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09
Chapter.7 가면 무도회(24)
***
카작, 카작, 카작 카작-
‘편리하네.’
[그치?]밖에서부터 언더돔까지 전력 질주에, 언더돔 거주구역에서부터 중앙 발전소까지 이어지는 전투까지. 내 체력은 바닥난 지 한참이었다. 급한 마음에 벽에 달라붙긴 했는데, 왼팔의 근력과는 별개로 내 몸에 힘이 남아있지 않아 빠르게 기어 올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기어 올라가는 나를 보다 못한 하이드가 왼팔의 통제권을 가져가더니,
카작, 카작, 카작, 카작
손가락만 번갈아 박아가며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피아노 치듯 번갈아 움직이며 벽을 기어 올라가는 커다란 손과 거기 매달린 몸통. 나야 뭐 힘 하나 안들이고 가니까 편하긴 했는데….
‘그….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냐?’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아니긴. 밑에서 구경하던 감찰부 아저씨가 막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비비더니, 지금 수첩 같은 거에 뭔가 잔뜩 적고 있다고. 누가 봐도 대단히 신기한 것을 발견한 사람의 얼굴이었단 말이다!
뭐, 그런 식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됐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이 손가락 등반 장비는 무사히 천장을 수평으로 가로질러 그 관리용 장비가 있다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저게 그 감찰부 사람이 말한 그건 가보네.’
[뭔가 중요해 보이는 게 잔뜩 있는데? 어떤 게 도시 쪽으로 전력을 올려보내는 거지?]‘생각할 필요가 있냐? 다 켜보면 되겠지. 우리 집 전력도 아닌데 좀 낭비되면 어때.’
철컥! 철컥철컥!
기우우웅-
교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레버를 다 올리고, 뭔가에 보호되고 있는 버튼은 전부 다 눌렀다. 이런 복잡한 시설에 대한 설명서를 일일이 찾아보고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뭔가를 껐을 때 문제가 생길 수는 있어도 켜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보였으니까.
웅-
웅웅웅-
파지지지지지직!
“오!”
“돼, 됐습니다! 전기가 들어왔다고요! 성공입니다아아아!!!”
어두침침한 공동에 조명이 들어오며, 조용히 점멸하던 중앙 발전기가 힘찬 소리와 빛을 뿜으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덜컹- 철컥!
구구구구구구-
“어…. 뭐가 계속 움직이는데?”
[관리자용 패널이랬으니까. 뭔가 이것저것 관리하는데 필요한 걸 잔뜩 움직여버린 것 같아!]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며, 칙칙한 냄새가 가득한 공동안으로 시원한 밤공기가 확 끼쳐들어왔다.
“천장이…. 열리고 있어?”
[밖이다! 아까 그 사람이 이 탑은 외부로 이어져 있다고 했잖아!]“외부로 이어져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런 식일 줄 몰랐는데.
중앙 발전소가 뿜어내는 전기가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거리에 하나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열린 구멍의 바로 위로, 발전탑이 하늘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지상과 연결된 게 아니라, 아예 이 지하 공동에 있는 발전탑부터, 지상의 저 높다란 빌딩까지가 전부 하나의 건물이었던 것이다.
“어어어, 자, 잠깐만. 저거….”
[부서….아니, 갈라지고 있어?]발전탑과 빌딩이 연결된 거대한 첨탑, 그 최상단 8개층 정도가 허물을 벗듯, 갈라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돔의 주포가 사용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어디 있다는 소문도 못 들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의 하루치 발전량이라는, 중앙 발전소에 저장된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발사하는 주포. 그 정신 나간 구조물이 중앙 발전소와 가까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돔에도 몇 개 안 되는 현대식 빌딩 중 가장 높은 빌딩의 최상단 30%가량이 열리며 나온 것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미래적인 디자인의 구조물이었다.
“저게 돔이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
대전쟁 시절에도 몇 개 만들어지지 않은, 전력만 충분하다면 대공, 대 지상 그 어떤 방어전에 있어도 99.9%,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수학적으로 계산했을 때, 핵공격이 아닌 한 무조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정신 나간 거대병기. 핵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해버린 지금, 저게 설치된 도시 중 핵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은 47구역이 유일하니 사실상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거치형 전략병기.
“메이어 제우스.(Mayor Zeus : 제우스 시장님)”
챠르르르르륵-
철컥!
