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01
Chapter.7 가면 무도회(16)
***
속닥속닥-
“야. 햅번.”
“음….”
“어떻게 좀 해봐! 저기 뚫고 들어가라면 난 죽어도 못하니까!”
“아니, 분명히 저 옆구리에 달린 애들이 앞으로 뛰어나가야 하는데….”
에젤이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가기 위해 애쓸 무렵, 교수 일행도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쟤들이 왜 후퇴를 하고 있지?”
교수는 렙터의 전략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알진 못하지만, 돔의 전략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부분이 없다고 해도 될 정도의 전문가였다. 어머니를 잃고 언젠가 복수할 때를 위해 뼈에 새기듯 공부했으니까.
그리고 돔의 대(對) 렙터 전술로 봤을 때, 지금 이렇게 후퇴하는 것은 렙터 놈들이 이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쐐에에엑-
퍼억!
퍼버억!
돔의 도시 방어 전략의 핵심인 저 스피드 범프, 과속 방지턱이라는 광역 전자석 방어 장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뭘 쏘든 빔이나 플라즈마 계열이 아니면 죄다 허공에서 붙잡혀 버리니까. 전력만 충분하다면 렙터 네스트가 통째로 달려와도 포격전으론 돔에 흠집 하나 낼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물건이지.’
물론 약점은 있다.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처먹는다는 것. 통상적으로 15분을 운용하면 돔 전체가 3일간 정전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전력을 먹는 만큼, 그 범위는 원활하게 전력 공급이 가능한 돔 주변 20m 정도로 제한되어있는데, 전투 시에는 그 범위를 살짝 연장하는 게 가능하다.
지금 엑소슈트 부대, 실버가드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온갖 굵은 전선을 주렁주렁 매단 커다란 가로등 같은 장치, 일렉트릭 폴이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냥 도시의 전기를 원활하게 전달해주는 일종의 변압기였다. 크고, 강력한 변압기.
‘범위 금속탄환 무효화라는 말도 안 되는 성능. 저 전기봉이 앞으로 나올수록, 전자석 그물의 범위도 렙터의 진형에 가까워지지. 막는 방법은 별동대를 보내 어떻게든 전기봉을 파괴하고 진출을 막거나, 지금처럼 후퇴하는 것뿐인데. 후퇴하면 그동안 도시의 주포가 충전되고, 제 아무리 T-7이라도 도시의 하루치 발전량을 뿜어내는 더럽게 무식한 첨단무기 앞에서는 버틸 수 없으니, 사실상 후퇴는 패배 선언이나 마찬가지지.’
애초에 올드 픽처 계획이 실패해서 저런 장치들이 가동되게 한 순간 패배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일렉트릭 폴을 막고, 주포가 충전되기 전에 화력을 총동원한 일제 사격을 통해 순간적으로 전자석 그물에 걸리는 전압을 높여 과부하를 일으키면 저쪽에도 승산이 있으니, 100% 옆구리에 있는 미닛맨인지 미니미 인지 하는 놈들이 그물의 진출을 막기 위해 자리를 비울 줄 알았는데···.
꼼작도 안 한다. 아예 움직일 생각도 없이, 천천히 진형을 뒤로 물리며 엑소슈트 부대에 피해만 누적시키고 있었다.
“음…. 조금만 더 접근해보는 건 어때?”
“자살행위야. 아무리 놈들이 전파 방해 장치를 켜놔서 레이더를 못 쓴다고 해도, 측면에 있는 놈들은 그쪽으로 오는 놈들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거라고. 이 우의 쪼가리 하나로는 금방 걸리고 말 거야.”
“젠장. 그럼 방법이 없군.”
교수는 우의 속에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모래 위에 대충 그려놨던 세 사람의 이동 경로를 지워버렸다.
“측면 돌파는 포기다. 무리하면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 대가로 누구 하나 죽을 가능성이 너무 커.”
“어이어이, 잠깐만. 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만히 짱박혀있자고? 그건 좀…. 곤란한데.”
“노획도 노획이지만, 일단 목숨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냐.”
좁은 판초 우의 그늘 속에 낑겨있던 이안은, 조금 애매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돈 문제 말고, 저쪽에 그…. 죽여야 될 놈이 있어서.”
“뭐?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혹시 아는 놈이라도 봤어?”
“알아야 할 놈은 봤지. 좀 전에 확성기에 대고 쌍소리 갈기던 팩 리더 말이야. 솔 아마르 라는 놈. 내가 걔를 좀 죽여야 해서, 그냥 이렇게 있다가 후퇴하게 해줄 순 없거든.”
