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16
Chapter.8 오 블러디, 붐 블라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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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군. 어디선가 나타나서 위협하는 괴한을 처리하곤 프러포즈하는 남자라니.”
“낭만? 그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겐 아니었어. 나는 필사적이었어. 그녀가 손을 놓는 순간 그 총천연색의 감정으로 물든 세계에서 다시 어둡고 고요한 소시오패스의 세계로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마음을 건네고, 마음으로 돌려받는다. 사람들 사이에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의 교류는 처음 겪어보는 이안에게 있어 기적처럼 느껴졌다.
“렙터에 소문이 났지. 전쟁광 애쉬필드의 절절한 고백! 뭐 이런 느낌이었나.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어. 아니, 오히려 내가 나서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말이 맞다! 저 여자가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온 세상이 다 알아줬으면 싶더군. 몰리, 그녀는 장님이자, 귀머거리였던 내게 명화였고, 오케스트라였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해줬지! 그녀의 옆에 있으면 나는….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어.”
교수는 두 팔을 휘저어가며 자신의 죽은 아내에 대해 설명하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표정을 보았지만, 저렇게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 이야기의 끝에 고통만 가득할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녀석은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젖어있었다.
첫 데이트 전날, 오래전 무감각하게 만나왔던 여자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필사적으로 떠올려 데이트 플랜을 만들었던 기억.
작전 회의에서 부하가 역정을 낼 때까지 넥타이는 어떤 무늬가 좋을지 떠들어댄 기억.
그녀가 피곤해 보이던 날,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한 휴식 환경을 구축해놓은 자신의 침실을 떠올리며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집에서 쉬고 가는 건 어떤가’ 따위의 말을 했다가 그녀의 얼굴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게 했던 기억.
반대로 그녀가 정말 ‘쉬고’ 갈 각오로 씻고 나왔을 때 호흡 곤란으로 그녀의 간호를 받아야 했던 기억.
봄. 유일한 친구, 구스타브와 오래된 부하들의 환호성 아래에서 그녀의 하얀 면사를 들추고, 미래를 약속하던 날의 기억.
겨울. 기적처럼 모래폭풍도, 블리자드도 없는 날에 태어난 그의 딸, 레오니. 레오니 데스몬트. 행복하게 흐느끼던 그의 아내.
햇살에 비친 비눗방울 같은 기억이 하나하나 스쳐 지날 때마다, 이안의 얼굴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꿈같은. 정말 꿈과 같은 나날.
그 시절의 기억은 강물과 같아 한번 떠올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끝에 고통의 바다가 있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는 속이 텅 빈 폭파광 애쉬필드가 아니라 이안이라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어. 하지만, 그녀의 곁에서 사람이 되어갈수록 나는 고통스럽고, 약해졌다.”
트드드득-
후우우.
타들어간 시가의 끝에서 재가 흩날렸다. 사람으로 사는 것. 그 행복의 대가로, 이안은 그의 과거와 마주해야 했다. 애쉬필드가 아닌, 인간 이안의 시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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렙터 소사이어티는 야만적이지만, 야만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기본 편제는 군대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병사계급 위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이 있고, 그 위로 팩 리더, 스웜 알파가 있다.
팩 리더와 스웜 알파라는 고유의 계급이 생긴 것은 렙터 소사이어티 제 1의 권력자, 구스타브 알 하르브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물이 고이면 썩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나태해지기 마련이지. 렙터의 우두머리는 언제나 막 갈아낸 칼날처럼 시퍼런 예기를 유지해야 해. 그런 의미에서 최고위 계급인 팩 리더, 스웜 알파는 기존 계급체계에서 분리하여 별도의 승급 체계를 가지는 것으로 한다.’
조건은 간단. 렙터의 본질과 같았다.
죽이고 빼앗는다.
