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12
Chapter.7 가면 무도회(27)
***
아작!
“이봐, 죠.”
“음? 뭐 필요한 거 있냐?”
“아니···. 병문안을 온 건 좋은데, 보통 병문안을 오면 과일 같은걸 사 오지 않아?”
한편, 그렇게 엄청난 상처를 입고도 일주일 만에 회복을 마친 벡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사들 사이에서 병문안이라며 이안이 들고온 엄청난 양의 오이를 베어먹고 있었다.
“왜? 오이 좋잖아? 몸에도 좋고. 너 수분 많이 섭취해야 된다고 해서 특별히 비싼 돈 주고 사 온 건데. 사실 돔의 과수원이 꽤 크게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라고. 전력 끌어올릴 때 과부하가 나서 온도 조절 장치가 70도인가, 80도인가 까자 올라갔다더라. 키우던 거랑 저장해놓은 과일이 거의 다 못 쓰게 되고 오이만 살아남았데. 커뮤니티 보니까 덕분에 개인 생존자들이 키우는 과일값이 올랐다고 되게 좋아하던데.”
“그래서 오이였구나. 수분이라….”
벡스는 이안의 말에 큼지막한 흉터가 생긴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 보았다. 거의 어른 주먹 두 개만큼 옆구리가 날아간 상처. 사실 그때는 이렇게 큰 상처라는 것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지금 보니 살아있는 게 이해가 안 될 정도의 부상이었다. 아마 그의 주변을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첨단 의료 장비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사람들이 돔, 돔 거리는 걸 듣긴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나도 어저께, 네 옆에서 자다가 네가 슥- 일어나길래, 잠결에 네 영혼이 튀어나온 줄 알고 너스콜 미친 듯이 눌렀잖아. 그러다가 버튼 박살 내서 혼나고.”
“뭔가 대단한 걸 많이 해준 것 같긴 해. 이상한 시험관 안에 든 약을 쓰려는데, 갑자기 뛰쳐 들어온 의사 한 명이 ‘그것만은! 앞으로 배양의 토대가 될 중요한 아이들인데! 돌려줘! 돌려달란 말이야-!’ 같은 소리를 하다가 다른 의사들한테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
“아, 그거. 주사를 놓던 그 늙은 의사도 손을 덜덜 떨더니, 눈을 질끈 감고 투여했지. 그때부터 차도가 확 좋아지긴 했어.”
“너무 잘해주니까 좀 불안하긴 한데….”
“쓰으읍- 환자는 그저 회복하는 것만 생각해라. 잘해주면 좋은 거지 뭐. 우리가 돈이 없냐, 백이 없냐. 도시를 통째로 구한 거나 마찬가진데,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자고. 한 개 더 먹을래?”
드르륵- 탁!
벡스가 ‘나쁠 것 없지.’ 하며 손을 뻗던 순간, 중환자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오, 교수 아냐? 저쪽도 너처럼 빨리 회복했나 본데?”
“교….수?”
이안의 말에, 벡스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아무리 봐도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미라처럼 온몸에 감아놓은 붕대.
뭔가 불안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내뱉으며 구부정한 상태로 주변을 살피는 움직임.
그리고, 절대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검고 커다란 왼쪽 팔과 손.
툭.
벡스의 손에 들려있던 오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며칠 전 중앙구역에서 있었던 교전에서 그 슬픈 괴물의 정체를 봤으니까. 죽어서도 움직이는, 원귀라 불리는 괴물을.
“여, 벡스! 몸은 좀 어떠냐? 많이 다쳤다고 하더니 벌써 일어나있었네?”
왈칵!
생소한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결국 벡스는,
“으어어어어엉! 주, 죽었어! 햅번이! 죽어서 다시 나를! 괴물이 돼서! 우아아아아아!!!!”
병상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링거줄과 온몸에 붙어 있는 전극 같은 걸 뜯고 날뛰는 벡스를 진정시키는 데는 30분이 넘게 걸렸다.
***
그렇게 나도 죽어버리겠다고 날뛰는 벡스를 말리기 위해 교수와 이안, 그리고 주변에 있던 의사들이 전부 달라붙어 실랑이를 벌인 결과,
“햅번. 그럼…. 이게 이제 네 손이야?”