“아이고 염병할. 심지어 저쪽 대가리라고?”
“죠, 뭔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좀 참으면 안될까? 내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엄폐 하나 없는 개활지를 지나서 저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덩치들을 암살하는 건 좀-”
“쟤가 우리 와이프를 죽였다.”
“힘드-으어엄….”
“내 딸도.”
“어….음….”
가볍게 나온 말 치고는 전혀 가볍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처자식 죽인 놈이 지금 눈앞에 있다는 건데.
“크흐흐흐! 갑자기 쪼그라들기는.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신경 꺼. 내가 초짜도 아니고, 사람 잃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막 눈 돌아가고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아. 쿨 하다고 지금.”
“으음… 그럼 다행이-”
“그렇다고 마냥 해피한 것도 아니고. 도리가 아니잖아. 눈앞에 원수가 있는데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건. 애아빠로서도, 한 여자의 평생을 책임지기로 한 남자로서도.”
지이익-
이안의 손가락이, 모래판 위에 적을 나타낸 기호 위를 주욱 가로질렀다.
“구멍이 없으면 내가 만들어주도록 하지. 돔에서 받아온 장난감이 이것저것 있으니, 시선 하나는 확실하게 끌 자신 있다.”
“이봐 죠. 너 설마….”
“미안하게들 됐다. 저놈 이름을 듣는 순간, 차 같은 건 아무래도 좋게 돼버렸어. 그렇다고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흔들어놓는 동안 너희 둘이 그 혼란을 파고들어서-”
빠악!
“으악! 썅! 뭐!”
“뭐? 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더 맞아라 이놈아. 야 벡스! 이 새끼 졸라 패버려.”
“아얏! 아, 이런, 염! 욱!”
“도리는 얼어 죽을! 저승 가서! 그 지랄하다 왔다고 하면! 참 좋아라 하시겠다! 형수님이!”
“멍청한 새끼! 병신 새끼! 미련한 놈! 멍청이!”
적진 근처라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세 사람은 비좁은 위장용 판초우의의 그늘 아래서 툭탁거리고 있었다.
“쿨하긴 개뿔. 제대로 맛이 갔구먼. 저 개틀링건 든 떡대들 사이에서 난리를 피우고, 살아나오겠다고?”
“왜 안돼! 처음에 폭발물로 크게 한 방 날리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내가 전투 차량 같은 걸 끼고 대치하는 동안 너랑 벡스가 안쪽에서 지휘 차량을 습격하면-”
“그.러.니까. 그동안 네놈의 몸뚱아리가 벌집이 될지 현무암이 될지 어떻게 아냐고. 이것 봐. 머리에 피가 아주 끝까지 차올라서 행복회로가 다 타버렸잖아. 쿨하기는, 아주 염병을 해요.”
속사포같은 잔소리에 차츰 사그러드는 이안을 보며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했지만 그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니까. 집행부가 얽힌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깊게 개입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사정을 들어보니 이안 저 녀석이 저 솔 뭐시기 하는 배 나온 팩 리더를 곱게 포기할 리가 없다는 것.
좀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있는 이안을 달래며 교수는 말했다.
“차분하게 좀 들어봐. 측면 돌파를 포기한다고 했지, 그냥 손 놓고 보고 있겠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측면 돌파 안 한다면서?”
“그것 ‘만’ 하는 건 지금 무리인 거니까. 상황이 변했으니, 그 상황에 맞춰서 움직여 줘야지.”
교수는 작계판 위에 그려진 진입 경로를, 세 갈래로 나누며 말했다.
“위험 부담을 약-간만 올려 보자고. 벡스?”
“응?”
“운전 할 줄 알지?”
“할 줄만 알지, 내가 운전대 잡으면 거의 100% 사고 나는 거 알잖아, 햅번.”
“괜찮아. 사고 내려고 하는 거니까.”
“어….어?”
“그냥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둬. 이안?”
“그래.”
“이건 소문으로만 들은 거라 좀 확인을 하려고 하는데, T-7 전차 조종수가….”
교수는 그렇게 이안에게 질문을 하며, 재빨리 모래판 위에 무언가를 마구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예의 그 악동 같은 미소를 입에 한가득 물고 히죽거리는 그 모습에 벡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 그를 나타내는 V가 가리키는 방향에 크게 해골 모양을 그려 넣는 걸 본 뒤로, 더더욱.
***
5분 후.
파박!
