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3
Chapter.2 위기는 기회는 위기다(3)
***
“우읍, 우웨에엑!”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교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위장 속에 남아있는 알콜을 모두 게워내는 것이었다.
“으어어…. 머리야.
망할놈의 용병들은 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지.
오랜만에 맛보는 깨끗한 술맛의 기쁨도 잠시, 한 명씩 옆으로 와서는 입이 쉬지 못할 정도로 술을 권하는 바람에 마시는 게 아니라 목구멍에 들이 붓다시피 해버렸다.
“으으…. 분명 건배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망할 게드로이츠. 숙취까지 구현하다니. 그래도 현실에서는 필름이 끊기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지만, GG에서는 알아서 확인할 방법이 있다.
“상태창. 플레이어 로그 확인.”
띠링-!
교수는 지금까지 자신의 행적이 기록된 로그를 쭉 아래로 내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부분 다음으로 넘겼다.
+player 교수의 log :
오후 7시 – 주점 ‘은빛 함성’에 입장
오후 7시 – 페일에일 한 잔을 마심 / 체력회복 소(小) 15초, 정신력 5% 회복 / 취기 2% 증가.
오후 7시 – 은빛 함성의 마스터 ‘왈도프 토프릭’ 설득에 성공. 전투 페이즈 취소됨.
오후 7시 – 드레곤 블러드 한 잔을 마심 / 체력 15% 회복, 35분간 정신력 최대치 35 증가, 화염저항 소(小) 35분, 스킬 [용기백배] 15분 적용 / 취기 40% 증가.
오후 7시 – 상태이상 : 약간 취함(80분) / 1도 화상(혀, 목구멍)
오후 8시 – 페일에일 한 잔을 마심 +
오후 8시 – 페일에일 한 잔을 마심 +
오후 8시 – 특선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먹음 +
오후 8시 – 페일에일 한 잔을 마심 +
오후 8시 – 용병 ‘미치 에드왈’ 파티와 우호 관계가 됨
오후 8시 – 아센트 산 라거 한 병을 마심 +
오후 9시 – 페일에일 한 잔을 마심 +
….을 마심
….을 마심
오후 11시 …..을 마심
오후 12시 ….을 마심
“죽일 생각이었냐.”
많이 먹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어쩐지 아침에 속 비우는데 끝도 없이 나온다 싶더라니.
“어디보자…. 마심, 마심, 마심, 먹음, 마심, 마심, 쓰러짐, 마심, 마심, 마심….. 다른 특별한 일은….. 오!”
혹시 필름이 끊긴 사이에 특별히 알아둬야 할 일이 있었나 뒤져보는 중, 눈에 띄는 기록이 있었다.
+player 교수의 log :
용병 조합 투란 지부장 왈도프 토프릭으로부터 F급 용병패를 받았습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꿈 인줄 알았는데, 진짜 받아뒀네.”
용병패를 받는 순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왈도프가 ‘너 같은 녀석이 트랩퍼라니!’ 하면서 박장 대소를 하던 장면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장하다, 박교수! 그 지옥같은 자리에서도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있었구나!
상태창의 직업란을 보니 ‘무직’에서 ‘트랩퍼’로 바뀌어있었다. 용병으로 등록할 때 자신의 주 포지션을 정할 수 있는데, 무직인 상태 다 보니 그때 같이 직업으로 등록된 모양이다.
“계속 끌고 갈만한 직업은 아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트랩퍼 만큼 좋은 직업도 없지.”
엄밀히 말하면 트랩퍼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거의 사장된 직업이다. 재료에 의존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투자를 많이 해야 하고, 투자를 많이 해도 언제나 수비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고 성장 기대치가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따로 전문 트랩퍼나 길드에서 가르침을 받고 전직한 것도 아니라 전직 효과로 주어지는 [직업 관련계열 스킬 숙련도 30% 보너스] 같은 효과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숙련도나 성장 기대치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봤을 때 이야기고.