“그렇다니까. 나름 쓸모가 있긴 한데, 아무래도 원래 손보다는 좀 불편해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중이야.”
아작!
세 친구는 난장판이 된 병실에 앉아 나란히 오이를 베어먹는 중이었으며,
“오오오, 이 고운 때깔 좀 보게! 흑요석처럼 빛이 나는군!”
“의장님, 일단 공명 테스트부터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훌륭한 생각이야! 당장 가서 3번 연구실에서 장비 좀 들여오고, 거기! 영상 찍는 친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에 담아야 하네! 인류의 새 역사를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연구야! 다른 돔으로 전송할 영상이니 허투루 해서는 아니 되네!”
결국 침대 끝에 걸터앉은 교수의 왼손에는 연구원들이 따개비마냥 들러붙어 버렸다.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박교수님! 이 왼팔의 효용도, 원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도! 저희 생명 공학 연구부서에서 기필코 찾아드릴 테니! 저희 쪽에 협조하기로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예….”
사실 어떤 식으로든 돔의 첨단 과학기술로 검사를 한번 해볼 생각이긴 했었다. 일단 좀 쉬고, 사태가 진정된 뒤에 좀 전에 위에서 떠들어대던 그 다양한 연구부서 중 가장 큰 거래를 제안하는 쪽에 맡겨보려고 했던 거지.
하지만 의사들을 우르르 몰고 내려와 화이트보드와 홀로그램 이미지, 구시대 잡지까지 들고 와서 무슨 의학 세미나 마냥 벡스의 치료 과정과 거기에 들어간 수많은 첨단 자원을 설명하는데 도저히 그냥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수술은 대체할 부품이 없어 가동 한계가 580시간 정도밖에 안 남은 구시대 정밀 수술 로봇으로 했고, 감염을 막기 위해 돔 전체에 몇 개 남지 않은 TI643 만능 항생제를 6회, 3000mg 투여, 배양시설이 없어 냉동상태로 보관해놓은 구시대 완성형 줄기세포를 바닥까지 긁어서 모조리 쏟아부었다고….’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그들이 준비한 자료와 영상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었다. 정말, 이 ‘생명 공학 연구부’인가 하는 곳의 의사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것이다.
‘벡스가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들어왔으니, 이미 내가 회복한 뒤에 협조를 요청할 생각으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니 그런 게 확실하지만….’
어쨌든 받은 것은 받은 것. 췌공장 연결수술에 거의 폭발해버린 간을 짜 맞췄다는 벡스가 일주일 만에 회복해서 저렇게 오이나 씹어먹고 있는 것은 이 사람들 덕분이다. 받은 게 있으면 갚아야지.
결국 일주일에 한번, 돔의 생명공학부에 들러 연구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교수 네가 있던 병실은 어디였냐? 너도 괜찮나 보려고 몇 번 찾아갔었는데, 아무리 봐도 못 찾겠던데.”
“어이구, 말도 마라. 나도 병실에서 나와서 여기까지 찾아오는 동안 말도 안 되게 헤맸으니까. 천장에 레일 타고 돌아다니는 이상한 박스나 병실이 늘어선 구조 같은 걸 보면 일단 기본 베이스는 대학병원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몇몇 병실의 벽을 터서 연구시설을 쑤셔 박은 것 같더라고. 연구동이 있으니 보안 설비도 붙여야 하지, 또 어떤 데는 진공 차단실 같은 것도 있어야 하지, 막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이다 보니까 길이 아주 개판이 되어버린 거야.”
교수는 병실에서 탈출한 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지치지도 않고 쫓아오는 승냥이같은 연구원들을 피해 숨었더니, 등 뒤의 벽이 열리며 퀭한 연구원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다, 당신만 우리 쪽으로 모시면 내년, 내후년 실적평가까지는 문제없어어어어!!’ 하고 달려들지를 않나. 멀쩡한 복도에 방화셔터가 내려와 길을 막더니 ‘제발! 저희 부서는 이번에 연구비 못 타면 끝입니다!’ 하면서 무작정 몸을 던져 매달리지를 않나. 무슨 좀비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어쩐지 길이 아주 병신같은 게, 설계한 놈이 건물로 예술 하나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만. 그런 미로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냐?”
