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11
Chapter.7 가면 무도회(26)
***
“그러니까…. 살아 있는 거라고?”
“그래!”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게 ‘박교수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박교수’가 아니라, 진짜 박교수?”
꿀럭- 꿀럭-
“그렇다고 지금 여덟 번째 말하고 있다!”
“그럼 그 팔은 뭔데? 3형 변종은 멀쩡한 시체에만 생기는 거 아냐?”
“그건 그런데, 아까 전부터 말했지만 나는 좀 경우가 다르다고-”
“그럼 시체 맞네!”
“아오 씨바! 돌대가리 새끼가 진짜!”
“뭐 임마! 그럼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몸이 3형 변종의 팔로 변했다는 게!”
텅! 텅그렁!
교수는 몇 분째 제자리 걸음 중인 대화에 신경질적으로 국방색 플라스틱 통을 던져버렸다. 장갑차 후면 짐칸 같은 것에 체결되어있던 기름통. 이안과 교수는 장갑차에 남아있던 연료를 모조리 빼낸 뒤, 주변을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기름 범벅이 되지 않은 사람 하나 없게 흩뿌리고 있었다.
“사, 사려저….. 사려주세어….”
이안은 발목을 붙잡는 손을 걷어 차버렸다. 막무가내로 솔의 장갑차를 쫓아왔는데 한바탕 피바다가 되어있는 상황.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나중에 병원 한번 가서 진찰받아보자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나저나 넌 여기까진 왜 왔냐? 저거, 이빨 다 박살 난 놈 낮에 그놈 맞지? 잭인가 샘인가 하던 집행부 대리인.”
촤아악-
“어, 맞아. 왜 왔긴. 공적인 일 다 끝냈으니까, 사적인 일 좀 하러 왔지. 패배한 집행부 애들이 올 만한 장소가 여기밖에 더 있겠냐. 다른 후보지도 몇 개 있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계획대로 정전이 됐으면 다른 시설들, 문 개폐장치라든지 하는 게 전부 맛이 갔을 테니 집행부 애들이 미리 열어놓거나, 뭐 조작을 해놓을 수 있는 자기들 건물에 비상시에 사용할 장비를 준비해뒀을 것 같더라고. 얘들이 우리 엄마 죽여서 잡으러 왔어. 넌 왜 왔냐?”
“아, 이놈이 우리 마누라랑 딸을 죽였어.”
“저런.”
“저런.”
무거운 내용과 달리 잔잔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이안은 푸흐흐, 하고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복수는 최대한 건조하게. 맞지?”
“그렇지 뭐. 어디 기둥 같은데 매달아 놓고 살점을 한점씩 베어내서 입에 처넣어줄까 생각도 했는데, 그럼 내 머리에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더라고. 어머니 유언이 살아남으라는 내용이었는데, 자식이 그거 복수한다고 설치다 미쳐 죽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냐. 좀 많이 아쉽긴 한데, 황무지 규칙에 따라 정신 건강에 좋은 방향으로 가자고.”
“짜식, 기특하게 의젓한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난 얘 말고도 죽일 놈이 산더미같이 많아서 일일이 미쳐 날뛰었다간 번아웃 할까 봐 자제하는 건데.”
“거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으면서 늙은 척은 다해요. 기껏해야 11살 밖에 차이 안 나잖아?”
“11살이면 황무지 평균 수명의 1/3에 가까운 햇수다 짜식아.
텅, 텅그렁.
사각형 기름통으로 4통 가량 뿌렸으니 모자랄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피와 기름투성이가 되어 버르적 거리는 원수들 사이에서 잠깐 숨을 돌리기로 했다. 장갑차 상판은 기름도 덜 묻어있고 주변보다 높아 집행부와 살아남은 렙터들을 구경하기 썩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울 엄마 제사도 못 지냈네. 어머니 돌아가시곤 아버지 쪽도 못했고.”
“제사? 이놈 봐라. 말로는 세상 둘도 없을 효자처럼 굴더니?”