“이건….”
[올라오라는데?]타이밍 좋게 내려오는 사다리와, 그 끝에 연결된 엘리베이터.
생각해보면 이 관리자용 패널은 발전탑 하단의 전력 통제장치보다 보안이 약간 더 삼엄한 편이었다. 우선 그 전력 통제장치의 보안을 패스하고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불러서 여기까지 올라와야 했으니까.
“관리용 패널이 ‘제우스’ 관리용 패널이었다면, 그만큼 접근하기 힘들 만하지!”
교수는 유혹하듯 눈앞에 어른거리는 사다리를 붙잡고,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거 쏴봐야겠다.“
[이거 쏴보자!]“바, 박교수니이이임!!!! 주, 주포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도시를 통째로 구워버릴수도 있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외부인이 건드려선 안 될….”
탕, 탕, 탕
밑에서 들려오는 감찰부 남자의 목소리는 싹 무시한 채, 힘차게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가는 교수.
“미안하지만…. 절차를 따지기엔 너무 많이 왔지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교수는 최상층 버튼 위쪽, 번개 모양으로 깜박거리는 버튼을 눌렀다.
띵-!
우우우웅!
교수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돔의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떠어어엉!
[KT-05! 전차 한 대 잡았습니다!] [잡을 필요 없으니까 궤도를 노려라! 궤도가 여의찮으면 후면 장갑 우측을 노려! 냉각수통은 얇아서 잘 터져!]적진을 파고든 그의 부하들과 함께, 랄프 몽클라르는 야수처럼 날뛰고 있었다. 돌아갈 생각은 포기한 지 오래. 그와 그의 부하들은 방어를 도외시한 체 적의 전차가 도시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MJ-06! 그쪽 소대 상황 보고!] […..] [MJ-06! 잭슨! 씨발 죽었냐!] […..]랄프는 검은색으로 불이 꺼진 통신패널의 아이디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아있는 이름이 별로 없었다.
‘완파 5대, 반파 14대니까…. 9대. 아직 멀쩡한 전차가 9대나 남았는데….!’
전차만 다잡는다면 나머지 보병과 전투 차량 정도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행,감찰,행정 3부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합격하지 못한 지망생들이나 도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인력까지 예비군 격으로 징집하면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겠지만….
‘전차를 막지 못한 이상 의미가 없지. 끝이다. 47구역 돔은 렙터의 손에 들어갔어.’
부디 제시간에 대피해야 할 텐데.
랄프는 도시에 있을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강한 여자니까 내가 없어도 아이들을 잘 키워주겠지. 막내는 이제 겨우 두 살이다. 내 얼굴을 기억할까? 못하겠지. 이 험한 세상에 아비도 없이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그러니,
“단 1초라도 더 벌고 죽겠다.”
파즈즈즉-
대구경 개틀링의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한 배터리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랄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부끄러워서 제삿밥 먹으러 올라오지도 못할 것 같다 말이다!!!”
철-컹-
개틀링을 든 무리들 뒤로, RPG를 든 병사 한 명이 정확히 그를 조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렙터의 보병전술. 적, 특히 엑소슈트같이 재생산이 어려운 적 장비를 잡을 수 있다면, 아군의 머리 위에 폭격을 퍼붓는 것도 허용한다.
정확하게 자신이 있는 곳을 따라오는 RPG발사관을 보며, 랄프는 개틀링을 든 보병들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다.
‘….부디, 내 목숨이 저들의 진격을 잠깐이라도 막을 수 있을 만큼 가치 있기를….’
상황을 눈치챘는지 그의 주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보병들을 보며, 랄프는 눈을 감았다.
-파즈즈즉!
콰아앙!
폭발.
충격.
그리고 그 사이에 그의 귓가를 간질이는,
‘실드의…. 반발음?’
귀를 울릴 정도로 대기와 마찰음을 뿜어내는, 실드의 소리.
랄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감은 눈을 떴다.
둥글게, 푸른 빛을 뿜어내며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를 지키고 있는 엑소슈트의 실드. 엑소슈트의 다른 모든 부분도, 떨리는 손으로 켠 시야 보조장치가 나타내는 모든 보조장비도 전부 녹색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설마…. 설마!”
번-쩍!