“아는 간호사가 도와줬어. 30분 동안 헤맨 길을 3분 만에 찾아주더라.”
“간호사라…. 이거, 역시 유명인은 뭔가 다른가 봐? 너 같은 숙맥한테 여자가 다 붙고.”
“음? 유명인? 그게 무슨 소리여.”
“크흐흐흐, 이거,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만? 그럼…. 입 아프게 떠들어대는 것보다.”
촤아악!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내 물음에 히죽거리던 이안은 창문으로 다가가더니, 두꺼운 커튼을 확 걷어버렸다.
화아아악!
“어으윽,”
햇빛. 햇빛이다. 모래 먼지에 가린 흐리멍텅한 햇빛이 아니라, 맑고 쨍쨍한 햇빛.
여기까지만 해도 생소한데, 그 아래에는 더 생소한 것이 우글거렸다.
[시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라!] [영웅 박교수 및 BDSM 일동의 상태를 공개해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내 생전에 저딴 문구 앞에 내 이름이 붙을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진짜 코딱지만큼 떠올린 적도 없어. 저건 망상으로도 떠올리기 힘든 수준의 그런 거라고.
“저, 저게…. 대체?”
“워,워. 창문에 붙지 마.”
“아니, 내가 병실에 있는 동안 뭔 일이….”
차작! 촤자자자작!
“박교수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어!”
“특종이다!”
“어흐흐흑! 교수님! 저 붕대좀 봐!”
“살아계셨어! 살아계셨다고!”
“와아아아아!!!”
얼떨떨한 상태에서 창문에 얼굴을 슥- 들이밀자마자 쏟아지는 셔터 세례와 환호성 소리.
“쯧. 붙지 말라니까.”
“저거…. 나한테 하는 거 맞지? 이 병원에 따로 유명한 박씨성의 교수님이 있는 게 아니라?”
“그래 임마.”
이안은 히죽거리며 자연스럽게 시가를 꺼내 물다가, 교수의 팔에 달라붙은 의사의 사나운 눈초리에 다시 집어넣고는 말했다.
“너 유명해졌다. 그냥 유명한 게 아니라, 황무지 전역에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돔에서 네 이름을 아주 대차게 팔았거든.”
“내 이름을…. 팔아?”
“팔다니요. 표현이 좀 그렇군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이번 전쟁에 있어 돔을 구하는데 가장 헌신적으로 움직인 집단이 누군지, 그 결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의 부상을 입고 쓰러진 이가 누군지 시민에게 알린 것 뿐입니다.”
멍하니 나 혼자 중얼거린 말을 누군가가 받았다.
뒤를 돌아보자, 감찰부 특유의 단정한 양복을 입은 사람들과 어린 소녀 한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앞에 서 있던 키가 큰 올백머리 남자가 교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BDSM의 리더, 박교수님. 저는 미력하나마 감찰부의 총장을 맡은 알렉산더 영입니다.”
‘알렌산더 영…. 감찰총장!’
교수는 총장의 뒤에서 슬쩍 손을 흔드는 에젤과 랄프를 보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총장 정도면 아무리 내가 배짱이 좋아도 막 들이받을 짬이 아니거든.
“BDSM의 리더, 박교수입니다. 제 이름을 알렸다고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흐음.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곳 행정부 건물에 꽤 괜찮은 까페가 있는데, 바쁜 일이 없으시다면….”
그 말에 교수의 왼팔에 달려있던 연구원들이 으르렁거렸지만, 총장이 인상을 한번 쓰자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시무룩해져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군요. 이곳은 너무 노출되어 있기도 하고, 듣는 귀도 좀 과하게 많으니.”
교수는 총장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이안에게 눈빛을 보냈다. 무슨 생각인지 다 안다는 듯 말없이 벡스의 병상 옆에 걸터앉는 이안.
