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06
Chapter.7 가면 무도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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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다닥!
“허억, 허억! 염병, 배땡겨서, 뒤지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GG는 황무지 생활에 도움이되는, 교육적인 게임이다.
‘언제부터인지, 아픈 거랑 움직이는 걸 별개로 생각하게 되었거든!’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플레이를 해오던 교수는, 어느새 현실의 고통에도 어느 정도 달관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제기랄! 고통에 익숙해지다니! 기분 나빠! 하필 캐러밴 이름도 BDSM인데!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잖아!”
교수가 전력으로 뛰어서 도착한 곳은, 얼마 전에 나왔던 감찰부의 차고였다.
나올 때랑 전혀 다른,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한 차고 안쪽에는 빨간색으로 깜박이는 비상등만이 그 윤곽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도시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엑소슈트는 견제만 당해도 알아서 무너지니까.’
평범한 엑소슈트의 가동한계는 약 35분~40분. 지금처럼 실드를 최대출력으로 켜놓고 전투 기동을 하면 15분. 여기서 실드에 전차탄이 한 발 박힐 때마다 40초씩 줄어든다고 계산하면 얼추 맞을 거다.
‘렙터놈들이 벌여놓은 판이니, 그다음도 생각해뒀겠지. 엑소슈트 부대는 쉽게 움직일 수 없을거야.’
이안. 그리고 벡스.
감찰부 병기창에 방문했을때 재빨리 눈으로 훑어보았던 감찰부의 내부구조를 더듬어 나가는 동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 게 벌써 몇 번째인지.
‘감찰부 사람들이 샌드백이 되어줄 테니 운이 좋으면 적진에 파고들 수는 있겠지. 얇은 부분을 파고들 정도의 화력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그 안에 혼자 쳐들어간 거지?’
이안이 달려나가는 순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멈추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기 직전, 저 안에 혼자 고립되어있을 벡스가 떠오르며 입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이안은 사지로 뛰쳐나가고, 결국 이렇게 혼자서 정전된 돔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믿자. 어쨌든 보통 놈들은 아니니까. 녀석들이 살아서 버틴다고 가정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는 거야.’
감찰부 건물을 나와, 쥐 죽은 듯 조용한 돔의 거리를 달렸다. 돔 사람들은 밖에 소란이 일어나면 공포에 질려 날뛰거나, 어디론가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집에 조용히 틀어박혀 이 순간이 지나가길 빌 뿐. 평화를 통해 길들인 선한 가축 같은 사람들.
교수는 슬슬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 정보를 정리했다.
‘깨진 판석, 부러진 가로수. 엑소슈트 1개 소대가 뛰어갔으면 저 정도는 당연하지. 저 방향은…. 언더돔이군. 랄프 형님이 발전기를 지키라고 명령했으니 바로 언더돔을 향했겠지. 저기 유일하게 푸른 빛이 번쩍이는 건물은 행정부 건물이겠고.’
행정부는 돔의 예산, 주민 문제, 법규등 여러 가지를 담당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담당하는 ‘연구’다. 행정부 건물은, 비상시에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개별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그 내부의 연구물들을 지키게 되어있었다. 여차하면 모조리 파기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물론 저거야 얼마든지 자기들이 끄고 나올 수 있는 거지만, 저렇게 켜져 있는걸 보니 쫄아서 안에 처박혀있는 걸 선택했나 본데?’
아니면, 돔이 멸망해도 렙터의 손에 넘겨줄 수 없는 걸 안에 가지고 있다거나. 돔의 도시는 여기 말고도 두 개나 더 있으니까.
흔적을 쫓아갈수록 거리가 파괴된 수준이 점점 높아졌다. 치즈처럼 너덜너덜하게 구멍이 뚫린 건물 외벽. 이건 펄스 라이플 흔적이고. 철구로 때려부순 듯 박살이 난 건물. 이것도 엑소슈트가 때려서 부순 것 같고.
물론, 벽과 건물에 난 것과 같은 흔적이 군데군데 널브러진 시체에도 있었다. 군복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과 같은 복장을 한 시체들은 익숙한 교수가 봐도 속이 울렁거릴법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용접기로 녹여버린 듯한 모습의 철문 너머로 언더돔으로 내려가는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 쓰러진 세 대의 엑소슈트와 함께.
‘생존자는…. 없나..’
교수는 슈트 안에 든 시체로 다가가 목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아직 따듯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는 뜻. 아니 그보다,
‘시체가 너무 멀쩡한데?’
오래전 돔에서 일할 때, 엑소슈트 타고 죽으면 관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 무식한 구시대 실드를 뚫을 수 있는 건 대전차급 대구경 탄환 뿐인데, 그런 걸 맞고 죽으면 시체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감찰부대원 시체 세 구는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대구경탄을 안 썼다는 소린데….’