팩 리더를 죽이면 팩 리더가, 스웜 알파를 죽이면 스웜 알파가 될 수 있다. 정면으로 도전해도 되고, 암살을 시도해도 된다. 독살을 제외한 모든 수단이 허용된다. 자칫 집단 자체가 머리부터 붕괴해버릴 수도 있는 말도 안 되는 규칙이었지만, 의외로 스웜 알파와 팩 리더의 자리가 교체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용되니까. 정면으로 도전해오면 스웜 알파의 친위대라는 최상위 숙련병과 할당받은 전차와 장갑차, 전투 차량을 몰고 나가면 대대장급 세력으론 절대 이길 수 없지. 노이지 팩을 영입해서 3교대 레이더를 돌리면 폭발물을 이용한 기습이나 저격도 웬만한 것은 해결되고.’
결국 스웜 알파가 되고 싶다면 스웜 알파 만큼의 세력을 만들어 도전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 된 것이다. 물론 도전 자체도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스웜 알파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강한 세력을 일구었다는 증명이니까. 이쪽에서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한 목숨을 걸고 불리한 싸움을 할 멍청이는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상위 계급에 대한 도전은 렙터 소사이어티가 만들어진 이래로 4번 정도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팩 리더에 대한 도전뿐 스웜 알파에 대한 도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안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가정을 이룬 뒤로, 약 1년 6개월 동안 스웜 알파 이안 데스몬트에게는 두 번의 도전이 있었다. 모조리 죽여버렸지만, 그의 곁에서 함께하던 친위대를 제법 잃었다.
오늘은 세 번째 도전을 마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애쉬필드.”
“….카터. 너와는 제법 많은 사선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니. 가라앉을 게 뻔한 배에 타고 있는 것처럼 미련한 일도 없지요. 늘 저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감정을 버려야, 비로소 올바른 길이 보인다고.”
“푸흐흐흐, 저흰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애쉬필드님. 좋은 모습만 기억하고 싶으니, 발버둥치지 말고 곱게 가십쇼, 흐흐흐흐….”
“솔…. 카터, 애쉴리. 모두 배신했는가.”
이안도 스스로가 약해졌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몰리의 그 화사한 미소를 맞이할 때마다, 그녀의 품에 안긴 레오니를 볼 때마다 과거에 그의 손으로 불태운 사람들도 이렇게 반겨줄 가족이 있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안은 포로를 모두 살해하지 않았다. 탈출한 포로 중 돔의 첩자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전처럼 과감한 작전도 잘 쓰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훌륭한 지휘관이었지만 과거의 그를 기억하고 있는 친위대에게는 ‘불완전 연소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그와 함께 이곳에 도착한 친위대가 적과 나란히 서서 그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퉤! 배알도 없는 새끼들! 애쉬필드님이 너희들을 살려준 게 몇 번인데 옆에 있는 놈들 좀 죽었다고 불알이 쪼그라들어서 튄 거냐!”
“켄이치, 정말 그쪽에 남을 생각이야? 튀코님이 널 얼마나 높이 사는지 알고 있으면서?”
“좆이나 까잡숴라, 카터! 쇼티 그 인간 엉덩이나 빨아줄 바에야 여기서 뒤지고 말지!”
튀코 브라헤. 이안을 그렇게 싫어하더니 끝내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름 모를 팩 리더도, 팩 리더치고 말도 안 되게 많은 저 세력의 숫자도 모두 그녀석의 라인에 속한 놈들이겠지. 스웜 알파가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차 다섯 대와 전투차량들. 배신한 친위대, 그에 비해 이쪽은 얼마 남지 않은 친위대와, 전투차량 한 대. 그나마도 켄이치와 몇몇 친위대를 제외하면 영입 제의를 받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비숙련병 뿐.
노이지 팩도 모두 떠나가버린 지금, 암살이 아닌 정식 도전을 선택한 것도 그의 추락을 구경거리 삼아 조롱하기 위함이리라.
“그래도 렙터 소사이어티를 만든 창립 멤버에 대한 예의를 담아 선수는 양보하지! 먼저 시작하시지요, 애쉬필드! 저녁 먹을 때까지 한 발이라도 쏠까 모르겠습니다만! 그 총성이 처형 시작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와하하하하!”
“쏴야지요, 먼저 간 마누라랑 자식새끼 안 잃어버리려면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적의 전차에서 이름 모를 팩 리더의 조롱 가득한 통신 사이로, 한때 그의 친위대였던 뚱뚱한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넘어왔다.
