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28
Chapter.9 스타 폴(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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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sset3315 : 공지 – ‘professor’ 박교수님에 대한 지역 대화방입니다. 과도한 선동 혹은 비방은 저희 돔 방송인 지원부서로부터 제재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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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osye2222 : 거 캐릭터가 참 신박하네….
– 섬바디헬미 : 그러게. 자동진행 중에 저렇게 똑부러지기도 쉽지 않은데.
– Nigromaa : 근데 이건 너무 날먹 아님? 캐릭터 자동 돌려놓고 방송하면서 후원도 타먹는다고? 교수 존나 노양심인듯.
– arms5275 : 이런 개호로잡놈의 애새끼가 어디 박교수님 존함을 그따위로 함부로 입에 올리고 있어!
– 아다지오 : 캐릭터 저만큼 키우는 게 쉬운 줄 아냐? 너 같은 조빱 찌끄레기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뚫고 저기까지 키운거란 말이다!
– arms5275 : 쫄아서 GG에 손도 못대본 찐따 새끼들이 꼭 저렇게 말하지! 저런 새끼들은 순대를 꺼내서 목을 매달아버려야 해!
– 세금의 부름17 : 당신의 닉네임과 커뮤니티상의 모든 행적을 확인했다. 겸허히 유언을 준비하라, Nigromaa. 교단이 당신을 찾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새끼들은 내가 게임을 안 하고 있어도 알아서 불타고 있네.”
접속기에 들어오자마자 지역 대화방부터 확인한 교수는, 꺼림칙한 기분을 꾹꾹 눌러가며 2번 대화방으로 들어갔다.
+ Player ‘professor’ 님이 대화방에 입장하셨습니다!
– arms5275 : 저 새끼는 내가 만나기만 하면 아주 가죽을 벗겨서 꼬들꼬들해질 때까지 말려서 술안주로 그냥….
– professor : 안녕하세요. 교숩니다. 묻고 싶은 게 좀 있어서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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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다테 : 오.
– 둥기동 : 리얼임? 진짜 박교수?
– Nigromaa : 찐? 찐교수?
– Hitchi! : 교, 교수씨! 그…. 저도 47구역 근처에 사는 개인 생존자에요! 여, 여자 호, 혼자사니까…. 시간나면 저희 집 발전기 한번 보러 와주세욧!
– 화이트스미스 : 교수님 오셨다!
– 슈여니 : 교, 교수님! 저 42구역 살아요! 근처 오면 메세지 한번만 주세요!
– D.bioTeam : 외람되오나 방문은 도대체 언제쯤 가능하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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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의부름17 : 전부 닥쳐어어어어!!!! 하실 말씀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아아아!!!
뚝!
다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위로 밀려 올라가던 채팅들이 거짓말 뚝 그쳤다. 멈춘 화면 위에 깜빡이는 커서가 마치 내 말을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부담시러워라.’
안 되겠다. 쓸만한 놈 있으면 친분이라도 좀 쌓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냥 할 일만 하고 튀어야지.
교수는 위에 있었던 채팅을 대충 훑어본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professor : 어…. 일단 감사. 별건 아니고, 사람 좀 찾으려고 왔수다.
– 안다테 : 사람을…. 찾아? 박교수가?
다시 한 번 조용해진 채팅창. 그리고, 그 조용함을 뚫고 터져 나오듯 엄청나게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 안다테 : 사람 말입니까?
– bro우니 : 설마…. 이게 소문으로만 돌던 BDSM 공채? 슬슬 세력을 키울 시기라고는 생각했는데….
– 화이트스미스 : 41구역! 커뮤니티 상이라 정확한 정보는 밝힐 수 없지만 7인 생존자 무리에 속한 화이트스미스입니다! 전쟁 전에 금속 가공을 좀 배웠습니다! 기계만 있으면 뭐든 깎아 드릴 수 있습니다!
– 슈여니 :42구역! 개인생존자에요! 30대 초반 미혼 여성입니다! 쉘터에 딸린 작은 온실에서 밀을 키워서 거래소에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도 잘 죽여요!
– 쾌도난마 : 45구역. 24인 스캐빈저 팀의 리더요. 돔처럼 얌전한 놈은 싫고, 렙터같은 또라이도 싫고 해서 정착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지. 이번 BDSM의 행보를 보니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오게 됐고. 이 세상에서 20인 이상인 무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테니, 긍정적인 연락 기다리겠소. 아, 특기는 애들마다 제각각인데, 사람 죽이는거야 당연히 기본이고. 파밍이 손으로 땅 거죽이나 헤집는 일반 생존자들이랑 차원이 다르게 전문적이오. 다방면에 걸친 전문지식을 토대로 건물을 분해해 그 심재를 뽑아내거나, 수집한 스크랩을 분해, 정제해서 거래소에 올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소.
