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00
Chapter.7 가면 무도회(15)
***
치직- 파지직-
“아니 갑자기 레이더가 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난다고?”
“고장이 아니라 전파 방해다. ‘노이지 팩’. 렙터의 주력이 움직일 때 항상 따라붙는 녀석들이지.”
교수는 당황하는 에젤의 엑소슈트에 매달려 차분하게 설명했다.
흙먼지가 가까워질수록 차례로 레이더망에서 사라져가는 붉은 점들.
“돔보다 기술력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맞붙었을 때 렙터 녀석들이 아예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건 아니니까. 저 전파 방해 장치는 이런 레이더뿐만 아니라 유도 미사일, 저출력 통신, 2세대 순수 전자식 화기까지 무용지물로 만드는 물건이지.”
“퉤! 옛날 생각나는군. 내 장담하는데, 노이지 팩 놈들은 원거리에서 잡는 게 불가능할 거다. 랩터에서 가장 단단한 차량에, 제일 두꺼운 실드를 쓰는 놈들이니까.”
“죠, 렙터 놈들도 실드를 써?”
“양은 적지만, 3차 세계대전 당시에 쓰던 군용 실드를 아직까지 보수해서 쓰고 있지. 그만큼 방호력 하나는 발군이라고. 어떻게든 저놈들을 따는 게 우리 쪽에 있어 최우선 목표가 되겠지. 노이지 팩만 작살내면 나머지는 돔의 유도화기로 작살내버리면 되거든.”
“그게 우리 목표지. 노이지 팩은 대열의 가장 안쪽에 있거든. 엑소 슈트 같은 기습할 수 없는 물건으로는 쉽게 타격을 가할 수 없단 말이야. 전열의 돌덩이 같은 놈들을 다 털어내지 않고서는.”
“돌덩이라면…. 으으, 설마?”
“왜. 벡스 너도 좀 알겠냐?”
“아니, 렙터랑 붙어본 적은 없는데…. 저놈들은 전쟁이 끝나고 군인의 대부분을 흡수한 놈들이니까, 돌덩이 하면 생각나는 게 있거든.”
“음…. 뭔데?”
“공룡.”
“오우, 정답!”
“으이이익! 진짜 그거라고?!”
쿠르르르르르!!
솨아아아아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뿌옇게 흩날리는 흙먼지와, 귀가 아플 정도로 울리는 궤도음, 그리고 흙을 밀어내는 소리.
“으아으, 진짜 그거네.”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거야!”
[전 대원에게 전달한다. 지금부터 아군 지칭은 코드명으로, 전투에 불필요한 대화는 금한다. 전 엑소슈트, 기동 출력 50%, 실드 20%, 외장형 반발 배리어 30% 유지.]“아, 에젤 너는 본 적이 없겠구나. 탱크야 탱크.”
“탱크? 전차?”
에젤은 자신의 엑소슈트 프레임에 매달린 교수의 말에 흙먼지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에 집중했다. 그도 자료를 통해 전차의 모습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그가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른, 마치….
“불도저?”
“크흐흐! 전장에서 그렇게 부르기도 했지.”
“하지만…. 내가 공부한 전쟁사에 저렇게 생긴 녀석은 없었다고!”
“그럴 수밖에. 저건 정식으로 나온 모델이 아니라, 대전쟁 끝 무렵에 생산시설이 죄다 작살나고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모델이거든.”
3차 세계대전. 재앙으로 시작돼, 이기심으로 불이 붙어, 목적 없이 모든 것을 불살라버린 구문명의 마지막 단말마.
전 인류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전쟁이었고, 그만큼 치밀하고 지독한 전쟁이었다.
폭격의 최우선 목표는 항상 생산시설이었다. 첨단 장비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 하나라도 생산이 멈추면, 상대의 전투력을 급감시킬 수 있었으니.
지금 눈앞에 다가오는 저 특이하게 생긴 전차는, 당시 최신형 전차에 들어가던 고출력 굴절 실드의 생산이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어떻게든 실드 없이 적의 초장거리 직사 포격, 레일건 따위를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방편에 가까운 모델이었다.
“트리케라톱스, T-7 전차. 과거 악명높았던 6호 전차를 계승한다는 명성답게, 악몽 같은 전면 장갑을 자랑하는 놈이지.”
“텔라닌 합금을 전면에 미터 단위 두께로 때려 박은 미친놈이야. 선회도 약하고, 측면은 거의 노출된 거나 다름없지만, 정면에서는 도시 거치형 레일건으로도 못 뚫는다.”
