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15
Chapter.8 오 블러디, 붐 블라다(3)
***
그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화려한 폭연 속을 살다 가겠다, 는 이안의 계획은 허무하게 실패해버렸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승전도, 패전도 없이 어느 날 뚝! 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게.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냐?”
“….”
이안은 구스타브의 빈정거림에도 말없이 작계도를 수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찰대의 말에 따르면 13여단도 해체가 됐으니, 이제 그쪽을 추가로 경계할 인원을 새로 편성해야….
“전쟁이 끝났어. 너도 알잖아? 두 달 전에 누가 쐈는지도 모를 핵이 적과 아군 사이에 떨어져 개지랄이 난 뒤로 명령도, 적의 움직임도 없는 거. 다 끝났다고. 세계를 불태운 전쟁의 불길이, 마침내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사그라든 거야. 어이, 듣고 있어?”
“….”
이안은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무시했다. 적은 남았다. 명령체계가 흐트러진 적군이니 피해 없이 섬멸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아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가 이끄는 부대와 친위대를 자칭하는 무리는 아직 명령에 충실하니 적은 인원으로도 잘 만하면….
“더는! 적이! 없다고!”
쫘아악!
거칠게 찢어지는 작계도와 그 너머로 보이는 구스타브의 성난 눈동자. 이안은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사내를 보았다. 답지 않게 동요하고 있는 그 남자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이안은 부러질 듯 쥐고 있던 연필을 손에서 놓았다.
“적이 없으면···. 이제 무엇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뭐?”
“내가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지. 좀도둑으로, 보육원의 허드렛일 하는 아이로, 대학생으로, 용병으로, 그리고 지휘관으로.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가장 만족스러운 삶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전쟁터에서의 삶을 선택하겠다. 허나 적이 없다면 전투도, 전투를 수행할 병사도, 그 병사들일 이끌 지휘관도 필요 없으니. 앞으로 나는 무엇으로 충족된단 말이냐, 구스타브.”
구스타브 알 하르브. 그는 이안과 비슷한 처지의 군인이었다. 8 연합군의 사령관이었으며, 제법 인망이 있었고,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같이 여러 번 작전을 진행하기도 해서 제법 대화가 통하는 녀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친구’에 가까운 관계겠지. 그 단어가 가지는 친밀한 느낌을 뺀.
“세상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애쉬필드 자네가 맞나? 네 녀석이 불태운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이 광경을 보면 피눈물을 흘리겠군!”
이안은 그런 구스타브의 빈정거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이들이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말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의 이안을 보며, 고개를 젓던 구스타브는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하긴.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자네는. 차라리 잘됐군.”
“뭐가 잘됐다는 거지?”
“자네 같은 벽창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사흘 밤낮 동안 머리를 쥐어짜서 준비했는데, 그게 다 필요 없어졌으니 말이야.”
구스타브는 이안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안이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엉뚱한 얘기였다.
“애쉬필드. 나랑 군사단체 하나 만들자. 적을 원한다고? 그럼 먼저 아군을 만들어야지. 아군이야말로 적을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경계 아니겠어?”
“군사 단체라면…. 용병인가?”
“용병이랑은 좀 다르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나? 변종이라 부르는 이상한 좀비같은 게 돌아다니고, 몇몇 지역을 제외하곤 방사능에 오염돼서 사람이 살 수도 없고, 정부도, 법도, 규칙이란 규칙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왔단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의 정점이나 다름없는 군의 지휘관이다. 이제는 소속도 없고, 명령을 내릴 사람도 없는 붕 떠버린 군대의 명령권자들.”
열변을 토하는 구스타브의 얼굴에는 확신이 어렸다. 어떤 미래에 도달한 자신에게 손을 건네듯, 구스타브는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우리가 구심점이 되는 거다. 군인은 명령에 따르는 생물, 누군가 명확한 목표와 명령을 제시해준다면 지금 흩어지는 군인들도 하나둘 우리 곁으로 모여들겠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정점이 되는 거다! 너와 내가!”
“그렇다면 적은….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누구지?”
하!
이안의 물음에 구스타브는 코웃음을 쳤다.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군. 적? 온 세상이 우리의 적이 되겠지!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투쟁의 시대가 올 테니!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오히려 이제 막 시작되었다!”