“후욱, 후욱! 허억, 허억!”
짤막하게 작전을 전달받은 세 사람은 곧바로 흩어졌다. 렙터의 측면을 바라보고, 이안은 전차가 있는 쪽에 가까운 전방으로, 교수는 중앙으로, 그리고 벡스 자신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서 후방으로.
작전의 기본 구조는 같았다. 옆구리가 비면, 은신, 잠입에 능한 벡스가 파고든다. 다만 파고들 틈이 없어졌으니 두 사람이 흩어져 놈들을 살짝 끌어낸다는 점이 달랐다.
벡스는 모래색 우의를 덮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을 고르며 시간을 세었다.
‘가운데 있는 교수가 내가 자리 잡는 걸 확인하면, 죠한테 신호한다고 했지. 우의를 덮으면 시작인 거고. 시작하고 3분 뒤라고 했으니, 앞으로 144초.’
째깍, 째깍,
벡스는 숨을 고르며, 우의 안에서 조용히 옷을 벗었다. 돔의 군복은 튼튼하고 유용하지만, 경계하고 있는 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교수의 작전에 따르면 어차피 벗어야 할 짐이니, 미리 벗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순식간에 탈의를 마친 벡스는 깡마른 몸에 흙먼지를 비벼 바르기 시작했다. 격한 움직임으로 땀이 나서 그런지 먼지가 잘 달라붙었다.
“23, 22..”
시계는 없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예전부터 시간을 세는 것에 정확했으니까. 아마,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자신을 살려준 ‘아저씨’에게 진 빚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로 이렇게 된 것 같았다.
“3, 2, 1,”
콰아아앙!
정확한 순간에, 저 앞부분에서 폭음이 들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렙터 전차의 포격음 속에서도, 그 질을 달리하는 거대한 울림.
벡스는 판초우의를 벗고,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땅 위를 포복으로 움직였다.
‘보병들이 동요한다. 저쪽으로 관심이 쏠렸어.’
선두와 가까이에 있던 보병들은 폭발이 시작된 곳으로 달려가고, 나머지는 전투 차량에 탑승해 그쪽을 조준하고 있었다.
——-
‘일단 요란하게 시선을 좀 끌자고. 너 그거, 무선형 지뢰 받았다며?’
‘크, 크흠! 시선 끌기라면 굳이 이런 고급품을 쓸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데…. 두 개 받아온 것도 하나는 소장용으로 하려고….’
‘아니, 무조건 그거 써야 해. 그거 무선이라며. 저 미니 뭐시긴지 하는 개틀링 떡대들의 시선이 죄다 네 쪽으로 쏠릴 텐데, 터트리는 순간 벌집이 되지 않겠어?’
‘내, 내 소총에 유탄 발사기도 달려있는데, 그걸로 어떻게….’
‘유탄발사기가 닿는 거리에서, 기관총이 안 닿을 리가 있냐?’
——-
‘첫발이 터지고 7초. 셋, 둘, 하나, 지금!’
콰아아앙!
미리 세팅해놓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에 맞춰, 벡스는 네발로 기듯이 움직여 미리 봐두었던 흙먼지가 쌓인 곳에 몸을 숨겼다.
“적습이다!”
“3군단, 위치 사수! 5, 6군단은 화망을 형성한다!”
“대형 유지! 대형 유지!”
정면으로는 돔에게 포격을 가하며 일사불란하게 후퇴하는 상황에 불시의 습격을 받았는데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 이안이 사용한 것이 파편 지뢰다 보니 주의를 끌기 위해 거리를 두고 터트렸다고는 해도, 부상자가 없지는 않을 텐데 단 한명의 병사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기계 같은 녀석들…. 방심을 하지 않으니 눈은 밝지만, 저렇게 굳어진 녀석들은 파고들 틈이 많지. 배운 대로만 움직이니까.’
째깍, 째깍,
머릿속의 초침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안의 역할은 끝. 다음은-
타아앙-
한참 뒤 쪽, 렙터의 전차라인과 이안을 있는 그 연장선에, 교수가 서 있었다. 저격을 할 거라고는 했는데…
‘저 꼴은 뭐야?’
돔이 도시 주변이라고 싹 밀어버린 개활지에서, 높이가 좀 부족했는지 이안이 놓고 간 철가방 위에 올라가, 그것도 좀 부족했는지 어디서 긁어모은 묵직한 돌 같은 걸 쌓아서 그 위에 올라서서는 조준을 하고 있었다.