“그런 거 아냐. 작년까지만 해도 부모님 생각만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권총이 어딨나 두리번거리곤 했거든. 얼마 전에서야 좀 담담하게 볼 수 있게 됐을 뿐이지.”
“황무지 사람들이 다 그렇다지만, 네 팔자도 참 기구하다, 박교수.”
“너만 하겠냐. 넌 또 뭐 그리 죽일 놈이 많아? 몇 명이나 되는데?”
“몇 명이라….”
어디서 났는지 멋들어진 시가를 꺼낸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장갑차 안으로 들어가 꿈지럭 거리더니 불을 붙여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차량용 시거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잘 모르겠는데? 렙터 구성원이 몇 명인지 세어본 적이 없어서.”
“렙터 전원이면…. 이야, 너 죽으면 지옥에서 표창장 주겠다?”
“크흐흐흐! 없는 것보단 낫겠지!”
“으으으으…. 말도,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이 내가 이렇게….”
멍하니 흘러가는 연기를 보고 있는데 밑에서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얼굴이다. 루윌 바르토스, 교수의 오래된 전우가 넘겨준 그 파일에 분명하게 명시되어있던 얼굴이었으니까. 이름이 분명….
“테오? 집행부장 테오 뤼스커 맞나?”
찰박!
장갑차에서 뛰어내린 교수는 차고 밖을 향해 기어나가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어디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들어나 볼 심사였다.
지이익- 지이익-
놈은 이 차고 밖으로만 나가면 살 수 있을 것처럼, 필사적으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그 앞에 쭈그려 앉은 교수가 길을 막아서기 전까지는.
“살고 싶어?”
교수는 진심으로 물었다.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애쓰는 이유는 뭘까.
“허억, 허억! 박교수…. 그래, 네놈이로군. 네놈이 모두 망쳤어. 그 알량한 복수심, 겨우 늙은 어미의 생목숨이 아까웠다는 하찮은 이유로, 이 모든 대업을 망치다니!”
카각!
테오가 사력을 다해 휘두른 칼날은 허무하게 교수의 왼손에 붙잡혔다. 정말 죽이겠다고 휘둘렀다기보단, 하나의 의사 표현처럼 보이는 공격이었다.
“대업이라…. 그런 말 하기 좀 창피하지 않아? 너네 선거 밀려서 살고 싶어서 배신한 거 아니야. 돔도 팔아먹고, 양심도 팔아먹고.”
“그 선거라는 게 잘못됐다는 걸 왜 모르나!”
테오는 갑피 사이에 걸린 칼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켜, 힘겹게 교수의 손에 매달렸다.
“너, 과거에 집행부에서 복무했다면 기억하겠지. 집행부도 원래 엑소슈트의 운용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을!”
“그렇지. 나도 엑소슈트 몇 번 타봤으니까.”
“그래, 그게 정상이 아닌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감찰부는 돔 내부의 위험분자 색출 및 제거, 집행부는 외부 위험 요소 담당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어떻게 됐지? 엑소슈트 사용 권한은 전부 감찰부에 넘어갔고! 대부분의 실권을 잃은 집행부는 궁여지책으로 시가전 전술이나 훈련하는 보조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어!”
남자는 피를 토하듯, 아니 정말로 피를 토하며 교수에게 외쳤다.
“그 잘난 민주주의! 돔은 하등 쓸모없는 과거의 잔재를 끌어안는 바람에 정치적 역량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쓰레기 같은 집단이 되고 말았다! 감찰총장의 독사 같은 혀가 의회를 휘감을 때마다 엑소슈트, 최신 전술무기 시험권, 임무 영역, 인원 제한까지! 집행부의 실권이 하나둘 감찰부로 넘어가기 시작했지! 무능한 집행총장은 그걸 막지 못했어! 아니, 막을 생각도 없었다! 놈들의 뒷돈을 받아 시 외곽에 개인 돔을 짓고 주지육림에 빠진 지 오래였으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응? 이상하지 않냔 말이다!”
