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20
Chapter.9 스타 폴(4)
***
누군가 말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고.
펠라스에서 한참 떨어진 언덕 위에서 정확히 하루 전에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를 문자 그대로 ‘갈아엎고’ 있는 뮤트들을 보며, 교수는 시름에 젖어있었다. 그들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기 전까지는.
챔버 메이드를 보고 후퇴한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 만에, 교수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제가 도착한 것이었다.
“야, 야! 보르카! 저거, 저거 사제 맞지! 내가 막 멘탈이 나가서 헛것이 보이고 그런 게 아니지?”
“맞바람에 희미하게 교단의 정향 냄새가 섞여 있군. 사제가 맞는 것 같소. 옆에 있는 자들은…. 확실하진 않지만 로드릭의 정규군 복장으로 보이는군.”
“예에에스으으으!!”
교수는 보르카의 확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제기랄! 그래! 애초에 이렇게까지 벨런스가 안 맞으면 말이 안 되지! 못해도 나흘은 넘게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벌써 도착하다니!”
흑마법사와 전투가 있었던 마을에서 5일 거리에서 챔버 메이드를 확인했고, 온종일 후퇴했으니 현재 일행은 마을에서 4일 정도 전력으로 이동한 거리에 머물고 있었다.
마을에서 헤어진 마법사들은 하루 거리를 되돌아 갔으니 토브룬에서 여기까지는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마법사가 도착하자마자 사제들을 보냈다고 해도 최소 5일은 걸려야 하는데, 저 사제 무리는 하루 반 만에 그들의 눈앞에 도착한 것이다.
‘되돌아간 마법사들의 소식을 듣고 움직였으면 불가능한 속도지만, 미리 보냈다면 얘기가 다르지! 서부 전선 쪽이 일찍 정리가 된 거야!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정도로 여유가 생긴 거라고!’
그래, 솔직히 내가 그동안 이 게임에 당한 게 많아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 없던 물량이 갑자기 솟아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인과관계 하나는 변태같이 빡세게 설정된 이 게드로이츠의 게임에서 그런 ‘기적’같은 전개는 절대 불가능하다.
‘좀 과하게 행복회로 돌리는 것 같아서 이런 가정은 배제하고 있었지만…. 저 병력이 서부 전선에서 후퇴한 거라면 설명이 되잖아? 그래! 그냥 기사단도 아니고 무려 [기사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로드릭의 근위 기사단 + 정규군이라고! 심지어 로드릭에는 그 삼해(害)라고 불리는 또라이들 중 하나인 로드릭 수도 방위기사단 캐슬 나이트도 있고! 눈이 뒤집힌 무자비의 성기사들도 있고! 생각해보니까 물량 딸려서 네임드랑 특수개체만 겨우 뽑아낸 뮤트가 정면으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하나가 설명되고 나니 나머지가 착착 들어맞았다. 온갖 수작을 부린 끝에 지금이면 됐다, 생각한 여왕이 잘못된 파워게임을 걸었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여왕은 아무리 네임드가 많아도 정공법에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부터라도 물량전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챔버 메이드가 저기 있고, 새로 생산된 것이 아닌 패주한 뮤트의 주력군이 마지막 희망인 챔버 메이드를 지키기 위해 펠라스에 틀어박힌 것이다!
아아아. 보인다 보여! 당당하게 개선하는 샬롯과 근위 기사들! 패주하는 뮤트! 없는 자원으로 아등바등 살아남겠다고 나무뿌리와 흙을 파먹으며 저급 뮤트를 양산하는 여왕이!
‘아아, 그래. 이게 게임이지. 생각보다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생각보다 잘 풀리는 일도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지금 오는 사제들은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거야. 어쩌면 내가 지나온 길로 벌써 뮤트 토벌군이 벌떼처럼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악마를 잡은 용사니까 내게도 지휘권이 어느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지휘권만 주어지면 투란 때처럼 멋지게 공을 세워서 작위도 받고, 뮤트도 때려잡고, 여유 생기면 하이드 분리하러 드래곤이나 엘프도 찾아가 보고, 혹시 동부 대사막의 주술이 먹힐 수도 있으니까 그쪽 고대신도 찾아보고, 락샤사도 만나고…. 아아, 모험이다. 골치 아픈 생존 경쟁이 아니라, 진짜 즐거운 게임과 가슴 설레는 모험이 날 기다리고 있어….!’