타앙- 타앙-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다소 힘없이 울려 퍼지는 근 미래형 볼트액션 라이플의 소리.
‘무식하게 두꺼운 전차나, 방탄 패드로 온몸을 두른 미니 슈터를 상대하기엔 한참 부족한 관통력이지만….’
벡스는 화망을 형성하기 위해 진형을 바꾸며 노출된 전투 차량 중 한 대에 집중적으로 불꽃이 튀는 것을 보며 미소지었다.
‘렙터의 차량 뒤에 매달린, 보급용 연료통에 불을 붙이기엔 충분한 위력이지!’
타앙-
화르륵-!
“어, 어어어!”
“불! 불이다!”
“으아아악! 내 몸! 내 몸이 타고있-”
타앙!
털썩.
“당황하지 마라, 적의 게릴라일 뿐이니! 겨우 차량 한 대에 병사 한명을 잃었을 뿐이다! 소화반! 소화반 좌열으로!”
“저격수다! 아군 저격수를 불러라!”
연료통에서 터져 나온 불이 차량으로 번져 전투 차량 한 대가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그것도 그뿐. 차량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옆 차량으로 옮겨가고, 대열의 안쪽에서 저격총을 든 병사 대여섯명이 몰려나와 순식간에 불이 꺼진, 새까만 차량에 총을 거치하고 총성이 시작된 부분을 조준하고 있었다.
저격수가 붙었으니, 교수도 이제 움직일 수 없다. 요란했던 것에 비해 별 성과는 없었던 두 사람의 움직임.
—–
‘박교수. 너무 렙터를 등신으로 보는 것 아냐? 저놈들은 전투에 미친 놈들이라니까? 지뢰 좀 터트리고 차 한 대 불태운 걸로 막 혼란에 빠지고 그럴 놈들이 아니라고.’
‘당연히 알지. 그 정도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머리 굴리고 앉아있을 일이었겠냐. 혼란을 주는 건 우리 역할이 아니야.’
‘그럼?’
‘내가 처음에도 말했잖아. 일단 적이 뭔가를 하고 있다면, 그걸 막는 쪽이 무조건 우리에게 이득이라고. 심지어 적이 손해를 보면서도 그 행위를 이어나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막아야 한다, 이 말이야. 간단히 말하자면-’
—–
“항상, 적을 엿먹이는 방향으로 움직여라….”
천천히 시간을 계산하던 벡스의 눈에, 잘 유지되던 진형이 갑자기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깔끔하게 화망을 형성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벡스와 가까운 후열과 달리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전열.
“3군단! 후진해! 후진하라고!”
“적들의 게릴라에 의해 차가 한 대 전소되었습니다!”
“차 빼! 당장 빼라고!
“2군단 쪽에서도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팩 리더! 차량이, 차량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밀어서라도 빼란 말이다! 아군 전차에 깔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이안이 사용한 것은 구형 대전차지뢰도 아닌, 무려 3차 세계대전에 현역으로 활약했던 최신형 대전차지뢰, 마그네틱 클레이모어 ‘플랑베쥬르’.
그 폭발력도, 파편을 비산하는 것도 일반 클레이모어와 같으나 플랑베쥬르는 대전차 지뢰라는 목적에 맞는 특별한 효과가 하나 더 있었다.
기긱- 기기기긱-
“차축에 뭔가 잔뜩 붙어서…. 차량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로, 사용자가 플랑베쥬르를 격발 시킨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목표 대상에게 박힌 강력한 자석 파편들이 자기들끼리 마구 끌어당기며 차량의 전자장비를 망가뜨리고 운행을 방해하는 것이다.
줄지어 이동하는 것은 어느 정도 훈련만 되어있다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줄을 그대로 유지하며 후진하는 것은 어떨까? 심지어 그냥 줄도 아니고, 수십 대에 가까운 전차와 그 배가 넘는 전투 차량이 줄지어 이동하는 것은?
파아앙-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돔의 경계 너머에서 렙터의 전차를 향해 주기적으로 날아드는 레일건의 탄환. 25kg짜리 쇳덩어리가 음속의 7배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드는 것이다. 후퇴를 한다고 해서 저 거대한 방패를 뒤로 돌릴 수는 없는 상황.
‘그렇게 줄지어 후진하는 상황에 먼저 자리를 비켜줘야 할 전투 차량들이 멈춰 서버렸지.’
