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03
Chapter.7 가면 무도회(18)
***
오래전, 내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던 시절.
전장은 내게 학교였고, 놀이터였으며, 내가 살아있음을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압도적인 힘. 선악을 따지지 않는 공포를. 대지를 찢어발기는 그 아름다운 비명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 비록 아내를 만난 뒤로 사람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저 전차의 포성을 들으면 아련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의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다니는 지금 이 순간에 조차.
‘벡스는 적의 진형 안쪽, 그중에서도 경계가 가장 삼엄한 전차 부근에 있을 거다. 레일건에 두들겨 맞고 있을 때야 충격을 조금이라도 흩어야 하니 해치를 다 열어놨겠지만, 진군을 시작한 지금은 거북이마냥 꽉꽉 닫아놨을 텐데. 안쪽에 피해가 가지 않게 뚜껑을 딸만 한 물건이 있으려나?’
붙어 다니던 녀석들을 떼어놓고 이렇게 홀로 전장을 질주하니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그놈들 때문에 얌전하게 싸웠지만, 원래 그의 스타일은 일대 다수의 상황에 뛰어들어 일단 미친놈처럼 뒤집어엎고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처럼 싸우기엔, 준비물이 하나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전장의 흙먼지 속을 누비며, 포격으로 파인 구덩이 속에 몸을 숨기며 겨우 전차가 눈에 보일 정도까지 접근한 상황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를 불안하게 만든 이유.
평소답지 않게 약한 소리나 하며, 유서가 어쩌고 하게 만든 그 이유!
“하이드 그 빌어먹을 기생충 꼬맹이가 내 차를….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랬다. 황무지를 누비며 스캐빈저 무리, 사이코 갱 집단 한가운데 뛰어들어 학살을 자행하던 향신료상 메탈죠-이안을 이렇게 바닥을 기는 쫌생이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차량의 부재였다.
파바박!
포격이 떨어지고, 흙먼지가 흩날리는 틈에 조금 더 앞으로 나온 이안은, 눈대중으로 적의 본진과 자신의 거리를 계산하며 숨을 골랐다.
‘여기가 한계다. 더 접근하면 벌집이 되고 말거야. 내가 아무리 미친놈처럼 달음박질해도 저 수 많은 미니 슈터들 중 한명의 눈에 띄는 순간 그대로 다진 고기가 되고 말겠지.’
차! 은신 침투 같은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니, 최소한 빠르게 진입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내 차는 애아빠 머리통이랑 같이 사이좋게 저승으로 갔으니. 새 차를 찾을 수밖에.
이안은 날카로운 눈으로 적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다행히 차라면 저쪽에 잔뜩 있었다.
‘전차의 좌, 우익이 빠르게 전진해 U 자 형태로 감찰부 놈들을 감쌀 생각이로군. T-7은 선회가 안 되니 포위 섬멸에는 저 정도가 한계지.’
익숙한 진형에, 익숙한 전법. 덕분에 약점이 어떤 부분인지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애초에 이건 다 잡은 먹이를 도살하기 위한 진형이니까. 포위진 안에 들어간 적은 별 저항도 못 하고 압살당하게 되지만….’
파각!
이안은 감찰부 병기창에서 받아온, 완벽한 구체에 가까운 수류탄의 머리 부분에 달린 캡을 날렸다. 플라스틱 캡을 날리면 나오는 새빨간 버튼. 어떤 훌륭한 제작자가 이다지도 직관적으로 만들었는지.
위이이이잉-
스위치를 눌렀다. 제트엔진에 시동이 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에 쥔 수류탄이 마구 진동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폭격으로 파인 구덩이 속에 포복한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전투차량 두 대.
휘이익-
‘제일 큰 약점은 포위하기 위해 앞으로 과도하게 돌출된 좌, 우익의 첨단이지. 전차 쪽은 아무리 병신 마개조라 욕먹는 T-7이라도 이런 콩알탄으로 터트릴 수는 없지만…..’
톡!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하게 차량 한 대의 운전석으로 날아가는 수류탄.
“음? 이게 웬….!”
“소위님! 이거 수류ㅌ-”
.
.
.
.
번-쩍!
쿠아아아아앙!!!
파란색의 자그마한 구체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 터져 나왔다.
***
“쿨럭 쿨럭!”
폭발에 차에서 떨어져 나간 병사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이명 속에서 그의 상관을 향해 달려갔다. 평소에는 때리고 욕하는 상관이지만, 저 폭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존경심이 마구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알려야 한다. 적의 공격을 알리고, 주변에 포진한 다른 아군을 불러야 한다!
“주, 중대장님! 적습입니다! 3호 차가 완파! 당장 지원을-”
“아, 그래. 지원 가야지 물론.”
타앙!
“나 내 친구 지원 나가니까, 저승 가서 너네 중대장한테 보고해라.”