콰르르르!
교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마침내 렙터의 주력부대가 흙먼지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처럼 넓고 두터운 전면 장갑으로 앞을 완전히 가리고, 그 가운데로 뿔처럼 포구가 나와 있는 모습.
그런 전차 수십 대가 빈틈없이 이어 붙어서 하나의 거대한 강철 방벽을 이루고 움직이고 있었다.
킁킁킁.
“햅번, 이건….”
“아아, 씨발 진짜.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냄새였는데.”
“놈들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사람이 죽었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저 거대한 전차를 움직이며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
휘발유의 수급이 어려워진 세상에서 놈들이 선택한 대체 자원, 황무지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자원을 태워 나오는 끔찍한 향.
렙터의 전차를 움직이는 기름은 대부분 인간에게서 짜낸 바이오 디젤이었다. 렙터가 움직이는 곳에는 언제나 시체가 타는 전장의 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악마…. 악마 같은 놈들….”
“틀린 말은 아니지. 과거 맛탱이가 간 예언가라는 놈들이 하늘에서 악마가 내려와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고 했잖아? 결국 사람의 손으로 세상이 멸망했으니,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 중 누군가는 악마라는 이름에 부합하겠지. 그리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임한 군인들이야말로 그것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교수는 착잡한 마음으로 에젤의 엑소슈트에서 뛰어내렸다.
짤그랑-
연극의 시작에, 집행부로부터 넘겨받은 군복에 들어있던 군번줄이 흔들리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울렸다.
***
“일반 곡사 무기는 요격. 정밀 유도화기는 전파 방해. 나머지는…. 모두 저 돌대가리 놈들이 막아내지.”
“측면은? 저렇게 느린 속도에, 선회도 안 되면 측면이 엄청나게 취약할 거 아냐?”
“생각을 좀 해라, 에젤. 저게 움직이는 경우는 전면전급 교전일 때인데, 지금 황무지에 3형 변종 빼면 렙터랑 전면전 할 상대가 돔밖에 더 있냐?”
“돔은….. 아!”
“그래 임마. 돔의 주 전력은 어디까지나 돔 ‘그 자체’야. 도시 거치형 시설은 우회 공격따위는 못 한다고. 엑소슈트 부대의 기동력이면 가능하지만, 저쪽에서도 전력으로 방어하면 엑소슈트 부대 정도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으니.”
대부분 수비하는 입장에서 싸우게 되는 돔의 약점이었다. 전장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우스운 일이다. 한번 멸망한 세계라고는 하나, 레일건과 실드 같은 첨단화기가 난무하는 세상에서의 전면전은 중세의 라인 배틀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으니.
에젤은 저 멀리, 어느 정도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해진 트리케라톱스 전차의 전면 장갑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게…. 가능해? 내가 아는 텔라닌 합금이면···. 일반적인 철보다 중량이 다섯 배는 나가는 물건인데 그걸 전차의 전면부에 저만큼이나 때려 박고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고?”
“전차용 고출력 실드를 안 쓰니, 전력이 남아돌잖아. 그걸 쓰려고 디젤 엔진 위에 전자 출력장치를 하나 더 얹었다더군. 첨단 전차의 거의 모든 출력을 이동에만 쏟아부으니 저런 것도 가능해지더라고.”
“저런 정신 나간 물건이….”
“전쟁은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지. 생산적인 게 아니라 주로 파괴하는 쪽으로 만들어낸다는 게 문제지만.”
쿠르르르르르-
천천히 다가오던 강철의 벽이 감속하더니, 완전히 정지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
“예나 지금이나 칼 같군. 곡사 무기 요격에 필요한 정확한 거리에서 정지했어.”
“이안. 너 렙터에 있었다고 했지?”
“….그래. 꽤 오래 있었지.”
“그럼 나보다 잘 알겠군. 우리 셋이 움직이는 데 있어 가장 유효한 공격은 암습을 통한 측면 혼란 유도라고 생각하는데. 동의해?”
“쯧. 나쁜 생각은 아니다만….”
이안은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다가, 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차며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고생깨나 할 거다. T-7으로 만든 방벽. 그 양옆으로는 렙터 군단의 전투 차량이 날개처럼 줄줄이 따라오고 있으니까. 어디보자…. 어이, 호모. 쌍안경 있냐?”
이안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던 일행은, 곧 호모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깨닫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씨…. 형님! 나 호모 아니라니까!”