극 초반에, 막 데미지를 늘린다거나 하는 기대 같은 것 없이 주변에서 공짜로 구할 수 있는 것들만 사용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어쨌든 전직은 했으니 트랩 제작 스킬은 생겼거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트랩을 제작하면 재료도 공짜에, 가공 단계가 많으니까 손재주 스텟 획득도 노려볼 수 있고, 제일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내가 직접 타격을 받을 일이 없다는 거지. 내 몸보다 훨씬 강력한 ‘부러진 잔가지’나 ‘단단한 나무’, ‘작은 쇳조각’ 같은 걸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 간장게이바 : ….. 얘 아까부터 좀 짠하지 않냐.
– takealook : 그러니까. 돔에서 실링 앵벌이 하는 애들도 벌목하면서 쌓이는 잔가지는 다 버리는데 그걸 무슨 귀한 재료처럼 말하고 있으니…..
“다른 멀쩡한 캐릭터랑 비교하면 안 되지. 내 몸이랑 비교를 하라고. 한번 휘두르면 또각! 하고 부러지는 수수깡 같은 팔이랑 밟기만 하면 묵직하고 든든한 나무 몽둥이를 휘둘러 주는 트랩이랑, 어느 게 더 믿음직스럽냐? 아이템의 가치가 아니라 현 상황에서 유용함을 보라 이거야.”
전에 이동하면서 할 일 없을 때 이것저것 실험해봤는데, 이 몸은 ‘유리 몸’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인장 응력, 그러니까 축방향으로 잡아 당기거나 누르는 힘에는 제법 버티는 편인데 충격에 극도로 취약하다. 충격 흡수 같은 좋은 옵션이 달린 방어구가 아니면 내게는 1도 도움이 안된다는 뜻이다.
‘무기도 마찬가지지. 내가 휘두른 힘 만큼 내 팔과 손목에 똑같은 충격이 올테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이 트랩퍼라는 직업이다. 민간인 보다 약한 이 몸으로는, 적을 만나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니까.
“끄윽- 어우, 속 아파. 내려가서 뭐라도 먹든가 해야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침대에 누워서 쉬고싶었지만, GG에서는 시간이 제일 중요한 자원이다. 지금 놀아버리면 나중에 미친 듯이 불어난 뮤테이션 블러드를 맞이해야되니까. 가뜩이나 성장이 뒤처지는 나로서는 1분 1초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대충 옷을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오자 어제보다 조금 한산한 플로어와, 조금 찌푸린 얼굴로 잔을 닦고있는 왈도프가 보였다.
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왈도프는 잔을 닦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좋은 아침. 왈도프”
“점심때까지 안 일어나면 장의사를 부르려고 했는데, 용케 일어났구만, 애늙은이.”
“….애늙은이?”
“그래 임마. 어제 술 맥이니까 좔좔 불더만. 신경쓰지 마라. 초짜 용병들이 괜히 어께에 힘주는거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니니까. 니놈이 하니까 좀 있어보이긴 했다만, 지금은 다 뽀록이 났다는 거지. 그러니까 쓸데없이 목소리 깔지 말고 와서 수프나 먹어라.”
“넵.”
아무래도 취한 사이에 나에 대해서 이것저것 캐물어 본 모양이다.
‘으음…. 술을 많이 먹인 데는 이유가 있었군.’
하긴. 한 지역의 용병들을 총괄하는 사람인데 어수룩한 사람일 리가 있나. 범죄자도 아닌데 한가락 하게 생긴 놈이 기어들어 왔으니 뭐하는 놈인가 싶어서 술을 진탕 먹였나 보다. 어제 내게 보여준 저자세도, 떠들썩한 분위기도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살짝 소름이 돋았다.
후르릅-
“커어어어-!”
“그래, 좀 살겠냐?”
“어우, 속이 확 풀리네요. 방금전까지 속이 막 뒤집어져서 내장이 목구멍에 들락날락하고 있었는데.”
“원, 녀석. 말은 잘해요.”
“후릅-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아, 벌써 의뢰 나갔나?”
상태창의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니 다들 자기 할 일 하러 간 모양.
“…..그래. 일 하러 갔지.”
“그런데 표정이 왜 이렇게 똥 씹은 표정입니까. 해장 안 하셨어요?”
처음에는 마스터도 술을 많이 먹어서 그렇거니, 하고 넘겼는데, 시간이 가도 마스터의 표정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찌푸려지고 있었다.