쾅!
열렬한 선언과 함께 구스타브는 두 팔로 강하게 책상을 내리쳤다.
“나와 함께해라, 애쉬필드. 네놈의 그 자기 파괴적인 욕망을 가득 채울 만큼의 적을 만들어주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 어느새 떨리던 손이 멈춘 것을 알아챈 이안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희미하게 깜박이는 백열등 아래에서, 두 남자는 손을 잡았다. 구스타브 알 하르브, 병사들 사이에서 렙터라 불리는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목표를 잃은 군인들을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였으며, 렙터 소사이어티를 만들었고, 세상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
“크흐흐흐. 속이 뻔히 보이는 이름 아냐? 렙터라고 불리는 남자와, 렙터 소사이어티. 구스타브는 야망이 있는 놈이었어.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저 태우고 날려버릴 적만 있으면 상관없는 놈이었고. 서로에게 윈윈이었던 셈이지. 그렇게 군 편제를 베이스로 한 체계 아래에 렙터 소사이어티가 만들어지고, 나는 추가로 합류한 3명의 사단장과 함께 스웜 알파라는 직책을 짊어지게 됐다.”
후우우우-
시가의 독한 담배 연기와 함께 독주의 알콜향이 훅 하고 올라왔다. 취했군. 그래, 확실히 취했어. 알콜이든, 니코틴이든, 오랜만에 맛보는 서늘한 새벽의 감성이든.
“제법 만족스러웠지. 구스타브는 약속을 지켰거든. 적은 넘치도록 있었고, 멸망 초기의 생존자들이 아득바득 쟁여놓은 물자를 약탈하는 것은 한 자리에 자리잡고 생존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수익률이 높았지. 렙터는 강하고, 부유했으며, 더 많은 무리를 끌어들였다. 돔이라는 강적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는 10살 생일 날, 핵이 터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본 날 이후 세 번째로 큰 소리로 웃고 말았어. 그 말도 안 되게 강한 녀석들을 보자 확신이 들었거든. ‘아, 이 거북이 같은 녀석들은 내가 죽는 날까지 나를 상대해주겠구나!’ 하고.”
괴물. 그의 적들은 그를 감정이 없는 괴물이라 불렀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적은 그렇다 치고 아군은 왜 그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로부터 1년, 나는 렙터의 스웜 알파로 살아남았고, 거의 렙터의 간판처럼 여겨지게 됐지. 끔찍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보람찬 삶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보람차고, 만족스러운, 전쟁과 살육에 가득 찬 삶이었지. 세 번째 폭발이 있기 전에는 말이야.”
“세 번째 폭발?”
“그런 게 있다.”
안 봐도 친구들의 얼굴에 가득 피어난 의문이 보이는 듯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까. 미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안은 ‘폭발’이라는 키워드에 얽힌 자신의 운명을 믿었다. 그의 삶을 뒤바꾼 네 번의 폭발. 그 세 번째는, 그녀를 만나고 몇 달 뒤에 일어났다.
***
이안 데스몬트는 폭약에 대한 토론은 3박 4일 내내 할 수 있는 남자였지만, 그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효율과 합리, 이 두 가지에 대한 추구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간부 전용 병동 대신 일반 병사들과 같은 병실을 쓰는 것도, 그들과 같은 밥을 먹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크고 넓은 병실. 화려한 식단. 전부 낭비가 아닌가? 병사들에게 제공하면 사기 진작이라도 되지, 소수의 간부에게만 제공되는 특혜라니.
이안이 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몰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검소한 성격과, 누구보다 많은 전투에 참여하는 바람에 얻은 수많은 부상 덕이었다.
“추, 추워…. 죽고싶지 않아, 어, 엄마. 엄마아…..”
네스트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병동에서 보내는 이안에게 그 장면은 대단히 불쾌한 종류의 것이었다. 병사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병사야 수도 없이 많이 봤으니.
‘다리의 관통상, 뼈가 부러졌지만 이건 괜찮다. 허나 복부의 저건…. 폭발로 인한 2차 부상이군. 저 녹은 암석 조각은 플라즈마 폭발 특유의 파편이지. 저 병사는 시체나 다름없다.’