“푸흐흐흐! 이것도 애쉬필드님 한테 배운 거 아닙니까! 후환을- 남기지 마라. 이쁜 마누라와 딸이였지요. 나름 눈치를 채고 숨겨놓으신 것 같은데, 터트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쓸데없이 뭐하러 그러셨습니까?”
“…..”
“나중에 만나면 잘 달래주셔야 할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놈들 중에서도, 가장 질이 안 좋은 녀석들로 보내놨거든! 존경하는 애쉬필드님을 망쳐놓은 쌍년이니 아주 제대로! 돔의 끄나풀 대하듯 풀코스로 대접하라고 일러두었지! 푸하하하하하!”
우드드득!
플라스틱 수화기가 이안의 악력을 견디다 못해 부서져버렸다. 천천히 후진할수록, 그만큼만 거리를 좁히는 상대. 배신한 녀석들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위치가 많이 틀어졌지만, 이정도면 충분하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안은 잡음 가득한 부서진 수화기를 들었다.
“잘…. 배웠군.”
“미안하지만, 울며 빌어도 살려줄 수는 없습니다! 푸흐흐흐!”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살려주긴 힘들겠지.”
이안은 주머니에서 작은 스위치와 기폭장치 하나를 꺼냈다.
“두 번의 도전. 아내와 아이를 향한 수십 번이 넘는 납치, 암살시도. 눈앞에 훤히 드러난 약점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 렙터는 그런 생물이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이니까.”
허나, 그는 스웜 알파라는 직책 이전에, 친위대라는 세력이 생기기 이전에 이안 데스몬트라는 남자였다. 타국의 용병으로 시작해 애쉬필드라는 이명을 손에 넣은 남자.
약해졌지만, 바보가 된 적은 없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가르쳐주마.”
“지랄, 여유 있는 척하는 것도….”
“적이 준비한 전장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마라.”
탈칵!
왼손에 든 스위치를 누르자 렙터의 병사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푸른 막이 떠올랐다. 색이 짙은, 적의 간부에게서 노획한 고출력 실드. 그리고 오른손의 기폭장치는 앞선 두 번의 전투로 세력이 줄어든 이안이, 어떻게든 이쪽의 희생을 줄이고자 미리 파묻어놓은, 고폭탄 수백 발.
그 폭발력은, 적의 세력을 부수기에도, 겨우 실드 한장에 의존한 전투차량을 날려버리기에도 충분할 것이다.
‘원래 내가 가장 앞에서 적의 시선을 끌고, 적과 함께 사라져 남은 녀석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준비했었는데….’
“웃기는 일이지. 네놈들을 살리기 위해 준비한 물건으로, 네놈들을 죽이게 됐으니.”
“뭐? 그게 무슨….!”
꾸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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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커 너머의 상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한적한 황무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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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익- 탁! 지이익-
비록 만신창이가 됐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예상보다 더 많아진 적의 장비가 폭발의 위력을 막아주는 벽이 됐기 때문이리라.
겨울, 네스트가 이동을 멈추고 그 내연기관의 열기로 추위를 버티는 계절이다. 빠져나오기엔 더할 나위 없는 적기. 아무도 모르는 곳에 위치한 쉘터를 미리 봐두었다. 우리 세 가족이 살아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곳. 이 언덕만 넘으면 집이 나온다. 이 언덕만 넘으면….
“아, 아아아….”
이안은 그의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모두 허상이리라. 폭발의 충격으로 뇌가 흔들려 헛것을 보고있는 것이다. 이 손으로 한번 휘저으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신기루에 가까운 악몽이, 악몽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사라지기는커녕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쉘터와 외부를 나누는 벽에는 검붉은 색으로 ‘배신자’라는 글자 앞에 세워진, 기다란 막대가.
자신이 선물한 원피스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죄인처럼 못박혀 있었다.
“모, 몰리…. 여보!!!”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그녀를 향해 절뚝이며 달렸다.
툭!
누군가, 그의 발을 걸었다.