뭔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감찰부의 분전을 나타내듯 온 사방이 쑥대밭이 된 거리. 터지고 검게 그을린 시체들. 쓰레기 더미, 깨진 유리….!
철컥!
순간, 교수가 총을 뽑아 드는 것과 동시에 그의 바로 뒤에 있던 쓰레기더미가 벌떡 일어나 등허리를 향해 뭔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타앙!
“끄으윽-”
“놀래라! 아니, 엑소슈트 상대하면서 뭔 나이프 같은 걸….”
퍼억!
시체의 머리가 터졌다. 정확히 그의 심장이 있는 높이에서 터져나간 머리. 놈의 소지품을 확인하기 위해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은 머리 대신 원래 목표를 꿰뚫었을 것이다.
“아니 이 또라이들이 진짜! 나이프에 저격수까지?”
곧바로 쓰러지는 남자의 몸을 들어 올려 쏟아지는 탄환을 막은 뒤, 박살이 난 건물 벽 안으로 몸을 던졌다. 일단 엄폐하고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벌떡!
‘또?!’
이번에는 돌무더기에서 손이 쑥 올라왔다. 회색 먼지가 가득 묻은 적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하얀 이가 드러났다.
‘늦었다. 놈이 나보다 빨랐어!’
놈의 권총 방아쇠가 당겨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흘러갔다. 이게 주마등이라는 건가? 아아, 제기랄. 다음 생에는 돌무더기 근처에도-
퍼어어억!
그때. 교수와 암살자, 두 사람보다 먼저 움직인 교수의 왼팔이 돌무더기 아래 숨어있던 남자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으음…. 눈 뜨자마자 웬 난리야…. 아직 안 끝났-]‘잘했어! 말 걸지 마, 정신 사나워!’
죽을뻔했다. 하이드가 그보다 먼저 반응하지 않았으면, 저 총에서 발사된 납탄이 내 뇌를 곤죽으로 만들 뻔했다고!
교수의 눈이 미친 듯이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돌더미. 떨어진 간판, 반쯤 날아간 가로등, 눈에 띄는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쓰레기 길리슈트에, 그쪽을 조준하고 있는 저격수에, 그 바로 옆 가장 가까운 엄폐물에 대기하고 있던 놈까지! 이미 전투가 끝나고 적이 지나간 자리에 예비로 남겨둔 병력이 이 정도라고?!’
심리의 사각을 이용한 치밀한 암습.
대구경탄? 대구경은커녕 나이프에 권총같이 숨기기 좋은 무기를 들고 거리에 스며들어있었다. 거기에 소음기를 쓰는 저격수까지.
철저하게 암습에 초점이 맞춰진 구성. 엑소슈트의 무식한 실드만 없었으면, 최적의 효율을 냈을 조합.
그리고, 목과 가슴 같은 곳에 작은 상처만 가지고 죽어있는 세 명의 감찰부대원.
“실드를 강제로 껐다고?”
그게 가능하다는 소문은 들었다. 휴대용 장비로 쓸 정도로 소형화는 불가능하지만, 미리 준비하면 작은 지역의 실드를 다운시킬 수 있다는 물건. 설치가 아니라 공사라고 해야 할 정도로 큰 면적에 빈틈없는 각도로 설치해야 겨우 차 한 대 정도 들어갈 구역에 사용할 수 있어 전쟁 때 사용되진 않은 물건이었는데···.
“….놈들의 구역이라 이건가.”
교수는 그의 옆에 죽어있는, 회색 흙먼지로 잔뜩 뒤덮여있는 집행부 요원의 몸을 뒤졌다. 레이저 나이프 하나. 소음기가 달린 권총 하나. 방독면이랑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류탄 하나.
‘100% 대인전용 장비. 벡스 녀석이 아쉽군. 녀석이 여기 있었으면 훨씬 쉬웠겠어.’
교수도 벡스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색적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는데, 집행부 놈들은 차원이 달랐다. 저 길리슈트만 해도 단순히 비닐이랑 쓰레기로 덮은 게 아니라, 정말 뒷골목에서 볼법한, 온갖 냄새나고 축축한 국물이 흘러내리는 끈적한 쓰레기 더미였다. 그걸 옷으로 만들어 입고 저 길 한가운데 엎드려서 올지 안 올지 모를 적을 몇 시간이고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암살자와 저격수. 심지어 적들에게 익숙한 지역.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무섭다고 눈에 보이는 모든 구역을 살피면서 기어갔다간 밖에서 벌어지는 저 전투가 끝나버릴 테니까.
다행히 교수에게는 쓸만한 조수가 한 명 있었다.
‘하이드.’
[도와달라고?]‘뭔가 움직인다 싶으면 바로 얘기해. 지금 속도를 늦출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한 하이드는 교수가 건네주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집행부 요원의 권총을 손에 들었다.
