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21
Chapter.9 스타 폴(5)
***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아아, 안감독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포기하면 졸라 편해….’
그냥 다 놔버렸다. 열 받아서 놓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놔버렸다고. 스케일이 정도껏 커져야 어떻게 내 손안에서 컨트롤할 생각이라도 해보지, 상대가 신이라는데 한낱 박교수 따위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영웅병에 걸려있었던 거야. 뭐든지 내가 다 해야 제대로 굴러가고, 전부 내가 알고 있어야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발바닥이 까져서 실혈사할까 봐 벌벌 떨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조빱이다! 뮤트님의 신묘한 계책을 꿰뚫어 볼 수 없는 조빱! 으헤헤헤헤!’
– takealook : 애 눈이 맛이 갔는데?
– Jokass :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시발, 솔직히 교수가 이번 시드에서 뭐 잘못했냐? 애초에 간게놈이 웃자고 만든 쓰레기 캐릭으로 여기까지 게임 굴린 게 기적이지. 얘 지금 방송 랭킹을 봐라. 5위야 5위. 무과금 리얼리스틱 랜덤 캐릭으로 골드만 그 돈지랄 사이다패스 영감탱이 바로 밑까지 올라왔다고. 내가 농담으로 맨날 뒤졌으면, 이제 그만 뒤져줬으면 했지만 더는 못하겠다. 개처럼 열심히 하면 뭐하냐고. 터질 시드는 자동으로 터지는데. 개 좆망겜 수준.
– 노루Drug해요 : 어우, 뭔 채팅창에 벽돌을 올렸어. 세 줄 요약좀.
– Jokass : 웃고 즐기기엔 게임이 불쌍할 수준까지 와버렸다. / 방송 랭킹이 그 노력을 증명한다. / 좆망겜 시발
– 노루Drug해요 : ㄱㅅ
– 고래가난다요 : 어쩌면 개발자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 딱 보니까 ‘어, 저렇게 키우면 다음 월드까지 쑥쑥 밀겠는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막 운영자 권한 같은 거로 게임을 조져놓은거임. 캐릭터 만들 때 현질로 추가옵션 졸라 넣으면 벨런스 패치돼서 절대 못 깰 만큼 시드가 씹창나잖음. 그거 좀 만지면 이렇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남바쓰리 : 킹리적이다. 올 클리어 시 게드로이츠 컴퍼니 좌표 제공은 공수표 였던거임. 클리어 시킬 생각이 없었던 거지.
– 하이웨이나초맨 : 좋게 보자고. 교수도 방송인으로 돈 잘 벌었을 거고, 지금 방송 랭킹이 높아진 이유도 다른 랭커들이 전혀 플레이하지 못한 새로운 루트가 개척되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아마 이번 교수 플레이를 발판으로 토끼겅듀 라던가, 천류제같은 뉴타입 랭커들이 새로운, 파밍 빵빵하게 잘된 3월드 클리어 시드를 만들 수 있겠지.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다고 봄.
– 흥안만두 : ‘이번 교수 플레이를 발판으로’ㅋㅋㅋㅋㅋㅋㅋ 발판행ㅋㅋㅋㅋㅋ
– professor : 아직 안 죽었어 썅놈들아.
– 뉴트리아지나 : 뭐야, 시체가 말도 하네.
– Jokass : 저승에 번호표 뽑아놓고 줄 서 있는데 그게 죽은 거랑 뭐가 다름.
‘쓰읍. 이 인간들은 위로하는 척, 하더니 또 사람 속을 살살 긁네. 태세 전환이 불법 유턴하는 김여사급이야 아주 그냥.’
물론 완전히 포기해서 안 한다는 건 아니고. 넓게 보던 시야를 조금 좁혀보겠다는 의미였다. 하이드 때문에 어떻게든 이 게임을 잘 풀어가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일이 틀어지니까 이젠 될 대로 되라, 뭐 그런 심정이 된 것이다. 그랬더니 어깨에 힘도 좀 빠지고. 지금 당장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확실하게 떠오르고.