순간, 강렬한 빛이 달빛 한 조각 없는 밤을 가르며 뿜어져 나왔다. 도시의 중앙타워가 빛의 기둥과 같은 모습으로 광채를 뿌리며 타워에서 도시 외곽으로, 외곽에서 일렉트릭 폴으로! 전류로 이루어진 생명선을 이어나가는 게 보였다.
치직-
[RM-01! 전기가 돌아왔습니다!] [이건…. 도시 중앙 발전소가 다시 가동된 것 같습니다!] [살았다! 씨발 우린 살았다고!]비상 통신채널의 잡음 가득한 소리가 아닌, 맑고 환희에 가득 찬 살아남은 대원들의 환호성 소리.
그리고-
치직-
[아아, 안녕하십니까, 감찰부 여러분. 이제 내 목소리 기억하죠? 대충 알지?]능글능글한 웃음이 눈에 보이는듯한, 감찰부 엑소슈트만 연결된 채널에서 절대 들릴 리 없는 20대 중반 남자의 목소리.
`ZEUS-00?`
[그래요, 납니다, BDSM 박교수. 그동안 없는 빠떼리로 파충류 새끼들이랑 푸닥거리한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현 시간부로 돔의 중앙 전력이 완전 정상 가동됨을 알리며….]‘아이디가 새로 등록된 게 아니라, 원래 통신채널에 포함되어있던 거야. 제우스…. 잠깐만. 제우스?’
끼이이이이이이이잉-!!!
치직-
[휘말리기 싫으면, 당장 아군 좌표부터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상!]뭔가 깨달은 랄프가 도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도시를 비추던 빛의 기둥 끝에 태양과 같은 푸른 빛이 모여들며 그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쾅!
“무능한! 쓸모없는! 줘도 안 가질 쓰레기 같은 돔의 쥐새끼들! 영 미덥지 못해서 기계화 의수들인 놈들까지 보내줬는데 실패하다니! 내 사냥이! 신성한 렙터의 사냥이이이이!!!”
솔 아마르는 이곳에 있는 모든 전차 중 가장 단단한 노이지 팩의 장갑차 상판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밝아진 도시. 쌩쌩해져서 날뛰기 시작한, 다 죽어가던 엑소슈트들.
‘도시에 전력이 돌아왔다. 그 쓰레기들이 발전기를 지키는데 실패한 거야!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들!’
사실 배신한 집행부 요원들은 중앙 발전기를 점령하는 즉시 발전탑을 폭발시켜 47구역 돔을 날려버리고 적의 역습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자 했으나 솔이 그것을 말렸다. 그냥 날려버리기엔 저 도시의 엄청난 인프라와 이제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도시급 거대병기, 제우스가 너무 탐났던 것이다.
물론 그 무지막지한 병기가 그들을 향해 비명을 토해내기 직전인 지금, 솔은 그런 사실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퇴각한다!”
“자, 잠시만 진정해주십시오, 팩리더! 아직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전력을 회복했다고는 하나 적 엑소슈트는 거의 대부분 제압된 상태고, 전자기 그물도 아군 근처까지 진출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니 화력을 집중해 엑소슈트를 모두 정리하고, 최속으로 운전해 병력이 없는 텅 빈 돔으로 입성하면…”
타앙!
“억, 왜, 왜…..”
풀썩.
“흥! 멍청한 자식.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멍청이로 보였나! 상관을 자신의 아래로 보다니! 쓰레기 같은 놈! 하극상이나 하는 쓰레기! 네놈 말대로 성공할 가능성도 있지만! 저 미친 초대형 플라즈마 대포가 이쪽을 노리고 있잖아! 휘말려서 내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거냔 말이다!”
십여 분 전 자신의 새 부관이 된 노이지 팩의 병사를 쏴버린 솔은, 씩씩거리며 그의 시체를 걷어차며 마구 욕설을 내뱉었다.
솔을 제외하고는 전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 병사들.
뚱뚱한 상관, 무능하고, 난폭하고, 병사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아는 쓰레기.
병사들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그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총구를 들었다.
“….씨부럴, 돼지새끼가…. 적당히 해야될 것 아-”
타앙!
“이, 이자식이 조지를!!!”
타앙!
참다못해 그를 향해 총을 꺼내든 병사들은 놀랍게도 총구를 들이밀기도 전에 머리에 구멍이 난 채로 쓰러졌다.