아톰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류탄. 처음 본 사람들은 그 파랗고, 동글동글한 생김새에 옛날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장난감을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한번 써보는 순간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싹 사라지는 물건이었다.
‘전투 차량 한 대 정도는 날리고도 남아,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의 정신까지 쏙 빼놓을 정도의 그런 쌈박한 물건이란 말이지.’
폭탄은 단순히 그걸 맞고 죽었냐, 죽지 않았느냐로 생존이 결정되지 않는다. 그 굉음과 충격은 사람의 뇌와 의식을 마구 흔들어대니까. 기절하지 않아도 일시적으로 바보가 된다는 뜻이다.
폭발의 여파로 무방비한 상대와, 기관총을 든 살인마.
이미 이안은 무전기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중대장을 쏘고 나머지 대원들을 정리한 지 오래였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쇼. 어차피 다 같이 지옥에서 만날 텐데, 누가 몇 명을 더 죽였네, 하고 싸우는 건 좀 추하잖아.”
잠시 묵념을 한 이안은 시체를 대충 치운 다음, 운전석에 앉아 핸들에 손을 얹었다.
쓰으으으으읍-
하아아아~
“이거지.”
착 감기는 가죽 핸들의 감촉. 조용히 울리며, 언제든지 달려 나갈 준비가 됐다고 시위하는 엔진.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탄 기어.
운전석에 앉는 순간 ‘돌아왔다’ 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봐 아가씨. 나랑 같이 드라이브 좀 갔다 올까?”
부아아앙! 부릉! 부릉!
“오, 정말? 날 상대하려면 각오해야 할 텐데? 내 드라이브는….”
카가가가가각-!
“브레이크를 쓰지 않거든!”
킬킬거리는 이안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전투차량은 거친 배기음을 토해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대열에서 이탈한 검은 차량이 향한 곳은, 포위망의 가장 안쪽, 중심에 위치한 전차의 정면이었다.
***
콰아아앙!
포탄이 떨어지고, 뿌연 흙먼지가 앞 유리를 가득 채운다. 폭발의 열기에 반쯤 녹아내린 모래가 탄환처럼 쏟아지며 우박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저건 와이퍼로 못 닦겠군.’
콰가가가가각!
끼이이익!
충격에 살짝 떠오른 차량의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며 미친 듯이 핸들을 꺾는다. 차는 사람과 같다. 아니, 사람보다 나은 점이 많지. 얘는 최소한 말을 하면 들으니까.
콰앙!
U자형 전차 대형의 끝부분에서 시작한 드라이브는, 살짝 외곽을 돌아 중앙으로 이어졌다. 바로 안쪽으로 파고드는 건 자살행위다. 옆으로 죽 늘어선 전차 대열을 지근거리에서 횡단하다니. 자살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지.
베스트는 포구와 직선이 되도록 움직이며 좌우로 피하는 것. 문제는 포구가 너무 많아서 그게 불가능하니….
‘조금 어그로를 돌려줄 필요가 있지.’
중앙에 똘똘 뭉쳐서 겹겹이 쌓인 실드로 버티고 있는 저 감찰부 쪽에 붙으면 틈이 생길 것이다.
부아아앙-!
콰아앙!
좀 전보다 근처에 떨어진 사격. 살짝 돌아왔다고는 해도 이 시꺼먼 차량이 적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도둑놈 심보긴 한데….
‘날 쏘시겠다? 배짱 한번 두둑하군 그래? 요즘 애들은 얼마나 훈련했는지 한번 볼까?’
적이 이쪽을 인식했다면 오히려 쉽다.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포격보다야 반쯤 예측 가능한 포격이 훨씬 낫지. 전차 타는 놈 속내야 훤히 들여다보이니.
“흠~ 흠흠~”
뭔가 유쾌한 기분이다. 새 차를 타서 그런가? 아니, 그것보다 더 기분이 좋아. 뭔가 내가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그런 기분이로군.
이안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글러브 박스를 뒤졌다. 렙터 놈들은 규정으로 군가 테이프 하나씩은 꼭 넣고 다닌다.
‘그리고 아까 그놈이 중사…. 라고 불렀는데. 중사짬 정도 먹었으면, 군가 대신….’
달칵!
‘이런 걸 넣고 다니지!’
사각형 플라스틱의 양쪽에 뚫린 구멍. 카세트 테이프다.
“웃기는 노릇이지. 사람 짜서 기름 뽑는 놈들이 음악 듣겠다고 꾸역꾸역 테이프나 만들고 있고.”
‘물론, 포격 한가운데로 직진하면서 좋아 죽겠다고 흥얼거리는 놈도 마찬가지겠지만. 크흐흐흐!’
찰칵- 촤르르륵-
플레이어에 부드럽게 빨려 들어가며 나오는 올드 팝.