“거기 대머…. 흠흠! 디마누스 수도사님? 아까 보니까 메시지 마법에 세나디스 주교님이 비치던데, 그럼 그쪽에도 저희 모습이 보이는 겁니까?”
“예에…. 그렇습니다만….”
오케이, 굿. 양방향 영상통화란 말이지.
“그럼 통신 한 번만 더 걸어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잠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으으음…. 신성력의 잔량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잠깐이라면야….”
“오트만님? 원견 마법 부탁드리겠습니다. 관찰 위치는 어제와 동일한 곳으로.”
“알겠네.”
잠시 후, 성물에서 빛무리가 쏟아져나오며 다소 언짢은 표정의 세나디스가 나타났다.
“디마누스 형제님, 지금 수도의 상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텐데요. 용사님에게 상황을 전하고 바로 복귀하라는 제 말이….”
“주교님! 그, 그게 아니라….”
많이 바쁜지, 흐트러진 머리칼로 이런 저런 서류를 확인하며 눈을 흘기는 세나디스. 그냥 두면 바로 끊어버릴 것 같아서 급하게 끼어들었다.
“잠깐 주목! 세나디스 주교님, 이거 보이십니까?”
“이 목소리는…. 교수 용사님이시군요. 이거라면 무엇을….?”
노기가 서려있던 세나디스의 목소리는, 내가 빛무리 속 그녀의 눈동자 앞에 원견 마법의 안구 하나를 들이대자 눈 녹듯 가라앉았다.
“이건….”
“일단 확실히 해둡시다. 처음에 받은 임무, 그거 포기해도 됩니까? 여왕 암살. 나를 고평가 해주는 건 정말 감사한데, 성물 하나로 악신한테 들이 받는거는 좀….”
“그야…. 물론입니다. 현재 용사님의 역량으로는, 죄송하지만 여왕에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으니.”
교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명목상 용사 파티였던거지, 진짜 ‘용사’ 명함 달고 있는 놈은 이쪽보다 한참은 더 괴물이거든. 칼질 한방으로 언덕을 평지로 만드는 놈이랑 나랑 비교하면 내가 좀 양심에 찔리지.
세나디스는 물방울 안구 속의 영상에 보이는 챔버 메이드를 보며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요?”
엥? 뭐야. 한참 설명해야 될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게…. 뭔지 아십니까?”
“교단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습니다만…. 신탁이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와 인접한 국가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개체입니다. 마탑에서 임시로 ‘하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상당한 수의 뮤트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일종의 지휘관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정체를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말끝에 ‘니가? 어떻게?’ 라는 의심이 생략된 질문.
“아, 예. 뭐. 아시잖아요. 제가 또 여왕님이랑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라.”
내가 머리를 톡톡 두드리면서 말하자, 세나디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작 만달리우스의 실험체. 뮤트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알아내셨나 보군요. 역시, 당신은 함부로 버림패로 쓸만큼 가치없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휴우! 이거 되게 편리하네!’
이 마법사의 실험체로 뮤트와 연결됐다는 설정. 이것 때문에 좀 빡쎄게 차별을 당하기는 했지만 내가 현실에서 알아낸 정보를 NPC들에게 전달하는 데는 이만한 방법도 없었다.
그냥 아무 근거 없이 ‘저게 챔버 메이드라는 1급 뮤트인데, 뮤트를 생산하는 공장 같은 겁니다. 사실 저는 네임드가 뭐 나올지도 다 알고, 어떻게 싸우는지도 다 알아요~’ 하고 말해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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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직 마탑의 마학자들도 알지 못하는 사실인데?’
‘어?’
‘이놈! 괴물의 첩자로구나!’
‘악신의 주구다!’
‘이단! 이단! 이단!’
‘죽여라! 불태워라! 찢어라! 빛이 네놈을 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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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인섬니아 크랩 때문에 잔뜩 예민해진 교단이나 왕실 사람들이 대번에 나를 잡아 죽이겠지.