순식간에 자기들끼리 흥분하더니, 갑자기 채팅창이 무슨 면접 자리처럼 자기소개서가 줄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난리가 났구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긴 했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우리 쪽에서 새로운 인원을 구한다는 얘기가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아 서둘러 말을 이었다.
– professor : 그게 아니라, 최근에 우리 쉘터 근처에 찾아온 사람이 여기 있는지 알아보려고 왔다. 누가 자꾸 찾아와서 보호비 명목으로 스크랩 놓고 가서.
– 안델로 : 저, 접니다! 제가 놓고 갔습니다! 인근 지리는 아직 잘 모르지만…. 그 빨간색 엑스표 크게 그려진 건물 파편 있는 곳 아시죠? 그 옆 건물에 자리 잡았습니다!
오. 전에 이런 내용의 채팅을 본 것 같아 혹시나 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찾았군.
– professor : 아, 거기. 쉘터 없으면 그만한 자리도 없지. 잘 찾으셨네. 한 명 찾았고. 또 없습니까? 세 명 이라던데?
– 안델로 : 한명은 제 와이프일 겁니다! 혹시나 몰려가면 습격으로 오해받을까 봐 따로 방문했으니까요.
– professor : 그럼 둘. 이제 진짜 없지요?
뭔가 잔뜩 올라오긴 했는데, 정말 찾아가면 보호 해주냐, 그런 집단인 줄 몰랐는데 실망이다 하는 쓸데없는 사견이 대부분이었다.
– professor : 각설하고, 자꾸 찾아오는 사람이 늘까 봐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우선, 공물이고 보호비고 다 필요 없습니다. 뭘 부담스럽게 자꾸 찾아와서 스트립쇼를 하고 그럽니까? 세상 남사스럽게. 우리 집에 애도 있으니까 앞으로 그러지 마쇼. 교육에 안 좋으니까.
– 안델로 : 하,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그렇게 찾아가는 게 예의라는 글을 읽었는데….
– professor : 개똥같은 소리 하지마시고 앞으로는 오지 마세요. 보호도 안 해주고, 보호비도 안 받습니다. 오늘 여기 찾아온 건 그냥 황무지 국룰에 따라 행동하자고 말하려던 겁니다. 아시죠? 다른 집단 거주지 반경 500m안에 거주 금지. 우린 세 명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황무지 생존자란 말입니다. 서로 갈 길 가자고요. 오케이?
이거 얘기하려고 찾아왔다. 이안 그녀석이 나름의 방법을 강구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오피셜로 이렇게 얘기해주는 게 제일 좋을 거 아냐.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보호해달라고 찾아오는 놈도 없…..
수근수근-
술렁술렁!
– 슈여니 : 저거…. 허락이죠?
– esomak : 어쩜 저렇게 겸손하시고 인자하실까….
– 안델로 : 500m 까지만 개인 영역으로 취급하고, 그 바깥쪽 부터는 그냥 들어와도 된다는 것 같은데요?
– 쾌도난마 : 심지어 보호비도 안 받는다니. 너무 무른 게 아닌가 싶지만…. 설마 47구역 인근에 집단 생존지역이라도 만들 생각인가? 위성도시처럼?
– 아다지오 : 불가능하진 않다고 봄. 45, 46구역이랑 걸친 47구역 끝자락에 위치해있고, 애매하게 돔이랑 거리가 좀 있으니까. 차타면 또 금방이라 거래하기도 쉽고. 47구역은 포화 상태라 새로운 생존자를 받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주변으로 확장되면 여러모로 편하지. 돔 애들은 민간 생존자 늘어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테니 협의하기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고. 게다가 BDSM은 친 돔 세력이잖아? 진짜 되겠는데?
– professor : 아니 시발 내 얘기를 뭘로 들은건데.
– 세금의부름17 : 가겠습니다! 부름에 답하고 말고요! 신도들이여! 짐을 챙겨라! 교주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 거죽 : 47구역에 새로운 상권이라…. 회장님과 얘기해봐야겠군. 분점 정도는 생각해봐도….
– 만멘미 : 가자! 매일 집앞에 쌓인 변종 시체를 치우는 삶도 이제 끝이다!
좆됐다. 알아서 불타오르는 것 같아서 물을 끼얹었는데, 불이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폭발해버렸어! 기름통이었나 봐!
‘….지금이라도 다 죽여버린다고 할까?’