화악-
지끈!
“윽!”
술이 좀 깨서 머리가 맑아지니 슬슬 발작을 시작하는 정신쇠약.
‘흐트러진 테이블, 미처 치우지 못한 안주, 술병. 바 테이블 너머에 그을음 자국이랑 재 약간. 뭘 태웠나? 플로어에 진흙 묻은 발자국. 도시 중앙은 전부 판석으로 바닥을 해놨으니 도시 외곽이나 밖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건데….’
그냥 털어버리기엔 정신쇠약이 물어오는 정보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다.
‘어제 보니 투란 용병 조합 사람들은 단합력이 꽤 좋아보였어. 마스터와의 관계도 괜찮아 보였고. 저런 식으로 어질러놓고 떠날 일은 없다는 거지. 특별히 급한 일이 없는한…..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마스터의 찌푸려진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뭐 안좋은 일 있습니까?”
“늙은 꼬맹이. 눈치 하난 쓸만하구나.”
왈도프는 손으로 파이프에 담배를 꾹꾹 눌러 담은 다음 불을 붙여 크게 한 모금을 빤 다음, 천천히 뜸을 들여 말했다.
“….아침에 영주 성에서 기사가 한 명 왔었다.”
영주 성에서 온 기사, 바싹 가라앉은 분위기. 교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뭣 때문에 왔답니까?”
“…..후우우”
말을 못하고 담배만 뻑뻑 피우던 왈도프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쟁이 났단다. 뮤트 새끼들이 투란 인근까지 밀고 들어온 모양이야.”
“예에에에???!!!!”
이제 막 나뭇가지나 쇳조각 따위로 소소하게 파밍을 시작하려던 교수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
“후우우.”
왈도프도 속이 타는지, 벌써 몇 번이나 파이프를 비우고 새 담배를 담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야. 도시 안쪽의 ‘단련의 거리’에 있는 훈련관 사람들은 벌써 다 징집당했고, 우리 쪽에도 실력의 고하에 상관없이 전원 참전하라는 영주 쪽 명령이 떨어졌다.”
“자, 잠시만요. 저는 어제 막 들어왔는데…..”
“….미안. 용병패는 발행되는 즉시 기록마법으로 등록되는거라. 너도 포함이다, 교수.”
“으아아아악!!! 쌰아아앙!!!!”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산 넘어 산이면 욕하면서 넘어가 주기라도 하겠는데 산 넘어 에베레스트냐! 수준 차이가 너무 나잖아! 뮤트? 제일 낮은 9급 뮤트라도 이 몸으론 버겁다고!
“너무 그렇게 아쉬워하진 마라. 어차피 도시 밖에 머물고 있었어도 징집됐을 테니까.”
“으으으….왜요.”
“우리 같은 칼 밥 먹고 사는 놈들 말고도 젊고 건장한 남자는 눈에 띄는 데로 다 끌려가고 있거든.”
더 나쁜 소식이다. 용병이야 원래 싸우는 게 일인 놈들이니까 이런 일이 터지면 1순위로 끌려가고, 나중에 용병 조합을 통해 의뢰 대금을 지불하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민간인도 징집한다니? 도시의 생산을 담당하는 젊은 남자들은 죽는 즉시 도시의 생산력은 저하되고, 장기적인 도시 전력 약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귀한 노동력을 고기방패로 다 끌고 간다고?
“상황이 그렇게나 심각합니까?”
“투란은 몰루딕 캐슬과 펠라스보다 안쪽에 있잖아. 그런데 놈들이 우리 코앞까지 왔다는 게 뭘 의미하겠냐?”
“….젠장.”
도시가 함락됐다는 뜻이다. 이 시기의 영주들이 아무리 평화에 찌들어 있다고는 해도 평범한 자원 수집용 9~8급 뮤트들에게 함락당할 정도는 아닐텐데.
‘아직 흑마법사의 시대 초기야. 5급 이상 고위험도 개체가 양산됐을리는 없다. 그건 불가능해. 누가 모체를 건드렸나? 여왕이 유전자 수집에 열을 올릴만큼 위협을 느낄만한 사건이 있었나?’