하지만 미리 ‘뮤트에게 감염됐다가 인간의 마음을 되찾은 특이케이스’ 라는 프레임을 달아둔 덕분에 같은 질문이 들어오더라도 ‘내 육체에 새겨진 감염인자가 그것을 들었다! 여왕님이 신성한 칼라를 통해 얘기하셨도다!’ 라고 지껄이면 바로 설명이 되거든.
“그 ‘하녀’라고 불리는 뮤트는 북부의 둥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뮤트를 만들어내기 위한 생산시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오급 정보를 아무 부담 없이 풀 수 있단 말이다.
“생산시설이라면….”
“반쪽짜리 여왕이라고 봐도 좋지요. 섭취한 생물의 특성을 추출할 수는 없지만, 여왕이 보내준 생명 정보를 토대로 뮤트를 만들어낼 수는 있으니까. 저거 그냥 놔두면, 한 달도 안 돼서 이 인근에 저급 뮤트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찰 겁니다.”
“그런…. 광명이시여….”
세나디스가 저도 모르게 묵주를 꽈악 쥐는 것을 보며, 교수는 말을 이었다.
“그런 고로, 저것 좀 잡고 가겠습니다. 복귀 명령 취소해 주십쇼.”
이것 때문에 통신에, 원견마법까지 써가며 세나디스에게 설명한 것이다. 무려 광명 교단 본단이 있는 수도 킹스랜드가 위험한 상황인데, 개인행동 하다가 복귀명령 거부하면 나중에 다 잘 끝난 다음에 ‘사상 불순함’ 같은 이상한 명목으로 잡혀갈 수도 있거든. 교단에서도 논공행상에서 한 명이라도 빠지면 이득이니까. 군대에서 어디 갈 때 보고 하고 가는 거랑 마찬가지지 뭐. 말없이 그냥 가면 근무지 이탈 내지는 탈영이라고.
“….좋습니다.”
마침내, 주교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상황의 심각성과 적 목표물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용사 교수의 단독 행동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교단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디마누스 형제님, 마찬가지로 복귀 명령을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용사님의 곁에서 보필하도록 하세요.”
오! 자율행동 권한에 성직자 한 명까지.
그때, 성물의 빛무리 속에 수행 사제 한 명이 나타나더니 세나디스에게 뭔가 빠르게 속삭이고 지나갔다.
“일단 필요한 얘기는 끝난 것 같으니 통신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밖에 여행자의 신전에서 보낸 용사대가 도착한 것 같아서, 이만. 라투라 로 하람.”
“되게 바쁘신가 보네. 고생하십쇼. 라투라.”
후우욱!
신례를 끝내기도 전에, 성물이 빛을 잃으며 세나디스의 영상이 사라져버렸다.
귀찮은 보고도 끝냈고. 돌아가는 상황도 대충 알았고!
지금 당장 움직이는데 필요할 만큼의 정보와 조치는 끝났다. 이제, 직접 실행으로 옮겨서 변수를 통제하는 일만 남았을 뿐.
짜악!
교수는 크게 손뼉을 쳐 얼이 빠져있는 일행들의 주의를 끌었다.
“자! 복잡한 문제는 다 정리됐고, 쉴 만큼 쉬었으니 움직입시다! 우리 파티는 이쪽! 킹스랜드로 돌아가실 병사님들은 저쪽!”
“그…. 교수? 내가 상황파악이 안 돼서 그러네만, 이쪽이랑 저쪽이 어딘가?”
알드리치의 멍한 질문에, 교수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야 물론 펠라스의 저 득실거리는 뮤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게 이쪽이고, 로드릭 전역의 병사를 끌어모은 것보다 여덟 배는 더 많다는 뮤트 대군을 상대하는 쪽이 저쪽입니다!”