‘….모르겠다. 그래, 좀 북적이게 살아도 좋지 뭐. 500미터라고 분명히 얘기했으니까 헛짓거리하는 놈 있으면 멱을 따서 문 앞에 걸어놓던가 해도 되고.
교수는 어디선가 다운로드 받은 지도를 끌어와서는 벌써 여기가 자기네 자리입네, 여긴 침 발라놨으니 나보다 먼저 자리 잡으면 죽여서 치워버리겠네, 하고 싸우는 채팅창을 보며 조용히 도망쳤다. 난 몰라. 에젤한테 얘기해두면 잘 정리해주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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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아악!
GG에 접속할 때 느껴지는 이 묘하게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 평소에는 좀 역했는데 오늘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대화방에서 분에 안 맞게 어디 리더인 것처럼 공식 입장 표명하다 역풍을 맞아서 그런가. 역시 나는 집단으로 우글거리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는 것 같았다.
‘어디보자…. 밖에서 하루 정도 있다 왔으니 이쪽에선 5일쯤 지났을 텐데. 어디까지 왔으려나….’
“대장.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사물이 분간될 만큼 동기화가 될 무렵, 옆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아. 보르카구나.”
어딘가 걷는 중일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일행이 있는 곳은 뭔가 왁자지껄한 곳의 테이블이었다. 술 냄새에 음식 냄새, 묘하게 코를 찌르는 땀과 이상야릇한 암모니아 냄새….
“여관? 토브룬인가?”
“무슨 꿈이라도 꿨소? 사람이 갑자기 멍해져서는. 킹스랜드에 도착한 지가 언젠데.”
“킹스랜드? 벌써?”
토브룬 까지만 해도 5일 거리였는데. 토브룬과 킹스랜드가 가깝다곤 해도 한 이틀 일찍 도착했네? 뭔 일이 있었나?
교수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옆에 있던 오트만과 알드리치 두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 웃더니,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말했다.
“허허! 생각이 많겠지. 오면서 얘기하지 않았나. 우리 대장님도 나름의 고민이 많은 사람일세. 저 얼굴로 이제 막 스물이라고 해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정말 20대 청년 같은 고민도 하더군! 으허허허!”
“그러게나 말이야! 밤에 야영하면서 저 덩치로 ‘사실 고민이 있다.’ 할 때는 또 무슨 큰일에 휘말린 건 줄 알았지! 설마 그런 얘기일 줄은….크흑큭큭!”
“그우우. 귀신 늙은이. 큰작은인간 놀리지 마라. 짝이 없는 발정기 수컷은 나무 옹이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큰작은인간은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거다.”
토닥토닥.
교수는 노툼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고민? 발정기?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갔단 말인가?
– Jokass : ㅋㅋㅋㅋ야, 찍어, 찍어놬ㅋㅋㅋㅋㅋㅋㅋㅋㅋ
– takealook : 아이고 수령님ㅋㅋㅋㅋ그런 깊은 고민이 있는 줄도 모르곸ㅋㅋㅋㅋㅋ
혹시나 해서 보니, 역시나 이놈들이 확인한 게 틀림없었다.
‘이럴 땐 방송하는 게 참 편해. 나 없어도 모니터링 해주는 사람도 있고.’
– professor : 나 없는 동안 뭔 일 있었냐? 또 사고났어?
– 노루Drug해요 : 아이고! 본체 오셨네! 일은 무슨, 푸흡! 아무 일ㅋㅋㅋ도 없었ㅋㅋㅋㅋ
– 간장게이바 : 아무 일도 없었다.(대충 피투성이 조로 짤)
‘….조졌네.’
있다. 저 반응을 보면, 뭔가 대단히 음습한 게 있었던 것이 분명해!
교수는 도대체 평화로웠어야 할 5일간의 여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필사적으로 생각하며, 서둘러 시스템 로그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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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stem log]
– 이동 : 기승(동료 : 보르카 달룬 / 늑대인간). 이동 경로 맵핑.
– 야영 중 의미있는 담소를 나눔 : 유대감 상승 – 보르카 달룬, 오트만 보들레르, 알드리치, 노툼.
– ‘광폭화 탈력’ 상태이상 회복. 전체 근력 0.4% 상승.
– 이동 : 당글테르 마을 도착. 광명교단 전초기지 입장. 상황보고 및 보수 협상. 흑마법사 처치 및 악마의 피를 흡수한 성물의 성장, 악신의 고위 수하 처치로 인한 교단 공헌도 및 호감도 상승.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협상의 영향으로 주교 ‘하만 아부르테’의 호감도 대폭 하락. 교단 정보부 접근 권한 획득. 동료 ‘보르카 달룬’의 상태가 [친근]에서 [존경]으로 변함.