한눈에 봐도 회생이 힘든 병사. 하지만 악다구니를 쓰는 병사들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흰옷을 입은 간호사는, 죽어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춰주며 그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지. 저렇게 낭비되는 시간을 다른 환자에게 쏟았으면 그만큼 부상에서 회복되는 병사들이 많아질 것이 아닌가? 비효율적이야.’
그런 이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간호사는 매번 이안이 입원할 때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그 간호사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이봐.”
“이쪽에 지혈제! 지혈제 좀 주세요! 클라이드 환자 담당은 당장 진통제 좀 놔 주시구요!”
“….이봐!”
째릿!
몇 번 더 부르고 나서야 그를 돌아보는 간호사. 적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데스몬트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나요?”
이안은 잠시 갈등했다. 비효율적이지만 쉴 틈 없이 자신의 임무에 열중하는 훌륭한 재원이다. 그런 사람에게 ‘눈에 거슬려서 불렀다’ 라고 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3번 병상의 환자는 곧 죽는다. 더 관리할 필요 없어.”
그런 고민 사이에서 갈등한 덕에, 입에서 나온 것은 꾸지람이 아니라 조언이었다.
“알아요. 나도. 맥스 하사님은 회생하기에는 너무 늦었죠.”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 것도 불필요하다. 병상에 번호를 붙여놓은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야.”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13번 환자님, 하고 불러줄 수는 없잖아요!”
“환자의 상태는 의료 종사자인 그쪽이 더 잘 알 테니, 후송되는 환자를 침대에 눕히기 전에 상태에 따라 미리 배제해버리면 훨씬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할 텐데.”
“이익, 정말!”
그의 조언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이안을 훨씬 불쾌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함부로 재단하는 게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최선을 다해봐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비효율….윽!”
말도 안 되는 궤변에 항의하려던 이안의 얼굴에 간호사는 모포를 던져버렸다.
“그렇게 떠들 힘이 있으면 퇴원이나 하세요! 그 음흉하게 따라붙는 시선도 지겨우니까 제발 그만 좀 다쳐서 오시고!”
“아니, 나는 그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녀의 말에 이안이 항의하려 했지만, 모포를 걷어냈을 땐 이미 그녀는 다른 환자들에게 향한 뒤였다.
“….어이가 없군.”
아무리 바깥 사정에 무지해도 그렇지, 렙터의 일원 중 누가 그들의 정점인 스웜 알파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대한단 말인가? 혹시 좀 모자란 여자가 아닐까?
묘하게 눈길을 끄는 그녀에 대한 평가에 중증 정신질환이라는 가설을 추가하자, 제법 그럴듯하게 설명이 되었다.
“행동거지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좀 모자란 여자였나.”
저 멀리 다른 환자에게 따뜻한 얼굴로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이안은 더욱 불편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단 한마디. 단 한 번의 손짓이면 내 앞에 그녀를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러는 대신,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어떤 면이 자신의 신경에 거슬렸는지 찬찬히 떠올려보며.
그 후로도 이안은 몇 번 정도 더 일반병동에 입원했고, 여전히 비효율적으로 일하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이안은 갈수록 쌓여가는 불편함에 매번 그녀가 그의 자리를 지날 때마다 진심 어린 조언을, 특별히 시간을 들여 만든 업무 효율 개선안과 함께 그녀에게 들이밀었으며, 그녀는 그러한 이안의 조언을 들을 때마다 생명의 무게와 삶과 같은 이안이 이해하지 못할 주제로 입씨름을 벌였다.
시간이 갈수록 이안은 자신이 그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비효율을 효율로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달성감이겠거니,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
“죠, 그거 완전히 그거 아냐? 그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벡스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반했다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 그녀에게 빠진 건 맞았지. 그때는 그런 걸 몰랐어. 나름 여자들과 많이 사귀긴 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본 적은 없었거든. 그저 내 얼굴만 보고 달려든 여자들이었고, 나도 남들이 좋다니까 하자는 데로 따라가 본 것일 뿐. 애초에 나는 연애감정 따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재수 없는 새끼.”
“형수님한테 대차게 까였으면.”