교수의 왼손을 잡고 어떻게든 부러진 다리로 일어나려던 남자는 손에 묻은 기름에 미끄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피와 기름으로 범벅이 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상이 망했으니 도덕성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냔 말이다! 돔의 사상은 그저 주민들을 인형처럼 만들어 윗대가리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배신했다! 이 돔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지막 고혈까지 빨려 쓰러지기 전에! 진정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는, 멸망 이후의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한 렙터를 받아들여-”
“이야아, 이것 참 새롭네.”
“그러게. 나 있을 때는 이런 더러운 수작 안 부렸는데. 렙터도 똥줄이 탄 모양이구만.”
이렇게 죽기 직전이 되어서 한다는 소리가 사상논쟁이라니. 이거 완전 그거 아냐?
짝짝짝.
교수는 저렇게 다친 상태에서도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테오의 말을 끊고 박수를 쳐주었다. 화가 난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사상교화라…. 구시대 북한놈들도 아니고.”
“내가 렙터에 있을 때도 프로파간다를 이용한 전쟁을 주장하는 녀석이 꽤 있었지. 붉은 군대니, 검은 군대니 하면서. 깜찍한 병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된 걸 보면 영 병신같은 생각도 아니었나 보군.”
“나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번 들어봤는데, 들을 가치도 없는 궤변이였어. 귀만 배렸네. 어으, 더러워. 나가서 빗물에 씻어버려야지.”
“궤변이 아니다! 우린 어디까지나 민중을 위해-”
“민중이라. 하하, 이것 참. 허구한 날 신을 욕했는데, 여기 계셨네. 살아남아야 할 ‘민중’을 선별하고, 그렇지 못한 ‘찌꺼기’들을 선별해 희생시키고. 네가 생각해도 네 말이 좀 역겹지 않냐?”
“….대의를 위해서는, 더 큰 선을 위해서는 언제나 작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세상이 변했으니, 도덕의 기준도 변해야 한다고 누차-”
“너희들이 굴리는 언더돔의 갱들. 그놈들이 뿌리는 마약에 중독돼서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 실링 작업장의 통조림 빚쟁이들까지.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언더돔은 그냥 못사는 동네 수준이었어. 이번에 가보니까 무슨 슬럼가 아편굴이 되어있던데, 내가 알기로는 언더돔의 주민이 어퍼돔에 사는 사람들보다 20%가량 더 많거든? 정~말 너그럽게 기준을 잡아줘도, 과반 이상의 사람들의 희생을 ‘작은’ 희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무리가 있는 게 아닐까?”
“수, 숫자에 얽매여선 안 된다! 비록 우리가 한 일들이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먼 미래! 이 황무지의 먼지가 사라진 먼 미래를 바라보면 큰 불을 막기 위한 맞불과 같은- 으으으읍!”
교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헛소리를 지껄이는 테오의 입에 왼팔의 찢어진 군복을 뜯어 쑤셔 넣었다.
“슬프구먼. 우리 엄마가, 루윌이 저런 하찮은 놈들의 손에 죽었다니.”
몇 년을 기다려온 복수였는데, 시원하다기보단 헛헛한 느낌이었다.
“복수라는 게 그런 거지. 그러니까 다들 최대한 담담하게, 그냥 할 일 한다 생각하면서 처리하라고 충고하는 거고.”
질질질질-
끄아악! 꿰에에엑!
그때, 차고 안쪽에서 이안이 교수의 말을 받으며 뭔가 시끄러운 커다란 것을 끌고 나오는 게 보였다.
“담담? 혹시 언행일치라고 아냐?”
“그럼. 난 지극히 냉정해. 냉정하게 이녀석을 죽이려고 하는 거라고.”
끌려 나온 남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솔 아마르였다.
“으, 으아아악!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애쉬필드님! 예, 옛정을 생각해서! 제게 손수 사격을 가르쳐 주셨을 때!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아아, 기억나는군. 너는 살이 많아서 반동이 안정적으로 잡힌다고 했었나.”