– 이동 : 토브룬에서 용사의 권한을 이용해 킹스랜드로 향하던 전령의 말과 전달 중이던 서한을 갈취.
– 야영 중 대단히 깊이 있는 개인적인 담소를 나눔 : 유대감 상승 – 보르카 달룬(최대치), 오트만 보들레르, 알드리치, 노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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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다. ‘의미있는 담소’, ‘대단히 깊이 있는 개인적인 담소’ 내 캐릭터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자동 진행은 평소 플레이어의 행동양식에 최대한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내 캐릭터.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마초 마법사. 그런 캐릭터가 타들어가는 모닥불과 밤하늘이 감성을 자극하는, 야영지의 밤에서 친한 동료들과 할만한 개인적인 얘기라면….
“후후후. 대장이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일 줄은 몰랐소. 자신만 기다리는 사막의 여인이라니.”
“[그녀가 가르쳐준 저 별이 향하는 곳에 내 님이 있지. 이름은 락샤샤라고만 알아두시고. 그녀의 본명은 오직 나의 것이니.] 흐허허허! 아주 가슴이 절절하더만! 이 전쟁이 끝나면 다 때려치고 바드나 하는게 어떤가, 교수!”
“입으론 아니라곤 하지만 기대하고 있는 게 온몸으로 전해지더군. 희망을 가지게! 그 락샤샤라는 여인도 사막 왕국에서는 제법 한가락 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정말 킹스랜드에서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여관도 달그림자랑 연관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자네가 박박 우겨서 들어오게 됐고 말이야.”
“흐허허허! 그렇게 작은 도둑 길드의 표식을 지나가는 곁눈질로 알아보다니! 사랑의 힘! 절대 무시할 수 없지! 영혼을 가장 깊게 울리는 감정중 하나이니 말이야! 흐허허허!”
콰앙!
쉰 목소리로 웃으며 그를 놀려대는 알드리치의 말에 교수는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망할. 그냥 이동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캐릭터 ‘교수’로 플레이한 뒤로 그의 삶은 항상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즐거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딱 한번. 락샤샤와 같이 마탑을 털었을 때. 그때 그녀와의 경험이, 그 키스가 이 교수라는 캐릭터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혔다가, 고즈넉한 새벽 캠핑의 감성을 따라 마구 흘러나온 것이다!
– takealook : 야, 박교수. 너 밖에 일도 많은데 며칠만 더 나갔다 와라. 너 캐릭터 방송 존나 잘함ㅋㅋㅋㅋㅋ
– 스피드 웨건 :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의식이 만들어낸 자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박교수는 세상 쿨한 척 해도, 속으로는 엄청나게 굶주려 있다는 게 내 결론임.
– 노루Drug해요 : 봐. 솔직해지니까 얼마나 좋아? 이제 우리 속세의 시선은 잠시 잊어버리고, 19금 방송으로 전향하자. 락샤샤의 그 풍만한 가슴! 유려한 허리! 도시 레프팅 때 튄 물이 그 구릿빛 피부를 타고 흐르며, 물에 젖은 머리를 틀어올리는데…. 아오! 녹화본 정주행하러 간다!
– Jokass : 그러다 닳아 없어지겠다, 야.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뒤지겠어!
온 세상이 [24세/ 남 / 박교수 / 연애경험 전무]를 알아버렸다고! 어쩐지 2번 대화방에서 ‘발전기 보고 갈래?’ 라던가 여성 생존자임을 강조하던가 하더니, 이딴 걸 봐서 그랬구나! 아이고 엄니! 아들 장가 다 갔소! 아들이 대국민 공인 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툭툭.
교수는 누군가 어깨를 치는 바람에 피가 제법 흥건한 이마를 들어 올렸다.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흠칫하더니, 푹 파인 나무 테이블을 가리키고 있었다.
짤그랑-
[300 sil 지불됨]더러운 현실 같으니라고. 잠시도 가만히 있을 틈을 주질 않는구나.
내가 슬프거나 말거나,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다 잊자! 현실의 일은 현실의 내가 처리해주겠지! 난 지금 박교수가 아니라 유리몸 반 뮤트 교수다! 게임 캐릭터! 용사 교수!’
저 끔찍한 기억을 빨리 파묻어버리고 싶었다. 다른 기억, 뭔가 충격적인 걸 그 위에 덮어버리자고.
일단 ‘자동진행 교수의 충격고백!’ 말고 로그에 있는 다른 상황들을 좀 확인하기로 했다.