“….이거, 어째서 이 신성한 사냥에서 패배하게 됐는지 답이 나왔군. 감히 지엄한 상급자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 정도로 사상이 오염된 배신자들이 구더기처럼 드글거리기 때문이었어.”
쓰러진 부관을 걷어차던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총을 뽑아 든 병사 둘의 머리를 정확히 쏴버린 솔은 연기가 나오는 총구로 천천히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내가 팩 리더가 되기 전, 자격 시험에서 다른 것들은 전부 턱걸이였지만, 사상과 권총 사격 딱 두 종목은 언제나 만점이었지. 렙터의 팩 리더란 말이다. 네놈 같은 일반 병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란 말이다. 아앙! 어디 또 나와봐! 내 명령에 불만이 있는 놈은, 지금 당장 나와보란 말이다! 렙터의 룰대로 해주지! 날 죽이면 내 자리를 넘겨주마! 나오란 말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분노와 살기가 뒤섞인 끈적한 감정을 마구 휘두르는 솔이였지만, 그의 총구는 출렁이는 그의 몸과 다르게 단 한점의 흔들림도 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철컥.
“….불만이 없으면, 명령을 수행해라. 아군 전차는 이미 적의 세력권에 고립되었으니, 노이지 팩을 비롯한 중앙군은 전장의 우측, 북쪽으로 우회 후퇴할 것. 전차 병력은 자리를 사수하며 지연전을 펼쳐라.”
“그, 그런! 전차부대와 중앙군 전부를 미끼로 삼겠다는!”
철컥!
“앉아. 너는 조종수니 한 번만 봐주지. 전차는 사수, 중앙군이 미끼가 되어 놈들의 공격을 유도하는 동안, 우리는 돔으로 간다!”
“도, 돔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노이지 팩의 지휘차량은 카모플라쥬 기능이 있지?”
“있긴 합니다만, 돔의 레이더를 피할 수는 없는 데다 그마저도 쓰려면 장갑을 모두 떼버려야….”
철썩!
“그럼 당장 나가서 떼어놓고 와! 저렇게 거대한 전력을 뿜어낼 텐데 레이더가 잘도 작동하겠다! 다른 놈들이 전부 미끼를 하는 동안, 우리는 돔으로 숨어든다!”
말대꾸하는 병사의 뺨을 올려붙인 솔은, 명령이 전달되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개인 물품이 든 상자를 뒤졌다.
자신의 몸에 맞는 민간인 복장. 미리 첩자를 통해 조사해둔, 돔의 시민들이 입는 것과 비슷한 옷.
‘상부는 내 모습이 렙터의 대외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줄 것 같다고 내가 대외활동을 하는 것을 막았지. 몹시 불쾌하지만, 덕분에 내 얼굴은 아직 돔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장갑차를 돔의 입구에 처박고, 돔에 남아있는 찌꺼기들이 군복 입은 이녀석들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돔의 시민인 척하고 빠져나와 도시 안으로 숨어드는 거야!’
솔은 직접 주문한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 상의를 벗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반드시 살아남아, 렙터의 영광이 전 세계에 흩날리는 것을 보고 말리라.
***
카가가각!
“염병! 씨부럴! 왜 하필 지금!”
이안은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앞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장갑차에서 튀어나와, 끝내 외부장갑을 날리고 궤도를 터트리는데 성공한 미니 슈터를 쏴버렸다.
뻐엉!
철-컹!
가죽 부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앞뒤로 두툼하게 껴입은 방탄판과 함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날아가는 미니 슈터.
“끄흐으음! 몇 발 더 쏘면 평생 오른손으로 밥먹어야 될 것 같은 것만 빼면, 손맛 하나는 생에 최고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군.”
감찰부 병기창에서 얻어온 핸드캐논은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하는 무기였다. 반은 총신, 반은 팔에 장착하는 보조부로 이루어진 이 무기는 무려 함선에서나 사용하는 24.1mm탄을 사용하는 괴물이었지만, 그 반동을 착용자의 팔과 관절이 오롯이 감내해야 한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파즈즈즉!
전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장갑차로 보병을 으깨고 전차의 포구를 들이받아 휘면서 돌아다니는 동안 쓰러진 엑소슈트도 많이 보였는데, 좀 전까지 다 죽어가던 놈들이 새 머리를 받은 호빵맨처럼 마구 날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원인은, 볼 것도 없이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눈을 찌르는 빛을 뿜어내는 도시의 탑.