“헤에…. 헤헤헤헤….”
“대장. 침 떨어지오.”
“응? 아아, 응.”
츄르릅!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최선의 준비를 하라는 훌륭한 명언도 있지. 하지만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 [압도적인 네임드 + 압도적인 물량]은 정말 최악의 맨 밑바닥이잖아? 아무리 내가 팔자가 사나워도 세상일이 그렇게 안 풀릴 수는 없다고. 밖에서 고생 많이 했잖아. 원래 떡락 다음에는 반등이 있는 법이지. 나쁜 생각 하지 말고, 쉽게 찾아오지 않는 행운을 최대한 즐기자!
교수는 멍청한 표정을 고치고, 침 자국이 묻은 입가를 벅벅 닦고 먼지 묻은 옷을 탁탁 털어낸 다음, 뭔가 멋있는 무기 같은 게 없나 살피다 맨손 격투를 선택한 것을 한탄하며 되는 대로 성물이라도 잘 보이게 목에 걸었다.
지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무리는 광명 교단의 사제들이다. 가뜩이나 우리 파티는 자살특공대 취급이라 입지도 약한데 이런 멍청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토벌군의 지휘권을 조금이라도 더 이양받으려면 최대한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남들보다 먼저 적진의 가장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길을 개척하고 있는, 그런 용사의 모습을!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교수가 최선을 다해 꽃밭을 노니는 정신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동안, 절박해 보일 만큼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온 사제들이 교수 일행의 앞에 도착하였다.
촤아아악-!
“허억, 허억! 광, 광명 교단의, 빛을 섬기는 수도사 디마누스, 허억! 입니다! 귀하가 혹시-”
“라투라 로 하람. 광명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형제님. 맞습니다. 제가 로 하람의 뜻을 받들어 이 성물 ‘넬피아의 빛’과 함께 적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을 밝히는, 용사 교수입니다.”
바로 전에까지 헤벌쭉한 얼굴로 침이나 흘리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중한 모습. 교단 식으로 한쪽 가슴에 올린 손과, 그 손을 내리며 자연스럽게 꺼내 드는 성물까지.
‘캬,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군! 역시 사람은 긍정적이어야 해! 행복하면 뭘 하든 잘된다니까!’
누가 봐도 ‘신실한 용사’의 모습을 연기하며, 교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자신의 연기 실력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마치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반듯한 모습이 사제는 물론 그 뒤의 병사들에게도 먹혔는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장식이 달린 갑옷을 입은 병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나섰다.
“오오오, 용사님…. 크흑, 흐으윽!”
털썩!
음. 약발이 과하게 먹혔군. 평소에 신실했던 병사인가?
교수는 그의 앞에 무릎 꿇은 병사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두 팔을 뻗어 그 어깨를 감싸 안았다.
“허허허. 일어나시지요, 병사님. 저는 누군가를 제 앞에 무릎 꿇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
“용사니이이임!! 로드릭을 구해주십시오오오!!!!”
“….예?”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상하다. 느낌이 좀 많이 쎄한데. 이거 아무리 봐도 감동해서 우는 게 아니잖아. 눈에 핏발이 올올이 선 게 아주 피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라고.
행복의 나라에서 꽃밭을 거닐던 교수의 정신이, 차츰 현실 세계로 내려오기 시작하며 극복된 정신쇠약이 강조해주는 정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눈앞에서 대성통곡하는 병사. 대충 십인 대장쯤 되어 보이는.
· 혀를 쑥 내밀고 침을 질질 흘리며 헐떡이는 말들. 쉬지 않고 달려왔음.
· 앞에 무릎 꿇은 병사들 만큼이나 침통해 보이는 사제와 다른 병사들의 표정.