기동이 정지한 차량을 궤도로 밟고 지나가기엔, 저 기형 전차의 거대한 방패가 너무 무겁다. 결국 뒤가 막힌 전차는 후퇴할 수 없게 되고, 후퇴를 멈추면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은 덕분에 빠른 속도로 전진한 일렉트릭 폴과 그 전력 중계기의 힘으로 쑤욱 앞으로 밀고 나온 전자기 그물의 접근을 맞이하게 된 렙터는….
‘나간다!’
결국 교수가 처음에 말한 정석적인 방법, 보병을 이용해 엑소슈트를 견제하며 일렉트릭 폴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사삭!
그의 앞에 있던 보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벡스는 재빨리 그 빈틈을 파고들어 렙터의 진형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계획대로 노이지 팩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칼 두 개에 속옷만 입은 맨몸이고, 보병이 빠져나갔다고는 해도 진형 안쪽에는 수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으며, 이안과 교수는 저 멀리 흩어져 합류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스걱!
“커헑! 끄륵! 그으으-”
털썩.
전장에서의, 그중에서도 적진 한가운데를 파고들어야 하는 암살자의 목표는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해야 하는 법. 갑작스러운 소란에 후진을 멈추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온 병사의 멱을 딴 벡스는, 피거품을 물고 허물어지는 상대의 눈을 감겨주며 신속하게 그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허리춤의 수통을 얼굴에 들이부어 먼지를 씻어내었다.
“침투 단계는 종료. 이제 남은 건….”
—–
‘그래 좋아. 들어갔다고 해. 그 정도면 별 이상 없이 침투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요인 암살? 방화?’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럼 네가 죽잖아. 메탈죠 녀석한테 들었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마침 우리 벡스님한테 딱 어울리는 자리가 있지 뭐야?’
‘어울리는…. 자리?’
—–
“어이! 거기 너!”
등 뒤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벡스는 순간적으로 품 안에 넣어둔 칼을 꺼낼 뻔했다.
“거기서 뭐하는 거야! 이름은, 소속은!”
“아, 그게… 저….”
—–
‘짜리몽땅, 가서 옷 갈아입은 다음에 아무 생각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해.’
‘평소 하던 대로?’
‘맹하고 멍청해 보이게 행동하라고.’
‘으이익! 내가 언제!’
‘그냥 그런 줄 알고 그렇게 행동해. 트리케라톱스 전차는 결함 덩어리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골치 아픈 부분이 있는데….’
—–
“키가 작군. 너, 전차 조종수냐?”
“어, 아… 예! 그, 그렇습니다!”
“그럼 꾸물거리지 말고 장갑차에 얌전히 들어가 있어! 도망칠 생각 따윈 하지 말고!”
벡스에게 눈을 잔뜩 부라린 장교로 보이는 남자는, 우악스럽게 벡스의 팔을 잡고 진형의 앞쪽으로 벡스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
‘조종석이 더럽게 좁아.’
‘전차는 원래 그런 거 아냐?’
‘원래도 좁은데, T-7은 머리통 때문에 앞부분을 더 줄였거든. 키가 155를 넘으면 안에 못 들어갈 정도라 일반 병사는 못 들어가. 너무 좁아서 완충 장치고 뭐고 다 떼어버렸는데도 그 정도지.’
‘그럼 원래 있던 조종수만 내가 어떻게 해버리고 들어가라는 소린데….’
‘그럴 필요 없다니까. 니 머리통만 한 쇳덩어리가 마하 7의 속도로 때려 박히는 전차인데, 그 가장 앞부분에 있는 조종수 석에 완충 장치가 없다고. 거대한 소리굽쇠 안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돔을 상대하는 전장에서 T-7 조종수는 소모품이야. 그냥 직진, 후진만 할 줄 알면 되니까 렙터에서 키가 작은 어린아이들을 교육시켜서 기절할 때마다 갈아 넣는 형식으로 운용하는 거야. 넌, 거기서 그냥 겁먹은 어린애처럼 휘적휘적 걸어 다니기만 하면 돼.’
—–
‘진짜 되네?’
“들어가! 다시는 나올 생각 하지 말고. 너희들은 위대한 렙터 소사이어티를 위해 봉사하는 거다! 긍지를 가져라!”
전차의 바로 뒤쪽, 포성이 몸을 흔들 정도로 가까이 들리는 거리에 붙어있는 병력 이송용 장갑차의 안쪽에는 벡스와 키가 비슷한 10살~14살 정도의 아이들이 먼저 앉아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에 맞은 자국도 보이는 게 대충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병신.’
벡스는, 그렇게 렙터 장교의 안내를 받아 적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 T-7전차의 조종수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