“크흐흐흐, 역시 내가 인정한 남자야, 박교수! 결국 해냈구만!”
뻐엉!
옆에서 튀어나온 보병 둘을 한방에 날려버린 이안은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복수를 그의 손으로 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죽일 만큼 죽였으니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그 주포인지 뭔지 하는 게 그의 오랜 원수를….
“….아, 라이터. 썅.”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안느에게 라이터를 받아오지 않은 자신을 다시 한번 책망하던 이안의 눈에, 갑자기 적의 병력이 묘하게 움직이는 게 포착되었다. 군사전략이라면 왕년에 질리도록 겪어본 몸.
“이놈들…. 다 버리고 째는데? 탱크···. 제일 먼저 버려졌고. 장갑차, 전투차량, 보병…. 전부 사석이잖아? 미쳤나? 설마 사령관이라는 놈이 패닉에 빠졌-”
상상을 초월하는 헛발질에 어이가 없어하던 이안은, 잠시 잊었던 사령관의 존재를 떠올렸다.
“….솔 그놈이 사령관이었지. 이미지가 하도 안 어울려서 잊어버렸군. 그 돼지가 미끼를 던진다, 연못을 아주 메워버릴 정도로 떡밥을 던진다면….”
놈의 행동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절대적 보신주의. 평상시에도 가장 안전한 자리. 위험한 작전에서는 가장 도주경로에 가까운 자리. 그리고 지금처럼 패배한 작전에서는….
“사석 반대편만 찾으면 쉽지. 크흐흐흐, 저기 가는군!”
이안의 눈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흙먼지가 날리는 게 보였다. 뭔가 희끗희끗하게 보일 듯 말 듯한 모습.
‘장갑차는 글렀고…. 전투차량은 죄다 저놈 반대편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뭐 타고 쫓아갈 만한 게 없-’
투타타타타타!
파박! 파바바박!
“찾았다! 노획된 장갑차를 몰던 놈이다!”
“아군을 끔찍하게 많이 살해한 놈이야! 잡으면 실적이다!”
‘염병할, 뭐 이렇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
부아아아앙!
그 두 명의 병사가 타고 온 사이드 카가 달린 오토바이를 보는 순간, 이안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잠시 후, 렙터 특유의 검은 도색이 된 오토바이 한 대가 돔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파지지지지지지직!
끼이이이이이이잉-!!!!
“흐흐흐, 왜. 쫄리냐? 네가 제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교수는 돔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제우스의 조종석 앞에 앉아있었다.
[아니, 좋기야 좋은데….]파지지직!
지잉! 지이잉!
[이거 상태가 영…. 멀쩡해 보이지는 않아서 그러지.]엄청난 전력이 모여들고 있는 제우스의 바로 옆에 위치한 조종석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굵직한 스파크와 전기 아크가 넘실거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당연히···. 안 괜찮을걸? 어디 보자. 여기 파란 점들이 엑소슈트고, 몽형이 이안 녀석이 오토바이 타고 빠지는 거 봤다고 했고, 에젤이 벡스 잘 데리고 있다고 했고….”
[‘안’괜찮아? 지금 안 괜찮다고 했어?]“당연하지. 이거 쏘려고 도시 전력 전부 끌어모으고 있던 상태에서 발전소에서 도시로 가는 전력을 끊어버렸잖아. 그 끊긴 시간 동안 모이고, 모인 무지막지한 전력이 선 입력 해뒀던 충전 경로를 통해 한 번에 밀고 올라왔을 거라고. 평상시보다 좀 많이 과충전 상태일 거야.”
[그, 그걸 쏘면….]“따끔하겠지?”
교수는 랄프가 보내온 좌표와 적들의 이동 경로를 최선을 다해 제우스의 조준선에 몰아넣고 있었다. 거의 세계 제일의 끝판왕급 병기라 다른 건 다 자동인데, 그 엄청난 방전량 때문에 레이더가 먹통이라 조준이 수동이었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과학자라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병신같단 말이야. 이렇게 무식한 무기를 만들어놓고 수동으로밖에 조준이 안 된다니.’