그 대답에 양측 모두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버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지익, 직. 지직-
모닥불이 피워진 흙바닥 위. 여섯 일행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교수가 막대기로 그리는 펠라스의 지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가죠. 미끼랑, 칼.”
“시선을 끌고 그 틈에 요인을 암살한다…. 정석이라면 정석이군.”
“사실 요인 암살이라는 게 걸리지 않는 게 복잡한 거지, 걸리는 것을 상정하고 움직이면 그리 복잡한 것도 없잖습니까.”
대충 상황이 정리되고 ‘용사니이이임! 이러시는 게 어딨습니까아아아!!! 킹스랜드를! 로드릭을 구해주십시오오오!!!’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는 병사를 잘 재워서 수도 쪽으로 보내버린 뒤, 교수는 일행을 아까 그 언덕 위로 데려와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역할부터 좀 나누죠. 칼, 그러니까 진짜 암살자 역할을 할 사람을 정해야 하는데….”
교수는 일행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수계 5위계 마법사. 다재다능함. 체력조루. 노인.
흑마법사, 영혼술사. 잘 모름.
히어로 유닛, 트롤. 튼튼함. 암습 불가. 맷집 좋음. 최근 흑마법사랑 자꾸 붙어 다니면서 뭔가 배우고 있음.
늑대인간. 빠름. 강함. 날렵함. 탄력적이고 조용하면서 신속하게 움직임.
수도사. 말하는 무전기. 꼰대.
‘생각할 필요도 없군.’
스윽!
“보르카 당첨.”
애초에 기도비닉을 유지하고 움직이는 것은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노인 3인방은 제외. 암습이랑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노툼은 당연히 제외. 나도 암습에는 나름 조예가 있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데는 본능과 뛰어난 감각을 가진 늑대인간 보르카가 제격이었다.
“마법사 두 분은…. 오트만 님은 같은 수계 마법사라 어느정도 알고 있는데, 알드리치 님은 뭐가 가능하시죠?”
“크흠…. 본디 영혼술사의 기술은 그 신비와 비밀스러움 속에 있을 때 가장 가치를 지니는 법인데.”
“광명 교단 지하감옥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
“대단위 환혹마법, 약화, 고통저주…. 암살 쪽에 가담한다면 목표 주변의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각을 약화시킬 수 있고, 미끼 쪽에 가담한다면 환영 마법으로 혼란을 유도하거나 분노를 촉발시켜 피아 구분 없이 난전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
오. 생각보다 쓸만하다. 영혼술사라고 해서 언데드 대상이 아니면 큰 힘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장례 조무사는 아니었잖아?
“생각보다 일반 흑마법사랑 활동 영역이 비슷하네요?”
“비슷한 게 아니라 우리 쪽이 원조라니까! 시체나 만지는 녀석들이 짝퉁이란 말이다!”
“음…. 원조라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흑마법에는 직접 전투에 어울리는 마법이 꽤 있잖아요? 저주받은 불놀이나 독성 늪, 시체풍댕이 소환 같은거. 분명 영혼술사도 그런 보조마법 말고 메인으로 쓰는 마법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건 정말로 말할 수 없네.”
“어허어…. 교단 지하의 종소리가….”
“정말로 안된다니까! 함부로 쓸 수도 없는 마법인 데다 입 밖에 내는 순간 금기의 반작용이 온단 말이다!”
“쳇. 그럼 일단 알드리치님도 보조 쪽으로….”
교수는 시스템 창의 메모란에 ‘알드리치, 딱 봐도 쎄보이는 뭔가 있음. 직접전투 가담’ 이라고 써두었다.
“노툼….”
“그워?”
“….은, 알드리치님이랑 같이 가라.”
맷집이 나랑 비슷하기도 하고. 솔직히 여기서 제일 쓸모없는 유닛을 꼽으라면 단연코 노툼을 꼽겠다. 머리가 종족 평균에 비해 좀 과하게 좋다 뿐이지, 전투력 자체는 일반 트롤 수준이니까. 히어로 유닛이라고 떡하니 이름 붙은 것 치고는 과하게 쓸모없는데, 최근 들어 뭔가 성장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우워. 귀신 늙은이. 이것 봐라.”