교수는 옆에 있던 가위를 집어 들어 전신을 감싼 붕대를 다 잘라낸 다음, 자유로워진 몸을 구석구석 스트레칭하며 풀어보았다.
‘음, 다 나았네. 이 정도면 일이 틀어져도 도망가는 것 정도는 문제없겠어.’
교수는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붕대를 허겁지겁 주워 비닐 팩에 담는 연구원들을 뒤로하고 감찰총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냥 뒤에 두 사람한테 들으면 안 됩니까? 아는 얼굴이라 좀 편한데. 내가 환자라, 스트레스 받으면 몸에 안 좋아서.”
“하하하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군요. 두 사람 다 유능한 대원이고, 승진이 예약되어있긴 하지만-”
“스,승진! 진짭니까 총자-켁!”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부하들보다는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는 게 수준에 맞지 않을까, 하여.”
수준이라. 나를 총장인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겠다는 뜻인데. 이거 영광이구먼. 저렇게까지 대우해주겠다는데 더이상 뻗대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가시죠, 그럼.”
교수는 붕대를 잘라낸 가위를 슬쩍 주머니에 챙겨 넣고, 총장의 뒤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섰다.
***
“비싼 거 시켜도 됩니까?”
“하하하. 참아주시죠. 이번 전쟁으로 돔의 재정 상황이 말이 아니니.”
“실질적 돔의 통수권자가 쪼잔하게.”
“더 큰 책임을 지게 됐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이거 너무 훌륭하신 분이라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하하, 과찬의 말씀을. 저희 돔을 구해주신 분이 너무 겸손하시군요.”
랄프는, 이 자리에서 당장 떠나고 싶었다.
“주, 주문은….”
“잠시 기다려주시오. 저 두 사람이 알아서 결정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분···. 그 사람 맞죠? BDSM의-”
타악!
“행정부 건물에서 일할 정도면···. 보고 기억에 남겨야 할 장면과 그렇지 않은 장면은 구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랄프의 조용한 위협에 까페 직원은 히이익! 하는 새된 소리를 내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신경을 너무 곤두세워서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전후 처리에 치여 과로사하기 직전에 끌려왔는데 그게 박교수와 총장의 면담 자리라니 심지어-
“카라멜 마끼아또! 시럽 추가해서! 꼬마야, 뭐 안 먹을래? 부장님은 뭐 안 시키십니-끄악!”
“목소리 낮춰 이 새끼야! 지금 저기서 총장님 얘기하는 거 안 들려!”
이 또라이랑 함께라니.
중환자실에서 이어 한 번 더 랄프에게 멱살이 잡힌 에젤은 숨이 막힌 목소리로 당근케이크와 우유 한 잔까지 주문한 다음에야 목소리를 낮췄다.
“콜록콜록! 몽부장님,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아닙니까? 교수가 그렇게 까탈스러운 녀석도 아니고. 딱 봐도 분위기 좋잖아요, 저 두 사람. 연애하러 왔다고 해도 믿겠구먼.”
“분위기가 좋아? 까탈스럽지 않아? 너 감찰부 맞냐?”
따악!
“아욱! 왜 때려-엌”
“목소리 좀! 제발! 저 두 사람 대화 내용을 뜯어보라고! 대화 몇 마디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간 줄 아냐!”
랄프는 아예 에젤을 그의 옆자리에 앉혀놓고, 지금 교수와 총장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조목조목 따져서 알려주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결국 돔은 전쟁에 승리했어. 그치? 비록 제우스로 인해 노획한 전차는 얼마 안 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렙터의 세력권이 한참 줄어들 테니 그런 부분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어마어마하겠지. 박교수는 앉자마자 그 부분을 콕 찝어서 ‘돈 내놔’ 라고 말한 거야. 총장님은 그걸 ‘지금 당장 주기에는 우리도 쓸 일이 많아서 어렵다’ 라고 한거고!”
“어…. 커피 사달라는 거 아니었어요?”
“너는….! 감찰부 시험 돈 주고 통과했냐!”
그래도 여기까지는 들을 만 했지. 그다음은 더 가관이었다.
[실질적 돔의 통수권자가 쪼잔하게]쿠웅!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1급 대외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박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니까.