치직-
[제우스, 준비됐습니다. RM-01, 카운트 하시죠.] [야! 박ㄱ…. ZEUS-00! 니가 거기에 왜 있어! 이게 얼마나 큰 일인 줄 알아!] [알죠. 지금 내 머리 옆에 태양이 떨어진 것처럼 후끈후끈한데.] [그거 말고! 제우스는 도시에서 제일 중요한 병기라고! 아무리 네가 동맹측 인사라고 해도 손대면 안 될 물건이란 말이다! 옛날로 치면 갑자기 미국 핵 잠수함에 통신이 왔는데, 동맹국 소령 정도 되는 사람이 ‘그쪽 핵 발사할 준비 다 됐는데 카운트다운 좀 해주쇼’ 하는 상황이란 마찬가지란 말이다! 미국 대통령 주머니에 있어야 할 핵 보안키가 타국에 넘어간 상황이라고!]끼이이이이잉-!
[안 하면 내가 합니다? 타이밍 안 맞아서 아군 쪽에 슬쩍 스쳐도 몰라요?] [빌어먹을! 적당히를 모르는 자식! 다섯 까지만 세고 갈겨! 우린 미리 보낸 좌표에 엎드려있을 테니까!] [라져-]치직!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제우스의 조종실, 그 핸들에 손을 올리고 관찰장비에 눈을 붙인 교수의 머릿속에 따가운 잔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차피 이겼다며! 이거 안 쏴도 알아서 이기는 거 아냐?]“이기긴 했는데…. 저쪽 움직임이 좀 그렇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처음 격전지에서 조금 돌아서 다시 맞붙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분명 다 죽을 텐데 저렇게 움직였다는 건, 어떤 명령이 있었다는 거야. 목숨을 걸고 옥쇄하라, 뭐 이런 종류의. 그리고 렙터의 병사들은 세뇌가 잘 돼 있어서 목숨 걸고 죽이라고 하면 정말 뒤도 안 보고 달려드는 녀석들이 많단 말이지.”
승리는 확정됐는데, 승리와는 별개로 제법 큰 피해가 예정된 상황.
“전쟁에서 피해, 라고 하면 대부분 숫자로만 보이지만, 결국 그거 하나하나가 사람 목숨이라고. 너나 나 같은. 죽으면 묻어주고, 매일 기도하러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교수는 발사 버튼으로 오른손을 옮기다, 손을 바꿔 왼손을 올렸다.
“이거 재질이 뭐냐.”
[어…. 나도 모르지. 근력은 네 몸의 구조에 경도는 내 유전자의 모체, 에데오르나를 참고했으니까. 변종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식했는지까지는 나도 모르거든.]“음, 그래?”
까각, 까가각!
슬쩍 손끝을 비비면 들리는 딱딱한 마찰음. 금속 같은 느낌은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갑자기 귓가에 어머니의 환청이 들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라고 소리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냐?”
[아, 아냐! 진짜 아냐! 딱 봐도 자살행위잖아! 진짜 네가 떠올린 거라고!]“그으래?”
까드득.
살짝 고민했다. 살아남는 것. 생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두 분을 위해, 그가 해드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보은.
교수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 보았다.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변종과 다를 바 없는 팔. 머릿속에 잔소리꾼. 형제 같은 친구들. 47구역 대화방 사람들, 감찰부, 돔, 살아남아 만난 수많은 사람들.
피식.
“그래, 살아야지. 뭔 수를 써서라도.”
교수의 왼팔이, 발사 버튼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하이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안,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요 어머니, 살아보니까 사람이 그냥 사는 게 다가 아니더라고. 잘 살아야지, ‘잘’!”
그리고, 힘차게 발사 버튼을 내리찍었다.
팡.
팡.
파팡.
도시 중앙, 제우스가 있는 탑을 기점으로 정전의 어둠에 물들어가는 도시.
그 모든 것을 끌어모은 듯 밝게 타오르는 전류의 태양이 흩어지며-
피싯-
가느다란 빛으로 된 실선이 지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없는 작은 빛.
찌직-
찌지지직-
침묵을 깨듯, 그 실선을 따라 푸른 전류가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전류는 점차 굵어지고, 사나워지며 실체를 갖추기 시작했고,
콰지지지지지지직-!!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내 거대한 전류의 토네이도가 되어 지상을 휩쓸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