“예! 예에! 제가 그 말을 듣고 사격에 매달리게 됐지요! 그 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하셨습니까! 같은 팩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스웜 알파의 친위대로서! 제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애쉬필드님을 보필하며 언제나-”
끼이익-
터엉!
“어이쿠!”
“그래, 그래.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네 녀석과도 제법 나눈 기억이 있지.”
“그, 그럼….!”
촤아악!
장갑차 안에서 끌고 나와 흠씬 두들겨 팬 솔을 고장 난 장갑차 위로 끌고 온 이안은, 해치를 열고 놈을 안에 구겨 넣은 다음 남아있던 기름을 듬뿍 뿌렸다.
“도로 넣을 거면 왜 꺼냈냐.”
“그냥 죽일 생각이었는데, 옛날 생각하다 보니까 문득 떠오른 게 있었거든.”
“뭔데?”
옛날 생각을 떠올리듯 고개를 들고 크흐흐, 하고 웃은 이안은, 다리가 부러진 솔이 갇힌 장갑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몰리는 돼지를 요리할 때 꼭 오븐에 넣어서 구웠거든.”
“아, 안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꺼, 꺼내줘. 꺼내줘! 제발!”
저 발작적인 반응을 보니 안에서도 이안이 하는 말이 다 들렸나 보다. 일부러 들리게 한 것일수도 있고.
“아이고, 들렸나 보네? 스트레스 받은 고기는 육질이 별로라고 하던데.”
찰박, 찰박, 저벅, 저벅.
쿵쿵거리며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장갑차를 지나,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는 테오가 있는 곳을 지나 차고 입구에 도착하니 안쪽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다.
“야.”
“왜.”
“담배 한 대 줘봐라.”
“피우게?”
“나 말고.”
교수는 엄지손가락으로 장갑차 울리는 소리와 신음이 가득한 차고, 그리고 기름이 가득한 차고 밖으로 필사적으로 기어 나오는 중인 테오를 가리켰다.
이안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저놈들? 쓰레기들 가는 길에 향은 뭐하러 피워줘?”
“어디 길 잃지 말고 잘 가야지. 똑바로 지옥에 가줬으면 하는 내 따듯한 마음이다.”
“제기랄. 이거 렙터산 최고급 시간데….”
투덜거리면서도 주저 없이 불을 붙여 건네주는 이안.
“우으읍! 끄으으읍!”
어느새 차고의 입구까지 다가온 테오. 불 붙은 시가와 기름 범벅이 된 자신의 몸을 번갈아본 그는, 발광하듯 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톱이 다 떨어진 그의 손가락에서 피가 흩날렸다.
“마중 나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소이다, 테오 뤼스커씨. 내세에는 좀 착하게 사시고, 이거 꽤 고급품이라니까.”
틱-
“끄으으으으으으읍!!”
“다른 애들이랑 사이좋게 나눠 먹어.”
절규하는 테오를 향해 선명하게 렙터의 로고가 박힌 시가가 날아들었다.
테오의 눈동자가 그것을 좇았다.
그의 어깨를 지나, 팔에 부딪혀 떨어지는 시가와, 그 충격으로 떨어지는 빨간 불씨.
화르륵!
“끄으으으읍! 끄아아아아압!”
순식간에 온 몸에 옮겨붙은 불은 그를 태운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가 기어온 자국을 따라 안으로 내달렸다.
푸화아악!
“으아아아악!”
“아아악! 부, 불이! 불이이이!!!”
쿵 쿵 쿵 쿵!
“뜨거워! 뜨거워어어어!!! 제발 꺼내줘! 누가! 제발! 아아아악!”
사람들이 산채로 불타며 울부짖는 소리와, 그 불꽃 속에 점점 달궈져가는 장갑차안에서 고통받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지옥 같은 광경.
‘복수는 허무하다고 하더니…. 마냥 그런 것만도 아니네 뭐.’