[음. 확실히 밖에 있을 때보다 생동감은 덜하지만, 이 정도면 쓰는 데 문제 없겠는걸? 나도 이제 몇 번 쏴봐서 네가 어떻게 하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구.]교수는 그제서야 뭔가가 평소와 대단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너….!’
[내가 의도한 거 아니다! 진짜로! 나도 자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돼 있었다고!]왼팔.
손가락, 손을 넘어 왼팔 어깻죽지까지, 한쪽 팔 전체에서 이물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이드를 현실에서, 그것도 녀석이 잠이 들 정도로 한계까지 이용한 대가였다.
***
타다다닥!
[오른쪽 위! 건물 창문!]타앙!
‘살짝 열린 맨홀. 반사광!’
콰직!
“끄아아악!”
‘왼쪽 골목! 비니 쓴 놈!’
[저거 민간인-]‘웅크려서 벌벌 떠는 놈이 품 안에 손을 넣을 리가 없잖아! 그냥 쏴!’
타 타앙!
하이드가 깨어나고 교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전에는 교수가 보는 것을 하이드가 관찰하는 정도였지만, 하이드가 팔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고 깨어있는 지금.
[천장! 빨간선!]촤아아악!
하이드가 말하기 전에, 이미 녀석이 인식한 레이저 감지장치가 그의 인식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이드가 교수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이젠 그도 하이드가 인식한 것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나 이거랑 비슷한 거 네 옛날 기억에서 봤어.]‘뭐? 혹시 이게 어떤 현상인지 안다고?’
[ㅇㅇ. 양의심공.]‘바빠 죽겠는데 헛소리 할래!’
타아앙!
속으로 욕하긴 했지만, 의미가 통한다는 것은 교수도 동의했다. 군인으로, 또 생존자로 화기를 오래 접해온 사람으로서 교수는 쌍권총이나 양손에 기관총을 들고 갈기는 녀석들을 항상 머저리 취급했다. 표적지도 아니고, 적은 움직이는 데다 대응 사격도 하는데 그런 혼란한 상황에서 두 개의 표적을 노린다니. 탄환으로 검기를 날리는 수준으로 흩뿌리는 게 아니라면 양손에 총을 하나씩 들고 전투에 임하는 것은 이득이라곤 하나도 없는 멍청한 행위였다.
하지만 지금, 교수는 그 머저리가 되어 언더돔의 골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려울 것 없이, 각자 자기 손에 총을 쥐고 인식한 적을 쏴대면 되는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각자 자기 손이라니. 전부 내 손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허, 캐러밴의 수장씩이나 되는 분이 공정한 거래를 부정하다니. 나 없었으면 죽었을 목숨인데 팔 하나가 아깝냐? 이거 ‘안쪽’얘기가 아니잖아! 죽으면 끝이었다고 끝!]‘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
[차!]타타앙!
교수의 양손에 들린 권총이 동시에 불을 뿜어 고철 더미 같은 차 안에 숨어있던 암살자의 미간을 뚫었다.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적었다.
‘감찰부 3소대였나 하는 친구들이 바보는 아니었군.’
언더돔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딱총에 세 명이나 당했으니. 대응책을 마련한 것이다.
엑소슈트들은 이 골목을 아예 다져버리듯 자근자근 박살 내며 지나간 것 같았다. 실드 앱소버는 미리 설치한 장치니까. 이렇게 골목을 통째로 가루로 만들면서 지나가면 발동하기 전에 고장나게 할 수 있었겠지.
‘건물도 다 밀고, 불도 질러주고 가서 집행부 놈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 많이 줄어들었지. 입구에 있던 놈들보다 찾는 게 쉬웠어! 하이드, 왼쪽에 몇 발 남았냐!’
[어…. 잠깐만! 기억 좀 뒤져보고!]‘안 셌다고!!’
[머리 좋은 네가 세면 될 것 아냐!]‘머릿속에 화면이 두 개가 돌아가는 와중에 네 것까지 어떻게 세라고! 내 손으로 쏜 것도 아닌데! 그리고 너도 내 머리 쓰잖아!’
“저기 있다! 보스가 말한 그놈이야!”
“썅! 발가락 놈들이 죽었을 때 물가게 앞이었잖아! 뭐가 이렇게 빨라!”
[저건….]‘죽여! 언더돔의 갱이다!’
촤아아악!
달리는 속도 그대로 골목에 슬라이딩으로 숨어든 교수는 권총을 품에 집어넣고, 아까 주웠던 가스마스크를 쓴 다음 예의 그 특이하게 생긴 수류탄을 던졌다.
[몸을 내밀어야 쏘지!]‘저거 다 죽일 시간 없어. 집행부랑 커넥션이 있는 놈들일 테니 뭔가 명령을 받았겠지. 저놈들한테 꼬리 밟히기 전에 빠져나오려고 그렇게 죽어라 뛰었던 건데….’