· 로드릭을 구해달라. 보통 구해달라는 단어는 위기에 빠진 대상이랑 같이 씀. 로드릭이 위기에 빠졌다?
‘아니야. 아닐 거야! 하, 하하하하, 그럴 리가 없지. 거기 사람이 몇 명인데. 전력 차이가 몇 배는 될 텐데!’
교수가 머릿속에 차츰 윤곽을 드러내는 현실을 마구 부정하는 사이, 병사는 땅바닥에 머리를 쾅쾅 박아대며 말을 이었다.
“서부전선이, 서부전선이이이이!!!”
‘안돼, 말하지 마 제발!’
“함락되었습니다!!! 적들이 킹스랜드로 향하고있습니다 용사니이이임!!!!”
.
.
.
.
.
털썩.
좌중을 감싸는 침묵 사이로, 교수가 병사를 끌어안으려던 자세 그대로 쓰러지는 소리만 들렸다.
졌단다. 그 천하에 무능한 새끼들이, 로드릭 전역에서 박박 끌어모은 병력을 다 데리고 나가서 졌단다!
‘하이드…. 그냥 평생 같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냥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어디 다치지 말고 돔의 끝내주는 신약이 내 몸을 고쳐줄 때까지 사는 거야….’
“하… 하하하하….”
“요, 용사님?”
“용사? 요옹사아아???”
툭!
파앙!
“어, 어어어어!”
“요, 용사님! 성물이!”
용사 같은 소리하고 있네. 광명 교단 본단이 킹스랜드에 있는데, 교단이 통째로 날아가게 생겼는데 용사가 대수냐!
눈이 뒤집힌 교수가 던져버린 성물이 파공음과 함께 저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졌다.
“안 해. 용사고 나발이고 다 때려쳐! 세상 무능한 병신 새끼들이 거기까지 말아먹으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 다윈상 후보 지망생 같은 새끼들아아아!!!!”
펠라스 인근 조용한 언덕 위에, 한순간에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불우한 게이머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말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이들은 말한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실이 있었다고.
천국에서 추락한 정신이, 현실의 바닥을 뚫고 나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절그럭.
“….찾아왔수다.”
“으으으음…. 로 하람의 손길이 어린 귀하디 귀한 성물을 그리 함부로…. 이런 불경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깨끗한 손수건에 성유를 뿌려 넬피아의 빛을 박박 닦는 수도사를 보며, 교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바탕 쌍욕을 해댄 다음, 교단과 연락을 위해서는 성물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보르카랑 같이 뛰어가서 저- 멀리 바위에 박혀있는 성물을 도로 가져왔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도로 담을 수는 없는 노릇. 교수를 보는 수도사의 눈은 짜게 식어있었다.
“….빛은 항상 곧게 뻗어나가는 법입니다, 형제님.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감히 로 하람의 은총 앞에서 불경을 입에 담다니….”
“빛도 물에 들어가면 굴절되는-”
“어허!”
“넵. 죄송합니다.”
제기랄. 행복회로 활활 태우다가 한 대 제대로 후드려맞아서 그런가, 밖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이성을 제대로 잃었다. 저저저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보라고. 내 이마에 ‘이단’ 이라고 써 붙여놔도 저렇게 보진 않겠네.
벌써부터 교단에 돌아간 저 대머리 수도사가 ‘용사 교수의 불경한 행위’에 대해 몇 시간이고 떠들어대는 것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건 일단 교단이 남아있을 때 생각할 문제고. 비록 우리 집이 초상집으로 변신하기 일보 직전이라지만 어쨌든 통신병이 왔으니 상황은 알 수 있게 됐다.
흙먼지와 돌가루가 잔뜩 묻은 넬피아의 빛이 다시 예전처럼 빤딱빤딱해지자, 그것을 조심스럽게 손 위에 올려놓고 신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로 하람께서 말씀하시길,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굽어 살피사, 훗날 그분의 옆에 서게 된다면 그와 같은 높이에서 세상을 보게 되리라 하셨다.”
마법의 주문과는 다른,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한 듯한 성령마법. 수도사의 말과 함께 주변을 맴돌던 성광이 넬피아의 빛으로 흘러 들어가며 한층 강한 빛이 되어 주변을 비췄다.