“참으로 애잔하군, 친구.”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시간이 없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이안은 앞으로 기었다. 분명히 봤다.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움직였어! 고개를 들었다고! 아직 살아있다. 그녀도, 그녀의 몸에 감긴 포대기 안의 딸도! 아직 살아있-
딸깍-
콰아아아앙!
섬광. 그리고 폭발. 모든 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쉘터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불꽃. 부풀어오르듯 폭연에 휩싸여 부서져내리는 담장과, 그 앞에 있던 그의 아내가 불꽃 속으로….!
“으아아아아아!!!!”
쿵!
“아아아악! 으아아악! 아아아아!!!”
쿵! 쿵 쿵!
사라졌다. 쉘터도, 그 앞의 기둥도, 피흘리며 매달려있던 그의 아내도, 자식도!
쓰러진 이안은 두 번, 세 번, 끝없이 두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주먹을 휘둘러도 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세상이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것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지듯.
“힘들어 보이는군, 애쉬필드. 참으로, 참으로 슬픈 일이야.”
저벅, 저벅, 저벅.
그의 발을 걸었던 남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구스타브…. 렙터!”
“내 인생에 가장 유능한 도구라 여겼던 자네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게 되다니.”
“네가….왜! 나를 죽여도 아무런 이득도 없는 네가!”
“오, 이런. 판단력이 흐려졌나 본데, 잘 한번 생각해보라고. 난 자네를 정-말 죽이기 싫다네. 오히려 큰 약점이 생겼으니 다소 과하게 휘둘러도 되겠구나, 하고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문제는, 자네가 렙터에서 너무 큰 위상을 차지했다는 거야. 외부 사람들이 렙터, 하면 자네 얼굴을 떠올릴 만큼.”
팅-
엄지로 튕겨 올린 총알이 장난스럽게 구스타브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렙터 소사이어티는 폭력과 공포의 상징이어야만 하네. 지금까지는 자네가 그 역할을 참 잘해주었지.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미친 폭파광. 하지만 지금은? 지금 자네 모습을 보게. 겨우 두 명이야 두 명! 자네가 그동안 죽여왔던 숫자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숫자인데, 겨우 그거 죽었다고 막 울고, 소리치고!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아, 저 철혈의 데스몬트도 저런 인간적인 면이 있다니! 렙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따뜻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안은 떠올렸다. 왜 과거의 그가, 이 남자를 친구처럼 생각했는지.
구스타브 알 하르브. 이 남자는 평범한 사람처럼 웃고, 울고, 교감할 수 있었지만, 그 내면에는 과거의 이안과 같은 차가운 피가 흘렀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닌, 감정을 나누지 않는 자.
“그래서…. 이렇게 된 거라네. 렙터는 앞으로도 공포의 화신으로 군림해야 하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자고. 사람들이 헤어질 때 하는 말이 있잖아. ‘좋은 모습만 기억하자.’ 우리도 그렇게 가자고. 아직 사람들이 자네를 파괴의 화신으로 생각할 때, 깔끔하게. 장례식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황무지에서는 죽어가는 친인의 머리에 납탄환을 박아주는 것이 미덕이니. 내 특별히 친우였던 자네를 위해, 이안 데스몬트라는 이가 평생에 걸쳐 사랑했던 두 가지 요소가 하나가 되도록 꾸며봤다네. 사랑하는 가족과, 폭발. 딱 자네 취향이지?”
철컥!
무릎 꿇은 사내의 머리 위로 총구가 드리워졌다.
“나도 가슴이 아프군. 그저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라 여겼는데, 자네가 이리도 망가지다니. 쇼티 그녀석이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곧장 이쪽으로 핸들을 돌리길 잘했지. 좀 의외였어! 자네 와이프 꽤 잘 싸우던데?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먼저 와있던 녀석들을 반 쯤 잡았더군. 내 찬사를 담아 그 놈들을 다 정리하고, 직접 그녀를 붙잡아 십자가에 박아 넣었지.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친우를 이렇게 만든 악녀니까. 벌은 받아야지.”