‘침착하자, 겨우 게임 플레이 2일차다. 내 캐릭터의 수준과 상관없이 지금 일어나는 일은 내가 개입하는 게 불가능해. 이번 시드의 정상적인 스토리 라인이라고. 그렇다면 절대 해결 못할 정도로 시나리오가 진행되지는 않았을거야.’
솔로 플레이 게임이지만, 누구도 같은 게임을 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의 월드 클리어 시드를 계승했다고 해도 그 효과만 계승할 뿐 생성되는 세계는 전부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어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예측 가능한 것은 딱 한 가지.
클리어 할 수 없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 그 말은 이 이벤트가 지금 내가 플레이 하는 월드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벤트라는 뜻이다.
‘시작부터 도시 2개를 넘겨주고 시작한다. 현 시간에서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전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흑마법사나 여왕 쪽에서 투자를 많이 했다는 뜻이야. 단순히 리스크만 높은 고난이도 이벤트는 아니라는 소리지.’
정보가 부족하다. 지금이 이번 회차의 분수령이라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왜, 막상 전쟁이라고 하니 불안한가?”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왈도프는 눈을 감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댔다.
“그럴 만도 하지. 기껏해야 이제 겨우 열 아홉살 짜리니까. 나도 네녀석은 어떻게 좀 빼보려고 해봤는데, 징집관이 조합 인원표에 등록된 자네를 보더니 나이에 상관없이 무조건 대려가야겠다고 하더군. 미안하네. 내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네 순서를 2차 징집으로 미루는 것 뿐이었어.”
“….보직은 어딥니까?”
징집 목록에 이름이 올랐다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기 란에 트렙퍼라고 올려뒀으니…..
“….방패병.”
“왜에에에!!!”
“젠장! 나라고 그 지옥같은 라인 파이트 최전방으로 새파란 애송이를 보내고 싶은줄 아나! 높으신 분들이 정찰병은 필요없다는걸 어떡해!”
“그럼 일반 보병이나 궁수, 보급도 있잖습니까!”
“성내에 민간인이 죄다 징집됐다고! 보급이야 진즉에 자리가 다 찼고, 조금이라도 전력을 유지해야 하는 보직은 이미 숙련병으로 꽉꽉 채웠다더라! F급 용병은 전부 방패병이라더라!”
방패병. 말이 방패병이지 뮤트와의 전투에서는 놈들의 돌진력을 줄이고 소모되는 고기 방패나 다름없는 병과다.
뮤트와의 전쟁이 어려운 이유는 그 말도 안 되는 물량과 야성도 있지만, 제일 큰 문제는 놈들의 피, 타액을 뒤집어 쓰는 순간 감염이 된다는 것이다.
뮤테이션 블러드의 본질은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여왕의 명령이 입력된 세포들이 군집을 이룬 슬라임에 가깝다.
시기에 따라 여왕이 내리는 명령은 다르지만 124년이면 아직 여왕이 다 성장하지 못해서 복잡한 사고는 못하는 시기. 뮤트에게 내려진 명령은 기껏해야 하나에서 둘일 것이다.
‘더 많은 고기, 더 많은 유전자’
그래서 이 시기의 뮤트는 약한 전투력에 비해 대단히 높은 감염성을 띄고 있다. 물리면 타액을 통해, 피를 뒤집어 쓰면 모공을 통해 모세혈관에 침입한 뮤트 세포가 순식간에 증식하며 숙주의 뇌를 지배하고, 감염체로 만든다. 여왕이 만족할 만큼의 감염체가 모이면, 뮤트는 그대로 여왕이 자리잡은 북부 영구동토로 돌아가 자신의 몸을 바친다.
“혹시, 앞에 두 도시에서 생존자가 하나도 없었답니까?”
“그럴 리가 있나. 피난민도 제법 있는 편이고, 영주와 휘하 기사들도 탈출했다더군.”
“한 명도 빠짐없이?”
“한 명도 빠짐없이.”
“….개자식들.”
병사들에게 옥쇄를 명령하고 저들만 몸을 뺀 것이다.