당글테르면 흑마법사가 자리잡고 있던 그 마을이다. 고위 흑마법사를 처리했다는 내 보고의 영향도 있겠지만, 서부 전선이 개박살이 난 만큼 동부에서 내가 확보한 지역의 중요도가 올라가서 이렇게 급히 사람을 보내 전초기지 같은 것을 세웠겠지.
[음…. 딱히 문제되는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네가 일을 잘해주고 있지만 여전히 수상쩍게 디테일한 정보의 출처를 ‘여왕의 명령을 엿들었다.’ 라고 둘러대고 있으니 의심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닐 거 아냐. 그런데도 교단의 그 비밀스러운 정보부 권한을 획득했다는 것은 자동 진행 캐릭터 치고 선방한 거 아냐?]‘그건….그렇지. 시스템이 내 플레이가 말빨로 주워 삼킨 게 제법 된다고 인정해줬나 봐. 자동 진행 캐릭터도 입 좀 터는 걸 보면.’
일단 보르카의 호감도가 최대가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그의 목표는 실적을 통해 교단 정보부 이용 권한을 얻어 납치당한 자식들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친밀도가 최대치가 됐으니 자식들을 찾아도 쉽사리 내 곁을 떠나지 않겠지.
“전령의 말을 갈취…. 이동속도가 빨리진 이유가 여기 있군. 말이란 말은 전마로 모조리 끌고 갔을 테니 돌아가는 길은 꼼짝없이 걸어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말이랑 같이 편지도 전달해주겠다고 한 모양인데, 인벤토리를 뒤져보니 [전령의 한이 맺힌 서한] 같은 아이템이 있었다.
“어디보자…. [딘스퍼 공국은 갑작스레 발발한 내전으로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음. 아투안 세이건 용사대, 신원미상의 인물에게 암습당해 이동 중 변사체로 발견. 포다이스 왕국의 기습적인 선전포고로 테니엄, 슈론등 도시국가 3국의 지원 불발]이라…. 전령이 필사적으로 전달하려고 할 만한 소식이군. 뮤트 친구들이 정말 열심히 움직여주고 있나 봐.”
“그거, 군용 서한 같은데 함부로 그렇게 열어봐도 되오? 아무리 용사라지만….”
“당연히 안 되는데, 당연히 읽어봐야지. 귀족 인장까지 떡하니 찍혀서 전령이 탈진하도록 급하게 보낸 서한이라니. 이걸 어떻게 참아?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걸리지만 않으면. 내가 누구야. 마법사잖아 마법사!”
교수는 어이없다는 얼굴의 보르카에게 씨익 웃어준 다음, 다 읽은 서한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양피지를 다시 원래대로 돌돌 말아 묶어준다. 반으로 뜯어진 봉인용 밀랍을 최대한 처음 상태에 가깝게 맞춰주고, 물 한 방울을 띄워 부드럽게 본을 뜬 다음 촛불로 밀랍을 녹이고, 물방울 틀로 눌러주면….
“짠! 매-직! 감쪽같지?”
봉인이 뜯어진 적 없는 두루마리 편지가 완성된다.
그 모습에, 오트만은 이마에 손을 올리며 탄식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로고. 깨끗함의 이미지가 대부분인 수계 마법을 어째 저런 식으로만 잘 이용하니….”
“크헤헤헤! 창의적인 마법사라고 해주시지요!”
“긍정적인 일이다. 손기술이 섬세한 남자는 여성에게 인기가 많지.”
“그럼 그럼. 우리 대장님, 여자만 있으면 아주 사랑받겠어.”
“그아아악! 좀! 언제까지 그걸로 놀릴 건데!”
“그웍.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큰작은인간 한테도 매력을 느낄 암컷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싫다.”
“위로 하지 마 임마! 더 기분 나빠!”
– 노루Drug해요 : ??? : 당신은 분명 좋은 사람이에요. 어딘가 분명 인연이 있겠죠. 하지만 난 싫어요.
– Jokass : 0 고백 1 차임ㅋㅋㅋㅋㅋ
– takealook : 아 혼자서 3형 변종 때려잡는 건 쉬워도 연애는 힘들다고 ㅋㅋㅋㅋㅋ
지워지지가 않아. 아무리 말을 돌려도, 이 인간들 몇 날 며칠이고 이 얘기로 나를 괴롭힐 생각이라고!
“으, 으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속에 결국 교수가 선택한 것은,
“크허허허! 어딜 가시나! 낭만 청년!”
“나무옹이를 찾아간다. 틀림없다.”
도망이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여관을 뛰쳐나가는 그의 뒤로, 부서진 스윙도어와 한층 더 얼굴이 일그러진 여관 주인에게 은화를 건네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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