‘집행부의 몰락, 행정부의 소극적 대응으로 인한 민심 하락. 사실상 3부 의회 체제가 무너진 지금 돔은 감찰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녀석은 그걸 알고 [전부 니껀데 좀 주면 어때] 라고 한 번 더 받아친 거야. 총장님은 그걸 인정하시고, 음…. 그 뒤부터는 나도 못 읽겠어.’
극도로 정치적 의미가 함축된 대화. 그냥 듣고만 있어도 나중에 ‘넌 너무 많이 알았어’ 하면서 잡혀갈 것 같은 그런 대화가 자리에 앉은 지 5초 만에 오고간 것이다.
“흠…. 그래요? 뭐, 그렇다고 합시다. 어쨌든 벡스가 저렇게 쌩쌩하게 살아남았으니, 정상참작 해주는 거로.”
“생명공학부 의장의 말을 들어보니 대단히 투자를 많이 한 것 같더군요. 오늘 당장 퇴원해도 될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큰 은혜를 입었네요.”
“하하하하! 아닙니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친구분들의 활약도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엑소슈트의 바디캠에 찍힌 영상이 있으니, 나중에 한번 보시는 걸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대단히 감명 깊은 사투였으니, 이것도 적절히 편집해서 커뮤니티에 올릴 예정입니다.”
까드득!
교수는 왼손을 만지작거리며, 시종일관 히죽거리던 표정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니까.
부드러운 표정을 풀고 냉정한 표정이 된 교수는 살짝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왜, 저희 영상을 편집해서 올리고, 영웅 취급해주는 겁니까?”
“영웅 맞잖습니까?”
“솔직히 내가 좀 히로익 하긴 했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의미가 궁금하다, 이 말입니다. 솔직히 감찰부에도 목숨 걸고 렙터랑 싸운 사람이 몇 명인데, 그 사람들을 띄워주는 게 더 그 쪽한테 좋은 거 아닌가? 감찰부 인지도 올라가는 쪽이 권력을 휘어잡는데 훨씬 도움 될 것 같은데.”
“영웅이 필요했으니까.”
영(young)이라는 성과 달리 그리 젊지 않은 총장은, 작은 테이블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교수의 왼손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사람들이 돔에 모여든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정의?”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아닙니다. 돔에 모여든 사람들은, 황무지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향수에 빠져, 과거와 같은 삶을 보장해주면 다소 과한 불합리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들. 그런데 며칠 전, 돔에서 제공하는 그 절대적인 평화의 약속이 깨진 것입니다. 정전이 일어나고, 도시에는 총격전이, 도시 외곽에서는 포격전이, 47구역의 수호신처럼 여겨지던 올드 픽처가 폭주하고, 심지어 집행부가 통째로 적이 되어 그 건물이 불타기도 했지요.”
뜨끔!
교수는 건물이 불탔다는 대목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차고에 붙인 불이 위쪽까지 번져서 제법 크게 불이 난 모양이었다.
“일상이 무너지자,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자리 잡았습니다. ‘계속 여기서 안심하고 일해도 되는 걸까? 나도 나가서 싸우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지난 일주일간 거래소의 식료품과 총기 가격이 얼마나 뛰었는지 아십니까? 과수원의 작물이 전부 못쓰게 됐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조사해보니 과수원에 일하던 관계자들이 식량과 채소를 빼돌리려고 수작을 부린 것으로 드러났지요. 고작 이렇게 작은 피해를 입은 것만으로도 이 지경입니다. 물가가 치솟고, 생산성이 떨어지고.”
“그래서. 그 불안을 잠재울 이슈가…. 바로 나였다?”
교수의 물음에 총장은 긍정을 표했다.
“만화 같은 일이 아닙니까. 절체절명의 위기, 거대한 검은 손을 가진 남자가 나타나 홀로 도시를 구해내다!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는 보고한 대원이 그만 정신이 나간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만화 같은 일에, 영웅에, 불안한 시민이라…. 이 양반, 너구리가 따로 없구만?’