좀 허- 한 그런 기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아파라 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후련하긴 했다.
멀찍이 떨어져 비를 맞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교수는, 그 불타오르는 차고를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한국에 인신 공양 풍습도 있었나?”
“그건 아닌데….. 뭐, 커다란 향도 피웠겠다, 사실 큰일이 하나 끝났으니 보고한다 하는 생각으로 하는 거야.”
“크흐흐, 이상한 녀석.”
교수는 바닥에서 일어난 뒤, 차고의 불이 번져 새까만 연기를 뿜어내는 집행부 건물과 빗방울에 드러난 푸르스름한 돔의 실드, 그리고 아직도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계곡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끝났네.”
“그래. 산책 한번 잘못 나갔다가 시작된 일이, 이제야 끝난 거다.”
철컹, 철컹, 철컹!
저 뒤쪽에서 갑자기 피어오른 불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감찰부의 엑소슈트를 보며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안. 너 지금 상태 괜찮은 편이지?”
“허벅지에 구멍 난 거 휘핑크림으로 막고, 포격에 튀어 오른 녹은 모래랑 유릿조각이 얼굴에 잔뜩 박히고 포탄 파편도 대충 쑤시는 것만 세어봐도 여섯, 일곱 개는 족히….”
“그러니까 유독 가스를 맨몸으로 돌파하고 제우스 바로 옆에서 감전된 데다 팔이 이 꼴이 난 나보다는 괜찮다는 말이네?”
“어…. 음….”
털썩!
말을 잇지 못하는 이안을 보며, 교수는 그대로 땅에 누워버렸다.
“네가 알아서 설명 좀 해줘라.”
“뭐? 야! 전반적인 상황은 네가 대부분 알고 있잖아! 보나 마나 후처리 한다고 행정부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들게 뻔한데!”
“꼬우면 너도 기절하던가.”
교수는 흐릿해지는 의식속에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이안과 엑소슈트의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부드러운 벨벳처럼 그의 달아오른 몸 위로 내려앉았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교수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있었다.
똑. 똑.
링거에 연결된 수액과 영양제, 그 외 여러 가지 약물이 혼합된 액체가 천천히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고,
삑- 삑-
한눈에 봐도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기계에서 나온 전선이 그의 몸에 빼곡하게 붙어 있었으며 심각한 표정의 의사들이 차트와 실시간으로 출력되는 그래프를 비교하며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거의 병원의 첨단 설비란 설비는 모두 끌어온 것처럼 커다란 특실을 가득 채운 설비에 그 사이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자리를 채운 의사들.
정말 교수의 상태가 이 정도로 각별한 케어를 받을 정도로 심각했느냐, 하면.
….빠직!
“아오 씨발! 이제 그만 좀 합시다! 예!”
그건 또 아니었다.
감찰부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온 이후, 약 이틀만에 눈을 뜬 교수가 의사로부터 처음 들었던 말은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괜찮습니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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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의사양반. 교수 상태가…. 좀 어떻수?”
“음….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감전에 의한 내부 화상이겠지요. 다행히 전류가 손을 타고 흘러들어와 발끝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니, 저희 돔의 회복시설에 계시면 금방 떨치고 일어나실 겁니다. 왼손의 특이한 재질이 도움이 됐는지는 확인중에 있습니다.”
“으으으음…. 여기는….”
“그것 말고는?”
“그것 말고는…. 약간의 중독 증세와 피부화상, 폐 내부의 화학 화상과 찰과상, 과로 등등이 있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비정상적인 회복속도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 아, 아닙니다.”
“이, 이안…. 물…. 물 좀….”
“아니, 계속해봐. 나도 그거 궁금했는데, 저 왼팔에 달린 저거, 도대체 뭐요?”
“저희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라 확실치는 않지만…. 일단 3형 변종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3형은 워낙 형태도 다양하고, 특징도 가지각색이니까요.”