‘어정쩡하게 병력이 남아서 더 악수가 된 거야. 펠라스, 몰루딕 캐슬의 병사들은 잘 단련된 정병으로 유명하지. 도시는 함락됐지만, 병사들의 분투 때문에 감염체의 숫자가 줄어서 필요한 양을 다 채우지 못했어.
덕분에 놈들은 개나 고양이 같은 몸이 아닌 단련된 병사의 몸으로 갈아탄 상태에서 다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다음 도시로 향하고 있는 거고. 멍청한 영주 자식! 차라리 기사들과 함께 싸우게 했으면 큰 피해를 입는 선에서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안봐도 뻔하다. 보나 마나 끝이 안보이는 뮤트 웨이브에 겁에 질려선 가장 강한 기사들에게 제 몸과 재산을 호위하게 시키고는 부랴부랴 도망쳤겠지.
덕분에 이제 내가 그 강화 감염체랑 들이박게 생겼고.
쾅!
절망적인 상황에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고있는데, 스윙도어가 거칠게 열리더니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주위를 한번 슥 둘러본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고풍스러운 양피지 한 장을 펼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투란의 용병들이여! 눈을 뜨고 귀를 열라! 북부 로드릭의 패자이자 만민의 추앙을 받는 기사 중의 기사, 이곳 투란의 영주이신 로밀리오 데 발카도스님의 명을 받들라!”
“왔군.”
“벌써요?”
“그만큼 영주도 애가 닳았다는 소리지. 첫 징집에서 병이나 노환을 이유로 징집을 뒤로 미룬 인원들을 긁어모을 만큼.”
그 뒤로 병사는 뭔가 열심히 떠들어댔지만, 대충 요약하면 ‘탈영병 낙인 찍혀서 평생 쫒겨 다니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들어와라’ 정도의 소리였다.
‘제기랄, 게임 하러 와서 의무 복무라니! 영장이라니!’
한참 좌절하고 있는데, 바 너머로 슬쩍 몸을 기울인 왈도프가 작게 속삭였다.
“이봐, 애늙으니.”
“왜요.”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어. 용병일 하다 보면 이런 재수없는 날도 있는 법이야.”
“용병 첫날부터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답니까?”
“….. 아무튼, 우리 쪽 용병들은 내가 어떻게 힘을 써서 대부분 좌익 쪽으로 몰아뒀어.
뮤트 놈들은 전략같은거 없이 그냥 달려들 뿐이니까 전투가 시작되면 전열은 대부분 난전이 될테지. 그때 우리는 뭉쳐서 가장 왼쪽, 성벽에 가까운 곳으로 붙을거야.”
“그 말은…..”
“네가 딱 한번만, 난전이 시작하기 전 놈들이 돌진할 때 한번만 버텨주면 네 뒤쪽에 우리가 공간을 만들거라는 소리다.
어떻게든 버텨. 전장에서 도망치지 마라. 독전관한테 죽는다. 딱 한 번만 버티고, 그다음에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뒤로 달려. 난전이 시작되면 그 정도는 보이지도 않으니까.”
….끄덕.
나는 왈도프의 말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말은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방진을 구성하겠다는, 혹여 지휘관 쪽으로 세어나가면 바로 참수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위험한 말이었으니까.
“흐, 입밖에 내면 안될 일이라는건 설명 안해도 될 것 같군.”
“이상! 호명하는 자, 앞으로! F급 용병 닐 케이시, F급 용병 사비 모조, F급 용병 교수, D급 용병…..”
“이제 정말 가야겠군. 잊지 마라, 하루밖에 안됐지만, 어제부터 넌 우리 은빛 함성의 형제야. 길바닥의 시체로 만나진 말자고.”
“거 재수 없는 소리 마시죠.”
“흐흐, 전장의 신은 거짓말쟁이라잖나? 이렇게 말해야 살아온다지.”
왈도프와 나는 용병들이 흔히 하듯 서로의 오른손 손등을 마주 두드리며 인사를 나눴다.
“좋아, 다 모였군! 지금부터 전선으로 이동한다!”
인솔 병사의 명령에 따라, 나는 다른 징집병들과 함께 성문 앞 막사를 향해 움직였다.
***