안 맞게도 코가 간지러웠다.
얼마 전 터진 콧속이 또 터지는 건 아닐까 싶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코를 훌쩍거리는 척하며 슬쩍 코 밑에 손을 갖다 댔지만 다행히 코 밑은 건조했다.
안도하며 고개를 들려던 찰나, 직원분이 크게 놀라며 외쳤다.
“너 우니?!”
네? 제가요?
아니, 잠깐.
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나?
자길 괴롭히던 상사와 통화하던 걸 들킨 내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거리면…….
오해할 만하군. 내가 그렇게 여린 이미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나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게 아님을 적극 해명했다.
그러나 직원분이 내 태도를 ‘눈물이 차오르지만 애써 갈무리하고 밝은 척을 하는 기특한 연습생’으로 봐 주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녹음본 확인은 밤으로 미루고 직원분을 갈 길 가시게 모셔다드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