“3형? 3형은 별개의 의지를 가진 변종 아닌가?”
“모, 목 말라…. 누가 물 좀….”
“사실 박교수님이 의식이 없는 동안 ‘저것’이 의사소통을 시도했습니다. 펜과 종이로 필담을 나누고, 심심하다고 해서 저희 연구- 윽, 의!의사와 함께 체스도 하곤 했지요. 확실하게 별개의 의사를 가지고 있으니 3형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하이드…. 역시 그녀석인가….”
“하이드?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그, 치료를 위해 필요할지도 모르니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적어주시면-”
와장창!
“물! 물좀 달라고, 쿨럭! 개놈들아….!”
“시, 실험체가 날뛴다! 시큐리티! 시큐리티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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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기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 돔이 새로운 기술 같은 것에 미쳐있는 건 진즉에 알았으니까.
“화, 환자분! 진정하시고….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으니 안정을….!”
“안 끝나긴 뭐가 안 끝나! 치료 끝나고 이제 집에서 쉬면 다 낫는다고 하는 거 다 들었어!”
“다….들었어?”
수군수군!
술렁술렁!
“환자 옆에서 상태에 대해 얘기하신 분 없지요?”
“틀림없소. 내가 말했잖아요! 팔 뿐만 아니라 본체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거라니까! 놀라운 청력으로 우리가 하는 얘기를 엿들은 게 분명해요!”
“혁신, 혁신이야! 이 황무지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기술! 황무지에 가장 적응한 형태의 생물인 3형 변종과 인간의 하이브리드를 이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무슨 수가 없겠습니까? 3년…. 아니 5년만 이곳에 그를 잡아둘 방법이?”
“기록을 보셨잖습니까. 그 괴물 같은 전투력을 무슨 수로….”
“쉬잇! 박교수님이 듣습니다!”
‘다 들었다 이놈들아.’
목소리를 죽인다고 죽였는데, 수군거리는 사람이 한두명이여야지. 이 넓은 특실을 꽉꽉 채운 의사인지 연구원들인지가 다같이 떠들어대는데 그게 안 들리겠냐.
교수가 자신의 몸상태를 알게 된 것은 별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입원 나흘째 되던 날, 밤에 몰래 찾아온 간호사 한 명이 몰래 귀띔해준 것이다. 팬이라면서, 혹시 BDSM에 의료 종사자도 가입이 가능하냐면서.
‘밖에서 뭔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여기 틀어박혀 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아직까진 별다른 수작 없이 그냥 조용히 관찰하는 정도이기도 했고, 왼팔에 대해서는 그도 궁금했기에 꾹 참고 치료-실험에 동참하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투둑, 투두둑!
“바, 박교수님!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시면….”
“아 몰라요! 좀이 쑤셔서 더 못 있겠네. 지금까지 있었던 연구 데이터 전부 정리해서 넘겨주기나 하시고. 정 필요하면 나중에 BDSM에 정식으로 요청하시던가.”
우르르르!
“저, 정말 요청하면 와주시는 겁니까!”
“그럼 저희 생명 공학부로!”
“아니! 무슨 그런 망발을! 하이드라는 생물이 GG에서 탄생했다고 하잖습니까! 당연히 저희 데이터 의식 탐구부서로 모셔야지요!”
“정신 나간 소리들 하지 마시오! 새로운 형태의 3형 변종이니, 당연히 우리 신문명 생태 연구부로!”
“이이이익! 자네 메이저급 논문 몇 개 있나! 나는 바이오 지에서 매달 취재를 나올 만큼…”
“하! 바이오 그깟 잡지에 좀 나왔다고 유세 떨기는! 내가 하버드 생명공학부 교수로 몇 년째 있었는 줄 알고!”
“노벨상 밑으로는 모두 닥치시오!”
와아아악!
우당탕탕!
“어…. 알아서들 정리해서 메시지 보내쇼!”
교수는 어느새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연구원들을 내버려 두고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중환자실에 가서 벡스부터 만나볼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