이안은 그를 향해 천천히 기어나갔다. 신음도, 울음소리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그렇게 연약한 그녀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렙터의 병사들과 싸우는 장면과, 그것을 구경하다가 장난감처럼 병사들을 정리하고 그녀를 끌어와 못박는 구스타브를 그릴 뿐. 한번 곱씹을 때마다 굳어가는 팔다리에 열기가 어렸다.
“죄와…. 벌이라….”
“그렇지. 그동안 데스몬트 자네가 죽인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인가? 무고한 사람은? 천 명? 이 천 명? 설마 따듯한 침대에서 사람들의 축복 속에 눈을 감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크흐, 크흐흐흐…. 맞아. 참으로, 그 말이 맞군…. 크흐흐흐….”
구스타브의 발치까지 기어간 이안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그의 품에 안기듯 매달렸다.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 바로 앞에 오는 위치로, 마치 죽여달라는 듯.
“꿈을 꾸었다, 구스타브…. 어쩌면 그녀의 곁에서….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자네 인생 최악의 실수였지.”
“크흐흑, 크흐흐흐! 맞아…. 기천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내가 평화로운 삶을 꿈꾸다니, 양심이 없었지…. 난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게 맞아.”
꾸우우욱-
휘청거리던 이안의 머리가 총구에 기대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세상을 물들인 다채로운 색깔들이 다시 회색으로 일그러져가고 있었으니까.
“죄인은, 죽는 게 맞아.”
단 하나. 한가지 색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붉은 색.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그녀의 붉게 물든 원피스처럼.
힘없이 매달린 이안의 손아귀가 갈퀴처럼, 부서질 듯 구스타브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손가락에는, 작은 안전핀이 걸려있었다.
“이… 미친 자식이!”
“죄인은, 비참하게 죽는 게 맞아!”
이안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놈의 목덜미에 이빨을 들이밀었다.
머리를 노리던 총구가 불을 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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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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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언덕 위에 작은 폭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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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끼이익-
“아, 일어났나? 그냥 묻어버릴까 했는데. 생각보다 명줄이 질긴 친구로군.”
이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싸구려 백열등과 피투성이 녹색 천, 수술 도구로 가득한 곳이었다.
“어, 으어어….”
“아아, 말하지 마. 아직 윗 턱뼈에 임플란트 해놓은 부분이 좀 헐거워서. 어차피 하관을 연결 안 해서 말도 못하겠지만.”
드르륵, 드르르륵!
은빛 카트에 잔뜩 실린 피 묻은 공구를 고르던 남자는 투덜거리며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재수 옴 붙었지. 이제 막 은퇴하고 새 삶을 살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 블럭 너머에서 폭발에, 총성에, 렙터의 시꺼먼 놈들까지 우글거리질 않나. 뭔 일인지 알아보려고 주변에 숨어서 좀 살펴봤지. 자네, 그 코트 입은 놈이랑 같이 죽으려고 했지?”
“….으으, 어어으.”
이안은 그의 왼쪽에 걸려있는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깨진 거울 속에는 턱이 날아간 자리에 축 처진 혓바닥과 온갖 보철물이 잔뜩 붙어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게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 한참 걸렸다.
“저어기, 언덕 옆에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지. 자네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머리를 노리고 있던 매그넘이 턱을 날려버렸지.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에 푸른 빛이 번쩍인 것을 보니까 그 코트 입은 놈, 반응성 실드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야. 덕분에 폭발력이 확 죽었지. 자네가 갈비뼈 몇 대 부러지고 파편 좀 박힌 정도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석 덕분이란 말이지. 그 코트 쪽은 자네보다 더 다친 것 같지만, 살아는 있더군. 그 파충류놈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놈을 차에 실어 갔지. 나는 놈들이 다 떠난 것을 보고 네놈을 데려왔고.”
“어으으, 으어어….”
“나? 나도 왜 이렇게 애썼는지 몰라. 큭큭큭! 이제 사람 좀 그만 죽이고 새 삶을 살아보자, 잃어버렸던 의사의 꿈을 펼쳐보자! 하는 순간에 숨이 깔딱대는 반 시체가 눈 앞에 나타나서 그런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별 뜻은 없어.”