“흐흐흐흐, 어떻게 알았냐? 애정인 줄은 몰랐지만, 분명히 흥미를 느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 권유했지. 내 비서관이 되지 않겠냐고. 스웜 알파쯤 되면 비서도 쓸 수 있었거든. 당연히 그녀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지. 간호사는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이니까. 이런 중증 외상환자 병동은 특히나 더.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말한 줄 알아?”
세상 불편한 표정으로 잔에 남아있던 술을 털어 넣은 교수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딱 잘라 말하던데. ‘사람 죽이는 일은 싫어요!’ 하고. 나도 모르게 설득조로 말하게 되더군. 비서관은 그런 게 아니다, 나를 따라 전장에 나오지도, 총을 들지도 않는다. 내 일과를 정리하고 약간의 서류작업만 있을 뿐이다…. 그런 구차한 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요지부동이었어. 나는 알겠다고 하고 병동을 나섰지. 슬펐나? 그건 아니었어. 하지만 예의 그 ‘불편함’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더군.”
꿈꾸듯 과거의 얘기를 입에 담는 이안의 어조에는 행복이 가득 묻어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 달달한 어조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지만, 이안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끙끙거렸지. 다시 그녀를 찾아가는 것은…. 뭔가 그랬어.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불편함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고. 결국 그날 밤은 화력 시험장에서 온갖 폭탄과 총기를 휘두르며 보내게 됐어. 그렇게 화력 시험장을 반쯤 태워 먹었을 때쯤, 아주 개 멍청한 생각이 떠오른 거야.”
***
‘죽이자.’
동이 틀 때까지 총을 쏴댄 덕에 머리와 귀가 멍했지만, 덕분에 애매하게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어지며 훌륭한 해결책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까지 왜 못 떠올렸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명확한 해결책이.
‘비록 흥미롭다고는 하나, 결국 취미의 일종일 뿐. 이렇게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심신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취미는 마약이나 다름없는 해로운 취미가 아닌가?’
역시 화약에게 매달린 것은 정답이었다. 단 하루 만에 이렇게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다니!
“이것 좀 빌리겠네.”
“그, 그냥 가지십시오!”
“그러지.”
이안은 화력시험장의 벽면에 걸린 무기 중 은빛 리볼버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에 닿자, 더욱 마음이 확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발. 단 한발이면 지난 몇 달 동안 그의 가슴을 간질였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진다.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명료한가.
저 멀리 병동의 녹십자가 보일 때쯤에는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곧 그녀를 만난다.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그냥 쏠까? 아니면 그녀가 죽어야 할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줄까? 병동에서 그 유치한 생명론에 대해 토론할 때처럼?
‘너무 길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한마디 해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해보니 폭발물 이외에 나를 즐겁게 해준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흐음…. 그래,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도가 좋겠군. 그녀가 이다지도 거슬리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지만 않았으면 그녀가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
평소와 같이 냉정해진 머리로 명쾌한 결론을 내린 이안은, 그 답지 않게 유쾌한 기분으로 병동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짜아악!
알콜과 피가 섞인 냄새 사이로, 날카로운 소리가 병동을 울렸다.
“아이구, 우리 간호사님. 아프겠다. 그지?”
“으으윽!”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들어. 우리도 환자라니까?”
날 선 분위기에 이안의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가라앉다 못해 저 깊은 심연으로, 그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뒤틀림이 가득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병사 다섯. 다친 곳 하나 없는 그들은, 누군가를 둘러싸고 겁박하고 있었다.
“밤새 아랫도리가 괴로워서 견디다 못해 이렇게 찾아왔는데, 뭐? 병동에서 소란 피울 생각하지 말고 나가 달라고? 그게 환자한테 할 소리야!”
“렙터의 여자라면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고 있었을 것 아냐! 깨끗한 척하기는! 누가 결혼해달래? 잠깐만 같이 즐기자고!
“어이, 딕슨! 여자 길들이기는 그 정도만 하고 안으로 데려가자고!”
“아으윽!”