“쿨럭, 쿨럭!”
“형님! 놈이, 쿨럭! 연막을!”
“끄으으으!!!”
“연막이 아니다! 화학가스야!”
교수가 던진 수류탄에서 주황색 연기 같은 것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근처에서 뭔가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끌고 오던 갱들은 마구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가스…. 수류탄?]‘대인전의 꽃…. 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흉악한 물건이지. 암살장비만 잔뜩 들고 있는 놈이 가스마스크에 수류탄 하나 들고 있으면 이것 말고는 없으니까.’
사실 마스크 하나 쓴다고 해결될 만큼 녹록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교수는 갱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노란 연기를 뚫고 그들을 지나쳤다. 피부가 불안할 정도로 따끔거렸지만, 끝도 없이 몰려나올 약쟁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후우, 후우!”
[뭐 하는 거야! 바쁘다며! 친구들이 죽는다고!]‘숨 좀 돌리자 이 자식아! 전투하면서 달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무슨 공포게임 스피드런 하듯 달려왔다고!’
[쳇. 속으론 자기가 더 급하면서.]‘여기서부턴 숨 돌릴 곳이 많이 없으니까. 체력을 좀 채우고 움직여야지.’
언더돔의 거주구역을 패스하는데 몇 분이나 걸렸지? 15분? 엑소슈트 부대가 한번 싹 밀고 갔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숨이 좀 가쁜 것을 제외하곤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소모한 것 같지도 않았고.
[진짜 안쪽 생활이 건강에 좋은 것 아냐? 왜, 그런 거 있잖아. 플라시보 효과라든가, 마인드 컨트롤이라든가.]‘그것보단, 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렇겠지. 이정도 생명의 위기를 거의 매일 겪었으니까. 의외로 이런 상황에서 긴장으로 인해 소모하는 체력도 상당하거든.’
젠장, 슬퍼라. 이런 상황에 긴장이 안 될 정도로 익숙해져버리다니. 내 삶은 도대체 어떻게 돼버린 걸까.
교수는 잠깐 앉았다고 딴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머리를 털어버렸다. 체력이 남으면 좋은 일이지. 아직 한참 더 뛰어야 했으니까.
저 가스탄은 효과는 좋지만, 공기보다 무거워서 금방 가라앉는 물건이었다. 연기가 가라앉으면 이제 뒤에서 집행부의 사주를 받은 갱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올 테니, 지금까지보다 더 빨리 나아가지 않으면 집행부 요원과 갱들을 앞뒤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골목 밖으로 나와 조금 더 움직이자, 눈앞에 지금까지의 허름한 건물과는 다른 현대적인 시설이 나타났다. 유리로 된 창문에, 작은 화면이 달린 자전거가 가득한 건물.
‘발전소다.’
[발전소?]‘그래. 돔의 주민이라면 무조건 하루에 정해진 발전 할당량을 채워야 하지. 어퍼 돔에도 있지만, 대부분 여기 언더돔 발전소에 있어.’
[이런 좋은 시설은 전부 위쪽에 있는 것 아니었어?]‘애초에 돔의 진짜 상류층은 발전 할당량이 없기도 하고, 이건 좋은 시설이 아니라 혐오시설에 가까우니까.’
[왜?]‘돔에서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는 대신 발전소의 저 자전거 위에 올려놓고 용접시켜버리거든. 형량을 다 채울 때까지 패달을 밟아야 하는데, 상당히 보기 힘들어. 죽는 사람도 많고.’
엑소슈트가 뭉개고 지나간 자리에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대피했지만, 죄수들은 발에 묶인 사슬이 용접되어있으니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챠각, 챠각, 챠각!
바닥에 부서진 유리가 가득했다. 죄수복을 입은 시체, 이제는 숨어서 암습할 필요가 없었는지 집행부 제복을 입고 있는 시체도 있었고, 완전히 갈가리 찢어져 박살이 난 엑소슈트도 4대 정도 지나쳐왔다. 파직 거리는 전선과 우그러진 고철더미들로 추측하건대, 중앙 발전시설을 방어하는 터렛을 뚫고 지나가다 저렇게 된 것 같았다.
엑소슈트의 흔적을 따라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던 순간,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주변에 잡다한 건물들이 싹 없어졌다. 땅을 깊숙이 파고 거대한 물탱크 같은 것을 잔뜩 파묻어둔 다음, 그 위에 전선으로 이루어진 탑을 세운 것 같은 모습.
“다 왔다.”
[여기야?]‘아마.’
하이드의 물음에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돔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중앙 발전소를 본 적은 없지만, 저 앞에 산산이 조각나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엑소슈트의 잔해들 사이에서 분전하고 있는, 마지막 남은 엑소슈트 두 대가 이곳이 적이 있는 곳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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