우진은 턱이 날아간 남자의 보철물을 약간 더 조였다. 마취제 같이 귀한 물건은 없어서 그냥 쌩으로 돌렸는데, 남자는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거? 자네 자는 동안 그 집을 좀 정리했지. 쓸만한 게 있나, 살펴보려고 했는데 불타고 터지고 온갖 지랄이 난 덕분에 쇳쪼가리 몇 개 건진 게 전부였어. 그건 그 중에 그나마 쓸만해 보였던 물건이고. 혹시 그쪽 물건인가?”
이안의 손이, 트레이 위의 그을음 가득한 쇳조각을 움켜쥐었다.
그의 물건은 아니었다. 첫 번째 납치 시도가 있었던 날, 이안은 총기를 극도로 혐오하는 그녀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서 이것을 쥐여주었다.
‘싫다니까요!’
‘몰리. 누군가를 죽이라는 게 아니야. 그저 당신을 지키기 위해 위협하는 용도라니까?“
‘실탄이 들어있잖아요!’
‘이, 이건…. 일종의 장식 같은 거야! 자, 봐! 우리 이름도 새겨놨어! 장난감처럼 보이잖…’
‘꺄악! 더 싫어! 아니,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총 같은 것에만 매달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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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라도 그녀가 스스로를 방어할 물건을 갖고 있길 원했다.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고른, 장난감 같은 권총. 손잡이에 이안과 몰리의 이니셜 I,M이 새겨진 데린저.
찰칵!
훤히 드러난 입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빈 공이가 허공을 갈랐다. 탄환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쯧쯧쯧. 기껏 살려놨는데 자살이라니. 배은망덕한 놈이로군. 빈 탄환이야. 그거 주인이, 안에 두 발 들어있는 탄환의 화약을 뽑아놨더라고.”
남자의 말에, 이안은 데린저의 약실을 열어보았다. 뒤가 뻥 뚫린 구릿빛 탄피 안에는, 화약 대신 종잇조각이 들어있었다.
[한 번 더 생각할 것!]작은 쪽지와, 화약 대신 들어있는 캡슐형 지혈제.
그녀의 글씨였다. 한 번 더 생각하라니. 도대체 무엇을?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끄흑! 꺼흑! 끄흑흑! 크흐흐흐! 어어어! 크흐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선물한 총을 무슨 독극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만지다가, 탄환을 꺼내서 화약을 덜어내는 그녀의 모습이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세상이, 이 세상이 너무나도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이름과,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텅 빈 탄환. 지혈제. 그녀의 메세지는 명확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볼 것.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그녀가 병동에서 죽어가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했던 것처럼.
“….좀 진정이 되면 부르시게. 옆에 종을 매달아 뒀으니.”
“크흐어허허! 흐으으! 흐하하하! 흐으으으!”
그날, 렙터가 떠나간 작은 분지의 쉘터 안에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광소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이안은 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안은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우진은 구스타브가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러니, 내게도 아직 살 이유가 남았다. 죽는 것은, 내 손으로 만든 모든 과오를, 렙터 소사이어티를 없애버린 다음에 한 번 더 생각해볼 것이다.
****
달칵.
이안은 테이블 위에 데린저를 열었다. 작은 쪽지와 지혈제가 든 탄환이 하나, 그의 이름이 새겨진 새 탄환이 하나.
“그렇게 해서, 나는 살아남았지. 많이 죽고 싶었지만 아내의 유언이 그때마다 날 붙잡더군. 우진 영감님이랑은 그때부터 같이 다녔어. 영감님이 43구역에 병원을 차리고, 나도 거기 자리잡았고. 그녀 말대로 세상에는 좋은 게 참 많더군. 지금은…. 나름 극복했다고 생각해.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위에 다른 것을 제법 많이 쌓아 올렸으니까.”
“쿨쩍!”
“그리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 이거, 나도 모르게 감상적으로 되어서는….”
“패에엥!”
“….뭐하냐?”
“으어어어어! 너, 너무 슬픈….크흐응!”
“괘, 괜찮아! 넌 아주 멋진 녀석이니까! 분명, 형수님도 하늘에서 너를….으흐윽!”