그리고, 그중 하나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여자의 익숙한 이목구비와 퉁퉁 부어오른 뺨이 눈에 들어온 순간,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이안은 평생에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새까맣고 끈적한 감정이 그의 뇌리에서부터 손끝, 발끝 하나하나를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짐승같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그를 바라보는 환자들도, 당황한 병사들도, 그들의 어깨에 달린 스웜 알파의 친위대에게만 주어지는 견장도. 그저 언제나 머리를 노리는 그의 사격습관 때문에 저들이 너무 고통 없이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타앙! …… 타앙!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사 다섯의 머리를 모두 날려버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던 놈의 시체에 한발을 더 갈긴 뒤였다. 전부 죽여버렸지만, 뭔가 해야 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을 수 놓았다.
더운 피를 뿜어내며 경련하는 시체들을 넘어, 이안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는지도 몰랐다. 흥분한 뇌는 단편적인 정보만 전달할 뿐, 정확히 완성된 생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그랬지? 아군이다. 허나 잘한 일이었다. 도대체 왜?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 모르겠다. 리볼버의 성능이 참 훌륭하군. 그래! 리볼버. 목적이 있었다.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었어. 리볼버와 관련된 일을 끝내기 전에, 뭔가 말을 건네려고 했는데….’
여자는 피와 뇌수가 흥건한 바닥의 한쪽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안의 마음 한구석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해야 한다. 뭔가, 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싫어요!]‘아….’
그 순간, 이안의 머리는 끝내 제대로 사고하는 것을 포기한 채, 떠오르는 대로 마구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철컥!
탱, 탱그랑-
“불가항력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리볼버를 던져버린 이안의 입이 마구 말을 주워 삼켰다. 내던져진 리볼버에서 떨어진 탄피들이 처량하게 울었지만, 그따위 것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나, 나는 렙터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거짓말이다. 필요에 따라 헌신짝처럼 저버린 병사들이 한 트럭은 넘을 것이다.
“저들은 렙터의 의료노동자로 재직 중인 그대를 위협했고, 이는 그대의 손이 앞으로 살릴 수많은 생명을 저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니, 부득이하게 저들을 렙터에서 ‘배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미 없는 살인이 아니란 말이다!”
이안은 갈수록 다급해지는 마음속에서, 그를 간질이던 불편함 중 하나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살인을 그토록 경멸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녀 앞에서 사람을 다섯이나 죽였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
이안은 지금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아군을 죽인 것? 처음이다. 거짓말을 해본 것? 처음이다. 숨을 헐떡일 정도로 불안감에 떨어본 것? 처음이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분노해본 것? 처음이다. 그리고….
“그러니…. 재고해주었으면···. 한다.”
이토록 가슴이 떨린 것은, 맹세컨대 처음이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내가 이런 허울뿐인 스웜 알파라는 직책에 가려진, 텅 빈 껍데기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 빈 가죽 부대 안을 채우기 위해,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감정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살아왔고! 그래! 그거면 됐다고, 나름대로 충분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이안은 손을 뻗었다. 저 두려움에 떠는 작은 어깨를 보는 순간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준 다음, 이안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갈처럼 쌓여가던 ‘불편함’들이, 씨실을 따라 날실이 풀려나오듯 이안의 가장 깊숙한 감정을 따라 하나둘, 꽃봉오리처럼 터져나갔다.
“하지만…. 당신 옆에 있으면, 나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평생을 감정이 없는 괴물로 살아온 이라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그녀였으니까. 회생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그렇게 헌신하는 그녀를 보며, 이안은 떠올리고 만 것이다. 어쩌면, 저 여자라면 시체처럼 텅 빈 그에게도 진심을 나누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안의 진심어린 고백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 앞에 무릎 꿇은 이안은 고해를 하듯, 생의 마지막 희망에 매달리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니, 부디…. 한 번만 기회를. 그대 곁에서 내가 사람으로 살아갈 기회를….”
꽈아악.
점점 스스로를 조여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이를 악물고 고백하던 이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품 안에서, 마주 안겨 오는 그녀가 느껴졌다. 그것은 백마디 말보다 더 아름다운 허락이었다.
새로 태어난 이가 그 울음으로 자신을 세상에 알리듯, 이안은 그녀의 품에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의 누이가 죽은 뒤로 22년 동안, 그를 이렇게 마주 안아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