휘익-
“지 입으로 ‘게이바’라고 이름 지어놓고는 무슨.”
탁!
투덜거리며 에젤이 던전 쌍안경으로 적진을 대충 살피고, 교수에게 넘겨주는 이안.
“저기, 공룡대가리의 끝부분을 봐.”
“….보병이군. 최신형 실드를 뚫기 위한 대구경탄과, 도시 거치형 방어시설의 정신 나간 화력이 오가는 전장에 보병을, 그것도 저렇게 많이?”
“그냥 보병이면 쓸모없겠지. 자세히 보라고.”
이안의 말에 교수는 쌍안경 안에서 작은 점처럼 움직이는 보병들을 살폈다. 차량에 탑승한 녀석들도 있고, 사열하는 것처럼 다섯 명씩 나눠서 줄지어 선 녀석들도 있고. 머리가 전투차량보다 높네? 키가 큰 건가? 검은 방독면에, 이상한 패드 같은 게 붙은 군복에….
“아!”
이안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45구역에서, 좁은 통로를 전차처럼 밀고 들어오던 녀석들.
“그 화염방사기든 놈들?”
“정식 명칭은 ‘미니 슈터’라고 하는 놈들이다. 화염방사기는 특수 작전용 부무장이고, 정식 무장은 저 옆에 있는 개틀링 건이지.”
“개틀링건…. 저거? 차에 거치되어있는 거?”
“거치된 거 아냐. 그냥 기대놓은 거지.”
“저게…. 미니?”
사람이라기보단 무슨 갑옷 입은 게임 캐릭터 같은 모습이다. 검은색 투박한 패드가 잔뜩 붙은 군복에 커다란 키. 그 키만큼 커다란 개틀링건.
교수의 황당한 얼굴에 이안은 낄낄거리며 답했다.
“일종의 반어법이지. 놈들의 주무장이 미니건(Mini gun)이기도 하고. 저놈들은 엑소슈트 전담 부대다. 온갖 마약성 도핑으로 근력과 체격을 키운 또라이들이야. 펄스 라이플이나 충격 소총 정도는 웃어넘길 정도로 단단하게 만든 보병이지. 미니 슈터 다섯이면 엑소슈트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다섯씩 묶어놓은 건가.”
“실제 교환비는 그것보다는 조금 나쁜 편이지만 말이야.”
한참을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샷건 셸 하나를 분해해서 나온 화약으로 마침내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이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후우우-! 제길, 폼 잡으려다 개고생이군. 아무튼, 평범한 방법으론 측면 돌파도 힘들어.”
“평범하지 않은 방법은?”
“내가 있을 때는…. 한두 번 뚫렸었는데. 하나는 초장거리 저격총을 장비한 돔의 특수부대 수십 명이 레이더의 범위 밖에서 미니 슈터 30명 정도를 따버리고 시작했을 때랑, 또 하나는, 지금은 생산도 안 되는 200kg급 임팩트 밤으로 전열을 죄다 흐트러트린 동안 카모플라쥬 장비를 장착한 특수부대가 안에 들어와서 깽판을 놓았을 때였지 아마?”
“저격은 장비가 없고…. 충격에 암습이라….”
“음.”
턱을 쓰다듬던 교수와,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이안의 눈이 동시에 벡스를 향했다.
“어…. 나?”
“될 것 같지 않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시키면 못한 적은 없잖아.”
“박교수, 네놈이 기절했을 때 반쯤 맛탱이가 간 상태에서 날도 없는 대검으로 1개 소대를 작살낸 적도 있어.”
“딱이네?”
“더할 나위 없이.”
“어….어?”
터억!
이야기가 진행되는 속도롤 따라오지 못해 당황한 벡스의 어깨에, 두 사람의 손이 얹어졌다.
“햅번? 죠? 설마…. 내가?”
“그럼 너 말고 누가 하겠냐?”
“믿어라, 짜리몽땅. 백업 확실하게 해줄게. 넌 들어가서 너 잘하는 것만 하면 된다니까?”
“원래 칼 쓰는 거 배울 때, 목이나 심장보다 배를 노리라고 배우잖아. 갈비뼈가 보호하지 않는, 내장이 가득 든 복부에 쑤욱, 하고.”
“으이이익, 말이 쉽지…!”
“하던 대로만 해, 하던 대로만, 흐히히히!”
휘익-
탁!
“우앗! 보급품 살살 좀 다뤄, 박교수! 근데 진짜 들어가게? 너희 셋이?”