우웅-
그 빛 한가운데에서 익숙한 얼굴의 법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라투라, 로 하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용사님.”
“라투라 로 하람. 글쎄요. 내 정신건강까지 생각하면 그리 건강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 말에 동의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세나디스 주교님.”
빛무리 속에 영상으로 나타난 세나디스는, 교수의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예, 저희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만나기는 했네요.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소식이라….”
쯧.
‘담배라도 있었으면 좋겠군.’
세나디스의 말에 교수는 저도 모르게 치미는 울화를 가라앉히며 습관처럼 왼쪽 손가락으로 손 마디를 벅벅 긁었다.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아야 하니 뭐라도 신경을 돌릴 게 필요했다.
“졌다고 들었습니다. 로드릭의 전 병력을 싸그리 끌어모은 서부전선에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니고 무려 근위기사에 궁정 마법사가 포함된 대군이었으니 기습에 허무하게 스러졌다고는 말하지 마십쇼.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니까.”
“기습은 없었습니다. 자비의 교단과 저희 교단에서 모인 성기사들, 기사의 왕국 로드릭 전역에서 모여든 우수한 기사들과 수도의 캐슬나이츠, 정규군, 그리고 근위기사단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양측 모두 전력을 다해 부딪혔습니다.”
“그건…. 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양측 전력의 차이가 몇 배인데 그걸….”
“못해도 여덟 배는 넘었지요. 아군에 비해, 뮤트의 머릿수가.”
쿠웅!
이게 무슨 소리지? 아, 내 심장 떨어지는 소리구나. 허허, 이것 참.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자꾸 떨어지는 게, 아주 대못으로 콱 박아서 뒤져버리고 싶네 정말!!!
여덟 배. 그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정확히 셀 수는 없었을 테니 최소한으로 잡은 숫자가 여덟 배라는 소리다. 급하게 끌어모았다고는 해도 로드릭이라는 한 국가 전체의 병력을 끌어모은 것에 여덟 배. 이미 자원 부족을 극복한 것을 넘어서 아주 남아돌도록 뽑아내고 있었다는 뜻이다.
화면 너머의 세나디스는 교수의 당황스러움을 다 이해한다는 듯, 뭔가 말하려다 집어삼키며 입을 뻐끔거리는 교수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아니, 그….. 그럼 희망이 없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뭔 수로 그렇게 세력을 불렸는지는 몰라도-”
“자비의 성녀. 기억하시나요?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게 된 계기.”
“그….예. 에데오르나가 자비 교단의 본단에 침입하여 자비의 성녀를 납치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신앙심을 훔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자비의 성녀, 이레네 아그리콜라를 잃은 것은 인류 측의 뼈아픈 손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능력은 결국 자비의 여신 ‘에리니에스’에 대한 신앙심과 그 총애. 그로 인해 발현되는 대단위 신성 마법이다. 뮤트 여왕이 상대방의 체액이나 신체의 일부를 통해 그 특성을 훔칠 수 있다고 해도, 신앙심을 훔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심은 물리적으로 빼앗거나 옮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대마법사를 납치해갔으면 [마력적성(극대)] 같은 특성이라도 넘어갔겠지만, 성녀는 기껏해야 [순수], [만인의 사랑을 받는] 같은 쓸데없는 특성만 잔뜩 가지고 있으니. 납치됐다고는 해도 이렇게 판을 완전히 박살 낼 정도는 아닐 텐데?’
“그게,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뮤트는 저희 생각보다 더 진화한 생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설마, 에리니에스의 신성력을 뮤트가 획득했다는….?”
세나디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훨씬 나쁜 상황이에요. 놈들이 납치해간 자비의 성녀를 통해, 신과 신자의 관계에 대해 학습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니까. 이틀 전, 전 세계의 모든 교단에 동시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세상에 악신이 탄생했으니, 저지하라는 뜻의 신탁이었지요. 전례 없이 명확하고 확고한 의미를 담은 신탁이라 의미를 헷갈릴 일도 없었습니다.”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맞나? 뭐가 탄생했다고? 신? 악신?