“음? 오오오! 노툼! 그래, 그거야! 떠돌이 영혼을 복속시켰구나! 아직 계약까지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워억? 복속…. 부하? 아니다. 그냥 말 걸었더니 따라왔다. 그후후후, 영혼 귀엽다. 작고 사나운 영혼.”
“그래, 그래! 처음에는 작은 새나 쥐, 다람쥐 같은 약하고 선한 영혼으로 차츰 익숙해져서….”
“그워? 이거 다섯 갈래로 찢겨 죽은 오크의 영혼. 막 까만 연기 뿌리면서 자꾸 물려고 한다.”
“흐어어업! 그, 그거 이리 내! 그건 원혼이란 말이다! 얼른!”
“궈억. 귀신 늙은이. 공짜 좋아해서 머리카락 밀렸다. 좋은 물건은 돈 주고 사라.”
흑마법사와 전투 이후, 알드리치 옆에 붙어 다니며 하루 종일 그웍, 워억 거리며 뭔가 물어대더니 벌써 저 수준까지 성장했다.
‘생각을 잘못했어. 태생적인 강함 때문에 당연히 전사형 히어로 유닛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트롤이라 그랬던 거고. 진짜 능력은 따로 있었던 거야!’
띠링-!
작은 영혼들을 손가락 사리에 굴리는 노툼을 보는 동안,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알림음이 들렸다. 그동안 게임에 집중한다고 시스템 알림음 거의 다 꺼놨는데, 이렇게 나타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알림인 것 같았다.
[정보 업데이트 : 히어로 유닛 – 노툼 : 당신이 동료로 받아들인 트롤은, 상상 이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암컷 트롤은 같은 종족의 지도나 도움 하나 없이, 종족 고유의 주술 능력을 개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 확인된 특성 : 종합 신체능력 Lv.2(종족) , 자가 치유 Lv.3(종족) , 괴력 Lv.3(종족) , 지능 Lv.9(종족 패널티로 Lv.3 감소판정.), 영혼의 인도자 Lv.8(스페셜)]– 간장게이바 : 와, ㅅㅂ. 지능 9따리였네.
– Jokass : 되게 오랜만에 와서 처음하는 소리가 그거냐. 반갑다 간게야. 죽은 줄.
– 간장게이바 : 몇 번 죽고왔다.
– Jokass : ㅈㄹ.
– 스피드 웨건 : 지랄 아닐 듯. 쟤 돔 사람이잖음. 개고생 했을걸.
– 노루Drug해요 : 아 맞다. 돔 산다고 했지. 너 박교수 봤냐? 진짜 팔에 변종이랑 공생하고있음?
– 남바쓰리 : 교수 형님 돔에서 나오면서 겁나큰 퍼레이드 했다는데, 그때 못봤슴까?
– 간장게이바 : 나, 나….난 아무것도 몰라! 박교수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 스피드 웨건 : 저 미치광이가 저럴 정도면 엠바고 개 빡쎄게 걸려있나봄. 돔 분위기도 생각보다 살벌한가보구만.
– 간장게이바 : 게, 게임 얘기합시다, 게임! 지능이 9에 스페셜 능력치까지 있네! 와! 히어로유닛! 넘모 머시따!
– 노루Drug해요 : ….진짜 고생 많이 했나 보다. 애가 병신이 돼서 돌아왔네.
– 뉴트리아지나 : 근데 지능 9면 개 높은 거 아님? 쩌어기 블루라인 한참 서쪽에 자유무역지구, 거기 5판관이 평균 지능 능력치가 8렙 아니냐?
– Jokass : 종족 패널티로 실질적 지능은 6렙이지. 6렙만 해도 어지간한 소국의 책사 정도는 되지만.
한쪽으로 밀어둔 시스템 창을 열어보니 노툼의 정보와 함께 대화방의 채팅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왔다.