교수가 보지도 않고 던진 쌍안경을 받아낸 에젤의 떨리는 목소리에, 교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우리보고 전설이네, 초인이네 별 이상한 별명을 다 붙여가면서 떠들더라고. 지금까지 한 일이 그렇게 대단한 건 줄은 모르겠지만···.”
“흐으으음- 하아아. 전장의 냄새가 나는구나.”
“음…. 어색한데. 새 칼은. 내 손에 길이 안 들어서.”
투덜거리면서 새로 받은 칼을 살피는 벡스와, 그런 벡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묵직한 철가방을 둘러메는 이안.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가운데 자리를 비워놓고 앞서나가는 둘을 보며, 교수는 말했다.
“진짜 전설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 말을 끝으로, 교수는 두 사람 사이에 합류하여 모래색 판초 우의를 뒤집어쓰고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놈들이···.”
치익-
[전 대원 교전 준비. 목표는 적의 포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것. 주포가 충전될 때까지 15분만 버티면 저 홈리스 파충류 새끼들은 끝이다. 긴장하지 말고, 긴장 늦추지도 말고 평소처럼만 하면 아무 일도 없다. 알겠나!]치직-
[실버가드, 여기는 오퍼레이터. 스피드 범프(Speed Bump : 과속방지턱)의 충전이 30초 뒤에 끝납니다. 3초 뒤, 시각 유도장치에 전송됩니다. 3…2…1]피잉-!
에젤이 뭐가 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뿌연 경계선. 전부 배웠던 내용이다.
‘돔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방어. 구시대에서도 화력으로는 선두를 달리는 도시의 주포가 충전될 때까지, 어떻게든 도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적을 방해하는 것. 적들은 엑소슈트의 실드로는 막을 수 없는 질량이 큰 대구경 탄을 사용한다. 직격당하면 무조건 죽지만, 그걸 위해 준비된 스피드 범프가 있으니 괜찮을 거야. 읽은 내용대로라면, 강력한 마이크로 전자석 그물은 범위 내에 들어온 그 어떤 금속 투사체라도 속도를 잃게 한다고….’
치익-
[EZ-07.]`우리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결계야. 닿으면 엑소슈트도 통제 불능이다. 침착해. 시각 유도장치에만 집중하면 충분히 피해서 움직일 수-‘
[EZ-07! 막내야! 듣고 있냐!]“허윽!”
[정신 차려 멍청한 새끼야! 실전이다! 네가 지금까지 투입됐던 작전, 47구역 인근에서만 돌았던 ‘연습게임’은 전부 잊어! 정신 놓으면 죽는다! 상대는 파충류 새끼들이다! 사람으로 기름을 짜기 위해 포로를 잡는 놈들이라고!] [어어, 예에에….] [씨발놈이 진짜…. 특이사항! 보고!]“예, 옛!”
허둥거리던 그에게 날아온 거친 욕설에, 에젤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머리는 아직 상황을 못 따라갔지만, 감찰부에 들어온 직후 신물이 날 정도로 구르며 받은 훈련은 상관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특이사항…. 특이사항….!’
[이, EZ-07, 전투 수행 지장 없음! 특이사항! 지원 세력 HIV 전장 우회 중!] [좋…. 아니, 뭐라고? 똑바로 말해! 누가 어딜 갔다고?]치익-
[실버가드. 여기는 헤드센터. 방금 통신 내용에 대한 브리핑 요청한다. 지원 세력 HIV의 우회. 상의된 내용인가? 목적은?]치익-
[스피드 범프 방사 완료. 고각도 레일 슈터 12정, 레디. 실버가드, 스텐드 바이. 실버가드, 스텐드 바이.]랄프 몽클라르는 초 단위로 어지럽게 조여오는 상황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이제 몇 초 후면 격돌할 텐데, 변변한 장비도 없는 그놈들이 어디로 갔다고?
[HIV! 지원 세력 상황 보고! 아군 충돌 후, 혼란을 틈타 적 측면 돌파, 진형을 무너뜨리겠답니다!] [….헤드 센터. 확인. 명성에 걸맞는 행동이로군. 행운을 빌지.] [오퍼레이터, 적 기선의 전차장 확인. 영상 전송합니다.]“아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놈들은 또 뭔 일을….”
랄프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통신 사이로 순식간에 지나간 교수 일행을 생각하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그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손에 맡겨진 감찰부 엑소슈트 부대, 실버가드를 통솔하는 일뿐.