장내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어있었다. 한참 전부터 훌쩍이던 벡스는 말라붙은 눈물자국과 함께 잠들어있었고, 에젤은 아예 대성 통곡을, 가까스로 버티던 교수도 마지막 부분에서 터져버렸다.
“크흐흐흐. 적당히 할 걸 그랬군. 뭐, 재밌게 들었다니 다행이고. 이제 정리하고 들어가자고. 어이, 코듀로!”
“허어어어엉-! 새, 새주인- 흐어어엉-!”
“뭔 기계가…. 얘들 상태 안좋으니까 뒤처리 좀 부탁한다. 난 들어갈 테니까.”
“명령, 완벽하게, 흐윽, 편히 주무십, 크흥!”
이안은 고개를 흔들며 눈물바다를 뒤로하고 쉘터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손에는 데린저를 소중히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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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직- 치지직-
[EZ-007. 수신 양호. 대답해라, EZ-007]“크흐응! 보, 본부. 여기는 에, 에젤. 수신 양호, 크흥!”
[확인. 작전 경과는 어떻게 돼가는지, 상세하게 보고-]“훌쩍! 몽부장님…. 우리…. 우리 그거 지웁시다.”
[뭐, 뭣…. 야, 이거 기록에 남는 거야! 이름 부르지 마!]수화기 너머에서 당황한 랄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행정부를 나와 그 난리통 속에 낑겨 세 사람의 뒷풀이에 끼어든 목적. 에젤은 그들의 친구였지만 순수하게 술이나 마시러 가기엔 랄프와 그가 발견한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니까 그 기록을 지우자구요! 확인 결과! 메탈죠- 이안은!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하고, 불쌍한! 그런…. 남자니까!”
[야! 그렇게 함부로 말할 게 아니야! 스웜 알파라고! 렙터의 최고위 간부란 말이다! 그것도 실종됐던, 돔에서 그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비밀스러운 남자! 내가 그 장갑차에서 통신 기록 뽑았다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지금 당장 BDSM의 쉘터 위로 폭격을 날려도 될만한 정보란 말이다!]당연한 얘기지만, 돔이 노획한 장갑차 중에는 이안이 솔 아마르와 통신을 했던 장갑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의 장비를 노획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그 장비에 남아있는 적의 정보를 추출하는 것이다. 랄프는 정석대로 행동했고, 이안과 솔의 대화를 들었으며, 당장 총장에게 달려가려던 찰나 에젤에게 걸리고 말았다.
‘놔 임마! 이건 친분으로 덮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아니, 그놈이랑 이놈이 같은 놈이라는 증거 있습니까! 그 뭐시야, 블러핑! 블러핑일 수도 있잖아요! 박교수가 많이 쓰는 그거!’
‘대화 내용을 봐라!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그럼 내가 알아볼게요! 마침 가서 술 한잔 한다니까, 한번 제대로 된 속내 한번 털어보고 판단하자구요!’
그렇게 해서 에젤은 이 세 사람의 술자리에 끼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과거를 작은 녹음기에 담아, 이안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위해.
치직-
통신기 너머로, 에젤이 몰래 녹음해온 이안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취해서 약간 발음이 흐트러진, 한 남자의 인생이.
[…..]“이안 데스몬트, 애쉬필드라 불리던 남자는 그날 죽었어요. 여기 남아있는 건 술 좋아하고, 담배 좋아하고, 크흐흐 하고 이상하게 웃는 메탈 죠란 말입니다.”
[….씨발. 너랑 얽히는 일은 어째 단 하나도 깔끔하게 끝나는 게 없으니.]랄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다. 너도 들어가서 자라.]“부탁드립니다, 몽클라르 부장님.”
에젤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 있는 랄프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부탁이라니. 감찰부 막내 주제에 최다 시말서 달성이라는 기가막힌 업적을 달성한 개쌍 마이웨이의 화신 같은 에젤 레이든이, 부탁이라니.
파삭!
[….나중에 크게 갚아라, 에젤.]랄프의 손아귀에서, 조각난 데이터 칩의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