– professor : 영혼 인도자 뭔지 아는사람~
– Jokass : 주술 특성임.
– professor : 너 말고~
– 노루Drug해요 : 영혼을 인도함.
– professor : 나갈래?
– 스피드 웨건 : 영혼 인도자. 동부 대사막 출신 주술사나 예언자 클래스, 아주 가끔씩 흑마법사 클래스에서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남부 대수림의 부족 주술사들 사이에서 발현하는 대표적인 주술 특성. 마법사가 전체 직업의 2.5%라면, 주술사는 0.25%에 가까움. 플레이했던 사람중에 생존자가 없어서 데이터가 많이 없음. 일단 월드 2에서 발견된 트롤 우두머리 주술사가 영혼 인도자 5레벨 이었던 것으로 확인됨.
– professor : 항상 여러모로 신세 지고 있습니다, 스피드 웨건님. BDSM 쉘터 위치는 정식으로 공개됐으니 언제 한번 들러주신다면 성심껏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 스피드 웨건 : …..
– 스피드 웨건 : 비즈니스 얘기는 따로 메시지로 함. 일단 알겠음.
“오. 진짜 오시나?”
그냥 감사한 마음에 얘기했는데 반응이 괜찮네? 나가서 연락해봐야겠다.
일단 노툼은 주술사 확정. 그것도 매우 희귀한, 트롤 주술사다.
‘우두머리 주술사가 영혼 인도자 5레벨이었으면, 8레벨 노툼은 얼마나 재능충인거지? 지능도 그냥 머리가 좋은 수준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아예 다른 종족의 언어를 그냥 귀동냥으로 듣고 익힌 거 아냐? 우리가 강아지 짖는 소리 몇 년 듣고 개처럼 말할 수 있게 된 수준이라고!’
파랗게 빛나다가 갑자기 시커멓게 활활 타오르는 영혼을 손 위에서 가지고 놀며 히죽거리는 노툼. 영혼술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흑마법사와 전투 이후 겨우 6일만의 성과다. 애물단지가 아니라 보물단지야 보물!’
“알았지? 무조건 알드리치님 옆에 딱 붙어서 같이 움직여라? 응?”
“그워. 큰 작은 인간.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다. 말 듣는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안전한 곳에 놔두고 싶지만, 그랬다간 [소외감],[인종차별당함],[소극적],[전투 거부] 같은 온갖 부정특성이 생길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옆에 딱 붙여놓고, 성장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메모 : 노툼. 일반 전사. 포텐 만렙 주술사. 알드리치랑 같이 암살조 지원.
“자, 그럼 정리 끝! 나랑 오트만 님이 적의 시선을 끄는 동안, 알드리치님이랑 노툼이 보르카를 보조해서 ‘하녀’의 목을 딴다! 질문?”
스윽!
말이 끝나자마자 오트만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한가지 이해가 안 가는데…. 나야 전장 보조니까 좀 안전한 곳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적들의 공세를 받아내는 교수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어…. 그냥 두들겨 맞을 생각인데요?”
교수는 한껏 심각해진 오트만의 표정을 보며 킬킬거렸다. 이 영감, 내가 목숨을 바칠 각오라도 하고있는 줄 아는군.
“믿고 그냥 따라오십쇼. 나도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솔직히 저 대군을 어떻게 이길 자신은 없는데, 적어도 살아서 붙들어놓는 정도는…. 저 숫자의 배가 있어도 가능하니까.”
“어떻게 말인가?”
“흐흐흐흐. 마법사 아닙니까. 한번 상상해보시죠.”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심각해진 오트만의 얼굴을 보며, 교수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광폭화의 재생력이 3급 이상의 고위 뮤트의 파괴력을 버틸지 미지수긴 한데…. 준비해둔 방법이 통한다면, 적어도 대 뮤트전에서 나 이상으로 유지력이 높은 존재는 이 3월드 안에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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