랄프가 입술을 악무는 사이 그의 눈앞에 영상이 나타났다. 강철의 방벽 뒤편, 커다란 확성기 앞에 종이뭉치를 들고 선 검은 군복의 남자.
“”“아아, 오랜만이군, 냄새나는 쥐새끼 친구들.”“”
전파 방해의 영향인지 약간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돔의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실버가드 전 대원, 준비 완료.]“”“의례적으로도 만나서 반갑다곤 못하겠군. 나는 렙터 8군단의 팩 리더, 솔 아마르라고 한다. 비록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너희 쥐새끼들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렙터의 전투는 신성한 법. 여기, 선전포고와 함께 오늘 너희들이 개처럼 죽어 나갈 이유를 이렇게 한가득 적어왔으니, 감사히 여기고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보도록.”“”
[선전포고다! 실버가드! 전방 배리어 들어!]화르륵-!
영상속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준비해왔다는 그 종이에 불을 붙였다.
“”“저승에 가서 말이지.”“”
콰과과광!
불타오르는 성명문과 함께, 한치의 예고도 없이 발포하는 전차들.
퍼버버벅!
에젤은 전자석 그물에 걸려 코앞에서 멈춰선 거대한 전차탄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EZ-07! 특이사항!] [없습니다아아악!]없기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전자석 그물 밖에 떨어진 포탄 터지는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고, 그런 상황에 엑소슈트 부대의 임무는, 그물 밖으로 나가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니까.
‘일렉트릭 폴. 도시 전력을 전달하는 장비가 앞으로 나오고, 그만큼 전자석 그물이 앞으로 나가고, 다시 우리가 목숨 걸고 텅 빈 구역을 사수하고….’
렙터와의 전쟁에서 도시의 주포가 놈들의 방어선을 깨부수기 전에는, 엑소슈트 부대의 역할은 유동적인 에너지 방벽일 뿐이었다. 덕분에 사상사자 가장 많이 나오는 것도 전투의 초반부, 전자석 그물을 앞으로 진출시키는 이 시점.
하지만 에젤은 이를 악물고 시각 유도장치에 보이는 회색 그물 지대 밖으로, 한걸음 나섰다.
‘진짜 전설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첨단이라고는 해도 보병용 장비만 들고, 적진을 향해 달려나가던 세 사람의 뒷모습.
에젤은 그 모습을 떠올리며, 답답하게 목을 죄고 있던 전투용 수트를 확 잡아당겨 목 부분을 터 버렸다.
“쪽팔리게…. 귀하게 자란 도련님 소리 들을 수는 없잖아!!!”
철컹! 철컹!
반쯤 일그러진, 삐뚜름한 미소와 함께 에너지 방패를 든 엑소슈트가 포격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캬하하하! EZ-07! 똘끼가 어디 가진 않았군! 얼어있었으면 네녀석이 퇴직할 때까지 그걸로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썅! 다음 출격 땐 기저귀 차고 나올 겁니다!] [미안하지만 준비된 기저귀는 우리가 다 차고 나와서 네껀 없다 EZ-07. 안됐군, 바지를 버리게 돼서.] [KT-05, MJ-06! 닥치고 방패 들어! 일렉트릭 폴 터지면 그물 밖에서 45초 더 버텨야 되는 거 모르나! 방어에 집중해!]철컹! 철컹! 철컹! 철-
콰아앙!
“커허윽! 우욱!”
포격이 에젤의 방패에 제대로 꽂혔다. 아직 배터리가 충분해 막아내긴 했지만, 한방에 전력의 잔량이 뚝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고, 실드 안쪽까지 전해진 그 충격에 속이 뒤집혀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이상해…. 전투 교리에는 실버가드가 진출하면, 포격 범위가 줄어든 렙터 쪽에서 전투 차량 같은 걸 투입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포격전이 아니라 난전으로 바뀐다고 했는데…. 저놈들, 후퇴하면서 계속 포격을 이어나가고 있어.’
이렇게 되면 돔의 승리는 확정이지만, 놈들이 후퇴한 만큼 따라오지 못한 전자석 그물로 인해 포격을 직격으로 견딘 실버가드가 당하게 된다.
‘주포가 충전될 때까지 배터리가 못 버텨! 제기랄, 빨리, 빨리….!’
에젤은 색이 옅어지기 시작한 실드를 보며, 앞서나간 세 사람에게 간절히 빌었다.
‘빨리 뭐라도 좀 해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