교수는 다른 건 몰라도 상황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는 것은 그 누가 와도 이름을 내밀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서부 전선의 패전 소식을 듣고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 그 상황보다 더 최악의 상황. 온갖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수십, 수백까지도 넘게 떠올렸지만 지금 세나디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 한 톨만큼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신앙의 메커니즘을…. 학습했다? 단순히 대상을 포식해서 특성을 쑤셔박은 뮤트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드의 뮤트들은 구원 교단이라는 사이비 종교를 이용해 인간 세력에 첩자를 심었지. 종교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성녀를 납치해서, 그녀의 삶에 깃든 ‘신앙’이라는 힘의 작동 원리에 대해 샅샅이 파헤친 것이다.
“제 어미에 대한 숭배….를 이용해 신앙을 만들어낸 것이군요.”
“네. 기본적으로 모든 뮤트는 여왕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숭배로 바꾸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겠죠.”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렇다면, 뮤트가 생산되는 만큼 그 신도가 늘어난다는 뜻이 아닙니까? 늘어난 신도만큼 여왕의 신력은 더욱 커지고, 그 권능으로 뮤트를 더욱 생산하고! 더 강해지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여 그냥 입 밖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그게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GG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바로 개체의 믿음, 의지에서 만들어지는 1인분 만큼의 세계에 대한 제어권이니까.
교수의 말에, 빛무리 속의 세나디스는 더욱 결연한 표정이 되었다.
“네, 맞습니다. 이제 더는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에요. 한시라도 빨리 여왕을 처단하지 않으면 악신, 퀸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세계를 집어삼키게 될 테니. 지금 킹스랜드를 향해 전 세계의 교단과 왕국에서 보낸 ‘용사대’가 결집하고 있습니다. 용사 교수, 교단의 이름으로 당신을 소집합니다. 킹스랜드로 오세요.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인류의 모든 힘을 집결시켜 악신, 뮤테이션 블러드 여왕을 제거할 겁니다. 부디, 광명이 그 길을 비추길.”
세나디스의 조용한 기도를 끝으로, 성물이 빛을 잃어버리며 통신이 끊겼다.
빛이 사라지자, 패전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침묵이 좌중을 감쌌다.
성직자를 제외한 병사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어려있는 것이, 악신의 발호에 대해서는 로드릭 병사들도 대부분 모르고 있는 모양.
그 사이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던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갑시다.”
“…..”
“아 뭣들 해요! 가자니까! 무려 악신의 군대가 몰려온다는데 여기서 노가리나 까고 있게!”
교수는 멍하니 얼이 빠져서 하나둘 몸을 일으키는 병사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씨부럴, 그래.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고! 내 손으로 판을 주도하는 건 이제 포기했다! 니가 이겼다 왕대가리 뮤트 새꺄! 전략은 때려치고! 파워 게임으로 조져주마!’
마지막의 마지막 희망까지 밟혔지만, 상대가 저렇게 초강수를 둔 덕분에 새로운 활로가 열렸다.
‘월드2의 메인 시나리오, 망자의 왕 처단 이후 악신이라 불릴만한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이라는 명함을 달고 인류를 적대하는 이상, 교단이고 왕국이고 정치적 견제 같은 건 다 내려놓고 힘을 합칠 수밖에 없게 됐단 말이지! 신? 조까라 그래! 우리 쪽은 고릿적부터 신 명함 달고 세상을 쥐고 흔들던 놈이 여덟 명도 넘게 있어! 8 : 1로 조져주마!’
더는 행복하게 게임을 계획대로 풀어나가겠다는 생각을 버린 교수의 눈에서 독기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밖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교수 그 자신도 장수가 아닌 장기 말로서 꽤 쓸모있는 존재였으니까.
판을 만드는 싸움에서는 완전히 졌다. 하지만 지금의 교수는 장수가 아니라 장기 말로서도 쓸모있는 몸. 판의 밖에서 졌으니, 2라운드는 판 위에서 치러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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