슬슬 총장이 어떤 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윤곽이 잡혔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자극적인 환상을. 올드 픽처라는 수호신을 대신할 영웅을 만들어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을 지켜줄 ‘커다란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 커뮤니티 영상…. 돔 이름으로 올렸겠네요.”
“큼지막하게 로고까지 박아서, 누가 봐도 돔의 시점으로 찍은 것으로 보이게 올렸습니다.”
조금 생각이 박힌 이들에게는 돔의 이름으로 나와 이안, 벡스의 쩌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올리며 돔과 BDSM이 적극적 우호 관계에 있음을, 렙터의 주력과 맞붙을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 돔과 대단히 친근함을 과시한 것이다.
‘내 허락도 없이.’
이게 문제였다. 집행부도 다 잡아 죽였고, 돔이랑 사이좋게 지낼 생각까지는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은 아니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대외적으로 우리가 동맹입네, 하고 공표하다니. 대놓고 쥐고 흔들 생각이잖아, 이거.
‘느낌이 쎄해서 좀 까칠하게 나갔는데, 욕도 좀 섞어서 말할 걸 그랬군.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확실하게 보여줬어야 하는데.’
이 문제는 잘 기억해뒀다가 총장 깔 일 있으면 써야겠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지금 당장 물고 늘어지긴 좀 뭐하니까. 좋아, 그럼 난 이제 슈퍼스타로군. 맨손으로 집행부 배신자들을 때려잡고 렙터의 전차부대도 쓸어버린 초인, 박교수.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데? 와! 히어로!]‘개똥 같은 소리하지 마. 방아쇠만 당긴다고 총알이 나가냐. 총신, 탄약, 장전손잡이…. 수많은 부품이 다 제 역할을 했으니까 나가는 거지. 내가 한 일은 방아쇠를 당긴 것밖에 없다고.’
영웅 취급이라니, 으으, 닭살 돋아. 죽은 감찰부 사람들한테 좋은 술이라도 한잔 사서 올리든가 해야지, 원. 공을 가로챈 것 같잖아.
“여기까지가, 저희 측 입장입니다. 생명공학부와 연구 협약을 맺으셨다는데, 가급적 방문 일정은 감찰부에게 전달해줬으면 합니다. 퍼레이드 준비라는 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
“밤에 몰래 담 넘어서 들어올 겁니다.”
“저런, 경계를 강화해야겠군요.”
톡, 톡, 톡, 톡.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가 담긴 얼굴로 대화를 이끌던 총장은, 식탁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별안간 까페 종업원을 불렀다.
“에스프레소, 투샷.”
표면적으로 이곳에 온 목표. 커피 한 잔 하는 것. 안에 담긴 의미는….
‘이번 대담의 결론. 단위는 모르겠는데, 투샷? 아메리카노보다 비싼 거니까 꽤 쓴다는 소리겠지? 2천만? 아니면 2억 실링 정도?’
나름 신경 좀 쓰겠다는 소린데….
까드득, 드득!
총장을 따라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다 깊게 팬 흔적을 남긴 교수는 옆에서 화들짝 놀란 종업원에게 말했다.
“블루베리 스무디. 큰 거. 물 한 방울 안 뭍게 깔끔하게 닦아서.”
“저…. 그런 음료는 메뉴에 없습니다만….”
“아니, 있어요.”
‘그쪽한테는 없지만, 총장님한테는 말이야.’
손끝에 동그랗게 뭉친 나무조각을 가지고 장난치던 교수는, 다소 당황한 표정의 총장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커피같이 은은하게 와닿는 것보다, 나는 시원하고 단게 좋더라고.”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찌푸려지는 그의 얼굴을 보니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교수의 말은 실링이 아니라 현물로 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돔이 가진 자산 중 저 정도 금액의 현물 자산은….
‘엑소슈트, 아니면 이번에 노획한 전차밖에 없지. 슈트는 보안상 못 넘기는 물건이고. 전차 내놔 임마. 새 차 타고 집에 갈 거야.’
“….실무진과 상의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부탁합니다. 나랑 벡스도 다 나았다고 하니, 집에 가고 싶어서.”
딱 봐도 속으로 욕하는 듯한 얼굴의 총장을 보며, 교수는 행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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