[That`s Life~ that`s what all the people say~]콰아아앙!
1970년대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음악 사이로, 전차탄의 굉음이 화음처럼 울려 퍼졌다.
부아아앙!
우박처럼 떨어진 포탄 덕분에 울퉁불퉁하게 패인 전장을 가로지르는 차량과,
[you`re riding high in April Shot down in May~]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흘러나오는 중년 남성의 희망찬 목소리.
“크흐흐흐. 선곡 죽이는군, 이름 모를 중사 양반!“
부아아앙!
덜컹!
엑소슈트 부대 주변은 집중된 포격으로 둥글게 패여 있었다.
그 포격의 언덕을 뛰어넘는 차량과,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날리는 이안,
그리고 푸르다 못해 스파크가 튀는 실드 안에서, 입을 떡 벌리고 손가락질하며 경악하는 에젤과 랄프.
온갖 파편이 박혀 흉한 몰골이 된 차 한 대가, 농담처럼 전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콰가각! 콰앙!
적진이 가까워질수록 치밀하게 날아드는 포격.
충격에 유리창이 깨지고, 녹아 붙은 유리와 모래가 이안의 얼굴에 흩뿌려졌지만,
“Cause this fine old world it keeps spinnin` around~ 와후!”
이안은 웃었다. 끝내주는 차 안에서, 사랑하는 포격음에 휩싸여, 친애하는 벗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크흐하하하! 와우! 맞춰봐 이 새끼들아! 맞춰 보라고!!!”
플레이어 속 남자의 말처럼, 이게 그의 삶이었다. 고통으로 가득할지언정, 후회 한 점 없는. 없게 할.
[I pick myself up and get back in the race~!]부아아아아앙!
미리 꺼내서 차 뒀던 작은 벨트. 안느가 챙겨주며 ‘가동하는 동안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한, 돔에도 몇 개 없다던 최신형 개인 실드의 전원을 올린다.
포격을 뚫고, 전차를 향해 달리는 이안의 차량. 목표는 계속 눈여겨보던….
“거기 가운데 너! 아까부터 한발도 안 쐈지!”
포구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유일한 전차. 이안은 직격당할 걱정이 없는 유일한 탈출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차량정비를 소홀히 하는 나쁜 전차병은!”
부아아아앙!
“뒤지게 쳐맞아야지이이이!”
레일건도 튕겨내는 거대한 금속 방패와 전투차량의 범퍼가 맞닿았다.
[That`s life!]콰각!
범퍼가 떨어져 나가고, 새하얀 에어백이 이안을 밀어내는 동안 오프로드 차량의 커다란 바퀴가 전차의 방패에 닿으며-
그와아아앙-!
차는, 전면 장갑의 경사를 타고 날아올랐다.
***
콰아아앙!
그림처럼 날아올라 적진 한가운데서 폭발하는 차량과, 푸르스름한 실드를 휘감고 튕겨져 나온 이안.
드르르르르륵!
땅에 발이 닿는 것이 느껴지기도 전에 쏟아지는 탄환 세례.
“염병할! 무슨 아군 진형 한가운데 화망을 형성해놨….어?”
곧바로 쏟아지는 탄환 세례를 피해 엄폐한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식적으로 그가 한 짓은 미친 짓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저 킬링 필드를 차 한 대로 뚫고 들어와 전차 라인을 넘어온단 말인가?
예상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라, 이 말이다.
그런데 적들은 그가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반응했다. 아군 진형 한가운데에서, 전차를 향해 화망을 형성하고, 꼼꼼하다 못해 편집증 적일 정도로 엄폐한 데다가 거치형 기관총까지 설치해놨다고?
‘나를 노린 게 아니야. 누군가 먼저 여기서 이들과 교전을 벌였어. 아니, 지금도 벌이는 중이야.’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발밑에 있었다. 그가 목표로 한 지점, 렙터에 있을 무렵의 지식 그대로 전차 뒤편에 자리 잡은 조종수용 장갑차,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시체들.
“….야….”
철컥!
별안간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벼락처럼 총구를 돌린 이안은, 그대로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늦었….그르륵, 너….”
“이런 제기랄! 벡스!”
익숙한 목소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냘픈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이 모든 시체의 원인이라고 시위하듯, 온몸에 피칠갑을 하는 벡스.
“너, 너!!!”
“매, 매번 그런다…. 내꺼 아냐…. 그냥 좀…. 튀었….”
“말하지 마! 야!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평소에 적을 상대하고 나선, 피칠갑을 해놓고선 경악한 그에게 자기 피 아니라고, 헤죽 웃던 녀석.
이안은 이번에도 제발 그렇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적들이 경계하던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그가 아니라 터진 옆구리에서 흐르는 창자를 손으로 막으며 적들을 조준하고 있던 벡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